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e ya!
잇솔
차카차카.
"어."
따지자면 우연이었다. 서명호가 도서관에서 깜빡 잠들어 새벽녘에 캠퍼스를 거닐게 된 것도, 여즉 몽롱한 정신 탓에 길을 잘못 든 것도.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스프레이를 요란스레 흔들던 남자의 손이 덜커덕 멈췄다. 남자가 느긋이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가로등이 남자의 머리 꼭지 위를 환히 비췄고, 휭 불어온 바람이 후드를 발랑 벗겨냈다.
그러니까, 비니 밑으로 삐져나온 은발 몇 가닥과 수증기를 머금어 반짝이는 속눈썹 끝을 서명호가 보게 된 것. 그리고.
"Chew...?"
서명호가 Chew의 그래피티를 몹시 잘 안다는 것도. 전부 우연. 괜한 긴장감에 가방끈을 쥔 서명호의 손등에 힘줄이 섰다. 서명호가 남자를 향해 조심스레 한 걸음 두 걸음 다가갔다. 남자 또한 서명호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한 걸음 두 걸음 뒷걸음질 쳤다.
우당탕!
남자가 벽에 기대 두었던 스케이트 보드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깨지는 듯한 소음이 공기 중으로 폭발했다. 큰 소리에의 반작용으로 서명호가 주춤 물러섰다. 남자는 서명호를 비스듬히 보며 보드에 한 발을 걸치곤 차카차카, 스프레이를 흔들었다. 치이익. 곧이어 분사된 스프레이가 벽에 유려한 곡선을 그려냈다. 남자는 재빠르게 눈을 굴려 제 작품을 살피곤 스프레이 통을 메신저백에 쑥 넣었다. 쾅, 발을 구르자 남자를 실은 보드가 빠른 속도로 사라져갔다. 뒤꽁무니를 바삐 쫓던 서명호의 두 눈이 벽을 향했다.
Be more noisy.
더 소란하라.
허. 마스크 아래 숨은 서명호의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갔다. 맞네, Chew. 삐쭉빼쭉거리는 글씨체와 통통 튀는 색은 분명히 Chew의 것이었다. 애써 추론하지 않아도 귀퉁이에 꼬리를 길게 늘린 'Chew'로 저작자를 알 수 있었다만, 그게 없었더라도 알아보았을 것이다. 당장 지난밤에도 그의 그래피티를 지겹도록 들여다보았기에.
서명호가 고개 돌려 남자가 사라진 자리를 보았다. 어쩐지 무지갯빛 궤적이 남은 듯도 했다.
-
서명호는 Chew를 기록한다.
아니, 기록할 것이다. 서명호가 콧잔등에 아슬하게 걸친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밀어 올리곤 비장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몇 줄 쓰지 않은 문서를 부릅 노려 본다. 미완된 문장 끄트머리에 커서만이 맥없이 깜빡, 깜빡. 결국 침대에 벌러덩 엎어지고 마는 엔딩. 절로 폭 한숨이 샌다. 아. 글 더럽게 안 써지네.
지금 창작의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서명호로 말할 것 같으면 현직 대학원생. 보다 구체적으로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유학 온 미술사학도. 현재는 석사 논문을 구상 중인데, 잘 풀리지 않아 골머리를 앓고 있다. 정해둔 주제부터 잘 풀리기 어려울 것은 알았다. 고통을 예상했다 한들 상쇄되지 않는다는 건 방금 알았다.
여기서 논문 주제는, 스트릿 아트. 특히 조명하고자 하는 것은 한국의 그래피티였다. 흥미의 근원은 서명호가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기 시작보다 조금 일찍 입국한 서명호는 한국의 이곳저곳을 누볐다. 나름 미술을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문화 마을이나 미술관이 있는 지역 위주로 돌았다. 그러나 기대에 찬 서명호를 맞아주던 건 난데없는 조형물들과 한국 관광지 특유의 억지스러운 벽화들. 어딜 가나 비슷비슷한 풍경에 슬슬 물리던 찰나에 마주쳤다. 벽을 적신 파란 파도를.
I believe in the power of love.
저는 사랑의 힘을 믿어요.
파도와 흰 거품을 컨셉으로 한 건 이곳이 해안 도시이기 때문일까. 서명호는 가던 발을 멈추고 시야를 덮은 썬글라스를 내렸다. 구구절절 길게 늘어진 문구는 일반적인 그래피티의 문법과도 어긋났으며, 유달리 실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기묘한 흡인력이 있었다. 사진을 찍을 생각도 못한 채 오랫동안 벽 앞을 지키던 서명호는 벽이 붉은 노을빛을 담아낼 즈음 자리를 떴다. 끄트머리에 작게 쓰인 Chew를 잊지 않고자 노력하면서.
나중에 알기를, 그 도시에는 약한 이들이 자신들만의 축제를 열었다가 혐오를 마주한 역사가 있다고 한다. 사랑의 힘을 믿는다는 다정한 문구도 그러한 맥락에서 비롯했으리라. 너무도 사랑스러운 저항이다. 가장 그래피티답지 않게 그려졌으나 가장 그래피티다운. 서명호의 머릿속에 철썩, 오붓한 파도 소리가 울렸다.
그렇게 서명호는 스트릿 아트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팔자에도 없던 일이었다. 애초에 서명호가 한국 유학을 택한 것도 고요한 자연을 담아낸 한국화에 이끌려서였지, 현대의 시끄러운 그래피티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서명호가 논문 주제로 한국의 스트릿 아트를 고려 중이라고 하자 보수적인 지도교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괘념치 않았다. 서명호가 워낙 쪼대로 사는 인간인지라.
