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瘗于池中幼


瘗于池中幼 

연못에 유년을 묻고

“교아, 사실은 있지⋯⋯.”

“백윤 오라버니가 태자 전하셨다는 거네.”

“응! 그렇게 우리를 깜빡 속인 거라니까!”

 교아, 어찌 너는 그리 침착해? 설마 너도 알고 있었어? 도화 나무 고목 아래의 그네에 앉아있던 설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펄쩍 뛰었다. 설영의 움직임을 따라서 교연의 고개가 올랐다. 

“그럴 리가 있겠니. 내가 어찌 알겠어. 설아, 그러다 넘어진단다. 어서.”

교연이 설영의 손을 잡아끌어 제 곁에 앉혔다. 설영은 이 사실을 알고 사흘 밤낮, 아니 이레 밤낮으로 머릿속에서 폭죽이 떠졌는데 태연자약하기만 한 교연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단 가에서 자신 말고는 이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설영은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리하여 낙양에 머물던 교연에게 급히 서신을 보내 제 마음을 달래줄 이를 찾았다. 그런데 이리 침착하다니. 왠지 풀이 죽은 설영이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그넷줄에 고개를 뉘었다. 교아. 나 앞으로 백윤 오라버니를 어찌 보아야 할 지 모르겠구나. 그 사람이, 아니. 전하가 어떻게 내 정혼자⋯ 악! 설영이 다시금 그네에서 벌떡 일어나 호숫가로 달렸다. 손 뻗어 잡히는 돌멩이를 들어 마구잡이로 호수에 퐁퐁 던져댔다.

속았다는 사실에 단지 분이 났을 뿐이지 그가 싫은 건 아닐 거라 짐작한 교연은 그네에 앉아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 비단신 끝으로 흙장난을 치던 발을 멈추고, 교연은 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평온이 내려앉은 낯과 달리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는 파장이 일고 있었다. 교연 역시 설영만큼 놀랐으나 어릴 적부터 속내를 감추고 감정을 갈무리하는 데 익숙했을 뿐이다. 감정을 자유로이 표현하며 클 수 있었던 설영과는 달랐다. 설영에겐 태생부터 마땅히 주어진 환경이었으나 교연에게는 그마저도 권리였다.

때마침 춘풍이 그네에 앉은 이에게로 불어왔다. 교연은 도화 꽃비를 흠뻑 맞으며 가라앉은 눈으로 몇 가지 장면들을 상기했다. 그제서야 모든 상황들이 베틀 위의 날실과 수실처럼 짜 맞춰지기 시작했다. 유독 설영을 챙기던 해은, 그리고 친우 이상의 감정을 갖던 그 눈빛마저도. 제 반려가 될 사람이니 그리 마음을 주었던 거구나. 이로써 교연은 평생 해은을 넘볼 수 없다는 게 드러났다. 생각할수록 불공평했다. 설영은 모든 걸 쥐고 태어났으나 처음으로 연정을 품은 이까지 앗아갔다. 교연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설영이 미웠다. 설영이 가진 것이 부러운 적은 있었어도 미워한 적은 없었건만.

교연은 일전에 해은에게서 서책을 받은 적이 있었다. 춘추春秋를 유독 어려워하던 교연을 어찌 알았는지 해은이 주석을 달아 필본을 쓴 것을 교연에게 건네주었다. 설영을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교연은 누군가의 호의가 당연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특별하게 여겨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전부터 동경으로 가득찼던 눈빛에 연심이 담기기 시작했던 게 이때부터였다. 그러나 해은이 교연에게 다정히 굴었던 이유도 설영 때문이었을 터. 설령 반쯤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해도 남은 반쪽짜리 의도가 교연의 마음을 조각냈다. 

그리 생각하니 해은이 준 서책을 품에 안고 한참이나 청려호 앞에서 쪼그려 앉아 발갛게 달아오른 낯을 식혔던 저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설영은 의도치 않았으나 교연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일이 많았다. 설영의 옆에만 서면 그 애는 빛이고 자신은 그림자가 되는 것 같았다. 

그네에서 일어난 교연이 호숫가 앞에 쪼그려 앉은 설영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치맛자락이 땅에 쓸리는 것도 개의치 않고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양팔로 무릎을 끌어안은 설영이 먼저 교연을 바라봤다. 교연은 여전히 물 위로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수면 위에 비친 설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아, 전하를 연모해?”

“⋯⋯백윤을?”

구름이 빛을 가려 설영을 등진 교연의 낯에는 그늘이 졌다. 동시에 교연을 마주 본 설영의 얼굴에는 햇빛이 들어 고운 이마가 투명하게 빛났다. 빛과 그림자가 함께 있으면 모든 이들은 빛을 좇았다. 때로는 강한 빛은 그림자마저 앗아가기 마련이었다. 그림자는 빛이 필요했으나, 빛은 그림자가 필요치 않다. 그림자는 빛의 부속물이었다. 교연은 처음으로 두려워졌다. 설영의 곁에서 내가 빛날 수 있을까? 설영이 지닌 빛이 너무도 강렬해서 그 커다란 그림자에 내가 평생이고 갇혀 사는 건 아닐까?

“연모하는 마음은 모르겠어.”

“그렇구나.”

“그래도 생판 모를 남보다, 그가 태자인 게 내겐 좋은 일 같아. 다시 생각해보니 그 편이 훨씬 기쁜 거 같아.”

“그럼 오라버니, 아니. 태자 전하가 밉지 않겠네.”

응. 그런 거겠지? 자신을 향해 시원스레 웃는 해은을 떠올린 설영이 수줍게 웃었다. 역시 교아 덕분에 다시금 상황을 돌이켜볼 수 있었어. 네 덕분이야. 고마워! 맑게 미소 지은 설영이 교연을 양팔로 힘껏 끌어 안았다. 교연은 설영의 품에 안겨 가만 뺨을 묻고 있었다. 사실 교아 네가 너무 그리웠어. 설영의 애교 짙은 음성에 교연은 말 없이 설영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해은은 설영이 처음으로 교연에게서 빼앗아 간 사람이었다. 

* * *

“누이가 울면 내 마음이 무너져.” 

“⋯⋯울지 않을게.” 

“경아랑 약조하는 거야.” 

