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혁해량] 7월의 애정촌

[지혁해량] 7월의 애정촌 2

초대

96x105 by 호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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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 https://youtu.be/35DGUDamyy0


하나, 둘, 셋, 넷…… 열여섯, 열일곱, 열여덟... 십팔. 이런 시발!

담배연기를 손으로 휘휘 날려보내며 웅장하게 서 있는 고층 빌딩의 층수를 하나하나 세어보던 서지혁이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발을 굴렸다. 세상이 망한다 어쩐다 해서 지어둔 해저에 처박혀 몇 년을 보냈는데, 환경오염도 막대한 자본 앞에선 깨갱대며 꼬리를 내리긴 하나 보다. 세상 참 살기 좋아졌다 소리가 절로 나오는 삐까번쩍한 건물을 보고 있으니 묘한 현타가 찾아왔다. 목숨값으로 번 돈은 이런데 쓰라고 있는 거구나.

뭐든 못하는 게 없는 인간인 건 진작 알았지만 그 짧은 시간 안에 유토피아 같은 거처까지 마련할 줄이야. 오는 길에 보니 대형 마트에 헬스장에 목욕탕, 각종 놀이 시설이나 식당, 상가들이 오직 이 거대한 신축건물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주위에 늘어져 있었다. 어느새 짧아진 담배의 불을 담뱃재 홀더에 비벼 끄고 꽁초는 근처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서지혁은 연이은 줄담배를 피운 덕에 쌓여있는 담배 무덤을 일별하곤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주변 편의점에서 아이쇼핑, 근처 옷가게에서 괜히 얼쩡거리기, 걸어서 1분도 안 되는 거리 골목골목 돌며 5분 걸려서 도착하기, 땡기지도 않는 담배 연달아 피우기, 강렬한 햇빛에 눈뽕 당하면서 건물 층수 세기 등. 온갖 의미 없는 헛짓거리를 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를 미루고 미뤄왔지만 이젠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일주일 전쯤 통보당한 약속을 보란 듯이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언제인지는 몰라도 신해량이 서지혁의 혈액에 그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는 악성 백신이라도 심어둔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죽어도 안 간다고 악을 쓰던 자신이 이곳에 서 있을 리가 없으니까.

시계를 확인하니 오후 12시 50분. 아주 어이가 없었다. 가지 않으려고 별 지랄을 다 떨며 왔는데도 약속 시간 보다 10분이나 이른 시간이었다. 기껏 큰맘 먹고 기어 나왔는데 늦었다고 욕 처듣는 것보단 제시간에 도착하는 게 낫기야 하겠지만. 누가 보면 일주일 동안 목 빠지게 기다리고 기대한 약속인 줄 알겠네. 시발. 염병.

그래. 오늘 당신 죽고 나 살고 아주 그냥 끝을 보자.

그 반대일 수도 있겠지만.


출입문 비밀번호를 몰라 전화라도 해야 하나 싶었는데 신축건물이라 이사 일정이 많아 당분간 저녁 전까진 출입문을 개방해 둔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알려주는 걸 깜빡했나 싶었는데 이래서 안 알려줬나 보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건물은 보안이 생명일 텐데 이렇게 개방을 해둬도 되나.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서지혁은 알 바냐 싶어져서 당당하게 외부인으로서 활짝 열린 출입구로 걸어들어갔다.

서지혁은 괜한 반항심에 1층까지 친절하게 내려와 있는 엘리베이터를 무시하고 계단을 올랐다. 그래봐야 겨우 3층이라 별 오만 딴짓을 다 해가며 기어올라가도 3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층수는 알려줘 놓고 호수는 왜 안 알려주나 했더니 한 층 전체가 하나의 공간이었다. 허, 돈지랄을 정성스럽게도 하셨구만. 이런 곳은 월세가 평범한 직장인 월급도 넘을 것 같은데. 그나저나 3개월 쉬면서 해외 가서 요양이나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집은 왜 구한 건지.

벨을 누를까 노크를 할까 지금이라도 그냥 돌아가서 해외로 튀어버릴까 고민한 게 또 2분. 역시 튀어야겠다는 결론이 나서 자신의 현명함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는데 그와 동시에 핸드폰에서 까톡. 소름 끼치는 알림이 왔다. 에이 설마. 진짜 귀신새끼도 아니고. 에이. 아니겠지.

[문 열어놨으니까 그냥 들어와.]

