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한 시선
그래? 난 너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원하는 대답을 들은 적이 별로 없어서 그래. ……정말 뭐든 대답해 줄 거야?
이미 늦었어. 이미 알아 버렸는데 어떻게 잊어?
그럼 너도 나한테 물어봐.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떤 일을 겪어서 내가 되었는지. 내가 나로 존재하게 하는 게 뭔지. 나도 정답을 알지 못하는 것들이 존재할 수도 있겠지만, 전부 대답해 줄 테니까.
우리의 관계는 어디서부터 꼬여 버린 걸까. 네가 불행을 고했을 때? 비로소 별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도 아니면 너를 떠나지 않겠다 다짐하던 때일까. 시작점을 찾자면 끝도 없이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너와 재회하게 된 순간. 바다를 찾아가는 습관. 내내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무형의 자취를 더듬어가던 날. 언젠가의 겨울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앓던 그 모든 시간들을 하나하나 되짚다 보면, 서로를 인식하게 된 교차점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더 이상 원인을 찾는 건 무의미했다. 이런 상황에까지 몰리고서도, 그날의 우연을 없는 것으로 치부하긴 싫었다.
누군가의 염려대로 명여휘의 선택은 오롯이 본인의 의지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그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본디 감정은 상호적인 것이라, 한 사람의 의사만으로는 형성될 수 없다. 일방적인 노력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첫눈에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도 있겠지만, 알다시피 명여휘는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존재했다. 덧없는 약속을 맺고, 친구라 이름을 붙인 것은 결국 상대를 아껴 주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줄곧 제 영혼에 새겨진 상흔을 좇았다. 기억보다도 본질적인 위치에 각인되어 차마 떨쳐낼 수 없는 애정이었다. 완결 내지 못한 이야기가 안타까웠고, 정의할 수 없는 관계가 퍽 아쉽다고 생각했다.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되리라 예고했던 것은 속절없이 기우는 마음이 버거운 탓이었다. 애정, 미련, 후회, 욕심. 우리를 구성하는 단어는 이토록 애틋한데, 깊어지는 마음은 서로를 상처투성이로 만든다. 네 밑바닥을 보았다면 만족할 수 있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사람은 타인을 완전히 꿰뚫어 볼 수 없고, 설령 가능하더라도 욕심을 충족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했을 테니까. 명여휘는 헛된 가정을 멈추었다.
“말했잖아. 나 그렇게 다정한 사람 아니라고.”
과거에도 자신보다 살가운 사람은 많았다. 악의라곤 찾아볼 수 없이 착하고, 본인이 희생하기를 자처하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당장 상대만 해도 그러했다. 네가 날 너무 다정하게 보는 거야. 덧붙이긴 했지만, 솔직히 이것도 좀 이해는 안 된다. 지난 대화들을 되새겨 보아도 상대에게 마냥 상냥하진 못했던 것 같은데. ……대체 뭘 보고 이러는 거지. 비교 대상이 없어서 그런가. 온기 하나 없는 우주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타인에 대한 기억이 흐려질 법도 하다.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가벼운 웃음을 흘린다. 어려운 요구를 하네. 웃음도, 다정도 네가 전부 가져가려고? 이건 욕심인가. 아니면……. 짐작할 수 있는 단어 몇 가지가 머릿속을 둥둥 떠다닌다. 어느 쪽이든 자신에게 물든 것만 같아 기꺼웠다. 아. 이런 걸로 좋아하면 안 되나. 하지만 태생부터 그러한 것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명여휘는 가만히 눈매를 휘었다. 그럼 어디 한 번 가져 봐. 원한다면 못 해 줄 것도 없다. 간격을 가늠하던 선은 지워진 지 오래였으므로.
“나도 솔직하게 구는 날은 있어야지.”
