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門

波浪

by 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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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냥 알지 못하는 채로 넘어가야 해? 생을 반복할 순 없잖아.

그렇다 해도 나는 널 알고 싶어. 넘겨짚는 것만으론 부족하니까.

 

 

파도가 밀려든다. 주홍빛 물길이 해안가를 휩쓸고 지나가면 다음으론 짠 내음이 물씬 풍겼다. 새하얀 포말이 사그라들며 짙어지는 모래가 퍽 볼만한 광경을 만들어 냈다. 어느 날의 기억이었다.

해소할 수 없는 불안감이 차오르는 날이면 습관처럼 바다를 찾았다. 끝없이 펼쳐진 해양을 바라보다 보면 갑갑한 속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았다. 이렇다 할 계기는 없다. 좋게 포장하면 직감이 이끄는 대로 움직인 것이고,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사람이 꼭 합당한 논리만을 따르는 존재는 아니었으니까. 이제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근거를 짚을 수 없는 행동은 언젠가의 약속이 남긴 흔적이었다. 평생을 기억하겠다던 그 하잘것없는 이야기 하나로. 망각으로도 어찌하지 못할 잔재가 이어진 것이다.

명여휘는 파도가 닿지 않을 자리에서 지평선을 응시했다. 저 멀리 보이는 경계선에선 때마침 노을이 지고 있었다. 새파랗던 하늘과 수면에는 점차 붉은 기운이 맴돌고, 세상이 따뜻한 색감으로 물들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풍경이다. 소유할 새도 없이 금세 사라지는 것. 낙조가 천지를 물들이는 시간은 이다지도 짧은데, 어째서 그 한순간에 마음을 빼앗기고 마는 건지……. 한 사람에게 무언가를 각인시키는 데에는 시간보다 중요한 요소가 많은 모양이다.

머지않아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공기는 한층 더 쌀쌀해졌으나, 겨울의 바다는 여전히 잔잔했다. 이따금 세차게 일렁이는 너울은 육지에 닿기도 전에 자취를 감추었다. 명여휘는 찬찬히 고개를 들었다. 오늘따라 유독 밤이 어둡다 했더니, 저 널따란 하늘에 별 하나 보이지 않는다. 오직 은은한 달빛만이 등대처럼 지상을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도시에서야 원래 별을 찾아보기 힘들다지만, 바닷가에서는 흔히 별이 반짝이곤 했는데.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았다. 자그마한 빛이라도 건지기 위해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가, 무의식적으로 왼눈을 더듬는다. 무용한 행위임을 알아채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반으로 줄어든 시야에 적응하려면 한참은 더 기다려야 할 듯싶었다. 그래도 살아가다 보면 익숙해질 날이 오겠지…….

체념하며 고개를 내리자 문득 차가운 것이 닿았다. 이마 위로, 콧잔등 위로, 뺨 위로. 제 존재감을 알리듯 찬 기운이 차근히 내려앉는다. 명여휘는 망연히 손을 펼쳤다. 차게 얼어붙은 손바닥에서 새하얀 결정이 켜켜이 피어났다가 체온에 녹아내렸다. 자그마한 탄식이 흘렀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별을 대신하는 첫눈이었다.


 

“그럴 이유가 뭐 있어? 난 예전부터 충분히 표현했던 것 같은데.”

얕은 웃음이 새었다. 눈치채지 못했다면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헷갈리게 행동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기억하겠다든지, 소유라든지. 정을 준 상대가 아니라면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일이다. 타인을 대하는 태도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증명할 방도가 마땅치 않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명여휘는 애착이 강한 만큼, 편애하는 대상에겐 한없이 무르게 굴었다. 다정한 것과는 또 다른 성질이었다. 자신이 상처 입게 되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간다. 몇 번을 거절당하고 밀려나더라도, 완전히 멀어지는 것이 아닌 이상은 거듭해서 시도하는 것이다.

 

“반응이 영 떨떠름해 보이네.”

툭, 찔러보듯이 말한다. 얘도 참 유별나다. 본인이 잘생겼다느니, 귀엽고 사랑스럽다느니 이야기할 땐 언제고, 도움이 되었다는 말 한마디에 겸연쩍어하는 게 좀……. 누구 말마따나 귀여워 보이는 것도 같고. 눈동자 슬그머니 아래로 내렸다가, 다시 제자리로 되돌린다. 네가 말하는 건 괜찮고, 나한테서 듣는 건 낯간지러워? 익숙해질 수 있도록 자주 말해 줘야 하나. 아니다. 괜히 여러 번 말할 필요는 없겠지. 그냥 네가 마음 편히 웃을 수나 있었으면 좋겠다.

