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門

不變

by 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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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아직도 모르는 게 너무 많은 것 같아.

서로에 대한 건 더더욱 그렇고.

 

눈을 떴을 땐 이미 낯선 장소였다. 천장이 새하얬다. 시야는 전과 달리 한쪽만 사물을 비추었고, 코에는 싸한 소독약 냄새가 스쳤다. 병원이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상은 의문. 내가 왜 병원에 있지. 되짚어 보아도 제대로 기억나는 것은 없다. 마지막 기억은 담력 시험을 위해 구교사에 도착한 상황에서 그쳤다. 학생 회장의 지시를 따라 제비를 하나 뽑고, 자신의 번호를 확인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대로 암전. 퓨즈가 나간 것처럼 이후의 기억이 전부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어둠을 헤집어 보려 하자 불현듯 왼눈이 욱신거렸다. 속이 뒤집히는 통증이었다. 더없이 익숙한 고통이면서도, 결코 적응할 수 없는 격통이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왼쪽 눈이 아예 사라져 있었다. 이유는 모른다. 기억 사이 자리 잡은 공백 속에 원인이 있겠거니, 하는 막연한 짐작만이 남았다.

부모님을 만났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무척 마음고생을 겪으신 듯했다. 열흘 정도 실종되었다고 하던가. 솔직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열흘이란 시간은 짧고도 길었다. 그 기간 동안 겪었던 일을 아무것도 기억해 내지 못한다는 게 이상했다. 어딘지 허전한 마음이 드는 것도 그랬다. 무언가 중요한 걸 잊어버린 기분이었다. 그래봤자 좋은 일 하나 없었을 텐데, 깊은 상실감이 생기는 것도 의아했다. 기억은 대체 왜 사라진 거지? 눈을 제외하면 별다른 외상도 없었다. 피를 흘려 체력이 떨어졌다는 점을 제외하곤 멀쩡하단 말도 들었다. 아마 눈을 잃을 때의 충격으로 기억이 덩달아 지워진 것이 아니냐는 게 의사의 소견이었다. 극심한 고통을 겪고 나면 뇌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트라우마가 될 기억을 숨기곤 한다며. 지금에야 제대로 된 치료를 받고 진통제 효과가 돌아 통증이 덜하다지만, 당시에는 상태가 심각했다고 한다. 어딘가에 찔리거나, 상처를 입은 게 아니라 누군가가 억지로 빼낸 것처럼. 잔혹한 광경에 비해 비교적 깔끔한 상태였다고. 하지만 선생님. 기억을 잃은 건 저뿐만이 아니잖아요. 멀쩡히 돌아온 친구들도 전부 기억하지 못하던데요. 명여휘는 묻지 않고 가만히 웃었다. 무의미한 의문이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명여휘는 이따금 허무한 기분에 시달렸다. 깊은 바닷속에 하릴없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세상에 녹아들지 못하고 홀로 유리된 듯한 감각. 그렇다면 차라리 모든 감각이 아득히 멀어지는 편이 나을 텐데. 오히려 한껏 예민해진 감각에는 늘 극심한 공허가 함께했다. 어느 순간부터 명여휘는 말수가 줄었다. 그러다가도 괜히 지는 기분이 들어 더 자주 웃곤 했다. 부모님이나 친구들과 지낼 때에는 그나마 괜찮았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어느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갈피를 잃은 생각이 자꾸만 가지를 뻗어나갔다. 기억은 내 것인데, 어째서 내 의사와는 무관하게 사라진 걸까. 나는 무얼 그리워하는 거지? 그곳에선 무얼 잃고, 무얼 얻었을까. 내가 찾고자 하는 건……. 너였을까?

