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역시 영원은 존재하지 않는구나.
이러니 평생을 약속하는 행위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
헷갈리게 굴지 않기. 솔직하게 대해주기. 언젠가 그런 약속을 나눈 적 있었다. 우리가 주고받은 모든 약속이 그러하듯 절대적인 제약은 아니었다. 허점이 많고, 어긴다 하더라도 크게 책망하지 않을. 말을 꺼내기 직전에야 재차 사고하게 만드는, 딱 그 정도의 구속. 이제 와 되짚어 보면 우리는 서로의 본질을 뒤엎으려 했던 것 같다. 진실을 알아내고 싶다는 그럴듯한 명목하에서.
누구에게든 부러질지언정 굽힐 수 없는 선이란 게 존재한다. 스스로를 오롯하게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은 모순 속에 갇혀 살 수밖에 없고, 일평생 타인의 자취를 좇은 사람은 깊숙이 파묻은 감정을 끄집어내지 못한다. 거스르려 할 때마다 본능적인 거리낌을 느끼던 건, 그게 자신을 망가트리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뿌리를 파헤쳐 나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일인 탓이었다. 그리하여 갖은 변명을 붙여 기어이 약속을 어기고야 만다.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 죄 그런 식인 이상, 우린 필연적으로 상대를 상처 입힐 수밖에 없다. 서로를 할퀴어 놓은 상처는 아물 즈음 다시 벌어질 것이다. 희망이라는 족쇄 아래, 체념이 갈고리처럼 파고든다. 너한테는 내가 마냥 반갑지는 않았겠다. 명여휘는 신지해를 직시했다. 속 어딘가가 뒤틀릴수록 입가에 걸린 미소는 점차 해사해진다. 이런 기분은 정말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인정할게. 내 선택이 우리를 망치고 있다는 거. 아. 다시 매캐한 냄새가 스친다. 잿더미가 된 누군가의 유해였다. 이 관계가 누군가의 죽음으로써 완벽해질 수 있다면…….
“글쎄…… 이젠 모르겠어.”
명여휘는 가뿐하게 손을 펼쳤다. 별은 그곳에 없었다.
나는 비로소 너를 떠나보낼 수 있겠지.
침묵은 곧 상대에게 의지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설령 상대가 알아주길 바라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사람일진대, 타인을 헤아리려 해 봤자 얼마나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겠는가. 대화는 간극을 좁히기 위한 수단이고, 이해는 상대를 받아들이기 위한 과정이다. 그걸 포기하는 건 단절을 의미했다. 넘을 수 없는 경계가 죽 그어지는 것이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가르는 어둠처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입 밖으로 내지 않기로 결정한 순간, 무의식에서는 이미 인정하고 만 거니까. 무의미하다. 시간을 끌기 위한 목적이라면 그럭저럭 통하겠지만,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얻고 싶은 게 뭐야? 지나치게 소중하지도 않고, 언제든 대체할 수 있는 관계? 네가 예전에 말했던 것처럼 말이야. 모르겠다. 또다시 몰이해가 쌓인다. 불안정하게 올라간 의문들이 위태로웠다. 누구도 이어가지 않아 미완성인 이야기는 단순히 잊히기만 하지 않는다. 잘게 쪼개지고, 흩어져 그리워할 방법조차 사라진다. 어느 밤에 문득 기억을 떠올리게 되더라도 되새길 흔적이 없다. 아니지, 너라면 그러길 바라려나…….
“나도 알아. 너 사람인 거.”
너도 욕심내는 것들이 있겠지. 개중에는 타인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가지고 싶은 게 있을 테고. 이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조합해 본다. 네가 빼앗고 싶었던 건 그 아이일까? 그 애의 옆자리? 아니면 그 애가 보이는 애정? 어느 쪽이든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만하다. 하지만 누구도 그걸 잘못이라 말할 수는 없다. 인간은 누구나 추한 면을 지니고 있다. 제아무리 추악한 감정을 가지더라도 겉으로 표출하지 않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신지해는 그다지 위협적인 상대가 아니었다. 무언가를 대놓고 질투해 본 적이 있긴 할까. 빼앗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인 적은? 그만큼 간절하게 갈망하긴 했을까?
들끓는 감정에는 이름이 없다. 명여휘는 다시금 충동에 휩싸였다. 이번에는 조금 짜증스럽기도 했다.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다. 상처가 곪은 부분을 건드리고, 자신에게 느끼고 있는 죄책감이나 부채감 따위를 이용하고 싶었다. 자신이 남길 수 있는 자국은 고작 이런 것이다. 애정, 우정, 미래 같은 긍정적인 낱말이 아니라. 물론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괜히 화풀이하는 꼴을 보이긴 싫었다. 자신이 무슨 억지를 부려도 죄인이라도 된 양 굽히고 드는 모습은 더더욱 보고 싶지 않았고. 언젠가는 오늘을 후회하게 될 것 같아. 그리고 난 전처럼 너를 원망하겠지……. 먼길을 돌아 도달한 자리는 결국 원점이었다.
“왜? 일방적인 애정만큼 오래 유지되는 것도 없을 텐데.”
가벼운 투였다. 갸웃 기울어진 고개가 일견 천진하다. 감정은 일방향일 때 가장 길게 소모된다. 맞부딪히며 깎여나갈 부분이 없어서 그렇다. 뾰족하게 솟아 감출 수 없는 부분들을 스스로 갈아내고, 억지로 덮어 두다 보면. 감정은 어느 순간 그리움이 되고, 아릿한 추억으로 남는다. 하지만 그런 단계를 거치지 못한 것들은 미련이라는 형태로 변모하기 쉽다. 일부는 집착으로 남기도 했다. 예상치 못한 이별일수록 변화는 극명했다. 미처 해소하지 못한 마음에 생긴 상처는 누구도 치유할 수 없었으니까. 내가 웃었으면 좋겠어? 그러면 네 마음이 조금 편해질까? 소리가 된 문장은 하나뿐이었다. 그 식상한 불행에 내내 앓았으면서, 타인에게는 여상한 모습을 바라는 것도 너무한 일이다. 죽음은 당사자만을 데려가는 게 아니다. 주변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송두리째 앗아간다. 그래서 네가 여태껏 포기하지 못한 거 아니야? 네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게 네가 아니라서.
폐허와 같은 사랑이다. 우주에는 터가 없다는 게 다행으로 여겨질 정도로.
“……네가 그렇다면야.”
담담하게 머릿속을 정돈한다. 이대로는 두서없이 이야기를 늘어놓게 될 게 뻔했다. 사랑하는 게 많으면 이래서 문제였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잔뜩 생기게 되니까. 일단 부모님부터 이야기해야 하나? 가족을 사랑하는 건 나한테는 너무 당연한 일이라, 선물받은 물건들도 전부 소중하게 여기고 있어. 만년필이라든지, 손수건 같은 건 아직도 지니고 다니거든.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너처럼 일일이 나열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야. 나한테 영향을 미친 사람을 고르기엔 수가 거의 없고, 한창 아껴주었던 친구들은 내 곁을 떠난 지 오래니까. 그 애들에게 받았던 선물도 버리지 않았어. 몇 개 망가지긴 했지만. 미약한 웃음이 흘렀다. 애정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나는 단순한 물건보단 의미가 담긴 걸 좋아해. 나를 위해 선물한 거라면 더 좋고. 얕은 숨 들이마신다. 호흡을 고르듯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이윽고 입술이 달싹이면,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래서 별이 좋아진 거야. 네가 나한테 선물한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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