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량무현] 폴짝폴짝이 부른 폴짝폴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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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2 by 양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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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많은 토끼가 있다. 작지만 몸의 10배나 큰 무기를 젓가락처럼 휘두르는 토끼도 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근육으로 이루어진 근돼토끼도 있고, 몸은 하마인데 얼굴은 아프로디테인 토끼도 있다.

박무현은 스스로를 평범한 토끼라고 생각했다. 누구보다 선한 마음을 가져 이 세상 어느 토끼보다 아름답고, 특별한 토끼면서 말이다.

사실 특별한 토끼와 평범한 토끼는 누가 정하는지 모르겠다. 세상 모든 토끼가 특별하고 평범하며, 아름다운데. 그저 특정 부분에서 특출날 뿐이다. 그것은 재능이기도 하고, 노력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펜을 든 것이 아니므로 대충 넘어가겠다.

박무현이 사는 곳은 심해-이름만 심해인 육지 한가운데 있는-마을이다. 작지만 예쁘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비명과 귀를 더럽히는 욕설이 들린 것 같은데… 착각이 아니고 제대로 들은 게 맞다.

심해 마을은 조금 유명하다. 봄의 신과 겨울의 신이 부부싸움을 하면 가장 먼저 크게 피해를 보는 곳이다. 꼭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나쁜 점을 이야기해야 한다.

때는 바야흐로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 토끼들이 분주히 움직이던 날이었다.

장만한 겨우살이를 수레에 실어 옮기던 박무현이 안쓰러웠는지, 마을에서 유명한 신해량이 다가왔다. 대신 집까지 밀어주겠다는 것을 박무현은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생명을 쥐어짜 힘을 내야 1mm 정도 밀렸기 때문이다. 이러다간 겨울이 지나야 집에 도착할 것 같았다.

수레는 신해량의 손이 닿기 무섭게 매끄럽게 움직였다. 박무현은 아주 조금 배신감을 느꼈다. 신해량이 아닌 수레에게.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얼마인데…!

어쨌거나 신해량의 도움으로 무사히 집에 도착한 박무현은 짐까지 집 안으로 날라준 총각을 그냥 보낼 수 없었다.

“이번에 말린 국화를 선물 받았는데… 한 잔 드릴까요?”

“감사합니다.”

신해량은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거실 소파에 앉았다. 좁은 거실이 신해량 하나 들어왔다고 가득 찼다. 박무현은 아늑하게 꾸며진 부엌에서 꼼지락꼼지락 움직여 따끈한 차 두 잔을 탔다. 향긋한 국화향에 심신이 편해졌다.

쏟지 않도록 조심조심 걸음을 옮기자, 신해량이 벌떡 일어나 박무현의 손에서 꽃무늬 쟁반을 가져갔다. 괜찮다는 말은 세탁기에게 닿지 않았다.

“향이 좋습니다. 겨울 동안 생각날 것 같습니다.”

“그러면 가실 때 챙겨드릴까요?”

“아닙니다. 마시고 싶다면 선생님께 찾아오겠습니다.”

“겨울에는 밖을 돌아다니면 안 되잖아요. 심장이 멎을 수도 있고 눈에 깔릴 수도 있어요. 아무리 신해량 씨가 강한 토끼라고 해도 겨울을 만만하게 보시면 안 돼요.”

서지혁이 봤다면 이마를 치며 ‘아이고!’ 곡소리를 냈을 상황이었다. 겨울에도 박무현이 생각나 보고 싶을 거란 말을, 위험한 겨울을 뚫고 찾아오겠다는 말을 이렇게 받아들인다니. 박무현은 이런 쪽으로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이런 일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신해량은 박무현에게 몇 번이나 제 마음을 돌려서 전달했다. 창과 방패의 싸움처럼 박무현은 매번 알아듣지 못했다. 보다 못한 서지혁이 담배 대신 민들레를 질겅질겅 씹으며 ‘그냥 솔직하게 고백하라니까요!’라고 외치며 도와주겠다고 나선 적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때가 하필 만우절이었고…… 결과는 뻔했다.

신해량은 이번에도 닿지 않은 사랑이 화살을 무심한 눈으로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고백보다 당장의 박무현이 짓는 미소가 더 중요했다.

신해량의 겨울나기에 도움 된다는 사실이 기쁜지 박무현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만 기다려달라며 폴짝폴짝 부엌으로 향했다. 봄이 오려면 한 계절 남았건만 신해량의 마음엔 이미 봄이 찾아왔다.

말린 국화꽃이 부서지지 않도록 조심히 예쁜 유리병에 옮겨 담고 혹시 몰라 보관해 둔 끈을 찾아 병 입구에 묶었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간질간질한 사랑의 분홍색 리본이 탐스럽게 맺혔다.

병을 소중히 안은 박무현은 신나는 걸음으로 거실로 향했다. 신해량이 심각한 얼굴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왜 그러지? 밖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머리에 물음표를 띄운 박무현은 테이블에 병을 내려놓고 창가로 향했다. 창밖을 본 박무현은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국화꽃을 옮겨 담는 데 걸린 시간은 10분도 안 된다. 그 짧은 시간에 눈이 마을을 덮었다.

“이, 이게…….”

“두 신이 부부싸움을 한 것 같군요.”

조금만 참았다가 겨울이 되면 부부싸움을 하지 왜 가을 끝 무렵에 싸운 걸까.

박무현이 곤란할 건 딱히 없었다. 곤란한 토끼는 신해량이었다. 그도 분명 가족과 겨울을 날 텐데 꼼짝없이 30대 후반의 아저씨와 좁은 집에 갇혔으니.

미안함에 축 처진 눈으로 힐끗 신해량의 얼굴을 살폈다. 곤란함의 ㄱ도 찾아볼 수 없는 들뜬 얼굴이었다.

“이번 겨울은 선생님과 함께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어… 그러게요. 해량 씨는 괜찮으신가요?”

“네. 선생님께선 괜찮으십니까?”

“그러고 보니 식량이 조금 부족할 것 같아요. ㅁ몰라서 작년보다 더 준비하긴 했지만 둘이 보내기엔 부족할 것 같은데 어떡하죠?”

제가 조금 덜 먹을게요. 해량 씨 식량은 제가 책임질게요!, 라는 말을 굳이 하지 않아도 들리는 눈에 신해량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렇게 많이 먹지 않습니다.”

거짓말. 내가 전에 서지혁이랑 옥수수로 10층 옥수수탑 쌓는 거 봤는데. 진실만 말하는 박무현에 눈빛에도 신해량은 아랑곳하지 않고 뻔뻔하게 이번 겨울은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선언했다.

연장자로서 한참 어린 토끼에게 짐이 될 수 없었다. 박무현은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이번 겨울은 덜 먹고 덜 입더라도 신해량만큼은 풍족하게 겨울을 보낼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것이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정점을 찍은 토끼를 지키는 방법이자 연장자의 의무였다. 적어도 박무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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