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직이어도 탈출하고 싶어! 두근두근 해저기지 방탈출
i want it that way...가 아니라 무현쌤 중심 어바등 엔가팀 ncp 두근두근 방탈출 개그물
해저기지 탈출 1주기 기념 방탈출 카페 모임.
그렇다. 이 생전 처음보는 단어 조합이 오늘 오랜만에 그리운 얼굴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된 이유였다.
끔찍한 재난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계속해서 연락을 이어가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일이다. 어째선지 다들 기억하는 탈출 상황이 제각각 이긴 해도 그게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구해낸 목숨과 이어진 유대감!!
…과 편리한 문명의 이기, 단체톡방이다.
한동안 잠잠하던 단톡방이 다시 복작복작해진 계기는 사소했다. 그저 무현쌤이 지나가다 흘린 치과 휴무 소식, 같은 건물에 대규모 방탈출 카페가 개장 예정이라 리모델링 공사로 인해 당분간 휴가를 내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을 뿐인데…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첫 타임으로 방탈출 카페의 예약이 잡혀버렸다? 마침 개장일이 해저기지 탈출 1주기 기념일이라고? 그러니까 기념으로 다 같이 방탈출을 하자고?
솔직한 심정으로는 누가 돈을 준다 해도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인데, 왜 비싼 돈을 내가며 자발적으로 본인을 감금하고 그걸 탈출하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전혀 되지 않았지만… 여전히 해양생물을 연구하고 있는 가련한 연구원의 불도저 같은 추진력으로 이미 예약까지 완료된 상황이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지, 그래! 사실 해저기지를 함께 탈출한 전 직장동료… 외에는 공통점이 전무한 성인 남녀 여럿이 모여서 할만한 일은 한정되어 있다. 차라리 이런 협동적인 오락거리를 즐기는 게 모두에게 즐거운 추억이 될 것이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역시 방탈출 같은 이상한 것보단 모두에게 스케일링이라도 해주는 편이 기쁠 치과의사 선생님은 어른스럽게 그런 기색을 티 내지 않고 꾹 참았다.
“오! 오랜만이에요 선생님.”
“아, 지혁씨! 오랜만이네요. 애영씨도 잘 지내셨나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음… 단톡방 확인하셨나요? 금이씨는 갑작스런 교수호출로 불참이래요.”
“아…”
이번에 구운 소금빵이 진짜 맛있게 구워졌다고 모두에게 맛보여주겠다며 며칠 전부터 들떠있던 유금이씨를 위해 잠시 묵념했다. …그런데 방탈출은 유금이씨가 예약한 건데 그럼 일정은 취소인가? 그렇다면 역시 일단 치과로 일행들을 데려가야 할까? 고민하고 있자 서지혁이 전혀 아쉽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런, 아쉽게 됐네. 그래도 기왕 예약한 거니까 우리끼리라도 가죠? 근데 지현이는 언제 온대?”
“멍청아. 지현언니는 저녁에나 합류할 수 있다고 했었잖아.”
“아아, 맞다. 그랬었지. 그러면 뭐, 저녁때까지 대충 시간이나 때워야겠네. 누구 더 올 사람 있나?”
“저기 오고 있네.”
백애영의 고갯짓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실루엣만으로도 누군지 알 것 같은 문짝만한 미남과 빨간 머리통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보고싶었어요, 무현씨.”
설렁설렁 고개를 까딱이며 서로 인사하는 (구)엔지니어 가팀을 바라보며 치과 의사쌤은 생각했다. 유금이씨가 너무 보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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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오늘 하루가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라는 강력한 예감이 드는 '해저기지 탈출 1주기 기념 방탈출 카페 모임' 이하 '어라? 이거 5회차였나? 모임'은 입장부터 난관을 맞이했다.
“손님,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측 실수로 예약이 중복으로 잡혀버려서 먼저 도착한 팀이 방금 입장하셨는데… 혹시 괜찮으시다면 남아있는 다른 탈출 시나리오로 안내해 드려도 될까요? 아니면 전액 환불을…”
“흐음? 어떻게 할까요?”
“저는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요.”
“선생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시죠.”
최연장자에게 선택권을 몰아주는 유교 질서에 감동을, 받지는 않았고 환불 쪽으로 마음이 무척 기울었지만. 이… 멤버들을 데리고 달리 갈만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뭐, 고작 방 하나를 나가는 건데 별일 없겠지…
………라고 안일하게 생각하자마자, 직원이 나눠준 팜플렛에 두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글씨가 쓰여있었다.
딥블루 방탈출 ep.3 [심해탈출]
“그럼 안내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해저 4천 미터에 위치한 심해기지에서 90분 내로 탈출하셔야 합니다.”
“……”
환불받을걸. 역시 그냥 전부 치과로 납치해서 유니트 체어에 한 명씩 앉혀둘걸. 격렬하게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탈출정은 떠나버렸다. 계속 지루한 표정으로 삐딱하게 서 있다가 뒤늦게 소리죽여 웃으며 바들바들 떨고 있는 누구씨의 등짝을 시원하게 때려주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아냈다. ‘아아, 역시 구원자님과 함께 있으면 지루할 틈이 없어서 좋네요.' 같은 헛소리를 한 귀로 듣고 넘기며 일행들의 반응을 살폈다.
“크~ 기가 막히네요. 경력직들만 모여있으니 이미 탈출은 확정인데?”
“선생님은 괜찮으십니까?”
“네, 조금 황당한 것 말고는 괜찮습니다.”
“…불편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어이가 없어서 얼빠진 표정근육이 조금 뻣뻣해진 것 빼고는 완벽하게 괜찮은 상태다. 그야 이건 고작 지상에 위치한 방 하나를 직원이 잠가두고 시간 안에 자물쇠를 해제해 나오기만 하면 되는 놀이니까. 직원이 상시 모니터링도 하는. 완벽하게 안전한.
“무서우시면 저랑 손잡고 들어갈까요?”
“됐습니다.”
불쑥 내밀어진 손을 아프지 않게 찰싹! 밀어내고 직원의 설명을 마저 경청했다. 우리가 대체 왜 해저기지에 갇히게 되었는지, 이 탈출 시나리오의 배경 설정을 이래저래 설명하는 듯했지만 별 관심이 없어서 흘려듣는, 잠깐. …방금 들어선 안 되는 단어를 들은 것 같았는데?