그러나 서명호의 의지를 배반하듯 자료 조사부터 난항이었다. 스트릿 아트는 특성상 예술 작품보다는 거리 정경의 일부로 인식된다. 잘 돼봐야 포토존 정도로 기능할 뿐 누가 어떤 의도로 그렸는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사유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당장 Chew만 해도 검색해봤자 이렇다 할 정보가 없었다. 게다가 여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그래피티는 불법 행위로 분류된다. 실제로 처벌당한 사례도 적지 않아 그래피티 아트가 위축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합법적으로 그래피티를 그릴 수 있는 곳들이 몇 군데 있었지만, 글쎄. 주류 사회에 질문을 던지는 그래피티가 공적 질서에 포획되는 게 과연 합당한가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서명호에게는 좀. 지루했다.
그건 Chew에게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래피티 치외법권을 아무리 둘러봐도 Chew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들른 <Power of Love>-서명호가 대강 이름 붙였다-가 있던 자리도 깔끔하게 회칠되어 있었다. 어쩌면 꿈에서 본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무렵, Chew를 만났다. 무려 포털 메인에 걸린 기사에서.
[지하철 전동차에서 그래피티 발견, 경찰 '수사 중' 밝혀]
입력 2022/01/18 10:10 수정 2022/01/18 10:23
앞으로 일보 | 권순영 기자
27일 서울 지하철 전동차에서 의문의 그래피티가 발견되어 경찰이 수사에 돌입했다. 발견된 그래피티는 여러 개의 바퀴가 철창을 깨고 나오는 모습을 담고 있다. 경찰은 인근 지역의 CCTV 영상과 필명으로 추정되는 문구를 토대로 용의자를 추적하는 단계라고 밝혔다. 한편 한국에서 그래피티는 재물손괴죄에 해당하며...
기사를 한 글자 한 글자 곱씹어 읽은 서명호는 말미에 첨부된 이미지를 꾹 눌렀다. 전동차에 남겨졌다는 그래피티는 기사에서 묘사한 대로 바퀴 여러개 그림이 전부였다. 서명호가 검지와 중지로 이미지를 확대했다. 구석에 아주 작은 글씨가 보인다.
Chew.
화질이 열화된 탓에 선명하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꼼꼼히 그려낸 그림과 상반되게 무성의하게 써낸 저 글씨를 서명호는 본 적이 있으니까. 서명호의 심장이 쿵쿵 울렸다. Chew다. Chew가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어째서? <Power of Love>가 그려진 장소 또한 치외법권은 아니었지만, 인적이 드물어 비교적 안전하다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금방 덜미를 잡힐 수밖에 없는 지하철 전동차와는 다르게 말이다.
가설을 세워보자. 이건 일종의 선언이다. <Power of Love>가 사랑의 힘이 필요한 곳에 그려졌듯이, 다른 곳이 아닌 전동차에 그려져야만 했던 이유가 있을 것이다. Chew는 이 그래피티를 전동차에 그림으로써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서명호는 다시 이미지로 돌아갔다. 아무리 사진을 확대해 보아도 특별한 문구는 보이지 않았다. 단서는 철창을 깨부수며 쏟아지는 바퀴 그림뿐. 바퀴들은 유명한 흑백 영화의 한 장면 속 톱니바퀴 같은 구도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바퀴의 모양새는 톱니바퀴와 달랐다. 그보다는 다른 탈것에 달린 것과 닮았다. 자전거라든지, 아니면...
휠체어.
머리에 댕-하고 징 소리 비슷한 게 울렸다. 서명호가 검색창에 '지하철 휠체어'를 입력했다. 누군가의 투쟁을 기록한 기사들이 나열된 가운데 사흘 전에 쓰인 한 기사가 눈에 띈다. 최근 지하철 시위로 시민들의 불편이 가중되고 있다는, 누가 봐도 편향된 기사였다. 이런 일이 있었구나. 교내 기숙사에 살고 있는 데다가 이동할 때엔 주로 버스를 이용해서 몰랐다. 이제 이해가 된다. Chew가 전동차를 택한 이유. 자신을 가둔 틀을 스스로 깨부수는 바퀴들을 그린 이유.
이제 서명호는 또 다른 가설을 세운다. 톱니바퀴와 같은 배치는 도망칠 구석을 만들기 위함이다. 싸우는 이들에게 연대를 표하면서도, 그들이 그렸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부러 다른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구도로 그렸을 것이다. 혹시나 발각되거든 <모던 타임즈>를 그렸을 뿐이라고 시치미 떼면 그만이니까. 영리하고 섬세하다.
그리고 다음 날. 버스에서 같은 그림이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한동안 Chew의 이름이 곳곳에서 언급되었다. 늘 깨끗하기만 하던 전동차 위에 누가 낙서를 했다는 사실 자체도 신선하게 다가왔겠지만, 시대를 잘 탄 것이기도 했다. 전세계를 휩쓴 전염병이 몇 년째 사그라들지 않음에 따라 일상의 상당 부분이 정적 활동으로 대체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모두의 삶이 지루해졌다. 이제 사람들은 맨날 뉴스에서 읊는 누가 죽고 아픈 이야기 따위가 아닌 새롭고 재미있는 것을 기대했다. 그때 Chew가 나타났다. 뜻모를 닉네임을 달곤 모두가 이용하는 대중 교통에 테러를 하고 사라졌다. 경찰은 그를 잡고자 혈안이 되었으나 사건 이후 한 달이 지나도록 잡지 못했다. 익명의 예술가와 공권력의 술래잡기, 이 얼마나 자극적인 소식인가! 마침 심심했던 사람들은 Chew에게 과하게 열광했다. 일회적인 관심으로 끝날 수 있었으나 Chew가 꽤나 부지런했다는 게 문제였다. Chew의 그림은 전국 곳곳에 흩뿌려져 있었다. 묻힐 만하면 새로운 그림이 발굴되었고, Chew의 그림을 #This_is_Chew_too 해시태그와 함께 SNS에 올리는 챌린지가 유행하기도 했다.
