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門

마음이 닿는 곳에

by 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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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만남으로도 만족할 수 있어?

난 못 하겠는데.

 

 

우린 무수한 갈림길을 지나쳐 왔다. 매 순간이 그리 순탄치는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첫만남의 시작부터, 우주로의 초대를 받은 오늘까지도. 번복하고 싶은 선택도, 아쉬움이 남는 시점들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다시 그날로 돌아가더라도 변하지 않을 행동들이 있다. 너를 만나는 것, 그리고 네 투영에 응하는 것. 그게 아니고서는 상대와 가까워지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신지해는 소문에 민감한 것 같았다. 평판이 안 좋은 사람들과 엮이는 일이 없고, 불편한 상대와는 구태여 친해지지 않는다. 그에 비해 명여휘한테는 늘 질 나쁜 소문이 따라붙었다. 특출나게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소문을 무마시킬 만큼 친구가 많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두 가지였다. 애초부터 친해지지 않거나, 아니면 똑같은 길을 밟거나. 올바르지 못한 결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친분을 완전히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도 지금보단 마음을 덜 주게 되려나. 모르겠다. 그런 게 가능할지는. 세상에는 정해진 흐름이 있다던데, 어쩌면 우리도 그 흐름을 따라온 게 아닐까.

명여휘는 시답잖은 가정을 잇는 대신 눈앞의 상대에게 집중했다. 그 모든 과정을 지나왔기 때문에 우리가 이 자리에 함께하는 것이다. 그게 마냥 긍정적인 상황은 아니라 할지라도. 단순하면서도 가장 정론에 가까운 말이네. 선선히 수긍한다. 부정할 이유는 없었다. 상대의 안위를 살피고, 안녕을 바라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어차피 이건 객관식이 아니었다. 수학 문제처럼 정답이 딱 맞게 떨어지는 것도, 정해진 식에 맞게 풀이를 적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무수한 오답과 몇 종류의 복수 정답. 그걸 추려 내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아니, 맞아.”

애정을 가진 사람이지. 나직이 웃었다. 왜 안 물어보나 했더니, 그냥 그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어떤 부분에선 맞고, 어떤 부분에서는 틀리다. 애정이란 것도 포괄적인 의미가 아니던가. 본디 인간은 다면적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에게 지닌 감정이 오롯이 하나일 수는 없다. 연민, 우정, 흥미, 호기심……. 그러나 상대의 반응을 보고 있자니 그걸 헤아려 분류하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다. 명여휘는 그를 대신하듯 질문의 방향을 돌렸다. 그럼 너는 어때? 나는 좀 궁금한데.

 

 


 

 

올곧게 뻗은 시선. 보랏빛 눈동자에는 별이 가득했다. 저런 눈을 본다면 누구라도 믿을 수밖에 없다. 누군가 제 행복을 바란다면 기뻐야 마땅한데, 어쩐지 입안이 온통 씁쓸했다. 명여휘는 바람결에 웃음을 실었다. ……너야말로. 다정하단 말을 들을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다. 상대였다. 어느 부분이 무척 살가워 보였다 하더라도, 그건 시늉에 지나지 않는다. 타인의 상냥함과 친절, 호의 따위를 조금씩 모방하여 드러낸 것이다. 진실로 자신이 다정했던 게 아니라. 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불쑥 의문이 치솟다가도 금세 사그라든다. 곁에 머물지도 못할 사람의 행복을 기원하는 건 대체 어떤 마음일까. 몇 번이고 상처 입으면서도 상대를 더 위한다는 건.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무엇인들 욕심을 누르는 것보다야 쉬울 텐데. 만일 자신이 저 자리에 있었다면 몇 번이고 애원했을 게 뻔했다. 가지 마. 여긴 너무 외로워. 네가 날 찾아온 거잖아……. 그게 상대에게 얼마나 괴로운 구속인지를 알면서도, 알고 있기 때문에 일부러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다. 명여휘는 신지해와 자신의 차이점을 나열해 보다 입을 열었다. 내 행복은 단순해. 네가 애써 바라지 않아도 행복할 거야.

그런데 지해야. 그럼 너는 누가 아껴줘? 네 마지막을 기억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고, 이 우주에 남아 있는 것도 너 하나잖아. 내가 이곳을 벗어나서, 나마저도 너를 잊게 되면. 불공평한 일이다. 서로의 부재 속에서 생이 지속되는 건 동일한데, 망각이라는 편리한 장치를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잊고 싶지 않다고 수없이 되뇌어도 한낱 인간의 의지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명여휘는 서툰 손짓을 지켜보다 신지해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대부분의 세월을 보랏빛으로 반짝였고, 어느 날에는 새까만 공허였으며, 지금은 색이 뒤바뀐 자리였다. 내가 너한테 도움이 되었을까? 어떤 의미로든 말이야. 그러기를 바라. 그조차도 안 된다면 이 만남이 너무 서글프잖아.

 

 

네가 이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나는 다시 불행해질 거야. 가시를 삼키는 것 같다. 날카로운 부분에 긁힌 듯 가슴이 따끔거렸다. 이어지는 대답들이 속을 죄 헤집어 놓는데도 한편에선 비정상적인 희락이 범람했다. 진짜 제정신이 아니구나. 수차례 악담처럼 들려오던 이야기들이 실체를 가진다. 네가 나를 잊지 못했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하면 너는 내내 불행에 시달리게 될까. 소중할수록 놓아줘야 한다는 말은 죽어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이젠 받아들여야만 했다.

너에게는 주고 싶은 것이 많았다. 이곳으로는 물질적인 요소를 가져올 수 없었으니 대부분이 추상적인 개념이었다. 좋은 추억이라든지, 아름다운 풍경 같은 것. 작게 본다면 애정이었고, 크게 본다면 행복이었다. 하지만 내가 남는 것도 최선은 아니겠지. 정말로 이 문제에는 정답이랄 게 없다. 마구잡이로 엉킨 실처럼 일부분을 잘라내야만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다. 네가 상처받을 선택은 하지 않았으면 해. 그럴 바에는 차라리……. 얕은 숨을 내쉰다. 문장이 목에 걸린 듯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줄곧 상대에게 모진 말을 뱉어 놓고서는 이제 와 상대를 위하는 양 위선을 떠는 꼴이 같잖았다. 명여휘는 제 손안에 얼굴을 파묻었다.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원치 않는다면 모르는 척 눈을 돌리면 될 것을, 끝끝내 외면하지 못한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차라리 날 잊어.”

버석하게 메마른 문장이 부스러졌다. 날 가지지 마. 이 기억도, 내 일부도. 그렇게라도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지해야.

 

 

희망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에 불과하다. 내일은 더 나아질 거란 희망, 행복이 찾아올 거란 희망, 언젠가는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는……. 그렇다면 아무런 가망도 없는 일에는 희망조차 존재하지 않는 걸까. 헛된 희망과 완전한 단념 중에 어떤 것이 더 절망적일지는 알 수 없다.

“그럼 그렇게 하자. 우리 둘 다 서로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니까.”

가만 상대를 주시하더니 문득 손을 뻗는다. 그대로 상대의 손을 꾹 붙잡았다가 놓아주었다. 잠깐의 접촉, 꼭 그만큼의 짧은 만남. 우리의 관계는 이다지도 한결같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더 나아질 거란 가능성이 없다. 누구 하나의 잘못은 아니었다. 단지 상황이 그러했다. 상대를 초대하고, 기꺼이 그에 응한다 해도 잠시뿐. 지속할 수 없는 상황에는 헛된 욕심만이 남는다. 그래도 나, 너와 함께한 시간이 고통스러웠던 적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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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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