“저희 매장은 다른 방탈출 카페와는 차별화된 특수한 룰이 존재하는데요. 여러분에게 각각 숨겨진 역할이 하나씩 주어지게 됩니다. 다들 마피아 게임 해보셨나요?”
“네~”
“총 다섯 분이므로 사설탐정, 엔지니어 팀장, 팀원 둘, 그리고 팀원으로 위장한 사이비 테러범 역할을 무작위로 배정받게 됩니다.”
“?”
“방에서 단서를 찾으시고 탈출에 성공하신다면 추가로 10분의 토론 시간이 주어지는데요. 그때 범인을, 이 시나리오에서는 그러니까, 사이비 테러범 역할을 맡은 사람이 누구인지 투표해 주시면 됩니다!”
"……”
모두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한곳으로 돌아갔다. 김재희는 생글생글 웃으며 직원이 나눠주는 역할 카드를 받아들고 있었다.
“사장님, 지금 바로 투표해도 될까요?”
“네? 아직 역할이 다 배정되지 않았으니 탈출 후에 투표해 주세요.”
서지혁이 곧장 거수하며 추리를 시작하기도 전에 끝내버리려 했지만, 안내 사항을 읊어주느라 바쁜 직원에게 바로 묵살당했다.
에이, 설마 김재희가 여기서까지 사이비 역할을 맡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20퍼센트의 확률인데? 사이비가 아니기엔 너무 높은 확률이지 않나?
근거 있는 편견으로 누군가를 잠시 바라보다가, 각자 배부된 카드를 확인했다. 나도 괜히 주위를 한번 살펴본 후 카드를 손으로 가리고 슬쩍 확인했다. 제발 사이비만 아니게 해주세요. 제발.
[사설탐정]
당신은 익명 의뢰인의 의뢰를 받아 해저기지로 온 지 3일 만에 물이 새는 해저기지에 갇히고만 불운한 탐정입니다. 수상쩍게 일행들을 방해하는 범인을 색출하고 해저기지도 탈출하십시오.
(히든능력: 패드의 기록이 날아가지 않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니 죄다 포커페이스라 누가 무슨 역할을 받았는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신해량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한결같은 표정이고 백애영은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서지혁은 미간을 조금 찌푸린 채였고 김재희는 샐샐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역시 재희가 범인인가?
“자, 역할을 확인하셨으면 제게 카드를 반납해 주시고 이 안대를 착용해 주세요. 안대를 쓰셨으면 모두 앞 사람의 어깨를 잡고 천천히 이동하겠습니다.”
안대를 착용하고 시야가 제한되자 갑작스레 긴장감이 밀려들었다. 후우, 침착하게 천천히 호흡하며 생각을 가라앉히자. 여긴 바다가 아니다. 내륙에 위치한 건물안이다. 바로 아래아래층엔 내가 일하는 치과가 있고 햇볕이 잘드는 커다란 통창 아래에는 노을이,그악!
“으악! 뭐, 뭐하시는거에요 지혁씨?”
“치과 선생님 어깨가 많이 뭉치셨네요. 아주 돌덩인데요?”
진짜 돌덩이같은건 네 손바닥이다! 무자비하게 쥐어짜이고 있는 내 어깨는 그에 비하면 찌개용 두부고!
“전방에 턱이 있어 위험하니 장난은 그만하시고 천천히 걸어와주세요.”
“넵.”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어깨가 잘 붙어있는지 손을 뻗어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앞사람의 어깨에서 손을 뗄 수 없었기에 그저 힘없이 발을 놀렸다. 아프다, 진짜 아프다, 아직도 찌릿찌릿한 것 같다, 같은 일차원적인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저릿한 어깨를 슬슬 쓰다듬는 병주고 약주는 손의 주인을 안대 속에서 힘껏 째려보았다.
“어때요? 좀 시원해지셨죠? 원래는 안마쿠폰이 있어야 받을 수 있는건데, 선생님께는 신세진게 있으니 특별 서비스입니다.”
“정말 고오맙습니다.”
이번에는 적당한 세기로 주물러오는 손길을 받고 있으려니 긴장이 흐물흐물 풀어졌다. 진짜 어깨가 많이 뭉쳐있었나, 무척 시원했다. 안마쿠폰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물어볼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면 안대를 벗고 시작하시면 된다는 마지막 안내를 받고 안대를 벗자 10평쯤 되어 보이는 방이 눈에 들어왔다. 모든 가구들이 바닥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게 꽤나 본격적으로 인테리어를 한 티가 났다.
“무현씨 저기 보세요.”
김재희가 가리킨 방향을 보니 거대 오징어와 눈이 마주쳤다. 여기 심해기지는 24시간 사방으로 불빛을 번쩍이고 있는 컨셉인가? 별로 감상할 만한 풍경도 아닌데 전기를 절약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오징어와 김재희를 번갈아 쳐다보며 의문을 표하자,
“흐음 이번에는 놀라지 않으시네요. 역시 가짜라 그런가?”
“……놀지 말고 탈출 단서나 찾아보세요.”
내가 단백질조차도 없는 저 영상 속 오징어에게 소원이라도 빌길 바라는 건가? 안타깝지만 나는 낭만 따위 없는 이과라서 아주 차가운 이성을 지니고 있다. 완전 냉정하고 아주 단단하지.
시키는 대로 설렁설렁 고개를 기울이며 무언가를 찾는 시늉을 하는 김재희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신해량과의 공감대가 형성됐다. 팀장이라는 자리는 정말 힘들겠구나.
주변을 돌아다니며 작은 상자를 하나 발견했다. 윗면에 쓰인 간단한 화학식으로 이루어진 문제를 풀고 잠긴 상자를 열어보니 귀여운 고래 조각상이 들어있었다. 찾은 것을 공유하기 위해 근처에 있던 서지혁과 백애영에게 다가갔다. 둘은 잠깐 옥신각신하더니 갑자기 서지혁이 깍지를 끼고 자세를 잡았다.
“두 분은 뭐 발견하신 게 있나요?”
“아, 선생님 마침 잘 오셨어요. 저 위에 딱 한 사람쯤 들어갈 만한 덕트가 보여서 확인해 보려고요.”
“네? 저 위에 나 있는 구멍이요? 지혁씨보다 머리 하나는 높은 것 같은데 어떻게 확인하죠?”
“너무 좁아서 저랑 팀장님은 못 들어가겠고 애용이가 확인하기로 했어요.”