 

그러는 동안에도 실종된 아이들에 대한 수색은 꾸준하게 진행되었다. 별 진척은 없었다. 무사히 돌아온 사람들은 전부 기억을 잃었고, 돌아오지 못한 이들은 아무런 단서도 남기지 않았다. 참고인으로 간단한 조사를 받던 중, 명여휘는 실종자 명단을 요청했다. 친구들의 얼굴을 보면 무어라도 기억이 날 것 같다는 명목이었다. 명단에 적힌 이름은 대부분이 낯설었고, 몇몇 아이들의 것만이 익숙했다. 같은 반이거나, 오며가며 마주친 적이 있거나. 개중에는 전혀 접점이 없지만 낯익은 이름도 존재했다. 그 이름들은 한 명씩 소리 내어 읊어 보기도 했다. ■■■, ■■■, 신지해. ……신지해? 확실히 처음 듣는 이름이다. 학교에서도 들어 본 적 없었다. 자신과 엮이지 않을 부류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분명한 기시감이 들었다. 묘한 일이었다. 신지해. 명여휘는 상대의 이름을 재차 발음했다. 지해야. 아, 부른 적 있는 이름이다. 그것도 몇 번이고. 우린 무슨 관계였어? 내가 저버린 기억에서 말이야.

 

 

난 그것도 걱정돼. 의리보단 네 몸을 더 챙겼으면 좋겠거든.

――긴 한데, ―네가 더――.

 

나도 네가 무사하길 바라던 때가 있었지.

――――들을 수―――― 기쁘네.

 

……날 위해 희생한 것처럼 말하네. 그런 건 바란 적도 없는데.

――――너도――이기적인 마음――――?

 

그날 명여휘는 꿈을 꿨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꿈이었다. 상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이름도, 표정도, 목소리도. 하나같이 노이즈가 낀 것처럼 흐릿했다. 실제로 경험한 일일까? 아니면 줄곧 의문에 시달리던 뇌가 만들어낸 혼동일까. 고민해 보아도 정답은 나오지 않았다. 깨끗이 소각된 기억은 어떠한 단서도 내놓지 못했다. 외면하고 묻어 두는 건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라, 명여휘는 끊임없이 꿈을 곱씹었다. 무어라도 실마리가 잡힐 때까지. 아주 중요한 약속을 했던 것 같은데. 그게 뭐였는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아. 너는 내가 잊은 게 뭔지 알고 있어?

 


 

계절이 바뀌지 않는다. 이곳은 영원한 겨울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된 이후로도 눈을 감으면 여전히 열아홉의 그날로 돌아가고 만다. 명여휘는 겨울의 한복판에서 내내 누군가를 기다렸다. 돌아오지 않을 교차점을 하염없이 그리워했다. 그게 무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그냥 그렇게 했다. 어느 낮엔 바다를 찾았고, 어느 밤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습게도 그 행동은 퍽 도움이 되었다. 한 번씩 끝없는 수렁에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에도, 기억의 공백을 헤매다 길을 잃었을 때에도. 괜찮은 이정표로 작용했다. 방향조차 알지 못하는 상황에선 두루뭉술한 목표도 제법 유용하다는 걸 덕분에 깨달았다.

 

이변이 생긴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이나 지난 시점. 평범하기 그지없는 하루를 보내고서 잠든 시각이었다. 꿈이라는 걸 알아차리기 전, 처음으로 인지한 요소는 무한히 어두운 공간이다. 빛 한 점 들지 않아 새까만 장소는 누군가의 겨울처럼 외롭게만 느껴졌다. 이윽고 생겨나는 별무리로 이루어진 길, 걸음을 인도하는 은하수, 불어올 리 없는 바람 한 자락, 옅어지는 매캐한 냄새, 쏟아지는 별…….

우주를 담아낸 시선을 마주한 순간 깨닫는다.

 

너였구나.

안녕. 줄곧 찾아 헤맸어.

 


 

“그렇다면 나도 한 가지는 확실히 돌려줄 수 있겠네.”

나는 한 사람을 다른 누군가로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추억은 개개인과 만드는 것이잖아.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에 옅은 미소를 머금는다. 처음부터 너는 내게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었거든. 간략한 진실만으로도 충분했다. 애초에 전제부터가 틀렸으므로. 상대에게 특별한 존재로 남고 싶었던 건 이쪽이 먼저였다. 그리 소중하지도 않고, 언제든 대체할 수 있는 관계를 누가 이토록 애틋하게 여기겠는가. 명여휘는 신지해의 요구에 응한 것이지, 진실로 그러길 바란 것이 아니다. 사람이든, 상황이든. 우리를 잇는 접합은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었다.