등골이 오싹해서 서지혁은 멀쩡한 핸드폰을 복도 바닥에 집어던질 뻔했다. 이거 집어던져봤자 신해량이든 서지혁이든 둘 중 하나 증발하는 것도 아니고, 갚아야 하는 위약금만 생긴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얌전히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그런 말이 있듯이 이제는 정말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왔다. 물론 즐길 수는 없겠지만. 서지혁은 해탈한 듯 허허허 웃으며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실례합니다-라는 말은 생략했다. 실례는 신해량이 서지혁한테 하고 있는 짓이지 자신은 아무런 실례도 저지르지 않았으니까.

문이 부드럽게 열리고 깔끔하게 정리된 신발장이 서지혁을 맞이했다. 차곡차곡 종류별로 정리된 신발이 모두 신해량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서지혁은 속이 영 좋지 않았다. 최선의 방향으로 도망치려고 했는데, 최악의 결과로 호랑이 굴에 제 발로 기어들어온 꼴이 된 것이다. 짜증이 나서 신발을 대충 벗어 구석에 집어던졌다가 이건 스스로가 용납이 안 돼서 각 맞춰 다시 정리해 두었다. 누구 밑에서 개처럼 구른 덕에 생긴 버릇이었다.

서지혁이 껄렁대며 거실로 이어진 짧은 복도로 들어서니 어디 고급 레스토랑에서나 맡을법한 음식 냄새가 났다. 그래도 손님 대접하겠다고 뭐라도 시켜놨나 했는데, 거실 바로 옆에 붙어있는 부엌에서 앞치마를 입고 요리 중인 신해량이 보였다. 허어, 이제 요리까지 섭렵을 하셨구만. 서지혁은 혀를 쯧, 차고 자신이 오든 말든 요리에 집중하고 있는 신해량의 맞은편 바 테이블에 몸을 기댔다.

"대체 어떻게 아는 겁니까?"

"또 뭘."

쳐다도 보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하는 태도에 서지혁은 헛웃음을 흘렸다.

"저 앞에 있는 거요. 문자하셨잖아요."

"몰랐어. 올 때 됐으니까 보낸 거지."

"제가 안 왔으면 어쩌려고요."

"왔잖아."

말문이 턱 막혀서 혀로 볼 안쪽을 살살 쓸고 있으니 그제야 신해량의 시선이 서지혁을 향했다. 뭘 봅니까. 너. 잘생긴 거 아니까 그만 좀 보십쇼. 손 씻고 와. 예이 예이.

실없는 대화를 끝으로 서지혁은 몸을 일으켜 거실 소파에 가방과 겉옷을 대충 던져놓았다. 거실 바닥은 대리석 재질인 것 같았는데 어찌나 잘 닦아 두었는지 어느 구석을 보아도 반짝반짝했다. 까딱 잘못하면 미끄러져 머리 깨지기 딱이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거실 중앙에는 넓게 회색 러그가 깔려 있었다. 딱 봐도 푹신해 보이는 소파와 나무 재질의 커피 테이블 옆으론 커다란 통창이 시원하게 나 있었는데, 3층인데도 불구하고 보이는 풍경이 꽤 괜찮았다. 적당한 자연과 적당한 도시의 경관이 잘 어우러져 있었다. 아까 시간 때울 때 잠깐 돌았던 공원도 보였다.

오피스텔 안을 눈으로 한번 슥 훑고 화장실에 들어가니 은은한 꽃향기 비슷한 방향제 향기가 났다. 비누로 손을 꼼꼼하게 씻고 각 잡혀 걸려있는 수건에 손을 닦고 나오니 신해량이 손을 까딱하며 오라고 부른다. 나 이제 당신 부하직원 아니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서지혁의 몸은 이미 신해량의 앞에 서 있었다.

"앉아."

"예이."

잘 훈련된 똥강아지가 따로 없었다. 서지혁이 지시대로 바 테이블의 의자를 끌어내 앉으니 신해량이 그 앞에 완성된 요리를 몇 개 올려두었다. 이제 구하기도 힘들어 금값인 조개와 새우가 가득 올려진 해물파스타, 두툼한 버섯과 파인애플이 곁들어진 레어와 미디움 레어 사이 정도로 익은 두꺼운 스테이크, 새콤한 토마토소스 위에 치즈가 한가득 올려진 리조또까지.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직접 만들었다는 것을 믿지 않았을 정도로 먹음직스러운 요리의 등장에 서지혁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신해량을 바라보았다.

"뭡니까? 예전엔 이런 퀄리티 아니었잖아요."

"배웠어."