의자들은 죄다 고정되어 있어서 사용할 수 없지만 목마를 태우면 높이가 닿겠구나. 내부가 컴컴한 게 생각보다 깊어 보이는데 손이 닿는 범위보다 깊은 곳에 무언가 있으면 어떡하지?
그때 갑자기 백애영이 서지혁의 손을 밟고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어어?”
“애용애용 어때? 뭐 좀 찾았어?”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웬 열쇠랑 종이 하나 찾았어.”
“역시! 뭐가 있을 줄 알았다니까!”
“어어…”
이건 이렇게 푸는 기믹이 아닌 것 같은데… 당황스러운 표정을 수습하기도 전에 전리품을 야무지게 챙긴 백애영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착지했다.
“선생님은 그 고래를 찾으신 건가요?”
“아, 네.”
“여기 종이에 고래가 그려져 있는 걸 보니 이게 단서가 되겠네요.”
얼떨결에 종이를 넘겨받고 고민하다가 문득 서지혁을 돌아보니, '저는 몸 쓰는 일을 더 선호해서요.'라며 백애영과 사이좋게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설마 계속 문제를 찾아내기만 할 예정인가?
종이가 가리키는 위치로 이동하니 조각상을 꽂으면 딱 들어맞을 듯한 홈이 보였다. 문제풀이상 고래에 해당 되는 위치에 조각상을 끼워 넣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 다른 퍼즐 조각과 힌트를 놓친 것 같았다.
그때 불쑥 튀어나온 손이 여우 모양의 조각상을 빈자리에 딸깍 끼워 넣었다. 그러자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정면에 위치한 책상이 옆으로 밀려나고 작은 비밀공간이 드러났다. 그곳을 확인해 보려는데 앞에 선 사람이 거치적거려서 확인할 수가 없었다.
“재희씨, 조금만 옆으로 비켜주세요.”
“제가 여우 조각상을 찾아왔어요.”
“네… 그렇군요?”
“…….”
“어… 잘하셨습니다?”
그제서야 김재희는 시위하듯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서 옆으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래… 처음엔 영 의욕이 없어 보이더니 조용히 방탈출을 즐기고 있었구나. 기왕 하게 된 거 적극적으로 즐겁게 참가하면 좋지. 충분히 칭찬할 만한 일인 것 같다.
재희가 비켜선 공간으로 머리를 들이미니 어두운 공간 너머 희미한 글씨가 보였다. 야광도료로 칠해진 듯했다. 머리를 더 가까이 들이밀어 조명을 차단하고 간신히 읽을만한 수준으로 선명해진 글씨를 확인했다. 김재희도 호기심이 들었는지 내 옆으로 고개를 기웃댔다.
흐릿한 글씨를 노려보며 패드 메모장에 옮겨적느라 손만 분주하게 움직이는 와중에 뜬금없이 재희가 귓가에 속삭였다.
“무현씨한테만 말씀드리는 건데요, 저는 사설탐정이에요.”
삐끗— 필기하던 터치펜이 패드 화면 밖으로 튀어 나갔다.
이, 이… 거짓말쟁이! 무슨 전생에 양치기 소년이라도 됐나? 어쩜 이리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을? 역시 김재희가 사이비 테러범 역할이구나! 어떻게 가상의 역할 배정에서조차 사이비가 될 수 있어!!! 어떻게 하면 재희가 사이비와 상종하지 않는 삶을 살지? 역시 사이비들을 한데 모아 몽땅 심해 저 깊숙이 메워야!
저도 모르게 심각해진 표정으로 김재희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고 있었는데, 내 무언의 비난이 섞인 시선에 김재희는 눈썹을 한번 꿈틀하더니 그대로 바닥에 엎어져 숨도 못 쉬고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하하하하, 아 배가 너무 아파요. 살려주세요 무현씨. 흑흑.”
“왜… 방금의 대화에서 뭐가 그렇게 웃긴 거죠?”
“그야, 무현씨의 투명한 반응이… 아아, 예상한 그대론데 실제로 보니까 너무 웃겨요.”
한참을 끅끅거리다 겨우 진정한 김재희가 바닥에 풀썩 늘어졌다.
“죄송해요, 농담이었어요. 무현씨가 탐정이죠?”
“네?”
“왠지 그럴 것 같았어요. 처음부터 티가 나더라고요.”
그러니까 지금… 날 떠본 건가? 탐정인지 알아보려고? 대체 무얼 위해서?
“가뜩이나 재희씨가 가장 의심받고 있는 상황에 왜 그렇게 더 의심스럽게 구는 겁니까?”
“그야… 재밌으니까요?”
…말을 말자. 머리에 구멍 난 도파민 중독자와 말을 오래 섞을수록 나만 손해다. 이마를 짚은 손을 주르륵 훑어내리고 한숨과 함께 받아들였다.
“하… 맞아요, 제가 탐정입니다. 그러니 재희씨는 당분간 저와 함께 다니도록 합시다.”
“지금 절 감시하는 건가요?”
“네.”
단호하게 사실을 긍정했다. 솔직히 치아 상태로 환자의 생활 습관 추리하기가 아닌 이런 류의 범인 맞추기는 영 자신이 없었지만, 일단 탐정 역할을 받았으니 범인으로 의심되는 용의자를 감시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흐음~ 좋네요. 앞으로도 쭉 제게서 눈을 떼지 말아주세요.”
……이건 사고를 치겠다는 선전포고인가? 방탈출은 처음이라 원래 이렇게 난이도가 높은건지 누구 덕분에 더 어려워진건지 모르겠다.
하… 일단 김재희의 손목을 잡고 끌고다니며 주변 사람들의 진행상황을 확인했다.
“아~ 이정도야 가뿐하지. 여기 캐비닛 암호 제가 풀었어요! 안에는… 엥? 사다리?”
“음… 아! 아까의 덕트. 이걸 밟고 올라갔다 오는게 아니었을까요?”
“에이, 그럼 필요없는거였네요. 쳇 기껏 풀었는데 시간낭비였다니.”
“아뇨. 정석대로라면 꼭 필요한 물건이었으니까요. 잘하셨습니다.”
