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

전직 다이묘인 내가 짝사랑 앞으로 회귀한 건에 대하여

240208 습작 (약 와키보름)

권력을 가진 이는 그가 지배당하는 이에게 떠받들어져 살아간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들이 없다면 천둥벌거숭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모르므로 그들을 가까이하지 않는다. 농노부터 궁전의 요리사까지, 권력자 곁에 기거하는 수많은 피지배자들은 그에게 거슬리지 않으면 다행인 존재들이다. 이는 영주가 수많은 영민들의 이름을 단 한개도 알지 못하는 일과 결을 같이한다.

옛날 옛적, 16세기 말, 조선을 침략한 한 다이묘가 당시 피지배인이었던 조선인 기생의 이름을 외울 뻔한 일이 있었다. 다만 그러지 않은 것은 함께 있을 때는 어이, 거기, 너, 정도로 부를 수 있었고, 옆에 없을 때는 부하에게 어제 그 기생을 데려오라고 명하면 그 기생이 쉽게 방에 데려와지는 위치에 군림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이묘는 금방 조선의 장수에게 대패한 것으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된다. 본국에 돌아와서는 가문을 보전하고서 장수했지만 그는 죽는 날까지 영민의 이름 하나를 온전히 외워본 적이 없었다.

아... 이제 죽는걸까? 그 다이묘, 와키자카는 그가 노년에 은거하던 조용한 목조주택에서 침상에 누워있었다. 옆에는 시종과 그의 부인이 무릎을 꿇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시야가 몇번 깜빡이고, 별 볼일 없는 주마등이 촤락 지나가고서는 암전이었다. —죽음이구나. 그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매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죽지 않은 것일까? 다만 그가 교토의 주택 안에서 들었던 소리와는 사뭇 달랐다. 조금 더 크고, 조금 더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듯한… …가까이? 목조주택 바깥에서 들려오는 유의 소리는 전혀 아니었다. 와키자카가 다급히 눈을 떴다. 강렬한 햇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밖에 내다 버려진 걸까? 그는 몸을 조심히 일으키려 했으나 몸이 말을 지나치게 잘 들었다. 한 손으로 땅을 짚고 쉬이 일어날 수 있었다. 가장 잘나갔던 젊은 시절처럼 몸이 아주 튼튼하게 느껴졌다. 놀란 그는 얼굴과 몸을 더듬거렸다. 주름지지 않은 손의 베인 흉이 일전보다 선명했고 몸에는 젊을 적에 입던 평상복이 걸쳐져 있었다. 사후세계일까, 그는 의문을 품으며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검은 기와를 얹은 단층 건물이 그의 앞에 있었고, 돌담이 이를 통틀어 두르고 있었다. 돌담의 밖에는 짚을 엮어 만든 지붕이 여럿 보였다. 의심의 여지 없이 조선의 마을이었다. 사후세계가 원래 이렇게 생겼나? 따위의 의문을 품을 적에, 그의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시오?"

집주인인가, 하고 그가 뒤를 돌아본즉, 익숙하고도 가물하여 그리웠던 얼굴이 그를 맞았다. 그 조선인 기생이었다. 차림은 수수했으나 그가 틀림없었다. 그가 아껴 마지않았던, 그리고 그를 배신했던 그 기생이... 이름이 무엇이었더라. 와키자카가 잠시 기억을 더듬는 동안, 여인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저를 빤히 쳐다보는 낯선 남자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나를 아시오? 여인이 조선어로 말했으나 평생 조선어를 익히려는 노력은 추호도 하지 않았던 와키자카가 이를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그는 그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지 않은 것처럼 무심코 여인에게 손을 뻗었다. 여인의 팔을 잡으려던 순간,

"아녀자의 몸에 손을 대려 하다니 제정신이오!"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정강이에 둔한 통증이 느껴져 와키자카는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여인은 여전히 와키자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조선어로 무어라 소리치며 돌담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날 알아보지 못하다니! 어떻게, 어떻게 내게 비녀를 꽂아놓고… 와키자카는 충격에 잠겨 한동안 그 마당에 얼어붙어 있었다.

다시 임진년, 4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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