“응.“

난경은 교연을 등에 업은 채 느티나무가 빼곡히 드리운 길을 걷고 있었다. 청려호에서 평국공부로 돌아가려면 이 느티나무 숲길을 꼭 지나야 했다. 교연이 청려호에 자주 걸음 하는 이유는 잔잔한 연못가보다 이 길이 좋아서가 아닐까. 이 길을 걸을 때면 유난히 교연의 걸음이 느려졌기에 난경은 그 연유를 짐작했다. 나뭇잎으로 가득 찬 하늘을 보며 행복하게 걷던 길을 눈가가 발개진 채로 걷는다 생각하니 마음이 시큰거렸다.

사실 난경이 낙양에서 청하로 내려온 지 채 반나절도 되지 않았다. 교연이 청하에 요양하며 수학한 지도 벌써 석 달, 누이가 보고 싶어 병을 핑계 대고 잠도 줄여 가며 청하로 내리 달려온 길이었다. 낙양의 제일가는 점포에서 교연이 좋아하는 나비 문양 노리개를 사들고 이를 전해줄 생각에 들떠 있었던 난경은 뜻밖의 소식에 짐도 못 풀고 교연을 찾아 헤맸다. 

일은 교연과 설영이 수학하는 학당에서 벌어졌다. 강연을 듣는 교연은 평소와 달리 혼자였다. 청하를 지나던 황실 종친이 평국공부에 들린 일로 설영은 본가에 불려가 얼굴을 비춰야 했고, 교연은 함께 가자는 설영의 말을 거절하고 홀로 서원에 갔다. 평소 설영의 신분을 동경하던 무리들이 교연과 설영의 사이를 질투해 설영이 없는 틈을 타 교연에게 해코지를 한 것이다. 신체적으로 해를 가하면 엄중한 벌을 받을 건 아이들은 간접적인 방법을 택했다. 그들은 말 한마디가 사람을 죽여놓을 수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서녀 주제에 비씨 마마와 어울리다니 우습지도 않구나.”

“청하의 격이 떨어진다면 그건 모두 너 때문이야.”

“제 분수를 알아야지.” 

교연은 그 말을 듣고도 울지 않았다. 지독하리만큼 익숙한 말이었기에 지독하리만큼 오래 겪어온 차별이었기에 도리어 눈물은 나지 않았다. 외려 욕하던 이들이 꼿꼿한 교연의 태도에 당황하여 눈앞에 있던 책을 들어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해은이 선물했던 서책이었다. 학생들이 빠져나간 학당, 교연은 홀로 찢어진 종잇조각을 하나도 빠짐없이 주워 서책을 싸왔던 노란 비단 보자기에 챙겨두었다. 짐을 챙겨 서원을 나선 교연은 신시申時가 지날 무렵까지도 평국공부로 돌아오지 않았다. 

몰래 교연을 마중하러 간 설영이 서원의 비복에게서 일의 자초지종을 듣고 교연을 찾아 나설 무렵, 이제 막 평국공부를 향하던 난경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길을 나누어 교연을 찾기 시작했다. 난경은 청려호로, 설영은 서원 근처로 향했다. 

청려호 염원을 이루어준다는 신목 아래.

교연은 쪼그려 앉은 채 남은 잿더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不索이면 何獲이리오. 마지막으로 태우던 조각에 적힌 구절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찾아 구하지 않으면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 태생부터 뭐든 손에 쥐고 태어난 운명이 아니었기에 사소한 것부터 원하고 바라서 노력해야만 얻어낼 수 있었다. 교연 자신의 일생을 담아낸 문장이었다. 동시에 설영은 죽어서도 이해하지 못할 감정일 것이다.

교연은 설영의 자개함에서 자신과 똑같은 주석이 적힌 춘추 책을 보았던 것을 떠올렸다. 어느 쪽이 우선이었고 어느 쪽이 사본인지는 자명했다. 설영은 제가 한 권을 더 들고 있다고 한들 수학을 위함이니 개의치 않을 것이나, 그 사실을 들킬 바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편이 나았다. 어차피 찢어져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되었으니 태워버리는 게 모두를 위한 방법이었다.

연모하지 않았다면 밉지도 않았을 것을.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서녀라는 낙인도 함께 불타 없어지면 좋겠다고 교연은 생각했다. 잘게 조각 나 재로 남은 것이 자신의 마음인지 서책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속이 북받쳐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제야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교연! 누이!”

그때였다. 종이 타는 냄새를 맡고 난경이 이쪽을 향해 달려온 것은. 교연은 자신이 정녕 헛것을 보는 줄로만 알았다. 난경은 청하가 아닌 낙양에 있어야 할 사람이다. 네가 어찌 이곳에 있어? 당장이라도 소리쳐 묻고 싶었으나 난경을 보자마자 교연은 몹시도 서러워졌다. 난경이 다가와 자신의 양 어깨를 꽉 잡아쥘 때까지도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큰 눈으로 눈물을 뚝뚝 흘릴 뿐이었다. 

“교아, 경아가 왔어.”

“⋯⋯”

“울지 말아, 응? 누이가 울면 내 마음이 무너져서⋯⋯.”

교연을 찾는 내내 난경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머리가 새하얘질 만큼 지독한 분노를 느꼈다. 동시에 교연이 처한 현실로부터 이루 말할 수 없는 참담함을 느꼈다. 청하에서의 날들은 교연에게 유일한 기쁨이었다. 낙양을 떠나 청하로 향하는 길 내내 고생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던 교연의 낯을 난경은 똑똑히 기억했다. 청하에 오면 교연이 숨통 트이는 게 눈에 보일 정도라 난경을 그것을 늘 안쓰러워하면서도 내심 다행으로 여겼다. 이번 여정도 다르지 않았다. 깜짝 방문으로 교연을 더 기쁘게 해주려 서신도 하지 않은 채 청하로 달려왔건만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홀로 울고 있는 교연을 마주한 난경은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는 말을 실감했다.

이리 될 줄 알았다면 청하에 홀로 남겨두지 않았을 텐데.

교연에게서 하나뿐인 숨통마저 앗아가는 현실이 너무도 잔인했다. 평생을 서녀 신분으로 인해 차별받았던 교연에게 이 일은 겨우 딱지가 아물고 있는 상처를 다시 칼로 상처로 후벼파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윤승의 괴롭힘과 가문 내 사람들의 멸시, 피난처였던 청하에서마저 본가의 상황이 재현되는 것 같아 난경은 참담한 낯을 숨기지 못했다. 