그걸 지켜보는 서명호는 마음이 좀 복잡했다. 사람들이 Chew를 흥밋거리로만 소비하는 게 속상했다. 누군가는 권력을 놀려먹는 모양새가 되어버린 Chew에게서 해방감을 느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어쨌건 사회적으로 합의된 질서를 무너뜨리는 이에게 관심을 줘서는 안 된다고 평했다. 여러 의견이 오고 갔지만 막상 Chew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듯했다.
일단은 그래피티에 관한 대중적 관심이 늘어 연구의 지평이 확장된 건 좋은 일이었다. 서명호는 사람들이 올린 Chew의 작업물을 차근차근 수집했다. 그런데 모아놓고 보니 황당했다. Chew의 그래피티는 정말이지 정형화된 데가 없었다. 때론 직설적인 말로 호통을 쳤고, 때론 의미를 알 수 없이 모호한 이미지를 남겨두었다. 그치만 서명호는 그 무작위한 그림들을 계속 들여다보았다. 개체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으려는 연구자적 습성도 있겠다만 서명호가 생각하기에 Chew는 무의미한 것을 그리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물론 이 추론도 하나의 가설에 불과했으나, 서명호에게만은 정설이었다. 밤낮없이 끈질기게 조사한 끝에 서명호는 발견했다. Chew의 패턴을.
첫째. Chew는 지금, 여기의 이야기를 한다. Chew의 그래피티는 그려진 장소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예컨대 어린이를 거부해 논란이 된 카페 근처에는 아이의 손바닥을 그렸고, 재개발을 앞둔 지역에는 그곳에 살던 길고양이들을 그렸다. 둘째. 공격보다는 공감을 말한다. Chew의 그래피티에는 분명히 사회 비판적인 의식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상처 입히는 자들을 공격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상처 입은 자들의 곁에 담담히 서는 것에 가까웠다. 그래서일까, Chew의 그래피티에서는 혈기와 낭만이 동시에 느껴졌다.
서명호가 Chew에게 꽂힌 건 전자보다는 후자의 이유가 컸다. 어쩌면 당연했다. 전자는 대부분의 그래피티가 갖는 속성이지만 후자는 희귀하고도 귀한 것이었다. 비단 그래피티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라, 온 세상을 통틀어도 그런 다정은 흔치 않다.
[... Chew는 온기가 필요한 곳에 나타난다. 따라서 나는 기대한다. 언젠가는 Chew가 그래피티를 남기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기를.]
서명호가 순식간에 써내린 블로그 포스트를 되돌아 보았다. 맞춤법과 문법이 어색한 부분이 보여도 간만에 마음에 드는 글이다. 하지만 업로드는 조금 망설여진다. 이렇게 단서가 늘었다가 Chew가 잡히기라도 한다면? Chew의 작품을 더 볼 수 없게 된다면? 물론, <세상에 이일언일이>에서도 Chew의 정체를 아는 분의 제보를 기다린다 했으나 몇 주가 지나도록 관련 방송이 없었던 걸로 보아 쉽게 잡힐 인물이 아닌 것 같았다. 고민하던 서명호는 마지막에 한 줄을 추가했다.
[혹시 Chew가 이 글을 보았다면 연락 주세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일단은 Chew를 만나고픈 이기심이 더 컸던 탓이다. 포스트를 업로드해버린 서명호는 안경코가 누른 자리를 꾹꾹 눌렀다. 이제 남은 일은 기다리는 것.
시간이 지나고, 서명호의 글이 여러 커뮤니티에 퍼지고 댓글창엔 토론의 장이 열렸다. 당연히도 Chew의 연락은 오지 않았다.
-
우연은 많은 것을 가능케 한다.
Chew를 마주친 날 서명호는 생각했다. 그렇게 만나고 싶어 몸부림칠 때는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이렇게 우연히 마주칠 건 뭐란 말인가. 다음날 아침 연구실을 가던 서명호는 Chew의 그래피티 앞에 와글와글 몰린 사람들을 보았다. 웅성거리는 음성 사이로 찰칵찰칵 셔터 소리가 섞여 들어온다. 또 누군가의 SNS에 올라오겠군.
그런데 문득 궁금하다. Chew가 왜 이 학교에 나타났을까. 혹여 블로그를 보고 찾아왔을 가능성은 만무하고,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서명호가 발을 돌려 학생회관 앞 계단으로 향했다. 빠른 걸음으로 계단에 도달한 서명호는 매거진랙에서 학내 언론지 하나를 챙겨 들었다. 평소에는 굳이 챙겨보지 않던 것이지만 왠지 여기에 단서가 있을 것 같았다. 아직은 능숙하지 않은 언어라 느릿하게 읽어 나가던 중, 귀에 소란한 소리가 꽂혔다. 서명호가 소리를 쫓아 밖으로 나섰다. 그 순간, 거대한 인파가 시야를 스치고 지나갔다. 같은 색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외치는 구호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 노동 처우 개선하라... 총장은 사과하라...
서명호가 다시 언론지를 들여다 보았다. 3면에 총장의 사진과 함께 실린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교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가 엉망임이 밝혀졌고, 관련해서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어제, 시위대가 출근하는 총장에게 항의하자 총장이 '요새 학교가 소란스럽네' 한 마디를 남겨두고 지나갔다고 한다.