 


 

명여휘는 멍하니 상대를 응시했다. 뺨이 덴 것처럼 홧홧했다. 망자가 흘리는 눈물에도 온도가 존재하는 걸까. 아니면 순전히 내 착각에 불과한가. 우습게도 그런 감상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무언가 감흥이 생겨야 할 것 같은데, 어딘가 고장난 것처럼 정신이 아득했다. 삐――. 이명이 머리를 뒤흔든다. 속이 울렁거렸다. 먹은 것도 없이 안에 든 것을 죄다 토해 내고 싶다가도, 정말로 꺼내 놓고 싶은 건 따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나마 감각이 돌아온 것은 신지해가 몸을 일으킨 이후였다. 우는 얼굴이 시야에 한가득 들어섰을 때. 여휘야. 설움이 담긴 목소리가 자신을 호명했을 때. 미안해. 역시 난 너 못 버릴 거 같아. 제 욕심을 충족시키기에 마땅한 대답이 돌아왔을 때……. 명여휘는 비로소 자신의 과오를 인지했다.

 

비이성적이다. 한순간의 충동에 휘둘리는 꼴이다. 합리적이지도 않고, 잃을 것이 너무도 많은 선택이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매번 언급했듯이 바깥에는 남겨둔 미련이 많았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 사랑할 것들.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야. 어차피 그곳에는 네가……. 정신이 혼몽했다. 사고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내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지? 한쪽 시야가 불완전하다는 걸 자각한다. 노이즈가 번진 것처럼 눈앞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뺨을 타고 떨어지는 눈물이 상대의 것인지, 제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나도 널 버리고 싶지 않아. 찰나에 불과한 순간이더라도 널 기억하고 싶어. 내가 불가능한 일만 바라는 거야? 이런 건 불공평했다. 할 수만 있다면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망각은 신의 축복이라고들 하던데, 원치도 않는 소실이 어떻게 축복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내 일부를 네게 주면, 그럼, 나는? 그 일부를 왜 잃었는지조차 모르는 채로 평생을 살아가게 될 텐데.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에 내도록 괴로워하면서. 그렇게 나는, 나는…….

“……그럴 거면 차라리 전부를 달라고 해.”

이젠 모르겠다. 내가 뭘 하고 싶은 건지, 너한테 뭘 원하는 건지. 단지 간절함만이 잔류해 사고를 휘저었다. 내가 별을 사랑하게 만든 건 너잖아……. 음절이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숨이 막혔다. 한 줌이 채 되지 않은 이지를 그러모아 호흡을 가다듬어도 폐부가 틀어막힌 것처럼 갑갑했다. 상대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원망을 쏘아붙이고 싶었다. 이미 늦었어. 난 어떤 선택을 해도 불행해지겠지. 네가 날 이렇게 만든 거야. 그러니 제발…….

 


 

 

천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있던 체온이 이젠 온전히 맞닿았다. 장갑을 착용한 상태에서는 장갑 탓으로 돌릴 수 있었는데. 이젠 변명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구태여 부정하고 싶진 않았다. 응. 그렇네. 짤막하게 내뱉은 답변이 마냥 거짓은 아니었다. 살아 있는 것 같아. 덧붙이는 말끝에 느슨한 웃음을 매단다. 체온도, 변해 버린 외형도. 하나같이 인간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게 완전한 죽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고 여겼다. 우리가 서로에게 닿아 있으니까.

“나도 그래. ……이젠 겨울이 그리워질 것 같아.”

춥고 건조한 시기. 밤이 길어지는 계절. 해는 느지막이 솟았다가 빠르게 저물고, 길거리에는 꽃 한 송이 찾아보기 어렵다. 예전에는 그즈음의 서늘한 공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정적인 풍경 속에 서 있으면 자신도 그 시간에 고정된 것만 같았으므로. 그러나 이제는 안다. 겨울은 머무르는 계절이다. 봄을 맞이하기 전, 재회해야 할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며. 영영 돌아오지 못할 추억을 그리는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기다릴래. 자주 웃고, 때로는 누군가의 자취를 헤매기도 하면서. 한번 해 봤으니 두 번째에는 더 잘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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