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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선

K=Potassium by KPo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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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가을 바람은 좀 아렸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면 공기가 머금은 기운이 달라진다. 여름은 축축하지만 어딘가 둔하고 바보 같은 밍숭함이 있고 가을은 포근하지만 눈을 잠시만 돌리면 코앞에 칼을 겨눌 것 같은 살기가 있다. 그런 말을 직장 동료들에게 하니 백 검사님은 굉장히 특이한 감성을 갖고 계신 분이네요, 하는 소리를 들었다. 백현상은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물론 자신에게는 감성이랄 게 전무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언제나의 침상에서 평소보다 5분 이르게 눈을 뜬 현상은 잠시 그런 쓸모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전 8시. 알람이 울린다. 일어난다. 코앞까지 침투한 가을의 서늘한 공기를 다시금 느낀다. 냉장고를 연다. 우유 한 컵을 따라서 전자레인지에 덥힌다. 전날 삶아 둔 계란을 깐다. 전자레인지는 그 사이 가동을 멈추고. 미지근한 우유와 차가운 계란을 함께 먹는다. 언젠가까지는 식빵을 함께 먹었다. 언젠가부터는 식빵을 먹지 않게 되었다. 단백질 위주의 아침을 다 먹으면 씻는다. 머리를 말린다. 옷을 입는다. 코트를 걸쳐야 하는 날씨. 그래도 아직 안경에 김이 서리지는 않는다. 구둣주걱을 든다. 신발을 신는다. 현관문 손잡이를 돌리고 밖으로 나간다. 뺨을 스치는 한기를 느끼기도 전에.

“안녕하세요오…….”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옆집 꼬마가 인사를 건넸다.

현상은 출근길 아침이면 늘 꼬마를 마주쳤다. 작년 봄 옆집으로 이사 온 모자가정의 아들이다. 처음 얼굴을 봤을 때만 해도 근처 초등학교를 다니던 꼬마는 해가 지나자마자 몸에도 맞지 않는 교복을 입었다. 한창 성장기인 열네 살 아이니 큰 치수의 교복을 입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비록 가을이 다 된 지금까지도 교복 마이의 소매가 손등을 가리기는 하지만. 성장이 늦는 것 역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꼬마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기다린다. 계단을 걸어 내려가기에는 애매한 층수에 현상과 꼬마는 살고 있었다. 꼬마는 그의 옆에 서서 엘리베이터의 층수 표시를 바라보다가 슬쩍 옆집 아저씨의 눈치를 살피다가 키가 훌쩍 큰 현상이 아무 말 없이 앞을 보고 서 있으니 주눅이 들어선 고개를 푹 숙였다.

“어머니는 출근하셨나?”

현상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꼬마는 흠칫 놀라선 떨궜던 고개를 퍼뜩 든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건 그 직후였다. 벌써 두 사람이 타 있는 엘리베이터에 그들은 올라탄다. 현상이 발을 디디면 흔들리고 꼬마가 뒤따라 들어오면 문이 닫힌다.

“출근하셨어요.”

엘리베이터 구석에서 꼬마가 뒤늦게 대답했다. 현상은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고개를 주억였다. 다른 승객들의 시선이 은근히 꼬마에게 쏠린다. 동정과 친절이 절묘하게 섞인 눈동자들은 꼬마의 심리에 좋은 영향을 주지 못했다. 꼬마는 검은 정수리를 보이며 또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1층에서 엘리베이터의 승객들은 모두 내린다. 세 번째로 내린 현상의 뒤를 꼬마가 종종걸음으로 따른다. 키가 유난히 작은 꼬마는 현상의 한 걸음을 세 걸음으로 나눠 걸어야 했다.

현상은 1층 현관 앞 주차장에서 자신의 차를 향해 걷는다. 꼬마는 아파트 정문을 지나 자신의 중학교로 향한다. 둘의 경로가 완전히 갈라지기 전에 꼬마는 아저씨, 하고 그를 불러세웠다.

자가용 앞 유리에 꼬마의 앳된 얼굴이 비친다. 현상은 몸을 조금 틀어 꼬마를 돌아보았다.

“잘 다녀오세요…….”

숫기 없는 꼬마는 항상 현상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부끄럽다는 듯이 허둥지둥 자리를 떴다. 현상의 답은 필요 없다는 듯이. 그래, 너도 잘 다녀와라 하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몸과 마음이 주체없이 커가는 질풍노도의 시기에 옆집 아저씨를 괜히 아빠마냥 생각하게 되면 안 된다는 듯이.