기사를 다 훑어 본 서명호가 고개를 들었다. 물결치며 행진하는 시위대의 머리 위를 장식하는.
Be more noisy.
더 소란하라.
그래서구나. 항상 한 발 늦게 알게 된다, 부끄럽게도. 서명호가 언론지를 잘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일주일 뒤. 서명호는 또 다시 우연의 힘을 등에 업는다.
지도교수와 논문 상담을 마친 서명호는 낙원악기상가로 향했다. 주제를 좋아하지 않는 듯이 보이던 교수는 그래도 지도 학생이라고 이것저것 제안해주었다. 그래피티가 허용된 곳뿐 아니라 낙원악기상가처럼 예술가가 밀집한 곳들을 가보면 새로운 작품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교수의 조언을 귀담아 들은 서명호는 실행력 좋게도 곧장 길을 떠났다. 마침 글이 꽉 막혀 있던 때기도 했다.
그러니까, 우연이었다. 걸어가는 서명호의 옆으로 스케이트 보드를 탄 남자가 스르륵 지나간 것. 시야의 옆면에 넘실거리는 은발을 포착하고 고개를 돌린 것. 그 짧은 순간 남자와 눈이 마주친 것.
Chew다. 서명호는 확신했다. 스케이트 보드 때문도, 은발 때문도 아니었다. Chew의 눈이었다. 제대로 보지도 못한 눈을 어떻게 알아보았냐면, 전 세계적인 전염병으로 모두가 마스크를 끼고 다니는 시대라 눈만으로 사람을 기억하는 법을 익혀버린 게 첫째. 쉽게 잊기에는 Chew가 너무도 아름다운 눈을 가진 게 둘째였다.
서명호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번만큼은 놓치면 안 된다. 있는 힘껏 달리려던 순간, Chew가 악기상가 건물로 쏙 빨려 들어갔다. 서명호는 잠시 멈칫했다가 발에 무게를 빼고 가볍게 뛰어갔다.
악기상가는 별천지나 다름없었다.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형형색색의 악기들이 예쁘게 걸려 있었다. 살면서 처음 보는 광경에 황홀해 하기도 잠시, 서명호의 고개가 휙휙 돌아갔다. Chew를 찾아야 한다. 조급하게 달아오른 마음에 다리가 빠르게 움직였다. 서명호는 찾으시는 거 있냐는 상인들의 물음에도 답하지 못하고 건물 내부를 빙글빙글 돌았다. 눈에 안 띄기 힘든 머리색인데 이상하게 보이질 않았다. 맨 위층에 이르러서야 겨우 발견했다. 520호, 버팔로 악기. 사방이 기타로 둘러싸인 공간 안에 앉은 남자를.
뒤집어 쓴 후드 속에 헤드셋까지 알차게 낀 남자는 고개를 까딱이며 리듬을 타고 있었다. 흥이 났는지 마스크 아래의 입술을 오물거리며 노래를 흥얼거리기까지 했다. 서명호가 살금살금 눈치를 살피며 가게 안으로 진입했다. 남자가 달리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야생동물에게 다가가듯 조심스러운 몸짓이 나왔다. 그때, 남자가 헤드셋을 빼서 목에 걸쳤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어서 오세요."
"저기."
"오우, 오셨네요. 제가 깜빡하고 손님이 예약하신 기타를 다른 지점에 두고 와서요. 혹시 8시쯤 다시 오시겠어요?"
"아?"
... 뭔 소리지? 영문을 모르겠는 서명호의 입에서 멍청한 소리가 흘러 나왔다. 당혹스러움에 눈을 치뜬 서명호에게 남자가 길게 눈을 마주쳐왔다. 촘촘한 속눈썹이 여유롭게 내려갔다 올라왔다. 아하. 서명호는 또 다시 Chew의 뜻을 뒤늦게 이해한다. 8시에 다시 보자는 말이다. 다 알고 있었구나. 그때 학교에서 마주친 사람이 나인 걸. 내가 따라올 것도.
그런데 저의를 모르겠다. 듣는 귀가 많으니 폐점 시간에 보자는 건 알겠는데... 걱정된다. Chew를 놓칠까 봐. 겹겹이 쌓인 우연을 붙들어 힘겹게 만났건만, 이마저도 놓쳐버릴까 봐.
"그럼 제가 여기서 기다릴게요. 8시까지."
"아뇨. 다녀오세요."
"..."
"어디 안 갈 테니까."
시간 아깝잖아요. 남자가 첨언했다. 모든 걸 꿰뚫린 기분에 가슴 한 켠이 뜨끔했다. 서명호가 찔려 하건 말건, 남자는 덤덤히 서명호를 눈에 담을 뿐이었다. 고집이 무력해지는 얼굴에 서명호가 순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한 마음은 가시질 않았지만, 더 이상 Chew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건물 밖으로 나가며 서명호는 생각했다. 한국을 뒤집어놓은 사람답지 않게 순진한 눈을 가졌다고.
시간이 뜨는 김에 둘러본 낙원악기상가 일대는 적절한 예시가 아닌 것 같았다. 예술가의 자유로운 영혼은커녕 아주 정갈하기 그지 없는 동네였다. 그래피티라고는 건물 내벽에 그려진 키스 해링을 본뜬 진부한 벽화가 끝이었다. 차라리 구석구석 설치된 조형물들이 훨씬 재미있었다. 와, 내 논문 망했네. 초조해진 서명호는 근처 카페에 앉아 다른 예술 마을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정신 없이 정보를 찾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8시에 임박한 시각. 서명호가 헐레벌떡 짐을 챙겨 나갔다. 멀리 건물 앞에 네모나게 선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등에 스케이트 보드를 메고 돌부리를 차는 남자는 꼭 거북이 같기도 했다. 저걸 타고 잽싸게 날아다니는 사람에게 할 말인가 싶지만... 거북이도 물에선 빠르잖아. 서명호는 떠오르는 온갖 뻘생각을 접어두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Chew. 맞죠."
