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증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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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이었다. 낮에는 눈 내린 마을을 바라보며 마음이 들뜨다가도 해가 지면 한없이 외로워지는 계절. 그건 고작 누군가 손을 잡아주는 정도로는 해결되지 않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였다. 봄에 만나서 겨울에 헤어진다면 적어도 한 해를 같이 보냈다고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아리에 슈우와 이시다 소라가 재회한 지는 1년이 다 되어 가는 셈이었다.
올해 마지막 사건은 '남자 친구 실종사건'이었다. 유난히 춥던 밤, 연락을 받지 않던 남자 친구가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홀연히 사라졌다… 슈우는 다시 만난 이후로도 이전처럼 소라를 돕곤 했는데, 이 사건에는 다소 회의적이었다. 그건 애인이 사라진 게 아니라 도망쳤다는 뜻이었고, 어떻게 해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 소라는 그것을 탐정으로서 쌓아온 경험보다도 그저 계절의 감각으로 이해했다. 슈우의 말대로 그는 아마 발견되기보다는 그저 이대로 사라지고 싶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희미한 흔적을 추적하고 찾아낸 건 마치 버릇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사건은 마음을 괴롭게 만드니까.
그러나 남은 건 뒷맛이 안 좋은 수고비 약간과 이미 예매된 로맨스 영화 티켓 두 장뿐. 날짜는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그것을 버릴 수도 돌려줄 수도 없어서 책상 위에 방치해두었더니 머지 않아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다르지 않고, 또 다를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던 크리스마스 이브 아침. 슈우는 소라에게 나가자… 그렇게 말했다. 영화를 보고 식사를 하자고 했다. 크리스마스 이브니까. 소라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 티켓은 분명 슈우가 가져간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왜 그에게 묻지 않았을까? 애초에 난 왜 그걸 버리지 못하고 계속 책상 한 구석에 나란히 놓아뒀던 걸까? 그때 소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슈우가 들릴 듯 말 듯 입술을 달싹였다. 깊이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아. 그리고 소라는 그가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생각하려다, 문득 마음을 바꿔 하지 않기로 했다.
*
로맨스 마니아라면 한 번쯤 이름을 들어보았을 고전적인 작품이 재개봉한 이후로도 몇 달째 극장에 걸려 있었다. 슈우는 그게 무슨 영화인지도 모르는 눈치던데… 소라는 어디선가 흘려들은 기억이 조금은 있었다. 그렇다고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아니었다. 포스터에 걸려 있는 캐치프레이즈 한 줄만으로도 결말이 어떨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슈우가 영화관에서 꺼내든 티켓에는 그 영화의 제목이 보란 듯 적혀 있었다. 검표원을 지나 들어서며 소라는 슈우에게로 몸을 기울여 속닥거렸다. 너 이게 무슨 내용인지는 알아? 슈우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답했다. 알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보는 영화잖아. 그리고 소라는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도 몰라서… 그냥 대답하지 않고 어둑한 복도를 앞장서 걸어 나갔다. 슈우는 팝콘과 탄산음료를 양손에 들고 있었기 때문에 평소처럼 소라를 빠르게 따라잡지 못했다.
영화가 시작하고 나서는 걸핏하면 스크린에 희끄무레한 설원이나 안개 낀 하늘이 나타나 관객들의 얼굴을 환히 밝히곤 했다. 처음에는 무료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던 소라도 시간이 지나자 차츰 영화에 몰입하게 됐다. 명작이라는 거 대단하네. 기껏해야 휴일에 나와서 구색 갖출 생각으로 보는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팔짱을 낀 채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보다가 중간에는 손으로 턱을 괴기도 하고. 그리고 끝이 다가올 때는 별수 없이, 아주 조금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원래 이런 영화에는 정말로 별 감흥이 없는 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괜히 가슴 한켠이 어수선해졌다. 어쨌거나 로맨스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특히 슈우의 앞에서는. 열이 오른 눈을 힘주어 깜빡이며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소라는 슬쩍 슈우를 돌아보았다. 다시 한번 스크린이 밝게 빛나며 두 사람의 옆얼굴을 비췄다. 스크린 속 주인공이 끝없는 눈밭을 헤치며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슈우는 스크린이 아닌 소라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의 불이 켜졌을 때 팝콘은 거의 새것이나 다름 없는 상태로 남아 있었다. 