가치의 상실_망각.
기억하지 못하는 걸 보면 가치가 없는 것이었나 보다.
짐승은 생각한다. 저는 그를 기억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그의 많은 것을 잊었다. 무안한 얼굴로 이름을 발음하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와 그의 웃음을 기억한다만 그와 무슨 관계를 맺었었는지는 저 스스로 잊어 기억나지 않으니, 그러니 이름을 읊는다고 무언가가 생길 리는 없었으니까.
그 어느 때든 전장으로 나가는 일이 없을 때는 일절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지금은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다던가, 눈이나 몸을 붙이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이 세상이 완벽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때는 현세의 인간들에게 속아 끈적한 관계를 쌓았다만 이제는 그들과 제가 다르다는 것도, 가까워질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렇게 그러고자 했던 이유를 이제는 상실했으니 자연스러운 일이려나. 짐승이 눈을 감았다. 조잘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속에서 또렷하게 제 진영의 별의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별의 아이들은 짐승에게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다디단 가치가 있는지라 안타깝게 짐승은 아직도 그들을 완전하게 거부할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도 시도하였지만, 막상 실제로 그들을 제 손으로 죽여본 적 없으니 결과적으로도 증명된 셈이다. 좆같게 아직도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은 그런 이유다. 적대해야만 하는 이들에게는 억지로 침묵을 고수하고 있으나…
힘이 들어가지 않던 몸에 힘을 밀어 넣는다. 근육이 서로 물고 당겨 안았다. 끔찍한 상처들은 진영 내 치유사들이 이능을 원천으로 한 에너지로 덮은 나머지 어느 정도 새 살이 돋았다. 오늘 짐승은 유독 예민했다. 이유라면 온종일 하는 것 없이 짐승의 옆에서 조잘대던 같은 진영의 사람이 시퍼렇게 멍이 든 얼굴로 짐승의 옆에 비스듬히 앉아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짐승은 고개를 돌려 서슬 퍼런 시선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무엇을 하는 척이라도 하려 주변에 있던 서류를 잡았다. 한 대 맞았던 기억에, 전장에서 보았던 그 짐승의 모습 탓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 아까 한 말 다시 해 봐. ”
“ … 아니야, 네 앞에서 안 뒤진 게 의외라고 한 건 내가 잘못했어. ”
사실 그 사람이 잘못한 일은 아니었다. 일 년 전 즈음 별의 아이가 하나 사망했다던 소식, 그리고 비밀리에 얼마 전부터 다시 우라노ㅡ 루나델린에 얼굴을 드러냈다는 이야기에 안 뒤진 게 용하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아쉽게도 병적으로 별의 아이들, 혹은 신에 관한 소식에만 반응하는 그 짐승의 앞에서 해버린 게 문제였지. 전장에 나가지 못할 정도의 상처를 입어 허드렛일이라도 도와주고 있던 짐승이 전장이 아닌 그곳에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한 것이다. 그러다 한 대 얻어맞고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 스스로는 주먹을 두 번 절었다. 그 사람은 힐끗 자신을 쳐다보는 짐승의 시선에 온도가 너무 없어서 섬뜩하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피했다.
“ 로웬. 몸 안 좋으면 들어가 있지, 왜 나와 있어. ”
그 사람이 뱉은 말은 다정한 것에 가까웠으나…표정은 껄끄러우니 어디 눈에 안 보이는 곳에 가 있으라고 말하고 있다. 짐승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는 도로 고개를 돌려 허공으로 답을 떠넘기고는 빠져나갔다. 어디 잠깐 들어가서 누워 있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었지만, 별의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이유가 가장 컸다. 짐승이 숨만 쉬고 어딘가에 가라앉아 답하지 않자 그 사람은 인내심의 끝에 다다랐는지 굳이 움직여 짐승의 옆에 가까이 앉는 것을 택했다. 다리가 불편한지 앉은 자세를 이리저리 바꿔보다가 그것마저도 내키지 않는지 짐승의 발끝 쪽에 누워 눈을 감아버렸다. 사실 그가 어째서 별의 아이의 생존 소식을 아쉬워했는지 짐승은 알고 있었다. 전장 위의 어느 별에 다리를 공격당해 하나를 쓰지 못한다지. 그렇지만 제 알 바는 아니라서, 주먹 한 대 날려준 걸 후회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에게 악감정도 없기에 제 발아래 눕자 힐끗 바라보고 말았다. 짐승은 그저 제 시선 하나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그 사람이 웃겼다. 그렇기에 입꼬리를 슬 올렸다.
“ 로웬, 너 이상해진지 벌써 몇 년 됐어. 원래 이상하긴 했는데… ”
저 멀리서도 별의 아이들이 말하는 것의 내용은 귀에 아주 생생하게 들렸다. 사실 누군가 칼이라도 들이밀지 않는 이상 짐승은 별의 아이들을 제외한 것에게 관심이 없다. 아무튼, 그 내용 속에 등장하는 단어들은 대게 별, 트라이야… 로웬 이상…?
“ 조용히 해. ”
원흉은 제 발아래에서 조잘거리는 이 인간 탓이다. 보통은 답이 돌아오지 않으면 기분이 나빠져서 침묵하는데 이 사람은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짐승이 대답해주자 그 사람은 상쾌한 얼굴로 웃었다. 짐승은 그 웃음을 보지 않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이제 죽은 이에 관한 악몽을 꾸지는 않지만, 누군가의 죽음 뒤에서 저는 그들의 웃음을 잊기 가장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그런 짐승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지와 검지로 바닥 위에 늘어진 짐승의 흰 털을 잡고 살짝 매만지며 제 취향도 은색 머리칼이라며 이야기했다. 짐승은 그 말을 들어도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그냥 듣는 건 포기하자며 생각을 비우고 있자면 어디선가 계속 홀로 조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근원지는 당연하게도 제 발치 아래의 인간이다. 저도 모르게 짐승은 인상을 찌푸렸다. 멈추지 않는 소리가 마치 시계 소리를 연상시켜서 기계적으로 표정을 굳힌 것이다.