 

상냥한 답변이다. 거짓이라 여기고 싶을 정도로. 명여휘는 상대의 얼굴을 가만 응시했다. 이전에는 쓰지 않았던 안경을 지나, 콧잔등을 가로지르는 흉터와 그 아래에 어린 미소를 본다. 다행이네. 말하며 담백하게 손길을 거둔다. 내가 떠나더라도 오늘처럼 웃는 날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만약, 내가 이곳에 남기로 결정한다면……. 어울리지도 않는 가정이 일순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너도 마찬가지야. 도움이 되었다는 말로는 부족하지. 더한 파문이 일기 전에 상념을 털어 낸다. 여러 형태로 바뀌어 간 감정에는 더 이상 이름을 붙이지 않기로 했다. 연민이든, 동질감이든, 우정이든. 명칭을 가져다 붙인다고 해서 그 형태로 고정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무의식에서는 이미 결론을 내린 걸지도 모르고.

 


 

기척이 멀어진다. 두려움에 휩싸인 걸음걸이가 위태로운 소리를 냈다. 일부러 마주하지 않았는데도, 흔들리는 눈빛이 눈에 선했다. 미안해. 무의미한 사과는 채 형상을 갖추기도 전에 사그라들었다. 그런 식으로 너를 붙잡고 싶진 않았다. 명여휘는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리는 대신, 고개를 돌렸다. 거짓을 고하는 것도 아니건만, 상대와 마주보는 것이 어려웠다.

“내가 너를 떠나가겠다는 게 아니야. 네가…… 나를 버렸으면 해.”

모순적인 말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그 방법 이외엔 떠오르는 게 없었다. 명여휘는 다시 호흡을 골랐다. 아무리 숨을 가다듬어도 먹먹했다. 벌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여야만 겨우 소리를 낼 수 있었다. 이곳을 나가면 나는 너를 잊게 되겠지. 전처럼 끊임없이 공백을 되새기면서도, 그 안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찾을 수 없을 거야. 하지만 넌 아니잖아. 나에 대한 기억을 잃지도, 우리가 나눈 대화도 고스란히 남아 있을 텐데.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잘 인식이 되지 않았다. 기계적으로 늘어놓는 이야기는 관성에 의한 것이다. 상대를 위하는 척, 적당히 꾸며내기만 하면 되는 말들. 이 또한 나의 욕심이니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건 너무 괴롭잖아, 지해야……. 비극을 선고하는 말이 아프게 떨어졌다. 네가 계속 불행할 거라면 차라리 내 눈앞에서 불행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내가 이곳에 남아야 할까. 생을 뒤로하고 네 옆에 남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정말 예상에 없는 일이었는데. 사랑하는 것들이, 사랑할 것들이 바깥에 있다며. 어떤 상황에서든 나를 우선시하리라 말해놓고서. 제대로 지키는 말이 하나도 없었다. 너는, 내가 나로서 존재하지 못하게 해. 자꾸만 무언가를 포기하고 싶어져. 정말 제정신이 아니게 된 것 같아…….

 

 

 

아무 대답도 없이 선뜻 손을 뻗어 잡아준다. 이번에는 단숨에 멀어지지 않았다. 자신에 비해 확연히 낮은 온도가 손안에 감돌았다. 죽은 사람이라 그런가……. 상대가 눈앞에 버젓이 존재하니, 죽었다는 생각도 별로 들지 않는다. 이러다 보면 언젠가 현실에서도 마주칠 것만 같았다. 불가능한 망상임을 알지만, 기대를 거두지 않기로 했다. 그 보잘것없는 소망 덕에 우리가 재회할 수 있었던 거니까.

"……우주는 계속 춥겠네."

문득 실없는 소리를 내뱉는다. 이곳의 별에는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이 지니는 체온은 당연히 존재할 수 없었다. 명여휘는 손에 힘을 실었다. 나가면 바다에 가야겠다. 그곳이 우주를 가장 많이 닮아 있을 테니까. 나가기 직전까지 생각하다 보면, 본능이 나를 바다로 이끌지 않을까. 그곳에서 나는 다시 너를 기다리겠지. 무얼 그리는지도 모르면서. 언제쯤이면 이별에 무뎌질 수 있을까. 나는 구교사에서도, 지금도 변한 게 없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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