“맞다. 이건 아까 발견한건데요. 일단 선생님께서 가지고 계시는게…”
삐— 삐— 삐—
그때 갑자기 조명이 붉게 변하며 스피커에선 듣기 거슬리는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서니 단단한 벽에 부딪혔다. 아 깜짝이야. 신해량이구나. 언제 온거지? 어느새 합류한 백애영까지 약간 긴장된 모습으로 주변을 경계하는데 곧, 각자 배부받은 패드에서 알림이 울렸다.
[이산화탄소 농도 경고!]
엔지니어들은 미니게임을 클리어해 기지 내의 산소 조절 장치를 고쳐주세요!
패드를 확인하자 다들 긴장이 풀렸는지 머쓱하게 물러섰다.
“범인은 탈출을 방해하기 위해 방해공작을 펼칠 수 있댔죠. 이게 그건가 보네요.”
“아 누구냐? 귀아프잖아.”
“일단 빨리 미니게임부터 처리합시다.”
나도 해야하나? 패드를 확인하려고 손을 뻗자 한쪽 손에 들려진 다른 손이 딸려왔다. 아차. 김재희를 끌고 다니고 있었지. 남은 손으로 한쪽 귀를 막고있던 재희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 한쪽 귀만 막으면 소용이 없지 않아? 그러자 김재희는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내 귀를 막았다.
“아니, 미니게임 하셔야죠.”
“아.”
혹시라도 누가 눈치챘을까 주변을 살폈으나 다들 미니게임에 열중하고 있는지 아무도 목격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내가 범인인것도 아닌데 왜 내가 더 초조한지 모르겠다.
슬쩍 재희의 패드 화면을 살펴보니 평범한 테트리스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었다. 엔지니어뿐만 아니라 모두가 참여하는건가? 하긴 엔지니어로 위장한 사이비니까 의심을 피하려면 모두가 게임에 참여해야겠구나.
내 패드를 확인하니 게임 화면이 아닌 진행 현황이 표기되어 있었다. 25% 벌써 누가 클리어했나 보다. 옆에 게임 시작하기 버튼도 있었지만, 진행도를 보니 역시 엔지니어만 카운팅 되는 것 같은데… 나도 해야 하나?
아무 의미 없이 패드의 빈 공간을 톡톡 두드리는 척하며 수상하게 구는 사람이 있는지 관찰했다. 눈을 옆으로 굴리자마자 신해량과 눈이 마주쳤다.
“어… 해량씨는 벌써 다 깨셨나요?”
“네.”
“평소에 이런 게임을 즐겨하시나요?”
“그건 아닙니다만, 몇 번 해본 경험은 있습니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함께 오락실에 가서 게임을 하는 신해량을 상상해 봤다. 내 상상력이 부족한 탓인지 영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오락실에 가는 길에 길거리 캐스팅을 받는 신해량이라던지, 삥뜯으려 시비 거는 불량 학생들과 1대3으로 싸워서 이기는 신해량은 잘만 상상되는데.
어느새 서지혁도 다 깼는지 말을 걸어왔다.
“선생님도 벌써 클리어하셨나요?”
“어……”
반사적으로 패드 화면을 확인했다. 75%
“네.”
“그렇군요. 생각보다 잘하시네요.”
“하하, 감사합니다.”
그렇군요의 앞 글자가 조금 길었는데 마치 그으으렇군요로 들렸는데 들킨 건가? 아니 그냥 탐정이라고 밝힐걸. 이제 와서 사실 저는 탐정이어서 게임을 안 했습니다, 라고 밝히면 너무 수상하겠지? 수상쩍은 사람을 찾으려 했는데 제일 수상하게 굴어버리고 말았다… 자괴감에 절로 숙여지는 고개를 애써 들어 올리는데, X발… 나지막한 비속어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니 백애영이 패드를 부술 기세로 콱콱 힘을 실어 두드리고 있었다.
“뭐야 백상아리, 왜 이렇게 못해? 너 사이비구나?”
“하…”
“다 들켰으니까 포기하고 빨리 경고음 좀 꺼줘라. 귀가 너무 아파용 애용애용애용.”
“네가 더 시끄러우니까 좀 닥쳐!”
그때 패드에서 띠링 하는 알림음이 울리더니, 거슬리던 경고음이 멈추고 붉게 점멸하던 조명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휴, 고맙습니다 사이비씨.”
“나 사이비 아니라고.”
“팀장님 앞에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겠어?”
“저 진짜 아니에요 팀장님.”
신해량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무슨 의미지? 팀원을 믿는다는 건가? 아무튼 긍정적인 반응과 함께 백애영은 역으로 서지혁을 의심했다.
“너야말로 제대로 찾은 게 없는데 네가 범인이지?”
“와 내가 얼마나 성실하게 조사했는데 이런 누명을? 선생님, 선생님이 말씀해주세요. 제가 얼마나 성실하게 참여했는지요.”
그건 그렇지. 서지혁은 계속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단서를 찾고 문제도 해결했다. 성실한 참여를 기준으로 의심한다면 제일 의심스러운 건…
무의식적으로 신해량을 돌아봤다. 김재희가 웃으며 저는 팀장님이 제일 수상한데요 라며 동조해 왔다. 아니 나는 그런 의도가…
“그러고 보니 팀장님, 계속 같은 자리에 가만히 서 계시던데. 거기서 뭐 하셨어요?”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
그게 끝? 뭘 기다리고 있었는데? 산소 조절 장치를 건드려 모두를 방해하기 위한 최적의 타이밍?
“좀 더 길게 설명해 주세요. 지금 의심받고 계시잖아요.”
내가 맡은 역할은 탐정이지 변호사가 아닌데 왜 자꾸 수상쩍게 구는 이들의 의심을 벗겨주기 위해 나서야 하는지 모르겠다. 범인으로 몰려도 상관없다는 거야? 자기변호를 좀 하라고!
“…정석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방을 탈출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서있던 쪽 벽을 두드려보니 뒤쪽으로 빈 공간이 존재하고 소품으로 가려둔 전선의 방향을 보니 이쪽에 설치된 장치를 건드리면 벽이 열리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장치는 표면에 미세하게 긁힌 자국으로 보아하니 이런식으로 움직이면 열릴 것 같습니다.”
삑! 찰칵!
……정말로 그쪽 벽에 숨겨져있던 문이 열렸다.
“……”
“……”
“이야 팀장님, 저는 언제나 팀장님을 굳게 믿고있었습니다. 벌써 탈출 성공이라니 경력직 신입다운 기록을 세우고 가겠네요.”