하지만 현상은 자가용에 올라타기 전 늘상 입안에서 이런 말을 굴려보고는 했다.

“도화 너도.”

점심 무렵 검사실에 손님이 찾아왔다. 지금 다루고 있는 도난 사건의 변호사다. 현상의 옆 책상을 지키고 있던 수사관들은 다른 건의 조사를 나간 참이었다. 흰머리가 나기 시작한 머리를 한손으로 쓱쓱 정돈하며 그는 현상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언제나의 사람 좋은 미소가 얼굴에 주름처럼 새겨져 있었다.

“오늘도 고생 많으십니다, 검사님.”

“아닙니다.”

“아니긴요. 수사관분들도 전부 외근 중이신데.”

인사치레를 마치고 업무 이야기를 나눴다.

일반 사람들은 검사와 변호사가 하는 일이란 검사석과 변호인석에서 각자 수집한 자료들을 모아 서로의 뒤통수를 치는 일이라 믿는 경향이 있다. 현상은 불과 얼마 전 도화에게서도 그런 물음을 들었다. 그렇지 않다. 공판 시작 전 검사와 변호사는 재판에 사용할 증거를 정리하여 제출해 서로에게 공개하여야 한다. 흔히들 공판준비절차라고 부른다.

그리고 눈앞의 변호사는 공판준비기일을 정하기 위해 현상의 검사실에 찾아온 듯했다. 탁상 달력을 살펴 괜찮아 보이는 날을 탐색했다.

“규모도 얼마 안 되는 사건이니 빨리빨리 끝내버리죠. 다음 주 어떻습니까? 다음 주는 수요일만 아니면 괜찮은데.”

“다음 주라면 수요일에만 시간이 됩니다.”

“아이고, 이거 애석한 일이네요…….”

“수요일은 바쁘신 모양이군요.”

그리 묻자 변호사는 흰머리가 드문드문 난 머리칼을 괜히 다듬기 시작했다. 머쓱한 웃음이 혈색 좋은 얼굴에 떠오른다. 왼손 약지에 착용한 금색 반지가 검사실의 창백한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그게, 음……. 딸 생일이라서.”

딸 생일이라서 그날은 일찍 들어가봐야 한다. 흔한 사유였다. 현상은 가족애와 먼 삶을 살아오고 있었지만 가정을 꾸린 사람들의 생리를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 거라면 공판준비기일을 다다음주로 미뤄도 괜찮다, 라고 말하려던 때였다. 변호사는 눈썹을 팔자로 만들면서 말을 이었다.

“실은 딸이 몸이 좀 안 좋습니다. 집중치료실에 입원 중이에요. 면회할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는데, 일을 다 마치고 가면 면회 시간이 끝났다면서 받아주지 않는 거 있죠.”

그래서 그 날은 아예 휴가를 냈다. 일에 얽매이지 않고 딸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변호사란 일이 징그럽게 많은 인종이라서, 로펌 건물에 들어서는 순간 처리해야 하는 무수한 문서 업무와 클라이언트 접견에 발목을 잡히게 된다. 그러니 아예 로펌 건물에 발도 들이지 않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고 변호사는 털어놓았다.

“아무리 그래도 생일인데. 생일에도 제가 얼굴을 안 비추면 얼마나 서운해 할지 눈에 선합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전에도 그가 딸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던 것 같았다. 아들은 없고 딸만 둘이라 제가 대표직을 맡고 있는 로펌을 어떻게 물려줘야 할지 고민이라고 했던 것 같았다. 아직 애들이 다 크지도 않았으니 이런 고민은 시기상조인가 하며 껄껄 웃었던 것 같았다.

“따님이 두 분 계시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아, 네. 큰애가 몸이 안 좋습니다. 올해로 열세 살인데……. 병원에 살다시피해서 초등학교도 다 못 다니고 홈스쿨링을 했습니다. 중학교는 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애가 교복은 입어보고 싶어하거든요…….”

심란한 표정으로 고민을 토로하는 변호사 앞에서 현상은 문득 헐렁한 교복 마이를 걸친 도화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당연하게도 신품이 아니었다. 근처 상가에서 일을 다니는 도화의 어머니가 주변 사람에게 물어물어 얻어온 중고품이었다. 팔꿈치가 해지고 무릎에 보풀이 인 교복을 그래도 도화는 좋다고 입고 다녔다. 그 나잇대 아이들에게 교복이란 자신이 특정 집단에 속해있다는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매개체임에 틀림없었다.

