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門

열병

by 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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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한 오후. 길게 늘어진 볕이 제법 따사로웠다. 이런 날에는 산책을 나가거나 소풍을 즐기는 등, 날씨의 이점을 한껏 즐기는 하루를 으레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안타깝게도 이쪽은 삼 교시부터 내내 보건실에 갇힌 신세였다. 아침부터 몸이 으슬으슬하다 싶더니 그대로 열이 오르기 시작한 탓이다. 그냥 조퇴해야 하나. 명여휘는 달뜬 숨을 내쉬며 가물가물한 정신을 다잡았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 몸은 한결 가벼워졌는데, 머리가 여전히 지끈거렸다. 약효가 두통까지 없애 주지는 못한 모양이다.

하필이면 이런 날씨에 감기라니. 시기를 따져 가며 오는 병은 아니라지만, 억울한 감이 없지 않다. 몸이 덜덜 떨릴 만큼 추운 겨울에도 바람이 곧잘 쌀쌀해지곤 하는 봄에도 잔병치레 하나 없이 넘겼건만, 날이 포근해지자마자 이 꼴이라는 게 황당하기도 했다. 일교차가 커서 그런가. 여름에 접어들 무렵이라 다소 해이해졌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며, 명여휘는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아, 깼어? 몸은 좀 어때?”

익숙한 목소리다. 명여휘는 눈을 두어 번 깜박이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야에 푸른 머리카락이 걸렸다. 신지해였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너 아프다고 하길래 병문안 왔지. ……안 돼?”

“아냐, 그냥 궁금해서.”

힐끔, 눈치 보는 시선을 알아채고 고개를 저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보건실에 도착한 지도 꽤 된 것 같았다. 상태가 안 좋긴 한가. 근처에서 머무르는 기척이 이다지도 선명한데,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조금 놀라웠다. 명여휘는 몽롱한 잠기운을 몰아내며 몸을 일으켰다. 고작 두 마디 말했을 뿐임에도 목이 칼칼했다.

“왜 벌써 일어나? 더 누워 있지!”

“계속 누워 있었더니 불편해.”

맥없는 투정에 신지해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침대를 눌렀다. 아주 딱딱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푹신하지도 않았다. 애당초 학교 보건실에 마련된 간이침대가 편안하길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명여휘는 그 행동을 잠자코 지켜보다가 침대 바깥으로 다리를 내렸다. 그러고선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너도 앉아. 진짜 목적은 이쪽이었다. 자그마한 소리로 말을 전하고 머리맡에 놓인 협탁 위 물컵을 쥔다. 잔을 입가에 대고 기울이자 시원한 물이 목을 적셨다. 미지근해야 할 온도가 서늘하게 느껴지는 걸 보니 아직도 열이 남아 있는 듯했다. 그 사이 신지해는 아리송한 얼굴을 하면서도 고분고분 착석했다.

“표정이 왜 그래?”

“아픈 사람 자리 빼앗은 것 같아서……?”

“내가 앉으라고 한 건데도?”

“기분이 그렇단 거지.”

명여휘는 작은 웃음을 흘렸다. 별것도 아닌 일로 신경 쓰는 게 신지해다웠다. 타인을 이토록 살뜰히 챙겨 주면 본인을 챙기는 시간은 있으려나. 실없는 상념도 덩달아 떠올랐다. 사고가 잠시 다른 길로 새어 나갈 즈음 이마에 서늘한 것이 닿았다. 열을 재기 위함인지 신지해가 제 이마 위로 손을 얹은 채였다. 아직 열이 나는 것 같은데. 안색도 안 좋은 것 같고…….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자니 중얼거림이 들려온다. 내가 대신 아파줄 수 있으면 좋겠다. 너보단 내가 훨씬 강할 텐데. 농담인지, 진담인지 분간할 수 없는 이야기도 함께였다. 명여휘는 혼잣말에 대답하는 대신 뜬금없는 주제로 운을 띄웠다.

“밖에 아무도 없어?”

“아마 그럴걸? 그건 왜?”

“떠들면 시끄럽잖아.”

농조로 대꾸하곤 상대에게로 고개를 살며시 기울인다. 안 그래도 가까운 거리가 좁혀지며 지척에서 시선이 맞부딪혔다. 불시에 붙어 온 탓인지 보랏빛 눈동자에는 당황한 기색이 짙었다. 무어라 잔뜩 말하고 싶은 것 같은데, 제 행동 때문에 그러지 못하는 기색이 여실했다. 명여휘는 그대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멀어지지 못하도록 침대를 짚고 있던 손 위로 제 손을 가만히 얽는다. 고요한 정적, 미묘하게 들뜬 공기, 서로에게 전해지는 선명한 체온. 인영이 살그머니 겹쳐진다. 열 오른 숨결이 스쳤다. 간질간질한 감각이 전신을 휘감았다가 가슴 한구석에 고였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같고, 찰나에 지나지 않은 것도 같았다. 다만 선명한 것은, 이 짤막한 순간이 언제까지고 기억에 남게 될 것이란 직감이었다. 목표를 달성하고 담백하게 몸을 물린 명여휘가 가볍게 웃었다.

“감기는 옮기면 낫는다더라.”

“……그, 그건 내가 해야 할 말 아니야?!”

“누가 먼저 하면 어때.”

만족스러운 낯과 얼떨떨한 얼굴이 서로 상반된다. 누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구태여 언급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때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아. 종쳤다. 이제 가야겠네. 명여휘가 신지해의 등을 떠밀었다. 아니, 잠깐만, 여휘야? 여휘야아……. 응, 수업 잘 듣고 나중에 봐. 애타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도 동문서답이나 내뱉는다. 침대 주변에 둘러쳐진 커튼을 걷고 바깥으로 내보내자 더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명여휘는 다시 침대로 돌아가 몸을 누이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손끝에 맴도는 열기가 지나치게 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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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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