이, 이런식으로 나가도 되는건가? 다시 모른척 문을 닫고 순서대로 문제를 차근차근 해결할 생각은… 아무도 그런 생각은 갖고있지 않은 모양이다. 모두 긴장이 풀린 얼굴로 나가서 또 뭘 하며 시간을 떼울지 떠들며 열린 문으로 다가갔다.
시간을 확인하니 들어온지 30분가량 지나있었다. 90분이랬으니 한시간이나 남은건가? 생각보다 어렵지않아서 다행이다. 치트키같은 인간덕에 난이도를 느낄새도 없이 끝나버린 것 같긴 하지만.
그러나 열린 공간 안에는 탈출을 축하하는 직원들의 얼굴이 아닌, 또다른 방이 등장했다.
“방이 하나가 아니었단 말이에요?”
“아 왠지 시간이 너무 남더라니, 이런 반전이 있었네요?”
새로운 방의 등장에 절망한 건 나뿐인가보다.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시퍼런 빛이 희미하게 비치는 어두컴컴한 방. 그 안을 하염없이 쳐다만 보고 있는데 서지혁이 나를 제치고 성큼 걸어갔다.
“제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서지혁은 비장한 표정으로 방 안에 들어가더니 대뜸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머리 옆에 들어올렸다.
“저게 무슨 뜻이죠?”
“……”
서지혁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자물쇠가 세 개 있다는 뜻입죠.”
“지랄떨지말고 비켜. 너 땜에 좁아서 안보이잖아.”
서지혁을 밀치고 방 안에 들어간 백애영은 잽싸게 눈에 띄는 물건들을 집어 밖으로 들고 나왔다. 코팅된 종이 두 장과 손바닥 두 개만 한 크기의 나무상자, 그리고 손전등이었다.
“이 상자는 네 자릿수 비밀번호로 잠겨있네요.”
“그러면… 아마 이 종이가 힌트 같아요. 숫자가 잔뜩 적혀있어요.”
대강 훑어보니 단순한 계산 문제인 것 같았다. 무슨 금값이 시세에 따라 오르내리고 변동되는 중간중간 사고팔고 최종적으로 현재 시세에 맞춰 철수가 보유한 현물자산의 가치를 맞추는 문제였다. 그래도 계산기 없이 손으로만 계산하려면 꽤나 까다로운…
“0531이네요.”
찰칵! 소리와 함께 상자가 열렸다.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백애영은 웬만한 금 시세 계산은 암산할 수 있다며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거 엄청 대단한 능력인 것 같은데?
백애영의 활약을 필두로 각자 숨겨둔 잠재력(?)을 발휘해 남은 퍼즐들을 빠른 속도로 착착 해치우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긴급탈출정이라고 쓰여진 작은 공간 앞에 도달했다.
처음에는 캐비닛인 줄 착각했을 만큼 내부에 작은 조작패널이 하나 붙어있는 게 전부인 무척 협소한 공간이었다.
“이… 탈출정?을 타고 탈출하는 거군요.”
“탈출정 수도 넉넉하고 이상적인 탈출 시나리오네요.”
비상탈출정은 계단을 수천 개 오르거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다가 추락할 위험도 없는 쉽고 간단하고 안전한 최선의 선택지다. 심해탈출 방탈출의 마무리로 더할나위 없는 깔끔한 마무리라고 생각한다. 기쁜 마음으로 1인 1탈출정에 몸을 집어넣었다.
모두가 무사히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문을 닫으니 삑 소리와 함께 정면의 패널에 불이 들어오고,
암호를 입력하십시오. 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암호? 무슨 암호지? 우리가 찾은 것 중에 탈출정 암호가 있었나? 일단 밖으로 나가 일행들과 상담하려 했지만 문이 잠겼는지 열리지 않았다.
패닉에 빠진 머리를 부여잡고 침착하게 단서들을 되짚어봤다. 여태 우리가 찾아낸 것 중에 아직 사용하지 않은 힌트가…… 역시 없는데?
그때 갑자기 삑! 탁! 쾅! 하는 굉음이 울리더니 왼쪽 벽이 덜컥 떨어져 나갔다. 손바닥으로 슬며시 밀어보니 문 너머로 좁고 긴 통로가 구불구불 이어지고 있었다.
암호는 상관없었나? 아니면 누군가 한 명이라도 맞추면 다같이 탈출할 수 있는 건가? 아무튼 문이 열렸으니 발밑에 안전하게 설치된 안내등을 따라 조심조심 걸어나갔다.
통로의 끝에 도착하자 고개를 약간 숙여야 지나갈 수 있을듯한 작은 문이 나왔다. 삐걱이는 경첩소리와 함께 밝은 공간으로 나아가니, …처음과 똑같이 생긴 방이 등장했다.
……? 아니, 정말 처음에 들어왔던 그 방인데?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탈출정도 출구가 아니었다고? 아직도 우리가 감금될 방이 남아있다고???
가벼운 절망에 빠져있던 차에 뒤에서 작은 기척이 났다. 뒤를 돌아보니 내가 방금 빠져나온 작은 문에서 백애영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이어서 따라 나오던 서지혁이 잠시 문에 가볍게 끼이는 사고가 있었으나 무사히 빠져나오고 김재희와 신해량도 차례로 도착하며 모든 인원이 처음의 장소로 도로 모이게 되었다. 그리고 차례차례 주변을 둘러보고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데자뷰인가? 방이 무척 낯익은데요.”
“자물쇠도 다시 다 잠겨있군요.”
“……아마 탈출정으로 탈출에 실패해서 처음으로 돌아온 것 같습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걸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고요? 모두가 탈출에 성공할 때까지? 계속 반복해서? 그런 게 어딨어요! 너무한 거 아닙니까?”
그러게나 말이다. 너무나도 익숙한 기시감에 무의식중에 코를 손등으로 슥 훑어봤다. 음. 코피는 안 나는군. 그야 침대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니까. 바닥은 물기 하나 없이 건조하고 귓가엔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들리지도,
삐— 삐— 삐—
……미치겠군. 카페인이 절실해졌다. 잠깐 쉬면서 커피 한 잔만 사 오면 안 될까?
✵
삐— 삐— 삐— 삐—
고막이 아닌 뇌에서 직접 울리는 듯한 경고음을 배경으로 정신을 다시 단단히 부여잡았다. 나는 능히 탈출할 수 있……다!
[이산화탄소 농도 경고!]