여상하게 대꾸한다. 싫은 게 아니라면 됐다. 이상한 말을 한 것도 아니고, 단순한 진실을 전달한 게 전부였으니까. 익숙하지 않은 태도에서 비롯된 반응이라면 앞으로 적응하게 만들면 될 일이다. 애초에 돌려 말하는 걸 즐기는 성격도 아니었으니……. 음. 그래도 한동안은 그냥 두도록 할까. 너무 정직한 모습은 금방 질릴 것 같은데. 고민하면서도 장난스러운 투로 묻는다. 더 솔직하게 해 줘?
무언가를 거머쥐기 위해서는 대가가 필요하다. 이 거대하고 잔혹한 세계는 그렇게 굴러간다. 살아서 돌아가기 위해선 기억을 지불해야 했고, 이곳에 남기 위해서는 현실을 바쳐야 했다. 둘 모두를 거머쥘 수는 없었다. 필연적으로 다른 한쪽을 잃어야만 했다. 그거 알아? 이 꿈에서 깨어나게 되면 불행해지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가끔 기억의 부재를 떠올릴 때마다 네가 남긴 흔적만을 의미 없이 되새기겠지. 난 욕심이 많은 성격이니까, 내가 잃은 게 무엇인지 알기 위해 평생을 헤매게 될 거야. 말하지 않은 진심이었다. 전하지 못하는 건 지금도 여전했다. 우리에게 남은 지표에는 최선이 없다. 최악과 최악 사이에서 무엇이 더 나은 길일지 헤아리고 있을 뿐이다. 어느 쪽을 골라도 결과가 같다면, 그렇다면 차라리 충동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면 되지 않을까.
쿵, 쿵. 심장이 아프게 뛰었다. 그릇된 결정을 내릴 때처럼 마음이 술렁였다. 온 세포가 어긋난 결심을 막으려는 듯 바짝 곤두섰다. 지금이라도 결정을 번복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명여휘는 천천히 마주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상대가 자신을 놓치더라도 괜찮았다. 어차피 나아갈 방향은 정해져 있었다. 한 걸음, 두 걸음 다가가 지척에서 고개를 기울인다. 이마를 맞대고, 시선을 마주했다. 별을 닮아 반짝이던 눈은 이제 별을 담아내고 있었다. 한때 저것을 탐내었던 것 같은데……. 과거를 더듬으며 입술을 달싹인다. 그래.
“가져가.”
파도가 밀려든다. 새까만 물길이 발치를 적셨다. 밤하늘에서 연신 반짝이던 별이 추락했다. 천체가 절명하는 순간이었다. 잿더미로 이루어진 세계는 느리게 멸망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상관은 없었다. 나를 놓지 마. 나긋한 목소리가 말을 잇는다.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줄 테니까. 일부로도 모자라 전부를 내어 주겠다 약조한다. 미력한 감정이 불러일으킨 반향이 기어코 결점을 만들었다. 제 안에 자리한 조각을 두고 현실로 돌아가든, 잔불조차 남지 않아 새까만 우주를 표류하든. 불행해지는 건 매한가지였다.
이곳은 구교사를 닮았다. 기대고 붙들 수 있는 게 서로의 존재밖에 없다는 점이 그랬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으면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려야 한다는 점이 그러했다. 그래서일까. 바깥과는 달리 이곳의 명여휘는 전혀 성장하지 못했다. 얼굴, 성격, 외관. 무엇 하나 변하지 않아 열아홉의 그날과도 같았다. 미련과 아집으로 뭉쳐 부딪히고, 원망하고, 애정하다…… 종내 상대를 택하고 마는 것이다. 언젠가는 이 세계조차 저물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영원을 믿지 않는 건 여전했다. 시간은 모든 것을 무디게 만든다. 감정은 변형되고, 추억은 빛바랜다. 종장에 이르러 잔류하는 것은 막연한 감상이 전부일 터이다. 그래도 이 지리멸렬한 생의 종착지까지 함께할 수 있다면. 그걸 영원이라 명명해도 괜찮지 않을까.
아.
그렇다면 이곳이야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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