"네."
예상외로 당당한 반응이 돌아왔다. 하긴, 이제 와서 내빼기엔 서로의 의중을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긴 했다. 남자는 가볍게 제자리 뛰기를 해 보드를 고쳐 메더니 앞으로 걸어갔다. 서명호도 일단 남자를 따라 걸었다. 느긋한 속도로 걷던 남자가 문득 멈춰 섰다. 고개를 틀어 서명호를 바라보더니, 물었다.
"궁금해서 그런데, 왜 물어보는 거예요?"
"네?"
"알고 찾아온 거면서."
무안을 주려는 의도는 아닐 것이다. 그보단 순수한 궁금증에 따른 질문이리라. 그래도 별 수 없이 머쓱해져 할 말을 잃은 서명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신고할 거예요?"
이어진 질문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신고할 거였으면 진작 했다. 남자는 눈썹을 으쓱 들곤 걸음을 재개했다가 다시 멈췄다.
"아. 저희 집 가시는 거 괜찮아요?"
"그럼요."
향방 없이 걷는 줄로 알았더니 집에 데려가는 거였나 보다. 그런데... 집을 간다고? 프라이빗하게 얘기할 만한 공간들은 영업시간이 10시까지밖에 안 돼서 방법이 없긴 하겠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처음 보는 사람을, 것도 자기 비밀을 아는 사람을 냅다 집으로 데려가다니. 이렇게 경계심이 없어도 되나? 내가 뭔 짓을 할 줄 알고. 괜한 노파심에 휩싸였지만 막상 본인은 태평하기 그지 없어 보였다. 서명호는 뚜벅뚜벅 앞서가는 어깨에서 위아래로 작게 흔들리는 보드를 흘겨 보며 걸었다.
Chew의 집은 낙원과 멀지 않았다. Chew는 서명호를 데리고 굽이굽이 골목길을 올라가더니 허름한 건물에 딸린 문을 끼익 잡아당겼다. 당기는 대로 열리는 걸로 보아 최소한의 잠금장치조차 해놓지 않은 모양이었다. 허술하다 허술해. 제대로 보긴 오늘이 처음인 사람인데도 걱정이 든다.
내부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옷가지와 빈 스프레이통이 널브러져 있었고, 벽에는 너덜너덜한 영화 포스터 여러 장이 붙어 있었다. 구석에 자리한 작은 탁자에 쌓인 바이닐에는 어떤 규칙성도 보이지 않았다. 화룡점정으로 이곳저곳 쌓인 종이 상자들까지. 집이라기보단 차라리 임시 거처에 가까운 꼬라지였다. 그 와중에 이 작은 방에 본인만의 취향들이 옹골차게 들어찬 게 엿보여서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완전히 압도되어버린 서명호가 현관을 넘을 엄두도 못 내고 머뭇거리는 동안 남자는 마스크를 벗으며 방에 들어갔다. 발로 물건들을 슥슥 밀어 빈 공간을 만들어내곤, 양손으로 공손하게 가리켰다.
"들어오세요."
평소에 깔끔히 지내는 서명호로서는 영 내키지 않는 제안이었으나 방도가 없었다. 서명호는 현관에 신발을 벗어 두고 남자가 마련한 자리 비슷한 것에 앉았다. 남자는 서명호가 자리 잡는 것까지 지켜보고는 냉장고 문을 벌컥 열었다. 냉장고 안을 한참 뒤적이다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돌아와 서명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땅히 드릴 게 없네요."
"아, 괜찮아요."
난잡한 방을 바쁘게 훑던 서명호의 시선이 소리가 들린 쪽으로 돌아왔다. 그 순간, 서명호의 숨이 훅 멎었다. 코앞에 마스크로 가려지지 않은 Chew의 얼굴이 있었다. 선이 굵으면서도 오목조목하게 자리한 이목구비는 생각보다도 더 앳된 인상을 주었다. 특히 눈앞의 사람을 빤히 담는 두 눈이 친숙하고도 어렸다. 작품으로 미루어 젊을 것은 짐작했지만 실제로 어린 티가 팍팍 나는 얼굴을 마주하니 말문이 막혔다.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던 서명호가 일단 마스크를 마주 벗었다. 남자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 빛났다. 대놓고 얼굴을 탐색하는 눈이 지나치게 천진난만해서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이윽고 찾아든 정적. 남자는 살짝 미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서명호를 꿈뻑꿈뻑 바라보았다. 서명호의 눈이 도로록 굴러갔다. ... 아. 또 멍청한 소리를 낸 서명호가 황급히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제 이름은 서명호고, 미술사를 공부하고 있고, 여행 중에 우연히 당신의 그래피티를 마주쳤고... 이곳에 이르기까지의 일대기를 구구절절 설명했다. Chew는 미동 없이 똑바르게 앉아 서명호의 말을 경청했다. 도통 생각이 읽히지 않는 무감한 얼굴이었다. 불안에 떨던 서명호가 불쑥 제 핸드폰을 내밀었다. 화면에 일전에 썼던 블로그 포스트가 띄워져 있었다. Chew가 깨알 같은 글씨를 자세히 보려는 듯 목을 앞으로 쭉 빼며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뒤, 좁아 들었던 미간이 순식간에 펴졌다.
"어! 저 이거 봤어요. 서명호씨가 쓴 거예요?"
