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딱히 어울리는 건 모르겠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노래라 넣었어요
“너 그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
“지해 이번에 결혼한다잖아. 며칠 전에 청첩장 돌리더라.”
“……그래? 난 지금 처음 듣는데.”
톡, 톡. 검지로 탁자를 두드리는 소리가 일정하게 울렸다. 그 옆에는 절반도 채 비우지 못하고 식어 가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 명여휘는 턱을 괸 채 회상에 잠겨 있다가 문득 실낱같은 웃음을 흘렸다. 나는 네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서 전달받을 수밖에 없구나. 지극히 당연해야 할 사실이 왜 이리 새삼스럽게 다가오는지…….
구교사에서 도망쳐 나온 지도 벌써 십 년 가량이 흘렀다. 당시 겪었던 사건은 많은 사람에게 상흔을 남겼다. 육체나 정신은 물론이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관계에도 무수한 흠집이 새겨졌다. 다투고, 상처 주고, 원망하고. 공포나 자기 연민 따위에 휩싸여 그게 잘못인 줄 알면서도 상대를 긁어 대기에 급급했다. 명여휘와 신지해도 그러했다. 직접적으로 다툼이 생긴 적은 없지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생긴 골이 깊었다. 서로에게 솔직해지지도, 약속 하나 제대로 지키지도 못했다. 서로를 소중하게 여긴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한데 어째서인지 자꾸만 엇갈렸다. 서러운 일이었다.
동시에, 십 년이라는 세월은 길었다. 무엇이든 적응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달갑지 않은 트라우마도, 한쪽만 남은 시야도, 누군가의 부재도. 이제는 익숙한 것이 되었다. 시간이 약이라는 흔한 말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뎌졌다. 멎지 않을 것만 같던 출혈이 그치고, 몇 번이고 헤집어진 상처는 서서히 봉합되었다. 흔적을 더듬으려면 그럴 수 있었지만, 구태여 그러는 사람은 없었다. 어떤 기억은 묻어 두는 게 최선이었다.
그런데도 명여휘는 이따금 신지해를 떠올렸다. 격통에 괴로워하는 모습이나, 자신을 걱정하던 말투, 불안해하던 표정 같은 게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때의 장면들이 어딘가에 각인된 것만 같았다. 이상하지. 우리의 교차점은 한 계절보다도 짧았는데, 나는 내내 너를 그리고 있었어. 유독 미련이 짙게 남는 건 네가 덧없이 소중해진 탓일까. 나는 너의 현재와 함께하고 싶은 거야. 찰나의 순간이라도 곁에 머물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너를 떠나지는 않을 거야. 보잘것없는 선언을 건넬 정도로.
지금에야 생각하는 거지만, 아마 나는 너를 사랑했던 것 같아.
아무 의미 없는 자각이다. 닿기도 전에 스러져야 할 감정이었다. 명여휘는 상념을 밀어내기 위해 차게 식은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은은한 허브 향이 맴돌았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사고는 어느 정도 정리되었지만, 불편한 마음을 감출 길은 없었다. 상대의 결혼이 내키지 않다가도 자신이 그런 기분을 느껴서 무얼 하나 싶었다. 우리는 이미 십 년 전에 멀어졌고, 친구라는 이름으로도 남지 못했다. 서로를 위한다는 명목이었다. 명여휘는 얕은 숨을 뱉었다. 기계적으로 움직여 씁쓸한 차를 재차 삼켰다. 떠나기로 결심했다면 괜히 미련을 남겨서는 안 된다. 그건 서로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며칠 뒤, 신지해에게서 연락이 한 통 도착했다. 연락처에 저장된 사람들에게 으레 돌리곤 하는 단순화된 청첩장이었다. 명여휘는 날짜와 장소를 확인했다.
첫사랑을 떠나보낼 때였다.
결혼식에는 벌써부터 사람이 제법 도착해 있었다. 홀에는 신랑 측 하객처럼 보이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들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신부 측 하객은 신부 대기실에서 회포를 풀고 있는 듯했다. 명여휘는 적당히 아는 얼굴이 보이는 자리로 향했다. 고등학교 동창들이 모인 테이블이었다. 안녕, 요즘 잘 지내? 일이 많이 바쁜 것 같더라. 반가운 투로 의례적인 인사를 주고받다 보니 식의 주인공이 다가왔다. 잠깐 틈이 난 사이에 인사를 돌리러 온 것 같았다.
“안녕. 오랜만이네.”
“……그러게. 오랜만이네.”
명여휘는 습관처럼 미소 지으며 힐긋 상대의 겉모습을 살폈다. 예복을 차려입은 모습이 퍽 잘 어울렸다. 차분해진 말투 하며, 성숙한 태도는 거리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고등학생 때의 인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제게는 아직도 고등학생 때의 모습이 고스란히 박혀 있는데, 이렇게 보니 시간이 참 많이 흘렀다는 생각이 든다. 공백을 좁힐 방법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두터운 벽이 사이를 가로막는다. 언제인가 우리의 사이를 가르던 어둠처럼. 짙고 새까만 경계였다.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는 신지해에게선 과거의 성격이 일부 엿보였다. 장난스럽고, 쾌활한 면모였다. 이 역시 자신이 알던 모습과는 차이가 있었다. 테이블에는 금세 왁자한 소란이 퍼졌다. 떠들썩하게 오가는 대화는 대부분 학창 시절의 일화였다. 그러다 누군가의 부끄러운 과거를 폭로하는 이야기까지 나오게 되었는데, 한 번 불이 붙은 주제는 오늘의 주인공도 뒷전으로 만들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명여휘는 문득 입술을 달싹였다. 지해야. 자그마한 소리였다.
“요즘은 어때. 행복해?”
시선을 돌리자 눈이 마주쳤다. 이름이 불리니 반사적으로 돌아본 것 같았다. 신지해에게는 많은 것이 궁금했다. 그날 이후로 어떻게 지냈는지, 너도 나를 가끔 떠올렸는지, 그때 우리가 내린 결정이 너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는지……. 그 모든 걸 물어볼 수는 없어서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다. 신지해도 저의를 파악한 눈치였다. 떠나기 직전까지 주고받았던 대화였으니 그럴 만했다.
“안 그럴 이유가 뭐 있겠어.”
신지해가 담담히 웃었다. 그 미소에서도 변한 부분이 엿보였다. 표정을 갈무리하는 데에도 능숙해졌고, 감정을 숨기는 방법을 익힌 듯했다. 혹은 저게 오롯한 진심일지도 모르겠다. 상대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다 자부하기엔 기준이 너무 오래되었다. 명여휘는 그 얼굴을 잠깐 눈에 담았다가 마주 웃었다. 다행이네. 단정한 중얼거림 끝에 몸을 일으킨다.
“나 먼저 가 볼게.”
끝인사를 전하니 득달같은 반응이 돌아온다. 뭐? 벌써? 더 있다 가지. 아직 식도 시작 안 했잖아. 명여휘가 가볍게 웃었다. 또 매정한 사람이 되겠네. 실없는 감상이 한 줄 떠올랐다. 일 있는데 시간 내서 온 거야. 알잖아, 나 바쁜 거. 단호하게 대꾸하곤 아쉬워하는 소리를 뒤로한 채 신지해의 앞에 선다. 그 뒤에는 예전에 그러했듯이 손을 한 번 꾹 잡았다 놓았다.
잘 지내. 행복하길 바랄게.
……미안. 축하한다고는 못 하겠다. 그래도 네가 행복하길 바란다는 건 진심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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