슈우와 소라는 그것을 한참 남은 음료와 함께 버려야 했다. 울었어? 아니. 소라는 괜히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두 사람은 영화가 끝나고도 한참을 앉아 있었는데 그게 딱히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서는 아니었다. 사람들이 다 나가고 직원도 자리를 비운 그 조용한 상영관 안에 잠시 앉아 있다가 나온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슈우는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소라가 먼저 일어나자 그 뒤를 졸졸 쫓아왔다. 그러더니 영화의 여운이 완전히 지나고 건물 밖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중에 불쑥 그런 말을 꺼냈다. 잠깐 코가 찡해지는 순간이 있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소라가 눈물을 보이는 일은 없었다.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 정말로 안 울었어? 조금도? 엘리베이터는 모든 층에서 멈춰서서 사람을 태우기라도 하는 건지 좀처럼 도착하지 않았다. 건물 뒤편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라 기다리는 사람은 슈우와 소라, 두 사람밖에 없었다. 놀리는 듯한 목소리에 소라는 얼굴을 팍 구긴 채로 정말로, 안 울었어. 조금도… 그렇게 대답하다가 멈췄다. 슈우가 코트 자락을 벌려 소라를 끌어안은 것이었다. 소라는 딱히 그를 마주 끌어안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굳이 밀쳐내지도 않았다. 하지만 왜인지 마치 괴로운 시간을 견디는 것처럼 눈을 꼭 감게 됐다. 어차피 소라가 짐짓 질색하는 표정을 짓든 슈우에게는 보이지 않는데. 슈우에게서는 소라와 비슷한 향이 났다. 그리고 평소에 맡아본 적 없던 향수를 뿌린 것 같았다. 그가 입고 있는 올이 가느다란 니트에 코끝이 닿으면 별수 없이 귀 끝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슈우가 완전히 팔을 둘러 소라를 끌어안으려고 할 때쯤 소라는 슈우를 밀쳐내고 노려보았다. 슈우는 별말 없이 능청스러운 얼굴로 양손을 들어 보였다.
식사는 나름 근사했다. 영화관 근처에는 그럴듯한 식당이 많았다. 슈우가 예약한 자리는 사람들이 오가지 않는 구석진 자리였다. 테이블 위에 놓인 조명은 빛이 닿지 않는 구석을 밝히기엔 너무 약해서, 차라리 영화관이 더 밝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날이 날이라 그런지 주변은 온통 연인들뿐이었다. 와인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꼭 풍경이 흔들리는 소리 같았고, 비눗방울처럼 가볍고 들뜬 웃음소리가 공기 중에 가득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있는 것 같았다. 모든 웃음과 소음, 사랑스러운 소리들은 그들에게 채 다다르지 못하고 잦아들었다. 낮은 조도 속에서 슈우와 소라는 일상적인 대화를 했다. 그러나 소라가 실수로 들고 있던 커틀러리로 접시를 조금 강하게 쳤을 때, 그래서 으레 들려올 법한 소음이 대화를 끊고 침범했을 때, 소라는 자신이 조금 들뜨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얻어먹기만 했네.
두 사람은 식당에 이어 따뜻한 커피를 한 잔, 그리고 서점에까지 들렀다. 서점의 문에 달린 차임벨이 달랑거릴 때쯤 문득 든 생각이었다. 슈우의 한쪽 손에는 서점에서 받은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안에는 슈우와 소라가 평소에 읽고 싶어했던 책이 한 권씩 들어 있었다. 집에 들어가서는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소라는 오늘 한 번도 지갑을 꺼내지 않았다. 물론 영화 티켓은 슈우의 것은 아니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소라의 것도 아니었다. 소라가 조금 멋쩍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뒷머리를 만지자 슈우가 입매를 올려 웃었다.
우리가 그런 거 따질 사이였어?
…그럼 무슨 사인데?
딱히 기대하는 대답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슈우는 대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질문에는 곧잘 말장난을 했다.
글쎄… 그런 건 굳이 따지지 않아도 좋은 사이?
그에게서 원하는 답을 얻어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가 내어주겠다고 마음먹지 않으면 소라는 자꾸 헛발질을 하게 됐다. 조금 언짢은 얼굴이 되어 고개를 돌려도 슈우는 굳이 그를 달래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눈이 채 녹지 않아 미끄러운 거리를 한참 나란히 걷다, 비로소 번화가의 소음에서부터 멀어져 익숙한 거리가 나올 때쯤 불쑥 소라를 불렀다.
소라 군, 나한테 고마워?
슈우는 어느새인가 뒤처져 있었다. 소라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낡고 먼지와 물때가 앉은 인형뽑기 기계 앞에 서 있었다.
그러면 이거 뽑아줘.
슈우와 그 기계가 너무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라—그는 기계보다 두 뼘은 커 보였다. 소라는 황당한 표정을 짓고 뒤돌아 그에게 다가갔다.
뭔데?
슈우가 손끝으로 투명한 아크릴 가림막을 톡톡 두드렸다. 그 안에는 극세사로 만든 작은 고양이 인형들이 쌓여 있었다. 얼마나 사람 손이 닿지 않았는지 가뜩이나 먼지가 붙기 좋은 천 위로 잿빛 먼지들이 꼬질꼬질 뭉쳐 있었다.
저거, 갈색.