엔지니어들은 미니게임을 클리어해 기지 내의 산소 조절 장치를 고쳐주세요!
흘깃 패드를 확인하니 이전과 같은 경고창과 미니게임 화면이 띄워져 있었다. 다만 게임의 내용이 달라졌는데 테트리스가 아니라 길건너친구들 32차선쯤 되어 보이는 도로를 민첩하게 무단횡단을 해야 하는 게임이었다.
횡단보도를 이용해 줬으면 좋겠다. 아니, 동물이라 인간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되겠구나. 이런 도로를 짓기 전에 생태통로를 고려했어야지!
…게임에 이렇게 열을 내봤자 무슨 소용이지. 그런데 이런 건 정상현에게 맡기면 금세 고치지 않을까? 어라? 그러고 보니 정상현은 어디 갔지? 아, 맞다. 탈출정에 무사히 태워 보냈었지. 그래서. 그리고. 어떻게 됐더라? 그러니까 분명…
삐— 삐— 삐—
큰일이다. 저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제대로 사고가 이어지지 않는다. 이제 백호동에 남아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굳이 알람 소리는 켜지 않아도 되지 않나? 끄는 방법이 분명…
패드를 누르려는 손가락이 자꾸만 미끄러져 헛돌았다. 몇 번 허공을 휘적이다가 문득 손목이 단단한 무언가에 의해 고정된 것을 알아차렸다. 손을 붙잡은 것을 따라 시선을 이동하자 타오르는 오렌지빛, 아니 붉은색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무현 씨? 지금 앞에 뭐가 보이나요?”
“네? 지금, 어… 재희 씨가 보이는데요.”
“그 외에는요?”
“어… 지금은 재희 씨밖에… 잠깐, 지금 너무 가깝지 않나요?”
김재희는 돌연 눈꼬리를 길게 접어 웃어 보이고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내 상태가 괜찮다고 말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지? 김재희가 물러서자 그제서야 주변의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샌가 의자에 앉아있는 내 앞에 다들 옹기종기 모여서는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 피곤하시면 마저 앉아서 쉬세요.”
“아뇨, 그럴 수는…”
“에이~ 어차피 아까랑 같은 방이라 저희끼리도 충분해요. 자물쇠 위치랑 비밀번호도 전부 동일하더라고요.”
“맞아요, 무현 씨. 벌써 거의 다 해결했으니 쉬고 계세요.”
서지혁의 부드러운 만류로(못 일어나게 어깨를 눌러오는 완력의 물리적인 작용으로) 인해 민망하게 혼자만 편히 앉아서 쉬게 됐다. 별로 내키진 않았지만 그래도 다 같이 놀려고 온 건데, 혼자만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있으면 안 될 텐데…… 몸뚱이가 말을 듣지 않았다.
남은 시간을 확인해 보니 20분 남짓. 벌써 한 시간이 넘게 이 안을 빙글빙글 돌았었나. 젊은 애들과는 달리 빠르게 체력이 방전될만도 했다. 조금만, 조금만 쉬었다가 다시 일어나서 도와야지.
여전히 커피 생각이 간절하긴 했지만, 앉아서 가만히 멍때리고 있기도 뭐하고 슬슬 일어나려는데 신해량이 불쑥 문어 모양의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게 뭐죠?”
얼떨결에 받아 든 문어를 이리저리 살피다가 물어보니, 신해량은 잠시 망설이더니 곤란한듯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고래 인형과 최대한 비슷한 걸로 찾아봤습니다.”
“고래… 노을이요? 그걸 왜 저한테…”
아, 설마. 노을이는 환자들의 마음의 안정을 위해 가져다 둔 거지 서른 살이 넘은 치과 의사의 취향은 아니라고 열심히 설명했으나, 청자의 태도를 보아하니 제대로 전달이 되었는지 의문이었다.
다시금 이 터무니없는 오해를 풀기 위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안쪽 방에서 기쁨의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팀원들이 뭔가 쓸만한 걸 찾았나 보군요. 같이 가시죠, 선생님.”
신해량을 따라 이동하니, 아까와는 반대 방향에 새로운 작은 방문이 열려있었다. 방 내부에는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커다란 잠수정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8인까지 탑승 가능한 다인승 잠수함이라고 쓰여있어요. 탈출정은 함정이고 이거야말로 진짜 탈출구였나봐요. 여기 이 문이 탈출구라는 느낌이 찌르르 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잠수함 그림의 중간에 진짜 문이 달려있고, 손잡이에는 낯설게 생긴 둥근 자물쇠가 걸려있었다.
“저건 어떻게 푸는 자물쇠죠? 열쇠 구멍이 안 보이는데…”
“방향 자물쇠네요. 이런 식으로 상하좌우로 움직일 수 있어요.”
능숙한 딜러처럼 찰칵찰칵 자물쇠를 조작하는 김재희의 손을 홀린 듯이 구경하다, 삐빅-! 전자음에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곳을 바라봤다.
문 위에 표시된 작은 디스플레이에 적힌 숫자가 59, 58, 57, 줄어들고 있었다.
“이런 틀리면 페널티가 있나 보네요.”
“저희가 남은 시간이 넉넉하지 않으니 신중하게 입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때, 뒤에서 백애영이 암호를 풀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이스! 백상아리!”
“근데 벽에 고정된 형태라 못 움직여.”
“그럼 그냥 거기서 불러주면 되지!”
“제가 부를게요.”
김재희가 나서자, 백애영은 혹시 모르니 다른 곳을 조사해 본다며 또 다른 방으로 옮겨갔다.
“위 아래 위 위 아래 좌 우 좌 우 우 상 하 왼쪽 우 우 왼쪽.”
삐빅-! 소리와 함께 화면에 3분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미안, 다시 불러줘.”
“위 아래 위 위 아래 좌 우 좌 우 좌, 아, 왼쪽이 아니고 오른쪽이네요. 상 하 좌 우 우 좌.”
삐빅-! 이번엔 5분으로 카운트가 늘었다.
“아니? 분명 제대로 눌렀는데? 재희야, 너 똑바로 부르는 거 맞아?”
“물론이죠. 다시 부를게요. 위 아래 상 하 하 왼쪽 오른쪽 좌 우 우 상 하 우 좌 좌 우.”