교연은 한참을 난경의 품에 안긴 채 울었다. 그의 옷소매가 눈물이 젖어 든다는 걸 알면서도 온기를 잃기 싫다는 듯 더 세게 끌어안을 뿐이었다. 이해받고 위로받고 싶었다. 평생 꼭꼭 내리누르며 쌓아만 왔던 서러움이 난경의 앞에만 서면 무너져 내렸다. 윤승에게서 구해주던 아주 어릴적의 그날, 우느라 고개조차 들지 못하던 제 손을 잡아주었던 그때부터 습관이 된 것 같았다.

난경은 우는 교연을 볼 때면 어쩔 줄 몰랐다. 웃게 하기도 모자랄 시간에 울고 있는 교연을 바라보는 게 견디기 어려웠다. 위로하는 방법을 입맞춤밖에 모르는 것도 아닌데 난경은 어느새 습관처럼 교연의 입술에 제 것을 겹쳐 얹었다. 질척한 입맞춤도 아니었고, 그저 입술을 대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닿은 입술 틈으로 교연을 생각하는 마음과 제 보잘것없는 애정이 조금이나마 전해지기를 바랐다. 그럴 때면 교연은 그 마음을 알기라도 한다는 듯 난경의 손을 찾아 세게 맞잡았다. 그것이 제 동아줄인 것마냥. 난경은 그 간절함이 안쓰러우면서도 달콤했다. 

“교아! 난경이니? 너희가 맞아?”

숨을 고른 채 이마를 맞대던 두 사람이 황급히 떨어졌다. 익숙한 인영을 보고서 달려온 설영의 목소리였다. 설영이 이곳에 다다르기까지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일었다. 시선을 내리 깐 교연이 달아오른 뺨을 숨기려 난경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설아에겐 네가 대답해 줘. 교연은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자신과 비슷하면서도 익숙한 난향이 폐부 깊숙이 내리 앉았다. 난경은 익숙한 손길로 교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모인 세 사람이 평국공부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울다 지친 교연을 난경이 업었고, 설영은 둘과 조금 떨어진 채 앞에서 걷고 있었다. 설영은 자꾸만 걸음이 늦어지는 두 사람을 돌아보다가 노을이 채 지기 전에 교연을 괴롭힌 아이들을 단단히 혼을 내러 가겠다며 먼저 달려갔다. 떠나기 직전까지도 설영은 교연에게 미안하다며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했고, 교연은 부은 눈으로 설영에게 웃어주었다. 

남은 두 사람, 난경은 교연을 여전히 업은 채 교연이 좋아하는 느티나무 자욱한 길을 걸었다. 느티나무의 이파리가 붉게 물들어 가는 해를 막으며 커다란 그늘은 드리웠다. 교연을 찾으러 가는 길에는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연신 난경의 등에 옆얼굴을 묻고 있던 교연도 어느새 고개를 들어 난경과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탓이었을까. 천천히 걷던 난경의 걸음이 더욱 느려졌다. 자신이 풍광을 더 둘러보고자 함인지, 교연이 좋아하는 길을 더 오래 걷고자 함인지, 교연과 단둘이 있는 시간을 더 누릴 참이었는지. 연유는 무수히 많았다. 문득 교연이 작게 소리 내 웃었다.

“내가 너를 업던 일이 몇 달 전 같은데.”

“이제는 내가 누이를 업을 수 있네.”

그리 답하는 난경의 목소리가 묘하게 붕 떠 있었다. 한 살 터울이라고 하나 어릴 적에는 확실히 연장자였던 교연의 키가 더 컸다면, 청하에서 수학한 후로 마주한 난경은 금세 교연의 키를 따라잡은 모양이었다. 난경의 등도, 어깨도 좀 더 커져 있는 것 같았다. 더는 자신이 아끼고 돌보던 동생이 아닌 것 같았다. 입 맞추며 위로하던 그때부터 애진작 느끼던 사실이었으나 비로소 체감하고 나니 마음이 저릿했다. 그에게 기대도 된다는 사실이, 그저 마냥 어리광 부리고 싶다는 충동을 일으켰다.

 

따뜻한 체온, 익숙한 향내. 청하에서 잠들던 밤이면 교연은 난경을 몇 번씩이나 꿈에서 보았다. 꿈속의 난경은 교연을 다정히 안아주고, 업어주고, 때로는 입을 맞추었다. 상사몽相思夢은 난경만 겪은 것이 아니었다. 꿈에서만 바라오던, 어쩌면 꽤 간절했을 그 난향을 맡고 있으니 마음이 안정되기는커녕 외려 가슴이 뛰었다. 

난경에게는 교연이 설영보다 귀한 것 같았다. 교연은 조금 더 욕심이 났다. 드러나는 방식으로 사랑을 확인받고 싶었다. 한숨을 삼키고 교연의 입에서 겨우내 나온 것은 물기 어린 목소리였다.

“경아.”

“응. 듣고 있어.”

“연모하는 이가 있어?”

“⋯⋯응.”

순간 난경은 손에 힘이 풀려 뒷걸음질 칠 뻔했다. 교연을 향한 제 애정이 부족했는지를 곱씹었다. 차고 넘치는 이 마음을 어찌 표현하면 좋을까. 그러나 교연이 묻는 연유가 확인받고자 함인지, 정녕 자신의 마음을 몰라서인지 난경은 알지 못했다. 그저 자신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답을 내어줄 뿐이었다. 

“나는 누이 곁에만 있으면 돼.”

교연은 그런 난경의 애정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품에 고개를 묻는다. 이런 무조건적인 애정은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생소한 것이었다. 속에서부터 차오르는 열기가 낯설어 괜히 기승을 부렸다. 교연은 모나게 구는 제 모습이 싫었다. 

“나 없이도 잘 지내지 않니? 낙양에서, 지금도.”

“누이가 보고 싶어서 청하까지 왔어. 꾀병을 부려 겨우 얻은 기회인걸.”

경아가 꾀를 부릴 줄 알다니, 이제 다 컸구나. 교연이 기분 좋은 듯 소리 내어 웃었다. 난경의 귓가에 웃음기가 묻어난 목소리가 울렸다. 할 말이 있는 듯 교연이 입술을 달싹였다. 이참에 나⋯⋯ 낙양으로 돌아갈까? 동시에 난경이 말했다. 