로펌 대표 변호사의 아픈 딸을 생각했다. 그 아이도 분명 교복을 입을 수 있을 것이다. 도화가 입은 해진 교복과는 정반대인 신품 교복을.

결국 공판준비기일은 다다음주 월요일로 정해졌다.

차를 몰고 20분 거리의 집으로 귀가했다. 현관문 옆의 작은 창문에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잠긴 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가면 구운 빵 냄새가 확 풍긴다. 서늘한 밤 공기와 대비되는 따뜻하고 촉촉한 향기를 맡으면서 현상은 구두를 벗었다. 현관에는 현상의 또다른 구두 외에 작은 운동화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오, 오셨어요…….”

TV가 켜진 거실 안쪽에서 꼬마가 얼굴을 내밀었다. 밤이 깊었는데도 여즉 교복을 벗지 않은 채다. 입가에는 보슬보슬한 토스트 가루가 묻어 있다. 눈인사를 하고 거실을 지나 안방으로 들어갔다. TV에서는 이름 모를 가수들이 뚱뚱한 브라운관 안에서 빠른 템포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실내복으로 갈아입으며 브라운관 안의 가수들을 생각했다. 일전에 도화가 말했던 서태지와 아이들은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은 이미 올해 초에 해체를 주장했다. 센세이셔널한 사건이었던 듯했다. 연예계에는 영 관심이 없어 보이던 딱딱한 직장 동료들도 서태지라는 이름을 입에 올렸으니. 현상은 신문에서 그의 이름을 본 적이 있었다. 목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못 보던 가수들이군.”

부엌에서 물을 한 잔 마시며 도화에게 말을 걸었다. TV 아래에 무릎을 꿇고 앉아 비디오 기기를 조작하는 중이었다. 버튼을 몇 번 누르자 기기 안에서 비디오 테이프가 찰칵 튀어나온다. 네모난 저장 매체를 손에 꼭 쥐고 도화는 씩 웃었다.

“이, 이번에 새로 데뷔했대요. 노래가 좋아서……. 학교 끝나고 와서 녹화했어요.”

그리고 여태 그걸 돌려보고 있었다고.

도화는 음악 방송을 녹화하는 게 취미였다. 학교가 끝나고 친구들과 놀다가도 음악 방송이 시작하면 곧바로 현상의 집으로 돌아왔다. 제 용돈을 모아 산 비디오 테이프에 이번 주의 방송을 녹화했다. 도화의 집에는 비디오 기기가 없다. 녹화 용량이 다 찬 테이프만이 책상 밑에 쌓여있을 뿐이다.

“토스트 드실래요?”

“아니, 저녁 먹고 왔다.”

“네…….”

쑥스럽다는 투로 비디오 기기 앞에서 멀어진다. 뉴스를 볼 용도로 TV를 구매했을 때 사은품으로 딸려온 기계다. 현상은 TV를 설치한 이래 비디오를 재생시켜 본 적이 없다. TV 선반의 공간만 차지한다는 생각이 들어 그대로 내다버릴 생각을 하던 차에 도화는 처음으로 현상의 집에 찾아왔었다.

“우와, 비디오…….”

하며 눈을 반짝이던 열세 살 꼬마의 얼굴을 현상은 아직 기억하고 있다.

도화의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는 아침 일찍 일을 나가 밤 늦게 집에 돌아왔다. 현상은 그보다 늦게 출근했고 조금 이르게 퇴근했다. 도화는 오후에 하교해 아무 친구들을 붙잡고 밖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 즈음에야 비척비척 집으로 돌아왔다. 텅 빈 집을 도화는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도 없고 간식도 없는 집에 가고 싶지 않아했다. 친구와 함께 공원 놀이터 그네에 앉아 불량식품을 깨작깨작 뜯어먹고 있던 도화를 현상은 퇴근하는 길에 몇 번이고 보았다.

얼마 후 현상은 아침에 식빵을 먹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잊지 않고 꾸준히 사 오게 되었다. 식빵과 잼과 버터를.