"네. 제가 썼어요."
"와, 진짜로요? 안 그래도 되게 고마웠는데, 어떻게 연락 드려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이렇게 만나서 다행이네요."
남자는 옛 친구를 우연히 마주친 사람마냥 신이 나서는 우다다 말을 쏟아냈다. 실시간으로 동그랗게 커졌다 접혔다 하는 남자의 눈을 보고 있자니 긴장이 풀렸다. 무작정 일터까지 찾아온 무뢰한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 블로그를 깐 거였는데 대강 성공한 것 같다. 이렇게나 반가워할 줄은 몰랐지만... 남자는 서명호의 핸드폰까지 뺏어 들곤 블로그를 보고 또 보았다. 실룩거리며 벌어지는 입매가 귀엽고 뿌듯해 서명호도 슬쩍 웃었다. 분위기가 좀 풀리려던 찰나, 남자가 핸드폰을 돌려주며 말했다.
"그래서 왜 온 거예요? 싸인 받으러 오신 건 아닐 거고."
겨우 풀렸던 분위기가 급속 냉각되었다. 이번에도 딱히 꼽주려는 의도는 없는 것 같았다. 일상적으로 뼈 있는 소릴 하는 사람이군. 하긴, 서론이 너무 길었다. 서명호가 큼큼 속기침을 해서 목을 풀었다.
"저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무슨 이야기요?"
"당신의 이야기. Chew의 이야기요."
당신의 그래피티를 보고 스트릿 아트에 관심이 생겼다, 한국의 스트릿 아트를 연구해보려 한다, 그런데 기록이 마땅찮고 아직 나도 잘 몰라서 당사자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편히 얘기해 달라... 서명호가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듯 여러 사연을 더했다. 사실상 초면의 사람에게 부탁하는 셈이라 그다지 당당하지 못했던 탓이다. 서명호의 말을 듣던 남자의 눈썹이 만화처럼 일그러졌다. 입에서는 어어어... 하는, 퍽 난감한 신음이 샌다.
"할 말 없는데. 벽에다 다 해서."
그러고는 뒷목이나 긁적이는 것이다. 예상했다곤 못하겠으나 개연적인 반응이었다. 저가 한 일을 떠벌리기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면 Chew가 되지는 않았겠지. 서명호가 침착하게 설득을 시도했다.
"꼭 작품에 관한 게 아니어도 돼요. 편하게 말해주세요."
"근데요. 제 그림이 작품씩이나 돼요?"
"무슨 말이에요?"
"작품이라고 하면 대단한 거 아니에요? 갤러리에 걸려 있고, 부자들한테 비싸게 팔리고, 그런 거요."
"다 그렇지는 않아요."
울컥한 서명호가 스트릿 아트가 예술로 인정받게 된 역사를 줄줄 읊었다. 그러다 아차 싶어 말을 멈췄다. 아까부터 자꾸 일장연설을 늘어놓게 된다. 슬슬 절박해진 탓이리라. 설교를 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민망함이 솟은 서명호가 남자의 안색을 살폈다. 남자는 반짝거리는 눈과는 상반되게도 그런가요, 심드렁한 소리나 흘렸다.
"그냥 전... 하고 싶은 말 하는 거거든요. 엄청난 의도도 없어요. 어차피 금방 지워질 거고."
"..."
"전 예술가가 되고 싶지 않은 것 같아요."
이 사람은 이미 자기가 한국의 뱅크시 따위로 불리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걸까. 방금의 발언 또한 상당히 예술가스럽다는 것도 아마 모르는 것 같지. 서명호의 머릿속에 수많은 반박거리가 둥실둥실 떠올랐다. 모든 예술이 작가주의적 의도에 따라 제작되는 건 아니며, 영구히 보존되는 것 또한 아니다. 오히려 순간적이기에 예술이 되는 작품도 존재한다. 정식으로 예술가라는 딱지를 받아야만 예술가가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는 예술가의 잠재력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내 모든 반박들을 지워냈다. 일단은 예술가가 되지 않기를 선택하고 싶다는 순진무구한 의지를 존중하고 싶다. 서명호가 깍지 낀 손으로 턱을 괴며 고쳐 앉았다.
이제 서명호는 이 사람이 궁금하다. Chew가 아닌, 눈앞의 이 아이가.
"악기 파는 일을 해요?"
"네."
그래서 가벼운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남자는 흔쾌히 응했다. 본업이랄 건 없고 현재는 지인의 가게 일을 돕고 있다고 한다. 음악을 좋아해서 노랫말을 적곤 하는데, 하고 싶은 말로 터져버릴 것만 같은 날에는 뛰쳐나가 벽에 그림을 그린단다. 생계는 어떻게 유지하냐고 묻자 여러 사정-이 부분은 캐묻지 않았다-이 있어서 당장은 사정이 어렵지 않지만, 그래도 안정적이라곤 할 수 없는 처지라 꾸준히 아르바이트를 하며 버틴다고 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할지는 모르겠다나.
부업으로만 이루어진 삶이라. 남의 인생에 할 말은 아니지만 참으로 낭만적이었다. 모든 게 미정인 상황이 불안할 법도 한데 본인은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남자는 지나간 문답을 곱씹는 서명호를 물끄러미 보다 툭 말했다.
"손에 굳은살이 특이하네요."
반사적으로 손가락이 오므라들었다. 숨기려는 몸짓이 분명함에도 남자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꿋꿋이 꽂히는 눈빛에 결국 서명호가 입을 뗐다.
"붓을 잡았어서요."
"그림 그리셨어요?"
남자가 놀랍다는 듯 눈을 틔웠다. 서명호가 어설프게 웃었다.