 

“나중에 청하에 집을 짓고 살까?”

봄바람이 크게 불어 두 사람의 머리칼을 헤집어 놓았다. 나뭇잎끼리 부딪치며 흔들려 나는 소리가 온통 요란했다. 교연은 저가 뱉은 말이 그 소리에 묻힌 것처럼 굴었다. 현실의 때가 묻은 자신의 말보다 난경이 건넨 말이 배로 듣기 좋았다. 

“응. 사실 청하든, 난주든 크게 관계없어.”

“난주는 누이에게 춥지 않을까? 교아는 한기에 약하잖아.”

“경아 말이 옳네. 사시사철 온난한 청하가 좋겠구나.”

“누이는 어떤 집에서 살고 싶어?”

교연의 입술 틈으로 잠시간 상념이 샜다. 천지에 내가 속할 곳이 생긴다면, 그게 어디든 좋을 터. 그러나 이는 입 밖에 낼 수 없는 답안이다. 고아한 얼굴에 일순간 짙은 고독이 물들었다. 교연은 난경을 마주 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도 떠나지 않는 집에서 살래.”

난경은 그 대답에서 교연이 지닌 외로움의 깊이를 짐작해본다. 마음의 빈틈을 자신이 메꾸어줄 수 있다면 가진 것을 다 내어놓아도 좋았다. 난경이 제 상념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교연이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교연은 오직 작은 틈만을 보여줄 뿐, 제 전부를 보이는 것은 허락지 않았다. 위로받는 입장임에도 그랬다. 자신이 생각하는 답을 먼저 내어놓고서 보기 좋은 미사여구들을 덧붙여 진심을 숨겨 놓으려 했다. 

“정원은 모란과 해당을 심어 기르고, 모란만 심어두면 다른 계절이 빌 테니 다른 꽃들은 경아가 좋아하는 것으로 심자. 어때?”

“누이가 좋아하는 것들로 모두 채워도 돼.”

“함께 살 집이잖니. 어찌 내가 바라는 것들로만 채우겠어.” 

그 후로 두 사람은 꽤 오래간 상념에 빠진 채 침묵하며 걸었다. 난경은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갈 집에 대해 생각했다. 교연도 잠시간은 난경과 살 집을 떠올렸으나,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정말로 난경이 나와 함께 여생을 보낼 수 있을까? 교연은 혼례복을 입고서 절하는 자신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 곁의 상대는 난경이 될 수 없었다. 난경을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그 인물은 난경이 아니어야만 했다. 지금은 유년이라는 허울을 쓴 치기 어린 감정이라 치부할 수 있어도, 후에는 제 목을 조를 칼이 되어 돌아올 터였다. 

마음이 눈에 비친다면 가차 없이 베었을 것이다. 다만 보이지 않아 어디로 뻗어가는지 그저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작금에서야 겨우 더듬어 본다. 이는 평생 허락되지 않을 연정이다. 태생부터 정해진 운명이 유일하게 허락된 연정마저도 빼앗아 가니, 이 모든 게 하늘의 장난처럼 느껴졌다. 난경의 목에 둘렀던 교연의 팔이 힘 없이 풀어졌다. 목이 쉬어 목소리가 갈라졌다. 

“경아, 내려 줘. 여기서부턴 걸어갈게. 누가 보면⋯⋯.”

 * * *

“일 배拜, 천지신명에 절.”

“이 배, 부모님께 절.”

“삼 배, 부부 맞절.”

세 번의 절을 올리고서 교연은 얇은 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신랑을 마주 봤다. 붉은 비단 너머로 비친 낯은 교연의 부친이 맺어주려던 연주의 한량도, 해은도, 난경도 아닌 여원의 얼굴이다. 교연은 이 순간이 꿈이 아닐까 하는 터무늬없는 두려움에 제 엄지의 손끝으로 검지에 작게 홈을 내어본다. 살갗이 따끔거리는 감각이 손가락을 타고 전신에 번졌다. 교연은 그제서야 연못에서의 만남 하나로 변해버린 제 운명을 실감했다. 기뻤으나 동시에 두려웠다. 약지에 쌍가락지를 낀 창백한 손이 잘게 떨려왔다.

“두렵느냐?”

합환주 잔을 비운 여원이 교연에게 넌지시 물어왔다. 오직 교연에게만 들릴 크기의 목소리였다. 마침 집례執禮는 흘기를 훑느라 정신이 없었고 두 사람 곁의 시종들은 교연의 잔을 채우던 참이었다. 본래 신랑과 신부는 신방에 들어갈 때까지 말을 섞지 않는 것이 법도이나, 대관식처럼 큰 행사가 아닌 데다 손을 떨 정도로 긴장한 교연이 안쓰러웠던 여원이 조용히 말을 붙였다. 교연은 어쩔 줄 모르고 고개를 든 채 여원을 바라봤다.

그 적잖이 안쓰러운 얼굴에 여원이 웃음을 터트렸다. 힘이 풀려 멋쩍게 허공을 부유하는 교연의 손을 여윈이 부드럽게 감싸왔다. 얇은 비단이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으나 그들은 서로를 선명히 응시했다.

“두려워할 것 없다.”

“⋯⋯”

“이곳의 어떤 이도 너를 해할 수 없을 것이다.”

“⋯⋯예.”

"너는 본왕의 측비이니.”

난경의 연모한다는 말보다 그의 사람이라는 여원의 말이 더 듣기 좋았다. 교연은 그 누구에게서도 받을 수 없었던 안온함을 여원에게서 찾았다. 그가 주는 보호와 소속감은 마땅히 여생을 바쳐 얻을만한 것이었다. 교연은 그중에서도 그의 총애가 가장 탐이 났다. 

여원에게 마음이 없었다면 제 목숨 하나 간수하기 어려운 이 황궁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난경과 함께 청하로 도망쳤을 것이다. 여원이 적장녀를 두고 신분이 미천한 자신을 골랐으니 그도 자신을 연모하는 마음이 없지 않을 거라 여겼을진대. 

어째서였나. 교연은 그의 마음이 제게 있다 착각했다. 그것도 아주 오랜 세월을.