서지혁의 앞에 앞접시와 포크&나이프를 놓아둔 신해량이 짧게 시선을 마주하며 대답했다. 요리야 군대에 있을 때든 해저기지에 있을 때든 종종 하는 걸 보기도 했고 혼자 먹고 살 만큼은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취요리 정도의 수준이었다. 따지자면 집밥 백선생의 느낌이었지 고든 램지는 아니었다 이 말이다. 서지혁이 신해량 보다 조금이나마 잘 하는 게 있다면 요리라고 꼽을 수 있었는데, 이제 그마저도 없어지기 직전이었다.

"뭐 이제 업종을 아예 바꾸시게요?"

진심이 담긴 물음에 신해량이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참 근사한 얼굴이다. 7년을 거의 매일을 봐왔는데도 일주일을 안 봤다고 또 적응이 안 되는 걸 보니. 역시 매일 보거나 평생 안 보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서지혁은 절대로 후자를 선택하기로 이미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취미로 배웠어. 근처에 클래스 하는 곳이 있던데."

"취미요? 갑자기 왜요?"

"여기서 지내면서 운동 말곤 딱히 할 게 없을 거 같아서."

"아니, 진짜 여기서 지낼 거예요? 어디 섬인지 해변인지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안 가. 한국에 있을 거야."

"왜요?"

"……."

신해량이 입을 닫고 미리 썰어둔 스테이크를 서지혁의 앞접시에 올려주었다. 뭐 하는 짓이냐고 쳐다보니 먹으라는 듯 눈짓을 한다. 허허허허.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걸 대화라고 할 수 있는 건가? 서지혁은 어이가 없었지만 저 꾹 닫힌 입을 열게 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이미 잘 알기에 빠르게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위아래도 없겠다 먼저 포크를 들어 두툼한 고기를 푹 찌르니 육즙이 흘러나왔다. 절로 군침이 돌아 재빨리 입에 넣으니 고기가 살살 녹았다. 신해량이 자기도 모르게 헤벌쭉한 표정을 지은 서지혁을 보더니 흐뭇하다는 듯 웃었다. 그린 듯한 미소를 보고 서지혁은 재빨리 표정을 정리하곤 뭐, 먹을만하네요. 레스토랑 별점을 매기는 까칠한 음식 평론가 같은 소리를 지껄였다. 무미건조한 소리를 한 것치곤 이미 서지혁의 손은 다른 음식을 급하게 퍼담고 있었다. 신해량이 피식대며 웃으니 서지혁이 헛소리를 더 얹었다.

"만든 성의를 봐서 먹어드리는 겁니다."

"조개도 가져가. 너 먹으라고 넣은 거야."

이미 서지혁의 입안에 가득 들어 있는 따끈한 조개들이 살려달라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신해량은 그 통통한 볼을 보고도 더 먹으라는 듯 파스타 면과 조개를 얹어주었다. 음식들이 다 입에 착 달라붙는다 했더니, 해산물에 고기에… 새콤한 토마토소스까지 디테일하게 서지혁의 취향을 노린 조합이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서지혁은 이게 마치 사형수가 먹는 마지막 만찬처럼 느껴져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 저 오늘 죽습니까?"

"? 무슨 소리야."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던 신해량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독 같은 건 안 넣었어. 같은 소리를 한다. 허허, 그럼 뭐 사랑의 묘약 같은 건 넣으셨나?

"저 왜 꼬십니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서지혁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노려보자 신해량이 넓은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배 터지겠습니다."

"엄살은."

절대로 엄살이 아니었다. 그 요리가 끝인 줄 알았는데 이후에도 냉장고와 오븐에서 다른 음식이 줄줄이 나왔다. 대체 무슨 클래스를 들었길래 일주일 만에 코스요리를 마스터하는 건지. 가르친 사람도 배운 사람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꾸역꾸역 마지막 디저트인 아이스크림을 마시듯 비우니 신해량이 빈 그릇을 치웠다.

"빵은 안 배웠습니까?"

"베이킹도 생각은 했는데. …… 그건 한 번 배우면 빵이 너무 많이 남는다고 해서."

"하긴. 팀장님은 빵 같은 건 잘 안 드시니까. 아."

이제 팀장이 아니지. 중얼거림을 들은 신해량이 서지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희 사이에 직급 빼면 남는 게 없네요."

"있어. 잘 생각해 봐."

신해량이 서지혁의 뒷머리를 긁듯이 쓰다듬었다. 아, 이건 이 인간이 나름 위로할 때나 하는 짓인데.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당신은 대체 나랑 뭘 하고 싶은 겁니까. 왜 이러는데요. 당장 멱살을 잡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곤 대충 입꼬리만 올려 고개를 끄덕었다.