그렸다. 아주 많이 그렸다. 매일매일 그리지 못해 안달 났던 때가 있었다. 처음에는 그리는 게 좋아서, 그리고 싶어서. 나중에는 따라잡고 싶어서. 뒤처질까 불안해서. 여느 때처럼 의무감에 붓을 붙잡고 있던 날에 결심했다. 이제 놓아주자.
흔해 빠진 서사였다. 재능과 열정의 부족이라는 한계에 부딪혀 지극히 사랑했던 일을 미워하게 되는, 닳고 닳은 이야기. 하지만 그 서사를 살아가는 내 인생은 유일해서. 한 점만을 향해 달려왔던 오랜 시간이 눈 깜짝할 새 무너지는 경험을 처음 해봐서. 그래서 짧은 시간 버겁도록 헤맸다. 사랑했기에 짓눌리는 이 감정이 무섭게 무거웠다.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지표다. 사랑했고, 사랑했기에 필사적이었고, 필사적이었지만 실패했던 순간을 지시하는. 어쩌면 너무 필사적이었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제 와서 인과를 따지기도 우스운 일이다. 쥘 것을 잃은 손에는 붓 대신 펜을 끼웠다. 그럼에도 미술을 완전히 떠나지는 못했다. 이 역시 굳은살이었다. 쉬이 말랑해지지 않는 기억들이 단단히 담겨 삶의 차선책에마저 남아버린, 지난한 사랑의 흔적.
잠깐 취미 삼아 그렸었다고 넘기려 했다. 그러나 입 안에서 말을 고쳤다. 더이상 과거의 자신을 무시하지 않기로 한다.
"미술 전공했어요. 대학생 때."
"오, 그러면... 잠깐만요."
남자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장을 벌컥 열더니 안에서 작은 스케치북과 크레용을 꺼내 건넸다.
"그릴래요?"
"너무 오랜만인데."
"그냥 아무렇게나."
글쎄. 솔직히 자신은 없다. 그래도 고분고분히 받아 들었다. 공간이 주는 힘 때문이었다. 이 너저분하고 자유로운 방에서라면 뭐든 해도 될 것만 같았다. 남자가 바이닐 뭉태기를 치워 탁자를 비웠다. 빈 탁자를 서명호 앞에 잘 옮겨두고는, 두툼한 손으로 제 눈 위를 덥썩 덮었다.
"안 보고 있을게요."
"하하, 봐도 돼요."
"완성하시고 불러주세요."
남자는 눈을 가린 채로 뒤뚱뒤뚱 걸어가 매트리스 위에 풀썩 엎어졌다. 서명호가 흐흐 웃음을 흘리며 크레용을 쥐었다. 봐도 된다고는 했지만, 사실 진짜 보고 있는다면 조금도 그리지 못했을 것이다. 시선에 영향받지 않을 정도의 자의식은 잃어버린지 오래였으므로.
자, 이제 눈 앞에 펼쳐진 여백을 보자. 아직까진 이곳에 무엇이 채워질지 모른다. 기다리자. 그림이 나를 찾아오기를. 서명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Chew의 그래피티를 처음 봤던 날을 떠올린다. 그때 들었던 파도 치는 소리, 가슴을 잔잔히 적신 환희, 그와 상반되게 휘몰아치던 자유를 상기한다. 서명호의 눈꺼풀이 힘차게 들렸다. 스케치북에 줄 하나가 죽 그어진다. 익숙지 않은 재료가 주는 감각이 나쁘지 않다. 줄을 더 긋는다. 색색깔의 크레용이 스케치북 위를 슉슉 횡단한다.
서명호는 Chew를 그린다.
"다 됐어요."
서명호의 한 마디에 일자로 누워 있던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남자는 서명호의 옆에 붙어 앉았다가 짧게 탄식하곤 다시 눈을 가렸다.
"봐도 돼요?"
"네."
과도한 배려가 제법 귀엽다. 드디어 남자가 손을 내렸다. 스케치북을 향해 내려가는 고개. 서명호의 고개도 따라 내려간다. 자신이 총총히 수놓은 색깔들을 이제사 제대로 본다. 흘러내리는 붉은색과 주황색. 그 위로 팡 터진 보라색. 사이사이를 채우는 초록색과 노란색. 서명호가 본 Chew다.
남자는 고개를 밀었다 당겼다 하며 열심히도 보았다. 좀처럼 변할 줄 모르는 표정에 왠지 긴장이 되어 침이 꼴깍 넘어갔다. 끝내 남자의 입이 열린다.
"음... 알록달록하네요."
서명호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모름에 당당한 자세가 도리어 안심이 된다. 괜히 의미를 붙여주려 전전긍긍하지 않는 게 고맙기도 했다. 서명호가 스케치북을 잘 덮어 남자에게 내밀었다.
"선물이에요."
"와우, 감사합니다. 제 스케치북에 제 크레용으로 그리신 거지만요."
굳이 달아둔 새침한 사족이 얄미웠다. 서명호는 못 들은 척 안으로 곱았던 어깨를 펼쳤다. 남자는 스케치북을 다시 열어 보더니, 검지로 우측 하단의 THE 8을 콕 찍었다.
"이건 뭐예요? 어떻게 읽어요?"
"디에잇. 필명으로 쓰려고 했었어요."
"멋있네요. 나도 그런 걸로 지을걸."
"Chew도 멋져요."
"근데 좀 귀엽잖아요."
알긴 아네. 시간을 확인한 서명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에 가방을 걸쳤다. 시간을 너무 많이 뺏었다. 남자는 엉거주춤 일어나 미적미적 현관까지 따라왔다.
"가시게요?"