* * *

경해은이 죽었다.

설영에게는 그를 알았던 세월이 그를 모른 세월보다 길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가 없는 시간을 살아가야만 했다. 설영은 해은이 없는 삶이 해은을 알았던 삶보다 커지는 게 두려웠다. 제 곁에서 해은의 흔적들을 지워나가는 모든 것이 싫었다. 설령 그게 시간이라 할 지라도. 

설영은 처음으로 생의 덧없음을 실감했다. 

* * *

“기어이 나를 이곳에 들이는구나⋯⋯.” 

밭은 숨에 말 마디가 흩어진다. 태자궁을 들어설 때부터 청하에 묻어둔 세 글자가 자꾸만 목을 조여왔다. 상처 없이 흉터만 남은 목 부근이 아려서 설영은 자꾸만 손을 뻗어 그 위를 쓸었다. 마마, 무어라 말씀하셨는지요? 태자궁을 안내하라는 명을 받고 설영을 이끌던 태감이 설영의 중얼거림에 되물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태감께서 길을 안내해주시지요. 창백한 낯의 설영이 달처럼 미소지었다. 태감은 그 미소에 설영이 망자를 떠올렸음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태자궁의 옛 주인을 기억하는 두 사람이 나란히 길을 걸었다.

“이곳이 태자궁이고, 이곳이 전하께서 사무를 보시는 곳입니다. 서재인 곳이지요. 마마의 침전은⋯.”

“서재의 남南 편이지요?”

“맞습니다. 마마께서 일전에 태자 궁에 오신 적이 있으십니까?”

훤히 지리를 꾀는 듯한 설영을 신기하게 여긴 태감이 물었으나, 이내 곧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았는지 머리를 조아렸다. 마마, 송구하옵니다. 소신이 분수를 모르고 입을 함부로 놀렸습니다.

 

“모두 지난 일이지요. 고 공공께서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오히려 그분의 이름이 금기시되는 게 싫습니다.”

“마마의 관용에 감사드립니다.”

“함안 태자의 생일연에 참석할 적에 길을 잃고 전하의 서재까지 걸음 한 적이 있습니다. 함안 태자께서 소녀를 다시 연회장에 모셔다 주셨어요. 그 일 덕분에 이 근방의 지리는 기억하고 있답니다.”

“한 번 본 길을 외우시다니, 역시 마마께서는 총명하십니다.”

따듯한 봄기운이 설영의 볼을 간지럽히는데도 설영은 바람 닿는 모든 곳이 아리기만 했다. 낙양의 바람을 맞을 때면 살갗으로 해은의 흐름을 느꼈다. 아플수록 그를 되새길 수 있으니 설영은 오히려 그편이 낫게 느껴졌다. 

“어찌 모르겠습니까. 나보다 이곳을 잘 아는 이가 있을까요⋯⋯.”

열다섯, 설영은 처음 낙양 땅을 밟았던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청하에서 관례를 치른 후 처음으로 맞는 황궁의 행사였다. 해은의 생일연 후 2년 뒤 혼례식과 동시에 이루어질 책봉식을 위해 황궁에서 머물며 규율을 익히도록 했다. 태자와 사이가 각별한 것을 염두에 둔 건평제가 긴히 신경을 써두었다. 어엿한 태자가 된 왕야가 사사로이 수도를 떠날 수 없으니, 설영을 낙양으로 불러들이기로 한 것이다. 비씨 마마를 궁에 들이라는 명령에 누구보다 기뻐할 줄 알았던 해은의 고운 낯에는 외려 그늘이 져 있었다. 마음을 쓰고도 기뻐하지 않은 것을 의아하게 여긴 건평제가 태자를 들여 하문하니, 앞으로 평생을 궁에서 머물 이가 저로 인해 이른 나이에 청하를 떠나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다고 답했다. 그에 건평제는 그 아이의 행복은 이미 네게 달려있지 않느냐고 되물었고, 해은은 하여 설영을 기쁘게 할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설영이 입궁하던 날 받은 태자궁의 도면이었다. 

지도나 설계도를 그리는 일에 능한 해은이 붓을 들어 화지에 먹을 물들일 때면 설영은 하던 것을 멈추고 해은의 곁으로 달려와 그 곁을 지켰다. 제 몸이 등불을 가리는 줄도 모르고 고개를 기웃거리면 해은이 편히 앉으라며 자리를 내주었다. 설영은 해은의 붓 자국이 남은 모든 것을 아꼈다. 해은의 수정을 거쳐 완성된 그네 도면은 설영의 가장 큰 보물이었다. 물욕이 없기로 유명한 도언 낭자가 베개 맡 자개장에 꼭꼭 숨겨둔 것들은 모두 해은이 그려준 그림이나 도면 몇 점들이었다. 춘추春秋를 유독 어려워하던 설영을 위해 주석을 달아 친히 건네주었을 때 설영은 해은인 것마냥 날마다 그 서책을 닳도록 펼쳐 보았다. 손끝으로 해은의 아정한 필체를 훑어내리다 제 모습을 상상하곤 볼이 달아올라 도언당 바깥으로 뛰쳐나간 것은 설영만이 평생 묻어둘 비밀이었다. 

설영이 태자궁에 들기로 한 날, 해은은 외국의 사신들을 접대하는 일로 태자궁까지 올 수 없었다. 이를 염려한 해은이 직접 붓을 들어 태자궁의 도면을 그렸다. 태자궁은 자신의 처소이자 앞으로 설영이 살아갈 곳이니 꼭 제가 먼저 소개해주고 싶었던 해은의 마음이었다. 어려서부터 먹고 수학하고 잠든 곳이니 눈 감고도 훤히 지도를 그릴 수 있었지만, 이곳은 초면인 설영이 볼 것이니 지도 외에 다른 것들도 적혀있으면 좋을 듯싶었다. 이를테면 월담하는 가장 쉬운 길이라던가, 서재와 통하는 개구멍의 위치라던가, 몰래 그네를 달면 좋겠다 생각했던 곳처럼 해은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들을. 낮에는 정무로 바쁜 태자는 산보를 핑계로 밤마다 태자궁 곳곳을 걸으며 지도 위에 곳곳을 덧그렸고 그 밑에는 구어체로 자신이 설영에게 이르듯 주석을 달았다. 해은은 설영을 여생을 함께 할 반려로 여겼기에, 해은이 유달리 설영을 아꼈기에 만들어진 애정의 총체였다. 