있긴 뭐가 있다고. 당신도 모르면서.

"앞으로 어떻게 부를 건지도 생각해 봐."

신해량은 이미 마지막을 고한 사람에게 당연하다는 듯 미래를 말했다. 서지혁이 과거와 미래를 없는 취급하며 오늘과 어제만 사는 사람이라면, 신해량은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그리며 현재를 나아가는 사람이었다. 사람을 오래 보면 서로 닮는다고도 하던데 이런 간극은 도저히 좁혀지지 않았다. 신해량은 자신이 그리는 미래에 당연하다는 듯 서지혁을 끼워 넣었다. 거기에 서지혁의 의사 같은 건 없었다.

"안 부를 겁니다. 마지막이라는 말은 귓등으로 들었습니까?"

"오늘 마지막 아니야."

"허. 오늘도 아닙니까? 그럼 도대체 언제입니까?"

신해량은 침묵했다. 물음에 대한 대답을 고르나 싶어 가만히 기다렸지만, 그의 입은 꾹 닫힌 채 다시 열리지 않았다. 또 무시의 무응답이었다. 서지혁은 허탈하게 웃었다. 이 인간과 함께 있으면 뭐든 마음대로 되는 게 없었다. 일을 할 때야 불만이 없었지만 이제 서지혁은 더 이상 신해량의 부하직원이 아니었다. 계약서에서 나란히 이름이 지워진, 아무 사이도 아닌 관계에서 당연하다는 듯 우위를 선점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 빡이 치는 건 거기에 자연스럽게 수긍하는 서지혁 자신이었다.

7년의 습관이란 참으로 무서운 거였다.

"벽이 너무 휑한 거 아닙니까? 티비라도 달지 그래요."

"잘 안 보잖아."

"어디 고장난 거 주워다가 멋으로라도 다십쇼. 아까 오다 보니까 길바닥에 박살난 티비 몇 개 있던데요. 제가 주워다 줘요?"

소파에 나란히 앉아 헛소리를 해대자 신해량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다른 곳은 있을 거 다 있고 최소한의 가구로 깔끔하게 배치를 잘 해놨길래, 해저기지 이력서에 괜히 인테리어 전문이라고 적어 낸 건 아니었나 보다 싶었는데. 소파 맞은편, 거실의 가장 큰 벽면이 텅 비어있었다. 누가 봐도 티비가 들어올 자리인데 아무것도 없으니 앉아서 벽면만 쳐다보게 되었다.

"뭐 그림 같은 거라도 걸든가요."

"<오른쪽을 보고 있는 여성> 같은 거?"

"허허허허. 마음대로 하십쇼. 당신 집인데 그림 눈깔이 오른쪽을 보든 왼쪽을 보든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서지혁이 투덜대듯 말하자 신해량이 낮은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뭐가 웃긴 건지. 서지혁이 눈썹을 꿈틀대며 신해량을 쳐다보자 웃느라 살짝 휘어진 눈이 마주 본다.

아. 이 미친 인간. 대체 뭐가 문제지? 평소엔 이렇게 잘 웃지도 않으면서. 통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은 신해량의 새까만 눈동자가 맑게 빛났다. 아주 혼자 반짝반짝 빛이 나고 광이 나고. 나는 눈물이 나고. 이 인간 진짜 해를 자기 소품으로 처 쓰고 앉았네.

꼴깍. 서지혁의 침 넘기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순간 당황한 서지혁이 고개를 휙 돌려 잔기침을 해댔다. 아 시발 진짜. 존나. 쪽팔려 뒤지기 직전인 서지혁의 등을 신해량이 두들겨주었다. 누구 놀리나 싶었는데 괜찮아? 하는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 있어서 더 죽고 싶어졌다. 서지혁은 차라리 신해량이 자기 등을 있는 힘껏 주먹질해 이 자리에서 기절시켜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괜찮습니다. 물 줄까? 예. 지금 고개를 돌리면 얼굴이 이백퍼센트로 토마토 돼있을 게 뻔해서 차라리 신해량을 보내버렸다. 손으로 열심히 부채질을 하며 열을 식히니 잠시 후 신해량이 물을 건넨다. 집이 넓어서 이럴 땐 좋네. 그 사이에 속성으로 얼굴의 열을 내보낸 서지혁이 고개를 꾸벅하곤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좀 쉬고 있으니 신해량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뭘 하나 지켜보니 설거지를 하려는 듯 고무장갑을 낀다. 그 꼴을 본 서지혁이 부엌으로 날듯이 뛰어가 고무장갑을 뺏어들었다.