"네. 오늘 시간 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어, 역까지 데려다 드릴까요? 길이 복잡한데."
"아뇨, 괜찮아요. 그런데..."
"..."
"우리 또 볼 수 있어요?"
남자는 대답 없이 서명호를 빤히 보았다. 그리고는 아 맞다, 그림 고마워요, 말했다. 능청스럽게 굴지만 이미 표한 감사 인사를 다시 건네는 걸로 보아 말을 돌리려는 의도가 선명했다. 빈 말을 참 못하네. 서명호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문고리를 잡았다. 그때.
"제 이름 알려드릴게요."
"... 네?"
"한솔 버논 최. 최한솔이라 부르든 버논이라 부르든 상관없어요."
어리벙벙해진 서명호가 문고리를 잡은 채 굳어버렸다. 실명을 알려줄 줄은 몰랐다. 남자, 아니 최한솔이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기억해달라고요. 명호씨가."
곧이어 최한솔의 입이 하트 모양으로 활짝 벌어졌다. 서명호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입꼬리를 길게 늘렸다.
"기억할게요."
서명호는 문을 열었다. 민망하면 머리를 긁는 습관이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
서명호는 Chew를 기록하지 않기로 했다.
당장은, 이라는 각주를 달아야겠다. 언젠가는 반드시 기록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것이 서명호의 결론이었다. 이러한 결론이 도출된 데에는 두 번째 우연한 만남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정확히는 만남 이후의 생각들이.
기록하고 싶었다. 바람처럼 휘날리는 너를 활자로라도 붙들어 매고 싶었다. 네가 지금 이곳에 존재했음을 남기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욕심을 부리려 해도 너의 눈을 떠올리면, 세상을 비추던 또렷한 눈동자를 떠올리면. 삽시간에 모든 게 부질없어지는 것이었다.
너는 살아 있었다. 나와 함께.
비로소 실감이 났다. 누군가의 삶을 역사라는 연속체에 소속시키는 일부터 실례임은 진작 알았지만, 글의 대상을 실제로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Chew는, 최한솔은, 대의명분을 붙여 속단하기에는 스스로 빛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적히지 않아도, 적히지 않아서, 적히지 않아야 아름다운. 반짝반짝 살아 있는 사람.
줄곧 최한솔을 생각하던 어느 날 서명호는 캔버스와 물감을 꺼냈다. 들춰보지 않은 지 오래된 재료들은 벽장 안에서 먼지를 덮고 잠들어 있었다. 서명호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물감을 억지로 쥐어 짜냈다. 그리고 캔버스에 마구잡이로 그었다. 붓이 이리저리로 튀는 통에 물감이 방울방울 흩어졌다. 아무려면 좋았다. 순전한 즐거움. 그 하나면 충분했다.
너는 나의 그림이 될 수는 있어도 글이 될 수는 없다. 궁핍한 언어를 부릴 만큼 너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하여 나는 기다리겠다. 지루한 글을 쏟아내면서, 내가 감히 너를 글로써 담아낼 수 있게 될 때를.
서명까지 마친 서명호가 뒤로 물러났다. 머리가 얼얼해왔다. 다른 생각을 할 여지 없이 집중했던 탓이다. 파랗게 젖은 캔버스에서 흰 파도 거품이 불규칙하게 굽이친다. 보는 이를 집어 삼키기 위함이 아니고, 포근히 끌어안기 위해서. 서명호의 손에서 붓이 툭 떨어졌다. 댕그랑 바닥에 떨어진 붓이 짧은 파도를 그려냈다.
최한솔이 아주 많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서명호는 낙원으로 갔다. 악기상가로 뛰어 들어가 5층까지 단숨에 올랐다. 그러나 520호 버팔로 악기에 최한솔은 없었다. 대신 자리를 지키는 이에게 물어도 봤지만, 얼마 전에 그만두었다는 허탈한 답이 돌아왔다. 기억을 더듬어 찾은 집도 텅 비어 있었다. 방을 뺀 지 얼마 안 되었는지 활짝 열린 문 너머에는 난잡하게 널려 있던 물건들도 싹 빠져나가 있었다.
끝내 최한솔을 만나지 못한 서명호는 힘없이 연구실로 향했다. 우연도 힘을 다했구나 생각하던 순간.
See ya!
또 만나요!
건물 외벽에 그려진 그래피티가 서명호의 발목을 붙잡았다. 삐쭉빼쭉한 글씨를 커다란 눈 그림이 둘러싸고 있었다. 최한솔의 눈과 닮은 엷은 갈색빛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그리고 곁에는, 흘러내리는 붉은색과 주황색. 그 위로 팡 터진 보라색. 사이사이를 채우는 초록색과 노란색.
서명호가 천천히 눈을 내린다. Chew가 있어야 할 자리에 무심한 글씨체로 THE 8이 휘갈겨 있다. 이름 옆에 덩그러니 세워진 스케이트 보드. 서명호는 이 모든 정경을 여러 차례 둘러 본다. 이윽고, 입가에 웃음이 스민다.
아름다운 아이야. 난 평생 너를 뒤쫓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구나.
서명호가 손끝으로 제 필명을 쓸었다. 지어놓고 쓰질 못했었는데 이렇게 빛을 보네. 아직 마르잖은 스프레이가 굳은살 위에 묻어났다. 손안에 번진 얼룩을 쥐고 씨익 웃다가, 보드를 잡아채 바닥에 내던졌다.
우당탕!
서명호가 보드 위에 한쪽 발을 걸치고 힘차게, 더욱 힘차게, 발을 굴렀다. 보드는 서명호를 싣고 빠르게 굴러갔다. 지나는 자리마다 퐁퐁 무지개가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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