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잊은 별에게

[플레이브] 나를 잊은 별에게 (5)

결국 예준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문가로 다가왔다. 연습 가야겠다. 마음이 상한 것 같은 얼굴에 노아는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소년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서 끌었다. 자리를 내어주고, 턱짓하자 결국에는 또 노아의 뜻에 따라서 얌전히 앉는 예준이다. 소년이 숨을 씨근거렸다. 나도 이상하다는 거 알아. 아는데, 애들이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거 보면 분명 내가 이상한 건데 나는…. 두서없는 말들 사이에서 예준은 두려운 얼굴을 했다. 그러다 불쑥 노아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밴드, 언제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마 우리 졸업 때까지? 길어봐야 하민이 졸업 때까지 아닐까? 애초에 더 들어온다는 애도 없었고.”

“…그게 끝나면,”

하민이가 사라질 것 같아서 난 너무 무서워, 노아야. 떨리는 음성에 노아는 맥이 빠진 얼굴로 제 목덜미를 문질렀다. 그저 기우에 불과한 말이 아닌가. 그건, 그저 네 걱정이 지나친 거라고 말하려다가도 소년이 얼굴을 손바닥에 파묻는 걸 보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말갛게 드러난 소년의 목덜미에 곧잘 약해지고는 했다. 숙여 가려진 낯, 기울어진 목과 흐트러진 호흡을 따라 들썩이는 몸. 예준이 꼭 울음을 참는 것 같은 순간들은 남몰래 금지된 폐허를 엿보는 기분이 들어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민이가 플레이브에 많이 집착한다는 거야, 다 아는 건데. 아무리 그래도 무슨 일이 있겠어. 졸업은 누구나 하는 거잖아.”

“알아, 아는데….”

소년의 꿈에서 그가 몇 번이나 무너졌던가. 또 몇 번이나 자신을 갈라 쪼개어 던져두고 사라졌던가. 그때마다 하민의 얼굴에서 희망이 사라져가는 걸 보며 예준은 늘 하민을 붙잡고 애원했다. 하민아, 그러지 마. 제발…. 그의 애걸에도 불구하고 하민은 어느 세계에서나 자신을 조각내어 예준의 곁에, 노아의, 밤비의, 은호의 곁에 남겨두었다. 그렇게 산산이 부서진 하민은 언제나 혼자였고, 어두운 공간 속 알 수 없는 부유물들이 잔존하는 곳에서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부정할 수 없을만큼 선명한‘우리’였다.

“나중에, 좀 정리되고 말해줄게.”

“예준아.”

“지금은 내가 도저히 말할 자신이 없어서 그래.”

“…그럼, 난 지금 너한테 해줄 게 기다리는 거 외엔 없는 거지.”

소년이 희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 정리할 거 있어서, 먼저 갈래? 마무리하고 금방 연습 갈게. 그 말은 부드럽게 노아를 밀어냈다. 녹아가던 아이스크림을 대강 잇새에 물어 부수고, 손에 묻어난 끈적한 걸 대강 털어내며 걸음을 뗐다. 소년은 책상 앞에 앉은 그대로 우두커니처럼 입술을 짓이기고 있었다. 결국에 오늘도 지는 건 노아였다. 스스로 잠갔던 문을 열고 소년을 남겨둔 채 빠져나가는 일, 도무지 내키지 않았으나 예준을 끌어낼 방법이 없음을 그 스스로가 제일 잘 알았다.

“먼저 간다.”

“…이따 봐.”

홀로 남은 예준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얼굴을 문지르며 숨을 가다듬었다. 하민은 가장 처음 노아를 찾아갔다. 어느 날 갑자기 전학을 와서 은호와 밤비 뒤를 졸졸 따라다니더니 정작 가장 먼저 손을 내민 건 노아에게였다. 형, 밴드 해볼래요? 이름도 생각해뒀어요. 플레이브. 설렘과 두려움이 뒤섞인 엉망인 얼굴로 하민은 노아의 손을 붙잡았다고, 그렇게 들었다.

애가 열심인 건 좋은데, 아 뭔가…. 좀 불안해. 어지간해서는 남의 상태에 대해 가타부타 말하지 않는 노아가 그렇게 말할 정도였다면 당시의 하민은 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대체 왜, 매번 너는 내 꿈에 찾아와 말할까.

‘제가….’

‘제가 예준이 형 팬이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만날 수 있다면, 플레이브로 남을 수 있다면요. 저는 언제까지고 견딜 수 있어요. 홀로그램처럼 떠오른 예준의 얼굴이 입술을 벌려 말한다. 하민과 눈을 맞추고, 가만히 고개를 까딱거리며 한없는 다정을 담아 속삭인다.

‘하민아.’

‘내가 너,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하민은 그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울었다. 녹음된 하민의 음성만 ‘아이, 당연하지.’하고 능청스럽게 그 말을 받아냈으나 정작 하민은 소년의 목소리를 듣고자 몇 번이고 손끝으로 허공을 헤집어 예준의 음성을 각인시키듯 다시 들었다. 그 끝에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얹은 하민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형.’

‘나도 형 사랑하는 거 알죠.’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물음 끝에 하민은 다시 자신의 가슴팍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고 고통스러워하며 갈매빛의 무언가를 움켜쥐었다. 그것은 너무나 많이 부서지고, 마모되어 제 형태를 잃은 보석처럼 보였다. 처음 꿈이 시작되었을 때에는 하민의 손바닥을 가득 채울만큼 커다랬던 것 같은데, 이제는 하민의 엄지 한 마디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소년의 눈이 자신의 손그늘 아래에서 어둑하게 빛났다. 하민아. 하고 부르는 음성이 적막한 학생회실의 고요를 깨트렸다. 자신의 가슴팍 앞에 손을 짚은 예준이 떨리는 숨과 함께 속삭였다.

“우리, 영원히 함께할거지.”

어디선가 하민이 ‘당연하지.’하고 기쁜 얼굴로 대답할 것만 같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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