“ … 그래서 로웬, 오늘 대체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거야? ”
표정이 안 좋아진 것을 확인한 그 사람은 불안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짐승은 고개를 내려 그 사람을 쳐다봤다. 그는 실실 웃으며 희게 질린 제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지 않고 유심히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다정한 웃음을 보면 쾌락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저도 참 병신 같다고 생각하며 짐승이 너그럽게 직접 소리를 내어주었다. 그래, 그 지독한 집념 하나는 높게 산다.
“ 잊은 기억 때문에. ”
거짓은 아니었다. 한결같이 죽은 것들을 잊어 제 앞을 가로막을 여지가 있는 요소들을 철저하게 배제했는데, 짓궂게도 살아 돌아온 이에 관한 기억은 사람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짐승에게 다시 돌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존재 여부와 어떤 일을 함께 겪었는지는 전부 기억이 나는데 저와 무슨 대화를 나누고 무슨 관계를 쌓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 그 때문에 평소에는 전장의 위가 아니면 인형처럼 예쁘장한 무표정을 하고 있던 짐승이 여러 가지 표정을 보여주고 있는 계기가 생긴 것이다.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거지? 안절부절 고민하고 있자니 그 사람이 말했다.
“ 아. 잊은 별의 아이가 살아 돌아와서? 다시 기억하는 거 아니었어? ”
“ 응. 여전히 일부만 기억해. ”
“ 다시 기억이 나지 않으면 그만큼 네게 의미가 없는 일이라는 거겠지. ”
“ 그럴지도. ”
실제로는 의미가 강하기에 망각한 것, 즉 그 의견의 반대라 생각했지만, 그저 별들이 미워 죽겠는, 별들이 행복해지지 않길 바라는 끝없는 증오를 품은 그 사람은 모른 척 또박또박 짐승에게 거짓의 말을 내밀었다. 다만 생각보다 무덤덤한 짐승의 반응에 실망한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꾹 당겼다. 주먹을 쥐고 있던 그 사람의 가운뎃손가락이 살짝 펴졌다. 다행인지 짐승은 인지하지 못했고, 사람은 표정을 관리하며 큼, 하고 작은 헛기침 소리를 내었다. 그 사람은 짐승의 눈치를 살짝 살피고 누워있던 곳에서 일어나 만족스럽다는 듯이 어설픈 미소를 띄웠다. 너는 정말 자신에게 서툴구나. 한마디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혼자 남겨진 짐승은 이야기하는 별의 아이들을 바라보다 그들과 눈이 마주치자 뚫어지라 쳐다보았고.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는 모습에 예의상 시선을 돌려주었다. 하늘을 보는 것을 집중하는 척, 그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할 수만 있으면 계속 바라보았겠다만, 그러고 있다가는 섬뜩하다는 소리나 들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지. 짐승에게 적어도 그 정도 눈치는 남아있었다.
그 사람이 떠나가고 얼마 간은 하늘을 보며 그 대화에 관한 생각을 했다. 그 말이 맞는 것도 같았다.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면 분명 가치를 중요시하는 제가 잊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속이 조금 안 좋았지만 괜찮았다. 제 팔을 잡아끌어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그렇게 결단 지었다. 잊은 것은 가치가 없는 일이 분명하니 그것을 이제 궁금해하지 않기로. 짐승의 비좁은 기억에서 별의 아이라는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울타리 안, 스물다섯의 문 중 하나가 반 즈음 닫혔다. 적당한 정도였다.
오늘 전장에서는 도움을 주려는 제 의도에도 막무가내로 제 손길을 뿌리치던 그 사람이 죽었다. 울컥한 감정 같은 것은 없었다. 그 사람은 제 손을 뿌리치느라 두 손을 활짝 편 채로 눈썹을 한껏 추어올리며 더는 제 눈치를 보지 않고 죽음까지도 별의 아이에게 구원되고 싶지 않다며 화를 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솔직히 어딘가 모르게 조금 억울했던 것도 같다. 저는 자신을 해친 별의 아이가 아닐 텐데 화를 내는 게 웃겼다. 결국, 민망해져 괜히 구해 주려 했던 것을 놔두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그는 제 세상 일부로 돌아오지 않았다.
진영으로 돌아오니 제 머리끝을 매만지던 그 사람에 관한 것이 자연스럽게 생각난다. 제가 잡았던 손목의 온기를 기억한다. 조심스럽게 제 손의 위를 만져보았다. 그때 그냥 고분고분 제가 이끄는 대로 후퇴했으면 죽지 않았을 텐데. 그때 제가 잡았던 손목은 아무리 잡아당겨도 끌려오지 않을 것 같은 의지가 있었다. 그래서 굳이 몸을 틀어 끌어당기지 않고 놓아주었다. 추억하는 짐승의 얼굴이 제법 애틋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일전 그가 짐승에게 지었던 그 일부의 웃음은 꽤 오랜 시간 기억되었다. 그리고 예고 없이. 잊은 이들이 기억날 법하면 꼭 그 이야기가 떠올라 모든 것을 틀어막았다. 가치가 없으니 잊은 것이라는 그 말은 묘한 파장이 되어 짐승에게 남았다. 결국, 고작 어느 별의 일부 기억이었던 그 사람은 어느 별의 전부가 되어 복수하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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