"제가 할게요."

"내 집인데 네가 왜 설거지를 하지?"

"얻어먹은 게 있잖아요."

서지혁은 산처럼 쌓여있는 설거짓거리를 가리켰다. 신해량이 요리를 하면서 제때제때 조리기구를 정리한 덕에 그나마 먹은 그릇밖에 없었지만 그 양도 어마어마했다.

"됐어. 너 손님이잖아."

"햐. 제가 손님입니까? 뭐든 다 지 마음대로 하시길래 손놈인 줄 알았는데요."

그 말에 신해량이 더 말해봐.라는 눈으로 서지혁을 쳐다봤다. 서지혁이 입을 꾹 다물었다.

"앉아 있어. 저쪽 방에 운동기구 있으니까 가지고 놀든가."

"……하. 당신한테 이런 대접은 처음 받아봐서 낯선데요."

"익숙해져 봐."

뭐라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문 서지혁에게서 고무장갑을 다시 빼앗은 신해량이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직접 뜬 건지 산 건지 모를 뜨개 수세미에 주방비누를 문지르는 신해량을 가만히 쳐다보던 서지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부터 계속 왜 이러십니까."

"뭐가?"

신해량의 시선이 서지혁을 향했다.

"왜 저 꼬십니까? 이미 넘어간 사람 꼬셔서 얻다 쓰려고 그럽니까."

이번에도 무응답으로 무시할 줄 알았던 신해량이 미소를 살짝 짓더니 입을 열었다.

"그건 이따가 알려줄게."

쪼르르- 맑은 물이 흐르고 그릇에 묻은 양념들이 씻겨 나가는 걸 멍하니 보고 있는 서지혁을 신해량이 가라는 듯 팔꿈치로 툭 쳐서 밀어냈다.

서지혁은 물속도 아닌데 숨이 차는 기분을 느꼈다. 이 인간이 대체 왜 이러는 거지? 그 비상한 머릿속을 이해하는 건 원래도 불가능했지만 이건 정말 감도 잡히지 않았다. 서지혁은 자신이 그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바닥에 매쳐지거나 멱살이라도 잡힐 거라 예상했다. 아니면 감히 개코를 가진 비흡연자의 집에 방문하면서 제대로 털고 오지도 않은 담배 냄새에 대한 추궁이라도 들을 줄 알았다. 그런데 신해량은 정말 서지혁을 환대한다는 듯 취향에 꼭 맞는 음식을 준비하질 않나, 눈을 보며 귀한 웃음을 날려주질 않나, 심지어는 뜻 모를 다정한 소리까지 해댔다.

뭐? 꼬셔서 얻다 쓰려고 그러는지 이따가 알려줘? 이거 작정하고 꼬신 게 맞다는 소리 아닌가?

갑자기 신해량의 머리가 빙글 돌아버렸거나, 어디서 저주라도 걸려왔거나, 약이라도 잘못 먹은 게 분명했다. 이런 상황에선 보통 어라? 이 사람도 설마 나를……? 하며 두근두근한 상황이 연출될 거라 예상하겠지만 서지혁의 머릿속에 그런 비현실적인 루트는 존재하지 않았다. 서지혁은 사랑에 빠진 신해량이 어떤 모습을 하는지 잘 알았다. 그 빛나고 아름다웠던 시기를 바로 옆에서 봐왔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그런 드라마 같은 상황은 아닌 게 분명했다.

서지혁은 자신이 간과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신해량이 던진 작은 돌이 잔잔하던 호수에 파도를 일으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제 며칠 후면 7월이었다. 더위든 추위든 잘 타지 않는 서지혁조차 에어컨이 없으면 힘들어지는, 지구온난화가 낳은 지옥 같은 한여름이 온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온몸이 불에 타는 듯이 열이 오르고 더웠다. 서지혁은 세수라도 하기 위해 다시 화장실에 들어와 문을 꼭 닫았다. 세면대에 물을 틀고 졸졸졸 흐르는 가느다란 물줄기를 한참 동안 눈에 담았다.

이제 현실을 마주할 시간이었다. 서지혁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이곳까지 걸어오는 동안 쭉 얼린 듯 유지되었을 표정의,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마주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귀.

동그랗게 커져있는 눈.

말을 하다 만 듯이 어정쩡하게 벌어진 입술.

"……하아. 시이이이발."

단언컨대, 세상에서 가장 얼간이 같은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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