“아까랑 다르잖아! 너 말고 다른, 선생님! 선생님이 불러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자물쇠를 조작하던 서지혁에게 지목받아 김재희가 있는 곳으로 향하자 작은 나침반과 숫자가 적힌 지도, 그리고 천장에 가까운 벽 위쪽에 작게 표시된 기호가 보였다. 정말 구석구석 많은 것들이 숨겨져 있었구나.
5분의 넉넉한 대기시간 동안 재희에게 간단한 설명을 듣고, 신중히 처리하기 위해 해답을 패드에 메모했다. 음? 그냥 처음부터 패드에 메모해 서지혁에게 전달하면 되지 않나?
“준비됐어요! 지금 불러주시면 됩니다!”
잠수함 방으로 돌아가는 대신, 미리 적어둔 풀이를 신중하게 또박또박 읽었다.
“상 하 상 상 하 좌 우 좌 우 우 상 하 좌 우 우 좌. 이상입니다.”
작게 삐빅-!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린 소리가 틀렸을 때의 소리와 같을 일은… 없겠지. 역시나.
돌아가서 화면을 확인하니, 9분 37초. 갑자기 제한 시간이 두 배로 확 뛰어있었다.
“아, 젠장. 암호 풀이가 틀린 것 같은데요. 우리 남은 시간이 얼마였죠?”
“8분.”
“여긴 포기하고 다른 루트를 빨리 찾아보죠.”
절망에 빠져있을 시간이 없었다. 모두 일사불란하게 흩어져 혹시 모를 숨은 문을 찾아 나섰다.
나도 최선을 다해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이 벽을 더듬거리며 걸어 다녔다. 미로에서 탈출하듯이 이렇게 한 손을 벽에 올리고 앞으로 쭉 걸어가다 보면 어딘가 얻어걸리지 않을까…, 는 반쯤 농담이었는데 방금 분명 손끝에 무언가 틈이 느껴졌다!
손끝의 감각으로 틈새를 더듬더듬 따라가니 다른 벽보다 미세하게 볼록하게 튀어나온 부분을 발견했다. 진짜로 찾아낼 줄은. 역시 끝까지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솟아날 구멍은 있구나!
일행들을 불러 모아 머리를 맞대고 생각했다.
“여기! 입력패널 찾았어요.”
“이 위에 음각으로 문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엄청 교묘하게도 숨겨놨네요.”
“s? c… 다음은 3인가? 으음… 종이랑 연필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나도 눈을 감고 음각된 문자를 열심히 읽어보다가, 이내 포기하고 아날로그가 사라져 버린 디지털 시대를 통탄하며 애꿎은 패드만 만지작거렸다.
“음… 알파벳?이랑 숫자의 조합 같은데 이게 뭘까요, 선생님?”
“무언가의 줄임말일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 신해량이 말없이 무언가를 띡띡 입력하더니, 갑자기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
“어떻게 푸셨어요?
“…뜨개질 기호입니다.”
……뜨개질 기호였다니! 이런 걸 사전 지식 없이 어떻게 풀어야 했는지 도무지 감도 안잡힌다. 아마 우리가 중간에 놓친 힌트가 있는 거겠지? 그래도 우리 중에 뜨개질을 잘 아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열린 문을 따라 이동하니, 또다시… 새로운 방이 등장했다…… 후우… 방탈출은 너무 축소 과장된 표현이 아닐까? 저택 탈출, 기지 탈출이 좀 더 적절한 표현인 것 같은데.
방 내부에는 작은 원탁과 정면에 위치한 커다란 디스플레이에 00:00:03이라는 숫자가 떠 있었다. 저건… 남은 시간인 것 같은데, 3초?
그때, 치지직- 작은 소음과 함께 천장에서 익숙한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탈출을 축하드립니다! 이제 10분 동안 토론을 나누시고, 범인을 투표해 주시면 됩니다.]
아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탈출에 성공한 뒤 범인을 색출하는 거였지. …다들 협조적이지 않았나? 그냥 몰래 치실을 안 쓴 범인을 지목하면 안 될까?
일단 디스플레이의 카운트다운이 10분으로 설정되자마자 바로 외쳤다.
“저는 진짜 아니에요. 저는 사설탐정입니다!”
“네. 그렇군요.”
“네네, 선생님은 탐정이시고~ 자, 사이비도 그냥 순순히 자백합시다.”
……?
“어… 이렇게 바로 믿어주시는 건가요?”
“네… 아무래도.”
“선생님은 거짓말을 음… 얼굴이 너무나도 진실되셔서 그냥 믿어드리고 싶네요.”
“이미 무현 씨가 탐정인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걸요.”
탐정처럼 행동했던 기억은 없는데 다들 어떻게 눈치챈 거지? 잘된 일이긴 한데… 기분이 조금 미묘했다. 그러면 이제, 어… 탐정답게 추리를 이끌어야 하나?
그러나 내가 무언가 행동을 개시하기도 전에, 김재희가 먼저 원탁을 쿵! 두드리더니 곧장 저격을 시작했다.
“범인 팀장님이죠?”
“왜 그렇게 생각하지?”
“글쎄요… 전직 사이비의 직감?”
……신빙성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기 애매한 근거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도 반반으로 갈리는 것 같은데.
“팀장님이 마지막에 비밀번호를 맞춰서 탈출한 거잖아. 팀장님이 사이비였으면 그냥 모른 척하고 있으면 되는데 왜 문을 열었겠어?”
백애영의 서포트로 여론이 기울었다. 그렇지. 사이비의 임무는 모두의 탈출을 방해하는 거니까, 신해량이 사이비라면 마지막 암호를 맞출 이유가 없지. 백애영도 가만히 신해량을 범인으로 몰아붙이면 되는데 끼어든 걸 보면 범인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김재희나 서지혁이…?
“하… 재희야. 진짜 너 아니야?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하면 내가 나가서 두부 사줄게. 자수하고 광명 찾자.”
“에이 형, 제가 사이비라니 그건 너무 뻔한 전개잖아요. 그러는 형이야말로 아까 잠수함 암호 일부러 틀리게 누른 거 아니에요?”
“너 말 잘했다! 네가 이상하게 불러줘서 내가 틀린 거잖아! 나는 잘 입력했다고!”
“그치만 마지막에 무현 씨가 불러준 것도 틀렸잖아요.”
“그건… 그냥 선생님이 실수하신 게?”