아들에게서 이야기를 전해들은 도화의 어머니는 퇴근길에 현상의 집에 찾아왔다. 뺨도 코도 붉었고 손은 군데군데 터 있었다. 애가 아빠가 없어서, 일을 다니는 바람에 도화를 잘 못 봐주고 있는데, 현상 씨 덕분에 요즘 애 얼굴이 밝아져서, 정말 감사하다고, 묶은 지 좀 되어 느슨해진 머리끈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겨우 붙잡고 있었다. 다소곳하게 모은 손에서 흉이 많이 진 금색 반지가 흐리게 빛났다. 왼손 약지의 반지. 이혼으로 부부의 정이 끊긴 사람이라면 반지는 착용하지 않는다. 사별이라면 말이 다르다.

현상은 그녀에게 도화가 먹다 남긴 식빵 봉지를 건넸었다.

거진 일 년이 지난 지금도 도화는 현상의 집에서 끼니를 때우고 있다. 하루에 세 장의 식빵을 구워 잼과 버터를 발라먹는다. 우유도 한 잔 마신다. 이따금 현상의 변덕으로 냉장고에 우유 대신 주스가 들어있는 날이면 주스를 마신다. 찬장에 딸기잼이 아닌 블루베리잼이 들어있으면 군말없이 블루베리잼을 발라먹는다. 식탁 위에 식빵 봉지는 없고 파운드케이크 박스가 놓이면 기름진 파운드케이크를 잘라먹는다.

오늘은 특식이 아니었다. 식빵과 딸기잼과 버터가 있는 날이었다.

“아저씨, 저, 갈게요.”

부엌 식탁에 앉아 물을 마시던 현상에게 도화가 말했다. 쓴 흔적이 있는 토스트기는 제대로 코드가 빠져 있다. 사용한 식기도 전부 치워두었다. 켜져 있던 TV의 전원도 껐다. 열네 살 치고는 교육이 잘 된 편이다.

“오,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현관 앞에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작은 가마가 보였다가 사라진다. 현상은 부엌 식탁에 앉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잘 가라.”

현관문이 닫혔다. 꼬마가 만들었던 온기가 사라진다. 현상은 현관 앞에 남은 도화의 잔영을 잠시 살피다가 식탁에서 일어났다.

도화는 고등학교 들어 공부를 완전히 놓았다고 했다. 실은 중학교 때도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고도 했다. 고등학교 들어서는 심화되어 이젠 칠판 앞의 선생들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단다. 국어는 차라리 읽을 수라도 있지, 글을 읽고 이해하는 건 또 별개의 일이지만, 하여튼, 수학이나 과학은 저 그래프가 대체 뭔지 상상조차 안 된다. 아무래도 자기는 공부머리가 아닌가 보다.

“아저씨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헤헤……. 안 되나 봐요.”

“검사가 되고 싶었던 건가?”

“검사? 음……. 아저씨처럼 돈을 많이 벌고 싶었어요.”

“그러면 꼭 검사가 되지 않아도 돼.”

“그래도, 공부 잘 하는 사람이 돈을 많이 벌잖아요.”

“네가 좋아하는 연예인들도 돈은 많이 벌지.”

연예인이라는 말에 도화의 눈이 반짝였다. 도화가 중학교를 다니던 삼 년 간 한국의 연예계에는 아이돌이라는 이름의 돌풍이 불었다. H.O.T.와 젝스키스라는 단어를 도화는 계속해서 말했다. 연예계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현상도 이윽고 신문에서 그들의 이름이 보이면 반가운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도화는 아이돌이 되고 싶어했다.

틈만 나면 노래를 흥얼거리고 춤을 췄다. 흥을 주체하지 못하고 학교 축제 무대에서 당시 유행하던 춤을 추기도 했다. 친구가 녹화한 축제 무대 영상에서 고등학교 교복 차림의 도화는 놀라운 솜씨로 춤을 추고 있었다. 현상이 따라했다가는 그대로 관절이 꼬여 병원 신세를 져야 할 법한 춤이었다.

“아이돌 오디션이라는 게 있던데. 보러 가지 그래.”

현상이 그리 물으면 도화는 살짝 낯빛이 어두워졌다.

“제, 제가 붙을 리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돈이었다. 만일 운좋게 오디션에서 뽑혀 아이돌 연습생이 된다고 해도, 연습생 기간 동안 벌 수 있는 돈은 사실상 없다. 연습생 기간이 언제까지인지도 모른다. 집안 사정이 좋지 않은 도화는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돈을 벌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고 했다. 더군다나 자신은 군대도 다녀와야 하는데. 무급자로서의 기간이 너무 길어진다. 그건 안 될 일이다.

