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위한,
마음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어.
봐, 우리가 그렇잖아.
그 모든 것이 의미 없는 약속이었다면, 우린 왜 이 자리에 있는 거야? 대답을 듣고 싶은 건 아니었다. 답을 알고 있어서였다. 대체 가능한 관계가 좋다던 이를 억지로 붙들고 부정을 강요했다. 원하는 대답을 들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면 될 것을, 자라난 욕심이 기어이 상대를 이 자리까지 끌어내렸다. 상대는 자신의 고집에 응해 준 것이 전부였다. 명여휘는 자신에게서 멀어지던 신지해를 떠올렸다. 뒷짐을 지고, 서너 걸음 물러나 이야기하던 모습. 그래, 우리한테는 딱 그 정도의 거리감이 어울렸을지도 모르겠다. 단순하고 좋잖아. 더 나아가서 무얼 하겠다고…….
이럴 거라면 차라리 계속 잊고 있는 게 나았을까. 뇌에 자리한 공백이 불쾌할지언정, 서로를 상처 입히지 않았던 때가. 제 의지 하나 포함되지 않은 망각에 빠져 우주에서 말미암은 연락을 수신하지 못하던 그 시점이. 나도 널 보고 싶었어. 반가웠지. 다른 이유를 다 떠나서, 그냥. 난 널 만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거든. 사람은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타인에게 전하는 경향이 있다. 널 떠나지 않을 거야. 그건 아마 네게서 듣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을까. 명여휘는 언제나 남겨지는 쪽이었다. 정을 준 이들과는 오래 지나지 않아 멀어졌다. 이별의 방식은 다양했다. 다툼, 불화, 거리감을 비롯한 내부적 요인과…… 상대의 죽음. 소유를 떠나 곁에 두고 보기만 하면 되었는데, 그 간단한 소망 하나 이루어진 적이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평생을 말해선 안 되었다. 서로가 원하는 바가 달랐으므로.
“내 생각도 그래.”
하지만 진실을 마주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아?
그러고 보니 너는 내게 아무것도 묻질 않네.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이야기하는 건지…….
우주는 바깥의 세상이다. 나는 안쪽의 사람이었다. 이것은 진부한 운명이었다. 사람이 우주를 정복할 수 없고, 우주가 지구를 침범할 수 없듯이.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흘러간다. 떠나지 않겠다는 다짐은 어디까지나 내 안위가 위협당하지 않는 선에서의 일. 확신을 주는 것은 어느 쪽이었나. 함께 있어 주겠다는 것? 아니면, 언젠가는 널 떠나고 말 거라는 거? 하지만 넌 같이 죽어주는 걸 원하진 않을 거잖아. 어떻게든 날 내보낼 거면서. 상대에게는 대체 뭘 해 주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정답이었을까? 명여휘는 흐리게 웃었다. 일평생 변치 않을 것을 찾아 헤맸다. 사람이든, 감정이든, 혹은 그 이상의 어떠한 존재든. 너무 많은 걸 바란 모양이지. 결국 무엇도 얻어내지 못한 걸 보면. 닮은 구석을 찾았네, 우리.
명여휘는 과거를 후회하지 않는다. 얼마나 귀한 것을 놓치든, 얼마나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든.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로만 남겼다. 그러나 지금 순간만큼은 후회를 직감하게 된다. 이유는 단순했다. 상대가 너무 소중해져서. 이미 잃은 것에 깊은 정을 쏟아 버려서.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리석은 선택을 반복하니까……. 원망은 방어기제였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 없어 타인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처음엔 제 애정이 짓밟힌 것 같아 서러운 마음으로, 이제는 제 선택이 틀린 것 같아 불안한 마음으로. ……불안? 아니. 그렇게 느낄 리 없는데……. 마음을 다잡는다. 발치에 흐르는 은하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자그마한 소리로 답했다. 미안. 난 너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나 봐. 건조한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따지면 세상에 안 그런 일이 어딨어.”
그 논리라면 우리의 관계만큼 허무한 일도 없다. 내가 너를 잊어버리고, 너도 날 다시는 기억하지 못한다면. 스쳐 가는 인연조차 되지 못하고 스러질 게 뻔했다. 단 한 번도 그러길 바란 적 없는데, 제 앞에는 늘 닫힌 결말뿐이다. 공상을 펼칠 수도 없게 완벽하게 마무리된 이야기. 그럴 바에는 네 말대로 미완성이 나을 수도 있겠다. 짧은 대화 속에서 생각을 몇 번이나 고쳐먹는 건지……. 순응은 체념의 일종인 것 같다는 실없는 감상이 떠올랐다. 널 놓치고 싶지 않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네가 행복하길 바라게 돼. 그러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해? 널 떠나는 게 정답인 거야? 몇 번이고 자문해도 답을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어떤 선택이 최선인지를 알면서도 늘 최악만을 골라낼 테니까.
고개 느릿하게 끄덕인다. 시선은 바닥에 붙박인 채였다. 생각에 잠긴 것도 같고, 바닥에 펼쳐진 별무리를 감상하는 것도 같은 행위였다. ……좋아. 이해했어. 답변이 떨어진 것은 일정 시간 침묵이 흐른 뒤였다. 내가 네 외로움까지 가져갈 순 없겠지만. 웃어 볼게. 그게 정말 깨달음을 바탕으로 한 말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우리의 세계가 맞물릴 수 있는 시기는 한정적이다. 이 만남이 성사된 것부터가 기적이나 다름없다는 걸 안다. 오늘이 지나고 나면 다음을 기약하기 어렵다는 사실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예감이 든다. 적어도 헤어질 때까지는 웃는 모습을 보이는 게 낫겠지. 이번에는 꼭 웃으며 헤어지자, 우리.
사람은 기억으로 살아간다. 그게 아무리 괴롭고, 고통스러운 기억일지라도 분명히 얻어가는 것이 있었다. 그러니 이 우주를 벗어나더라도 너를 잊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너의 존재도, 나의 존재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지워지는 것은 싫었다. 고통스러운 기억만을 안고 가게 된대도 괜찮았다.
“나 욕심 많은 거 알면서.”
이것도 내 욕심이겠지. 억지로 이곳의 문을 열었던 것처럼. 명여휘는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난 그 반대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온 게 아니라, 네가 나를 초대한 거 아니야?”
제 몽상과 섞였다고는 해도 이곳은 엄연히 상대의 영역이다. 그렇다면 전소한 우주에 별을 데려온 것은 누구일까. 내내 무언가를 그리워하던 나의 상상? 아니면 내게 별을 선물하고 싶었던 너의 다정? 후자라면 조금 슬플 것 같네. 결국 이 공간에 너를 위한 건 하나도 없다는 거잖아. 그러니까, 나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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