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門

이런 우주도 좋아하세요?

by 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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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여름 방학이 끝났다. 가을은 무덥고, 화창한 날씨로 막을 열었다. 새파란 하늘. 새로운 학기. 단어만 들으면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청춘의 한 장으로 나아가야 할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K-고등학생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집 가고 싶다. 야, 우리 아직 1교시도 안 했어. 더운데 에어컨 못 틀어? 가을이라 안 틀어준대. 시시콜콜 만담 같은 이야기를 떠들다 보면, 드르륵, 앞문이 열린다. 익숙한 얼굴 뒤로 낯선 사람이 따라 들어왔다. 누구지? 모처럼 발생한 색다른 이벤트에 학생들의 이목이 단번에 집중되었다.

“자, 조용. 우리 반에 전학생이 왔다.”

허리 부근에서 살랑이는 긴 생머리. 바르고 단정한 자세. 입가에 띤 옅은 미소.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약간의 수줍음, 그리고 그를 감추는 설렘 가득한 표정이 기운을 누그러트린다. 금방이라도 하하, 속없는 웃음을 터트릴 것처럼 악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사람의 첫인상을 결정지을 때, 겉모습보다 크게 작용하는 요소는 없다. 그런 점에서 전학생은 학생들의 호감을 사기에 적절했다. 선생님의 짧은 안내가 끝나자 샛노란 시선이 천천히 좌중을 훑었다.

“안녕. 이번에 전학 온 명여휘라고 해. 음…… 잘 부탁해?”

특색이랄 게 없는 식상한 소개였다. 얌전하고 부드러운 말씨는 독특한 축에 들지 못했다. 평범하다면 평범한 인사에 학생들도 의례적인 박수를 보냈다. 신지해도 그중 한 명이었다. 명여휘를 보자마자 처음으로 떠오른 것은 누군가와 닮았다는 감상. 그 뒤를 따른 건 다급한 부정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을 막 겹쳐 보면 안 되지. 이런 건 둘 모두에게 실례인 행동이다. 스스로를 타박하는 동안, 명여휘는 선생님의 지시를 따라 빈자리로 이동했다. 신지해의 옆자리였다.

“해외에서 살다 온 친구니까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1교시 시작하기 전까지 자습하고 있어라. 조례 끝.”

선생님이 교실을 나가자마자 학생들이 명여휘의 주변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안녕. 너 외국에서 왔다며? 원래 어디서 살았어? 너 머리 엄청 길다. 재잘재잘 떠들어 대는 소리가 소란스러웠다. 인파에 밀려 얼떨결에 자리를 내어준 신지해는 허망한 눈으로 반 친구들을 보았다. 안녕, 말 한마디 건네보려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간 지 오래였다. 얘들아. 거기 내 자린데. 미약하게 항변해 봐도 들어주는 이 하나 없다. 어쩐지 서러웠다.

저 멀리 밀려난 신지해는 하는 수 없이 친구들의 곁으로 갔다. 쫓겨났냐? 조용히 해. 시답잖게 다투며 무리를 힐끔거리자 열 명 정도한테 둘러싸인 전학생의 모습이 보였다. 명여휘는 쏟아지는 질문 공세에도 차근차근 대답을 돌려주었다. 하나를 대답하면 두세 개의 질문이 돌아왔지만,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성실했다. 좋은 애인 것 같다, 단순한 평가를 떠올리고 있자니 불현듯 눈이 마주친다. 우연히 부딪혔겠거니 생각하려 해도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다. 신지해는 멀뚱멀뚱 눈을 깜박이다 고개를 기울였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여기서 재차 말하지만, 명여휘의 눈동자는 노란색이었다. 금색보단 밝고 선명했고, 개나리나 민들레 같은 꽃에 비하면 서늘했다. 인간보다는 짐승의 것에 가까운 색채. 그래서인지 명여휘가 입을 다물고 가만히 미소 지었을 땐 어딘지 모르게 선득한 기분이 들었다. 돌연 정적이 내려앉은 것도 그즈음이었다. 공기가 어색하리만치 고요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숨소리조차 크게 들릴 정도였다. 갑자기 조용해지면 귀신이 지나간 거라던데. 우스갯소리로 주고받는 괴담이 절로 생각났다.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적막을 깨트렸다. 얘들아.

“우리 다음 쉬는 시간에 마저 대화하는 건 어때?”

학생들이 눈치를 살피듯 서로를 쳐다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별문제 없이 대화가 오갔는데, 지금은 선뜻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어…… 그럴까? 한 명이 어설프게 대답하자 인파가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떠나는 아이들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던 명여휘가 이번에는 신지해를 향해 손짓했다. 나 부르는 건가? 신지해는 주변 친구들을 쳐다보고선 삐걱삐걱 자리로 돌아왔다.

“안녕. 지해 맞지?”

“응? 아, 맞아. 여휘랬지? 첫날이라 정신없겠다.”