갑자기 튄 불똥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거의 보고 읽기만 하면 되는 비교적 간단한 문제라 아마 틀리지 않았을 텐데…? 서지혁이 범인인가? 아니, 문제에 함정이 있어서 내가 틀렸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서지혁은 제일 의욕 넘치게 탈출구를 찾아다녔다. 딱히 의심스러운 구석은 없었는데…
“그러고 보니 백애영은…”
“……”
“…범인이 아닐 듯? 에이, 사람이 테트리스 좀 못할 수도 있지. 설마 그런 거로 의심하겠어?”
“그런데 눈을 왜 그렇게 뜨고 쳐다봐?”
“내가? 아아닌데? 선량한 시민을 이렇게 몰아가다니 마치 사이비 같군, 악!”
“팀장님이 조용한 게 수상한데요?”
"저 양반은 원래도 말수가 없잖아.”
“마피아 게임은 원래 유독 시끄럽거나 유독 조용한 사람이 범인이잖아요.”
“흠, 그러고 보니 좀 수상한데? 입을 열면 실언할까 봐 일부러 말을 아끼고 있는 거 아닙니까?”
“내가 그런 실수를 할 거 같나?”
“우우~ 재수 없다~~”
“팀장님의 특기, 거짓말 탐지기로 판별해 보죠.”
"재희야, 너 사이비지?”
“네. 최근에 친절한 분들이 먹을 걸 나눠주며 가입을 권유하시길래 들어보기로 했어요.”
“당장 거절하고 차단하세요!!!”
“……내가 질문을 잘못했네. 네가 범인이지?!”
"아뇨?”
“판독기의 결과는… 진실이라고? 허, 나이 먹더니 고장 났나? 아이코, 농담, 농담!”
"지혁이 형이 범인이죠?”
“당연히 아니지.”
"거짓말이군.”
“아니, 잠깐 아까 농담한 것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이러시는 게 어딨어요!!!”
누굴 투표하지? 망설이다 손을 내밀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기명 투표의 결과는… 예상 밖의 결과가 나왔다.
김재희 2표, 신해량 2표.
"선생님은 투표 안 하셨네요?”
“마침 선생님이 탐정이시니, 최종 결정을 내려주시면 되겠네요.”
“용의자들은 최종변론을…”
“시간 없어! 당장 제출해야 해요!”
“그럼 한마디씩만 최종변론을 하죠.”
9분 동안 떠들어도 결론이 안 났는데 한마디로 범인을 정해야 한다니? 그게 과연 도움이 될까?
“전 아닙니다.”
“저도 아니에요.”
역시나 마지막 한마디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쩌다 이런 구도가 되어버렸나…
신해량을 믿기 vs 김재희를 믿기
남은 시간은 이제 한 자릿수로 줄어들었고, 나는… 가까스로 결정을 내렸다.
[투표 완료]
남은 시간이 띄워져 있던 대형 모니터에서 갑자기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다급하게 뛰는 것처럼 심하게 흔들리는 화면은 어두운 바닷속에서 점차 밝아지더니 마침내 파란 하늘 아래 모래사장을 찰박찰박 걸어갔다.
이어진 발자국을 따라가니 그 앞에는 구조용 헬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무사히 헬기에 올라타 상공으로 올라갔다. 멀어지는 섬, 어느새 해가 저물었는지 어두운 하늘만을 보여주다가 저 멀리 밝은 불빛이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했다. 육지에 가까워진 듯했다. 하늘과 땅이 뒤집힌 듯한 아름다운 풍경과 점차 가까워지고… 점점 붉어졌다?
도심의 불빛은 전기등의 빛이 아닌 도시가 불타고 있는 화마의 빛이었다. 충격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헬리콥터는 계속해서 나아가고 우리가 도착한 곳은… 거대한 문어 조각상이 장식된 사이비의 본산이었다.
“……”
“……?”
"이게 대체 뭐죠?”
모두가 말을 잃고 그저 멀뚱멀뚱 시선만 교환하고 있는데, 정면의 문이 열리더니 직원들이 박수를 치며 들어왔다.
“탈출을 축하드립니다~”
“저희 가게의 첫 탈출 성공팀이세요. 이쪽으로 이동하셔서 기념사진 촬영 도와드리겠습니다.”
그야 우리가 첫 손님이니까 처음으로 탈출을 성공한 게 맞지만… 이게 탈출한 게 맞아??? 심해를 빠져나가서 사이비에 도착했는데 이게 맞아????
포토존으로 꾸며진 곳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직원의 부연 설명이 이어졌다.
유출하면 안 되는 비밀정보로 사실 이곳의 방탈출은 엔딩분기점이 있다고 한다. 놓친 단서의 유무나 범인을 맞추는지 여부에 따라 끝나고 틀어주는 영상이 달라진다나.
우리는 범인은 맞췄는데 안타깝게도 탈출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다고 한다.
사이비의 정체는 거대문어 숭배교. 중간에 모두가 문어 숭배 조각상을 만져버렸다. (UV라이트로 모두의 손을 검사하자 형광물질이 빛나고 있었다)
“와… 갑자기 왜 문어를 떠넘기나 했는데.”
“이건 정말 상상도 못 했네요.”
“고작 역할극 놀이에 너무 진심을 다하신 거 아니에요?”
…그때의 의심스러운 정황으로 인해 추리에 성공할 수 있었지만, 스멀스멀 밀려오는 배신감은 어쩔 수 없었다.
쏟아지는 비난에도 신해량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갑자기 신해량이 사이비에 관심이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탈출 암호에 사이비 전용 비상탈출 암호를 입력했다고?
“뜨개질 기호라면서요???”
“거짓말이었습니다.”
“……”
배신감에 말을 이루지 못하고 그저 웃음만 나왔다. 이번에는 백애영마저 신해량을 비난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백애영은 그 암호때문에 신해량을 믿고 지지한 건데!
“그래도 재미는 있었네요. 금이씨도 오늘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이제 팀장님이랑은 이런 거 안할랍니다. 흥!”
“저도 옛 상사랑은 오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무현 씨가 부른다면 참가할게요.”
“저도 사양하고 싶습니다…”
✵
끝나고 나가는 길에 설문조사에 참여해달라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Q1. 저희 방탈출은 즐거우셨나요?
✔ 네. ⬜ 아니오.
Q2.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할 의향이 있나요?
✔ 네. ⬜ 아니오.
Q3. 재방문 의사가 있으신가요?
⬜ 네. ✔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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