낙양의 성문을 통과하고 친척 집으로 향하는 길에 익숙한 낯이 설영에게 그 지도를 건넸다. 해은은 출궁할 수 없으니 청하로 향할 때마다 함께했던 호위가 설영이 낙양에 당도할 때를 맞추어 찾아왔다. 설영은 그 지도를 보는 내내 춘기 어린 낯으로 환하게 웃었다. 지도와 함께 적힌 서신을 애정 어린 눈으로 훑던 설영이 눈물을 툭 떨궜다.

“정무로도 충분히 바빴을 텐데, 나랑 한 약조 하나 지키겠다고.”

 서신을 읽고 있는 네 표정이 어떨지 모르겠구나. 상상하는 게 두려울 정도야. 그래도 데리러 가겠다는 약조는 반쯤이나마 지켰으니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주겠느냐? 못 다 지킨 약조는 네 소원 하나를 들어주는 것으로 대신하고 싶구나. 어떤 청이든 들어줄 테니 미리 생각해보거라. 연회 전날 너를 찾아가마. 네 모습이 그립다.  

“설아, 어찌 울어? 무슨 일이 있는 게야?”

“아니에요. 간만에 서신을 받었더니 너무 기뻐서요.”

“너도 참. 별일 아니라니 되었다. 그래도 울음은 어서 그치고.”

“예, 그리 할게요.”

빠르게 눈물을 닦아낸 설영이 환히 웃어 보였다. 바람 잘 날 없는 수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미소였다. 설영은 서신을 곱게 접어 소매 아래 깊숙이 집어넣었다. 

 다음번에는 내가 너를 직접 데리러 오마. 너 홀로 그 광활한 곳을 걸음할 일이 없도록.

설영의 관례 전, 청하를 떠나며 해은이 했던 말이 그대로 서신의 끝에 적혀 있었다. 그 날도 일이 생겨 어쩔 수 없이 설영의 관례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낙양으로 급히 돌아가는 길이었다. 시전에서 돌아온 설영의 두 손에는 해은에게 줄 계화떡이 들려 있었다. 그러다 마당에서 마주친 소영에게서 해은이 오늘 밤 이곳을 떠난다는 말을 듣고 손에 든 것을 던져 놓은 채 해은이 머무는 처소로 달렸다. 처소에 닿기도 전, 해은은 도언당 가장 큰 도화 나무 아래에 서서 돌아올 설영을 기다렸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뚝뚝 눈물을 흘리는 설영에 해은이 어쩔 줄 모르고 설영을 바라봤다. 삐친 것은 달래봤어도 이리 슬프게도 우는 설영을 본 적조차 없었다. 그게 본인 때문이라는 걸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다. 해은이 단단한 팔로 여린 품을 끌어안고 연신 미안하단 말을 중얼거리며 설영을 쓰다듬었다. 고운 이마에 해은의 밭은 입술이 뭉개졌다. 

입맞춤을 끝으로 청하를 떠나던 해은의 뒷모습이 여즉 설영의 눈에 아른거렸다. 수년이 지난 지금도 이마에 온기가 남아 있는 듯 했다. 넋을 놓은 채 이마를 매만지던 설영이 낮은 음성에 불현듯 고개를 돌렸다. 

“설아.”

정무가 일찍 끝나 태자궁으로 향하던 여원과 설영이 마주쳤다. 설영을 맞이하려 부러 일찍 자리를 파하고 태자궁으로 바로 향했는지는 여원만이 알 일이었다. 태자 전하, 하며 태감과 설영의 시녀들이 여원에게 예를 취했다. 따라 고개를 조아려야 하는 것도 잊은 채 설영은 여원을 응시했다. 설영의 표정이 몽롱한 게 꼭 꿈에서 깬 듯한 얼굴이었다. 

“태자궁을 둘러보는 게지? 내가 안내해주마.”

더 이상 자신이 기억하던 태자궁의 주인은 세상에 없었다. 

* * *

안온한 삶을 바라는 것은 사람이라면 가져야 할 본능이다. 교연은 난경에게서, 설영에게서, 해은에게서, 낯설기만 한 청하에서 온기를 느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제 것이 되어 머무르지 못할 온기일 뿐이다. 교연은 제 것을 갖고 싶었다. 온전히 자신에게만 귀속될 수 있는 사랑을 원했다. 결핍을 채울 수 있는 버팀목을 바랐다. 유년의 부족함이 집착이 되었는지, 타고난 본성이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태자의 생모로 혜비에 봉해지던 그날도 교연은 한평생 단 하나만 바라던 그 사람 역시 제 것이 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영강 8년, 2황자 경여원이 새로운 동궁의 주인으로 봉해지며 그의 태자비를 내정하는 것이 궁궐의 화두가 되었다. 일찍이 병사한 정왕비에 예를 다하기 위해 2년이나 정비 자리를 비워둔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2황자를 지지하던 세력들은 그가 태자비로 새 인물을 들일 것을 짐작해두었다. 그가 정해둔 인물이 죽은 태자의 정혼자라는 것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지만. 그의 아비되는 황제조차도 고려하지 않았던 감정이었다. 모든 게 연정 때문이었다.

교연은 설영과 같은 지아비를 모셔야 한다는 현실이 꼭 해은을 죽인 죗값을 제게 치르게 하는 것 같다고 여겼다. 태자비 책봉령이 내려진 후로 지금까지, 교연은 단 한 번도 설영을 사사로이 찾은 적 없었다. 설영 역시 얄궂은 운명을 탓했으나 교연의 입장에서는 설영 자신이 굴러온 돌로 보일 것을 알았다. 해서 먼저 교연을 찾아가 제 어려움을 토로할 수도 없었다. 다만 설영은 교연이 자신을 조금 덜 미워하길, 언젠가 자신을 이해해주길 바라며 기다렸다. 

계절이 한 번 바뀌고 설영의 탄일을 맞은 날, 황궁에 문안을 드리고 돌아온 설영은 교연이 일찍부터 자신을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교연의 처소로 향했다. 마마, 제발 천천히 걸으세요. 그러다 넘어지신다니까요! 나무라는 시녀들의 목소리에도 설영은 거의 뜀박질하듯 걸음을 재촉했다. 걸친 옷은 황궁의 것이었으나 달려가는 뒷모습은 영락없는 청하 시절의 도언 낭자였다. 