“난 괜찮은데…… 너야말로 정신없지 않았어? 나 때문에 괜히 자리도 빼앗기고.”

“뭐어, 별로 신경 안 써. 멀리서 온 전학생이라는데 다들 궁금했겠지. ……솔직히 조~금 서운하긴 했지만?”

눈물 닦는 시늉을 하며 농담처럼 덧붙이자 명여휘가 작게 웃었다. 얼핏 보기엔 냉랭한 인상인데, 생각보다 웃음이 많은 모양이다. 하긴. 처음 교실에 들어섰을 때부터 내내 미소를 띠고 있긴 했다.

“애들을 좀 더 일찍 보낼 걸 그랬나? 사실 나, 너랑 먼저 대화해 보고 싶었거든. 우리 짝이잖아.”

명여휘가 비밀 이야기를 전하듯 소곤거렸다. 다른 아이들에게 들리지 않게끔, 손을 입가에 댄 채였다. 그래? 그럼 지금부터 자주 이야기하면 되지! 신지해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역시 좋은 애인가 보다. 평가가 확정 지어지는 순간이었다.

 

 


 

“전학생 좀 특이하지 않아?”

“그래? 난 좋은 애 같던데.”

“아니,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분위기가 좀 독특하다니까?”

“그런가?”

신지해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잘 모르겠는데. 뒤따라오려던 말은 적당히 삼켰다. 잘못 트집 잡히면 눈치가 없다느니, 뭐라느니 하며 한소리 들을 것이 뻔했다.

명여휘가 전학 온 이후로, 신지해의 학교생활에는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명여휘와 엮이는 일이 늘어난 탓이었다. 옆자리라는 이유로 학교 구경도 시켜 주고, 어려워하는 일도 이래저래 도와주고. 붙어 다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분이 쌓였다. 그 사이 명여휘도 여러 사람들과 친해지긴 했지만, 가장 편하게 여기는 건 신지해인 것 같았다.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신지해를 먼저 찾는 것만 봐도 그러했다. 흠. 이만하면 친하다고 해도 되지 않나? 실없는 상념을 이어가던 중, 옆에 있던 친구가 팔을 툭 건드렸다.

“야, 축구 아이스크림 내기한다는데 보러 갈래?”

흠. 신지해는 운동장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다들 밥을 마시고 오는 건지 벌써부터 경기가 한창이었다. 판이 제법 커진 탓에 구경꾼도 제법 모여 있었다. 평소였다면 저 사이에 껴서 구경 정도는 같이 했을 텐데, 오늘따라 영 내키지 않는다. 신지해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난 그냥 교실로 갈게.”

“뭐, 그러든지. 그럼 나 혼자 간다.”

휘휘 손을 흔들고 미련 없이 떠나는 친구를 바라보다 방향을 돌렸다. 점심시간도 아직 한참 남았으니 교실로 급하게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신지해는 발이 닿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운동장을 뒤로하고, 중앙 화단을 지나 체육관의 구름다리 아래를 넘어가자 구교사 건물이 보였다. 지금은 시설 노후화로 인해 사용하지 않는 곳이었다. 다친 사람들이 많다는 소문 때문인가, 구교사에는 괜히 으스스한 느낌이 감돌았다. 으음, 다시 돌아가야겠네. 어차피 여긴 볼 것도 없으니까……. 생각하던 찰나.

깜박.

시야 한구석이 점멸했다.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꾹 감았다 뜨자, 다시금 어느 지점이 깜박였다. 착각이 아니었다. 신지해는 곧장 빛이 흐려진 자리를 확인했다. 그곳에는 낯익은 인물이 서 있었다. 바람 한 자락 불지 않는데도 짙은 색조의 머리카락이 허공에서 나부꼈다. 깜박. 그 주변이 계속해서 어두워지고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빛이, 한 점에 고이고 있었다. 밝은 기운이 빠져나간 자리에 다시 빛이 밀려들면서 자그마한 세상이 끊임없이 명멸하는 것처럼 보였다. 빛이 고인 자리에는 환한 구가 존재했다. 태양의 일부를 그러모은 것처럼 찬란한 형상이었다. 그리고,

―꿀꺽.

“……엥?”

얼빠진 소리가 튀어나왔다. 삼켰다. 무얼? 빛을. 누가? 명여휘가! 깨달은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아무래도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선득하게 빛나는 샛노란 눈동자. 그 위로 번진 노을빛 색채. 새까만 동공 속에서 휘몰아치는……

……우주?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신지해는 우주의 단편을 목격했다. 그것은 별이 빼곡한 은하가 아니라 블랙홀에 느리게 휩쓸리는 외계였다. 아름답다기보단 섬뜩한 광경이었다. 내가 대체 뭘 본 거지? 넋 나간 얼굴로 바라보고 있으니 명여휘가 검지를 들어 입술 위에 대었다. 쉿.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살그머니 휘어진 눈매가 비일상을 예고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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