소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가림막에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그가 말하는 갈색 고양이 인형은 이제 거의 얼룩 고양이나 다름없게 때가 타 있었다. 거기다 워낙 구석에 있어 뽑기도 어려워 보였다. 그러나… 나한테 고마워? 라고, 묻는 슈우의 목소리가 소라를 자꾸만 등을 떠밀었다. 소라는 저 인형을 뽑으려면 도대체 얼마를 써야 할지 가늠하다 어깨를 으쓱였다.
알았어.
그리고 주머니를 더듬었다. 지갑은 늘 손에 닿는 대로 외투 주머니에 쑤셔 넣는 게 그의 버릇이었다. 그러나 양쪽 주머니를 전부 더듬어봐도 지갑은 손에 걸리지 않았다. 소라가 몸 구석구석을 더듬어보는 걸 지켜보던 슈우가 눈 한 번 깜짝이지 않고 물어왔다.
지갑 잃어버렸어?
소라는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슈우는 그 한숨의 의미가 무엇인지 가늠하느라 대답하지 않는 듯했다. 허리에 손을 얹고 삐딱하게 서서 슈우를 바라보자 그가 그제야 눈을 깜빡거렸다.
내놔.
뭘?
지갑 가져갔잖아.
나한테 네 지갑이 있다고? 어디 있는데?
오른쪽 주머니에.
슈우의 눈이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역시 그의 장단을 맞춰주는 건 어려웠다. 그러나 그가 바라는 게 고작 인형 같은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수밖에 없다. 소라는 얼굴을 한 번 문지르고 말을 이었다.
영화관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 네가… 손장난을 쳤잖아. 그리고 그 이후로 내가 돈을 못 쓰게 했고. 카페에서도 내가 커피를 사겠다고 하니까 얼른 먼저 계산해버렸지. 서점에서는 뭐, 포인트를 써야 한다느니 온갖 핑계를 다 댔어. 그리고 넌 영화관에서 나온 다음부터 내가 네 오른쪽에 서면 굳이 왼쪽으로 자리를 바꿔서 섰단 말이야.
말을 늘어놓을수록 슈우의 기분이 들뜨는 게 보였다. 소라는 갑자기 그를 골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불쑥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애초에 처음부터 가져간 거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얼른 내놔.
그러자 직전까지만 해도 마치 미끼를 바라보는 고양이처럼 반짝거리던 눈에 황당한 기색이 깃드는 게 보였다. 슈우가 줄곧 손을 꽂아 넣고 있던 오른쪽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손 안에 소라의 지갑이 들려 있었다.
알면서 말 안 했어? 재미 없네, 소라 군.
그리고 그 목소리가 정말로 실망한 것처럼 들렸다. 그런 일은 드물었다. 소라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지갑을 돌려주려던 슈우가 손을 도로 움켜쥐었다.
웃었네.
짧고 명료한 한마디에 소라는 흠칫 표정을 원래대로 굳혔다. 거의 찌푸린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말이 어떤 저의를 담고 있는지 알 수 없어서 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소라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슈우를 흘끗 바라보았다.
왜? 이상해?
그럴 리가. 그냥… 소라 군 오늘 한 번도 안 웃었잖아.
소라는 찌푸리고 있던 얼굴을 폈다. 생각해 보니 정말로 그랬다. 오늘 웃은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즐겁지 않은 시간이 없었는데도.
*
소라는 결국 그 인형을 뽑는 데에 거의 삼천 엔을 썼다. 다른 인형 사이로 들어가 버렸을 때 소라는 이제 그만하자는 의미로 슈우를 바라보았지만 슈우는 못 알아들은 척 가림막 안으로 눈길을 돌렸다. 저 검은 고양이부터 뽑아야겠네. 그러고 나서 갈색까지 뽑아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면 차라리 삼천 엔으로 끝난 게 다행이었다. 이건 소라 군, 이건 슈우 군. 징그럽게… 보란 듯 흘겨보아도 슈우는 능청스럽게 두 고양이를 양손에 들고 흔들었다. 걸어 다니는 시늉을 했다. 마지막에는 고양이들끼리 한 손에 붙어 쥐었다. 그게 무척이나 귀여워 보였다.
슈우는 소라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나눠 가질까? 넌지시 물었고, 소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느 쪽이 자신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갈색 고양이 인형이 내 건가? 나랑 닮았다니까. 하지만 소라는 사실 슈우의 인형이 더 갖고 싶었다. 갈색 고양이에게 이시다 소라의 이름이 붙는다면 더욱 그랬다. 그런데 검은 고양이를 달라고 하면 너무 이상한가. 질색하는 척하면서도 내심 그 인형이 슈우를 닮았다고 인정하는 셈이라 우스운가… 그렇게 생각할 때쯤, 슈우가 소라의 손을 꽉 맞잡으며 손안에 인형을 쥐여주었다.
손을 펴보면 그 안엔 검은 고양이 인형이 들어 있었다. 소라는 조그마하고 부드러운 인형을 손끝에서 가만히 굴려보다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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