초념당初念堂에 들어선 설영이 미리 마중을 나온 시녀의 안내에 따라 후원으로 향했다. 설영이 교연의 처소에 직접 온 건 손에 꼽는 일이다. 이리 내원 깊숙이 걸음한 것은 더더욱. 설영의 청랑전淸浪殿과는 달리 초념당初念堂은 주인을 닮아 온난하고 세련된 분위기로 꾸며졌다. 특히 교연이 좋아하는 자색이 곳곳에 쓰인 것을 보고 자신도 자색의 장신구를 선물하리라 다짐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부지런히 훑는 탓에 설영의 걸음이 도중에 멎어 설영을 안내하던 시녀가 난처한 눈으로 마마, 하고 고개를 조아리기도 했다. 

설영은 초념당에 올 때마다 정왕의 측비 시절 교연의 처소를 상상했다. 관례를 치르고 더 이상 청하에 올 수 없었던 교연이 어떤 가정을 꾸리고, 어떻게 자신의 공간을 꾸몄는지 한 때 자매 같았던 친우로서 궁금해할 수밖에 없었다. 저보다도 먼저 황궁의 일원이 되어 자리잡은 교연의 자취를 발견할 때마다 설영은 그간의 노고를 짐작했다. 교연이 살았을 삶을, 교연이 견뎌야 했을 시간을. 

가족이 아닌데도 가족처럼 그녀를 아꼈다. 그런 점에서 설영과 난경은 꽤나 닮아있었다. 입궁한 후로 난경과도 서신이 끊어진 것에 생각이 닿았다. 서원에서 제 몫을 긴히 해내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설영은 더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했다. 예를 들면, 서원에 친한 사형이 있는 지, 그곳의 식사는 입에 맞는지 따위의 시시콜콜한 안부가 알고 싶었다. 생일을 핑계로 교연을 만나면 이에 관해 물어볼까? 낙양에서 청하를 오가던 그 시절보다 태자궁에 함께 머무는 지금 둘의 관계가 더 소원함을 깨달았다. 난경과 교연, 그리고 설영 세 사람이 함께 뛰놀던 청하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돌아갈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함께 추억할 수 있는 사이가 되기를 설영은 바랐다. 내딛는 걸음 위로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들이 쌓여갔다.

설영은 교연이 청하에서 보냈던 시간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낙양에서의 차별 받던 나날들은 잘 알지 못했다. 서 양제가 머무는 초념당은 교연이 처음 정왕부에 들어서부터 꾸며두었던 측비 처소의 세 배는 족히 넘는다는 사실을 모른다. 넓은 정비 처소를 남겨둔 채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꿋꿋이 그 처소를 지키며 언젠가 그 자리를 꿈꿨다는 사실 역시도. 자색은 욕망이자 동시에 절제의 상징이다. 초념당 곳곳에 자리한 자색 장식들은 의식하지 못한 새 묻어나온 교연의 짙은 애환이었다. 

“태자비 마마께서 당도하셨나이다.”

“안으로 모시게.”

정원에서 가지치기를 하던 것인지 교연의 발밑으로 꽃잎이며 나뭇가지가 흩어져 있었다. 손에는 은으로 된 가위를 꼭 쥔 채였다. 한쪽에 붕대를 감고 있는 것이 날붙이를 다루다 주의가 흐트러진 모양이었다. 교연이 먼저 고개 숙여 예를 취했다.

“양제 완녕, 태자비께 인사드립니다.”

“인사는 되었으니 일어나세요. 어서요.”

“금일이 마마의 탄일인데 먼저 찾아뵙지 못하여 송구할 따름입니다.”

“일찍이 처소에 들렀다가 돌아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황명이 없었다면 완녕을 맞이할 수 있었을 텐데요. 문안을 들라는 명이 내려질 줄 몰랐습니다.” 

설영이 태자비에 봉해지고 처음 맞는 생일이었다. 이를 기껍게 여긴 건평제가 설영을 친히 궁으로 불러들여 축하의 말을 전했다. 미래의 황후가 될 이였으니 태자비 시절에도 귀히 여겨지는 게 마땅했다. 정3품인 양제와 무품의 태자비는 시작부터 걷는 길이 다르기 마련이다. 교연에게는 다음 생에서야 감히 꿈꿔볼 수 있는 자리였다. 태자비는 그런 자리였다. 교연은 지난 간 궁에서 맞았던 자신의 탄일을 상기했다. 

“금일은 마마의 탄일이지요. 경하드립니다.”

“완녕. 나는 완녕이 날 먼저 찾아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뻐요.”

설영이 예쁘게 웃었다. 환해서 눈이 부실 정도의 저 미소. 교연은 그 미소가 진심이라는 것쯤은 캐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교연이 고개를 비틀어 설영의 시선을 피했다. 혀 끝이 유독 썼다. 교연이 설영을 긴히 불러낸 것은 잔인한 물음을 하기 위해서였다. 

“마마.”

“네, 양제.”

“제가 마마를 피해 다녔다는 건 마마께서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동그랗게 눈을 뜬 설영의 낯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설영이 손을 휘둘러 주변의 사람을 물렸다. 조 상궁, 자네도 물러나게. 교연이 나직이 읊조렸다. 한때는 친우였던, 그러나 지금은 같은 지아비를 모시는 두 여인만이 서 있었다.

“마마께 묻고 싶어요.”

“⋯⋯”

“마마, 전하를 연모하시나요?”

“내궁에 있는 여인이라면 응당 그분을 아끼고 생각하는 것이 도리입니다. 양제.”

당황할 법한 물음에도 설영은 막힘 없이 답을 내놓았다. 질문한 이는 한참이나 말없이 설영이 아닌 연못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잠잠한 호수 같던 설영의 얼굴에 작은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완아. 네가 청하에 머물던 시절에도 청려호를 바라볼 때 이런 눈을 했었지. 그럴 때면 늘 네게 고민이 있었어. 이 궁에서 마음 둘 곳은 이제 너 하나뿐인데도 너는 내게 고민을 털어놓지 못하니.