도화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아르바이트로 중학생은 써 주지 않는 곳이 많았지만 고등학생은 그래도 많이들 쓰는 편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바로 아르바이트 장소로 달려가 일을 한다. 그리고 밤늦게 귀가한다. 자연스럽게 도화가 현상의 집에 들르는 빈도는 적어졌다. 원래는 삼 일이면 다 떨어졌던 식빵 한 봉지가 이제는 일주일이 지나야 다 떨어질까 말까였다.

아르바이트 첫 월급을 탄 날 도화는 현상에게 넥타이를 선물했다. 남색 배경에 하늘색 줄무늬가 촘촘하게 그어진 무난한 디자인의 넥타이였다. 그동안 아저씨 덕분에 많은 걸 할 수 있었다며 울먹였다. 꼬마에게 선물을 받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그 목소리를 들으니 받지 않는 게 더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현상은 몇 년 후 그 넥타이를 매고 검찰청에 사표를 냈다.

끽다점의 창가 자리에서 나이프로 프렌치토스트를 자르던 현상은 문득 고개를 들어 맞은 편을 바라봤다. 약간 긴장한 기색이 있는 도화가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작은 접시에 서빙된 제 몫의 토스트는 이미 먹어 치운 후였다.

“몇 시 출발이라고 했지?”

“두 시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얼추 두 시간이 남았다. 도화와 동행할 또다른 조사원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일전 부산 사건에서 함께했던 조사원이라는데, 현상은 필드에서 그녀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마 조사 건마다 이름을 바꿔가며 활동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요코하마에서 출발해 일본을 위아래로 길게 한 바퀴 돈 후 요코하마로 다시 입항하는 10박 11일 여정의 크루즈. 특이사항으로 경유 도시에 부산이 끼어 있었다. 요코하마에서 출발해 6일 후 부산에 도착하고 그로부터 4일 후 요코하마로 돌아온다. 도화는 이 크루즈에 탑승한 어떤 승객을 조사해야 한다고 했다.

“요코하마까지 가지 말고, 부산에서 승선하는 게 낫지 않나?”

현상의 자연스러운 의문에 도화는 잠시 심부름센터의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대답했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조사 대상이 어쩌면 부산에서 중도 하선을 할지도 모르겠다고 해서요.”

“중도 하선?”

“왜인지는 모르겠어요. 저쪽 정보라서. 하여간 그 인간……. 물어봐도 알려주지도 않아. 아무튼간에 요코하마까지 가야 된다고 하던데요.”

“그 조사에 너는 왜 끼는 거냐?”

“…제가 시킨 조사라서.”

“네가 시킨 조사라니?”

“영감님도 참. 있어요, 그런 게. 설명하기 좀 길어요.”

현상은 그 뒤로도 몇 번이고 캐물었지만 도화의 입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도화는 이왕 이렇게 된 거 함께 일본을 가자고 했다. 자신은 일본어를 할 줄 모르니 영감님이 함께 있어주면 도움이 될 것 같다며. 현상은 비즈니스 일본어를 할 줄 알았다.

“경비는 제가 댈 테니까, 네?”

“나는 괜찮다만. 너 딴따라 일은 어떻게 하고?”

딴따라가 아니라 인터넷 방송이라는 도화의 반박을 언제나 귓등으로 흘리는 현상이었다.

“잠깐 쉬어도 돼요. 인터넷 방송이라 방송 주기가 상당히 유연하거든요.”

자신이 그렇게 구독자가 많은 방송인도 아니니 이 주 정도는 안 보여도 괜찮다고 했다. 현상은 잠시 의구심을 가졌지만, 인터넷 딴따라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식이 없어 도화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커피를 마시며 끽다점의 창밖을 살피던 도화는 멈칫했다. 일행이 왔구나, 하고 백발의 현상은 짐작했다. 가게에서 나가기 위해 옷가지며 짐을 챙기는 모습을, 나이프를 내려둔 현상은 보고 있었다.

“가는 거니?”

“왔어요.”

“알겠다.”

매무새를 추스린 도화는 계산서를 집어들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테이블을 완전히 떠나기 전에 현상을 한번 돌아봤다. 분장으로 축 늘어뜨린 눈매가 현상을 살폈다.

“다녀올게요, 영감님.”

“다녀와라.”

“남은 여행 잘 보내요.”

“너야말로.”

현상이 식어버린 커피잔을 입에 댄 사이에, 도화는 계산을 마치고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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