“⋯어찌 그리 물어? 너는 나를 잘 알잖아. 나는⋯ 주어진 도리를 다하고 사명을 다할 거야. 태자비는 나의 꿈이기도 했고."

“설아, 그분을 연모하니?”

언젠가 난경이 제게 물었던 물음을 반복하는 것은, 청하에서 물었던 말을 작금에서야 되새기려는 것은 설영에게 말하고자 함이다. 네 정인은 경여원이 아닌 경해은이라고. 너는 그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동시에 설영의 마음에는 여원이 들어설 자리가 없음을 교연은 확인받고 싶었다. 둘 사이에는 망자의 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아로새기는 것이다. 교연은 어떻게든 설영에게서 제가 사랑해 마지않아 평생을 바칠 정인을 지켜야 했다. 수단이 매정하든 잔혹하든 가리지 않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설영은 답하지 못하고 망연히 연못을 바라봤다. 연못 아래에 유년이 묻힌 것은 교연만이 아니었다. 교연은 제 손으로 직접 연못 아래에 유년을 묻어두었지만, 설영은 단 한 번도 그리 되기를 바란 적 없었다. 청하에 살 적에는 언제고 그 유년을 꺼내 볼 수 있었지만 낙양에서의 삶은 그렇질 못했다. 황궁은 그리움마저도 죄가 될 수 있는 곳이었다.

“⋯백윤을?”

“⋯⋯”

“그것도 아니라면⋯ 화선을?”

“그 안에 네 답은 있겠지.”

교연이 습관처럼 짓던 미소를 지워냈다. 일말의 거짓도 없다는 듯 단호한 목소리였다. 

“난 그분을 사랑해. 네가 백윤을 연모했듯이.” 

“교아, 태자비는 내 뜻이 아니야. 황상께서는 태자지위太子之位를 공고히 하기 위해 단 가의 지지가 필요하셨던 거야. 그게 아니었다면, 백윤과의 혼약을 무를 필요도 없었겠지.”

“넌 화선을 연모하지 않는 거야?”

“난 미망인으로 살고 싶었어. 여생은 그분을 기리면서⋯⋯.”

습관처럼 목 위 자욱을 쓸어낸 설영이 슬프게 웃었다. 그제서야 설영은 자신의 위치를 다시금 깨달았다. 태자비는 본래 내게 속한 것이었지만 더 이상 그렇지 않다. 누군가에게는 빼앗은 자리가 될 수도 있구나. 네 눈에 나는 눈엣가시였겠구나. 

“교아. 그게 날 피하던 이유였어?”

“별 게 아니라는 듯 말하지 마. 난 너랑 달라. 너에게는 지겸 오라버니가 있고 단 가가 있지만⋯ 내겐 오직 전하뿐이야. 총애를 잃은 측실은 죽은 것과 다름없어.”

“고의가 아니었다고 해도 내가 어찌 너를 해하겠어. 어찌 그걸 지켜만 보고 있겠어.”

“그저⋯⋯ 확실히 해두고 싶었을 뿐이야.”

그분의 연심은 언제까지나 내 것임을. 

교연은 뒷말을 구태여 소리내어 말하지 않았다. 설영이 제 뜻을 충분히 알았으리라 짐작한 탓이다. 교연이 조심스레 설영의 손을 감싸쥐었다. 옥중에서의 만남 후로 처음 잡아보는 손이었다. 험한 일을 하지 않았음에도 붓만큼이나 활을 쥔 탓에 굳은살이 마디마다 박혀 있었다. 손 끝으로 패인 굳은살을 쓸어내리며 교연은 꺼낼 말을 골랐다. 설영은 이미 교연에게 굳은살 같은 존재였다. 제 일부라 떼어낼 수도 없고, 다만 아플 때마다 찾아오는 흔적 같은 것. 

“설아, 너는 태자비이기 전에 나의 벗이지?”

설영은 익숙한 온기에 낯섦을 느꼈으나 그 손을 빼낼 정도로 모질지 못했다. 설영에게 교연은 황궁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유일한 청하의 조각이었다.

“그럼. 나는 네 벗이지. 나는 네 친누이고 싶었어.”

“네게 미안하구나. 그간 나로 인해 서운하였지.”

“어찌 너를 탓하겠어. 네 신분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나는⋯. 내가 더 노력했어야 했어.”

손을 맞잡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음성은 청하 시절의 것과 다름없었다. 설영이 그토록 바라던 것처럼 격의를 내려놓고 대화했으나 교연은 아무런 감회도 느끼지 못했다. 교연은 설영의 청하를 닮은 미소를 볼 때마다 제 손으로 죽인 벗이, 연못에 묻어둔 정인이 떠올라 그저 괴로울 뿐이었다. 두 사람의 몸은 황궁에 있었으나 한 사람의 마음은 죽은 지 오래였다.

* * *

서국에서 대현으로 들여온 여러 가지 물건 중에는 서국의 전설을 담은 화첩이 있다. 그중 반은 사람이고 반은 물고기를 닮은 인어 종족의 설화를 교연은 꿈을 꿀 정도로 반복하여 읽었다. 교연은 목소리를 잃고서라도 뭍으로 나가고자 했던 인어가 자신과 참 닮았다고 여겼다. 동시에 인어를 두고 왕자와 혼인한 여인에게서는 설영을 떠올렸다. 

빳빳한 책장이 닳아 너덜해질 때까지 읽으며 교연은 자신의 유년을, 설영을 향해 사무치는 염오를 느꼈다. 설영의 탄일이 밝아오던 간밤 새벽, 목소리를 잃은 채 가라앉는 인어의 말로를 새겨읽으며 교연은 스스로 약조했다. 기어코 잠길 운명이라면, 홀로 물에 빠져들진 않을 것이다. 왕자를 빼앗은 그 여인 역시 자신과 같은 삶을 살도록 인어로 만들 생각이었다. 제가 앗아간 모든 빛을 똑같이 빼앗아줄 참이었다. 

 

설아. 우리가 얼마나 더 가라앉을 수 있을까. 

*

난주: 낙언의 고향. 북방 변경 접경지대. 

태자비 시절 설영 처소: 아란궁 > 청랑전 淸浪殿

양제 시절 교연 처소: 초념당 初念堂

궁宮 > 전殿 > 당堂 > 각閣(1층) 루樓(2층) > 정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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