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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guard

K=Potassium by KPo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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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직한 사전과 편람들이 키 큰 책장에 나란히 꽂힌 대학도서관 5층 참고자료실에는 그다지 사람이 없었다. 개강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도서관을 찾는 이들이 없는 탓도 있겠으나, 공부를 위해 도서관을 찾은 학생들은 저층에서 머물 테니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최은수는 텅 빈 열람용 테이블을 지나 서가 안으로 몸을 옮겼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법한 좁은 통로에는 누구도 서 있지 않았다. 꽂힌 책들의 도서 코드를 확인하며 목표하는 위치까지 뚜벅뚜벅 걷는다. 서가라는 벽으로 만들어진 미로는 도전자에게 제법 친절한 편이었다.

“뭘 찾는다고 했었지?”

은수의 뒤를 조용히 좇던 동행인이 물었다.

“졸업 전시 아카이브.”

미궁의 앞을 걷던 은수가 조용히 답했다.

“근 몇 년까지의 아카이브는 웹에 공개되어 있는데, 아무래도 십몇 년 전의 기록은 아날로그로만 존재하는 모양이더라고.”

“그게 이 도서관에 있다는 건가.”

당연한 말을 묻는 동행인에게 은수는 조금 짜증이 났다.

“예술을 중시하는 대학이니 말이야. 졸업 전시도 아카이브로 남겨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거겠지. 아마추어들의 작품이라고 한들 일단은 그들도 학교에서 커리큘럼을 완수한 전공자들이니.”

“좋은 판단이네.”

은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바로 눈앞의 서가 번호를 살폈다. 그녀가 목표한 서가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듯했다. 동행인은 그녀를 따라 서가 번호를 슬쩍 확인하더니 두 칸 앞의 서가를 가리켰다.

“나도 알아.”

작게 투덜거리며 그가 가리킨 서가로 향했다. 검은 가죽 표지에 금색 글씨가 박힌 편람이 두 줄 정도를 채우고 있었다. 서가의 너비가 그리 작지 않은 걸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양이다. 검게 빛나는 책등에는 H대학교 회화과 졸업 전시 편람이라는 어구가 동일하게 적혀 있다. 늘어선 동어반복 속에서 다른 건 년도뿐이다.

“몇 년도 작품을 보려고?”

편람의 책등을 손으로 훑던 동행인이 물었다. 은수는 그에 대답하지 않고 특정 년도의 편람을 쓱 뽑아들었다. 그다지 두껍지 않다. 회화과의 졸업작품이란 대부분 그림 한 장일 테니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딱딱한 가죽 표지를 펼쳐 목차를 훑었다. 졸업 전시에 작품을 출품한 학생들의 이름이 작품의 제목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 소나무의 이름은 중간 즈음에 있었다. 작품의 제목을 확인하기도 전에 손이 먼저 움직였다. 빳빳한 페이지를 빠르게 넘긴다. 다른 학생들의 작품들이 활동사진처럼 훅훅 지나갔다. 캔버스나 패널에 그린 그림이 대부분이었고 설치형 작품은 겨우 한두 작품 있을까 말까 했다.

그리고 소나무의 작품 역시 한 장의 그림이었다.

<Fragment>, 200X, 캔버스에 유채, 162.2×130.3cm

우선 느껴지는 건 어두운 색감. 무엇을 그린 건지 바로는 알기 어렵다. 캔버스는 인물화의 규격이니 사람을 그린 건 맞을 것인데. 캔버스 정가운데에 그려진 거대한 타원형의 무언가는 그 위에 덧칠된 모자이크 같은 치장에 의해 완전히 가려져 있다. 잠시 시간을 갖고 들여다 보면 가려진 모티프는 분명 인간의 얼굴임을 알 수 있다. 정면이 아닌 사선을 바라보는, 콧날이 조금 선 얼굴은 그것이 남자의 것인지 여자의 것인지도 판별하기 어렵다. 얼굴 전체를 뒤덮은 강렬한 붓터치의 모자이크와 갈라짐 패턴이 관찰자의 판단을 흐리기 때문이다.

문득 이전에 보았던 그림이 머리를 스쳤다. 작년 봄, 부산의 고립된 갤러리에서 보았던 어떤 화가의 추상화가 떠오른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피사체를 과도하게 변형시켜 흘긋 보는 것만으로는 뭘 그린 건지 알 수 없는 추상화. 소나무의 졸업 작품은 확실히 그와 닮은 일면이 있었다. 추상화라고 하기에는 피사체가 명료한 편이기는 하지만.

소나무는 그 추상화에 관심을 보였다. 추상화의 피사체를 제 나름대로 해석해 알맞은 답을 내놓기도 했다. 다른 작품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그가 추상화에만 관심을 보였던 건 자신의 예술 세계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은수는 일단 편람을 닫았다. 보고 싶은 건 다 보았다. 작품의 해석은 하지 않아도 좋았다. 소나무의 작품이 내포한 의미를 알기 위해 발품을 판 것이 아니다.

그저 그가 온라인 포트폴리오에 공개하지 않은 작품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디지털 그래픽이 아닌 아날로그 터치가 궁금했을 뿐이다. 디지털에서는 볼 수 없는 원시적인 형태의 터치가.

편람을 서가에 돌려놓았다. 은수의 어깨 너머로 소나무의 그림을 빤히 보고 있던 동행인은 왠지 아쉬운 눈치였다. 물론 그런 눈치에 호응할 정도의 선량함이 은수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도서관을 나와 자신의 모교가 아닌 교정을 걸었다. 숲처럼 풍성하게 가꿔진 가로수가 그들의 시야 일부를 가렸다. 도심 속에 지어진 학교 치고는 제법 환경친화적인 디자인이었다. 동행인이 적을 두고 있는 언덕 위의 대학교도 이 정도로 나무가 많지는 않다고 했다.

“대학 캠퍼스라기 보다는 도시숲 같은 곳이야.”

동행인이 길고 풍성한 머리칼을 하나로 올려 묶으며 말했다. 50대 남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헤어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캠퍼스를 거니는 학생들의 시선은 그에게로 향하지 않았다. 예술 특화 대학이란 열린 마인드를 가진 이들의 쉼터인 것이다.

“교수님은 할 일을 다 하셨나?”

은수가 물었다. 교수라고 불린 포니테일의 남자는 잠시 새파란 가을 하늘에 시선을 두었다가 대답했다.

“만날 교수들은 다 만났지. 이젠 내려가면 되겠어.”

그는 오늘 이 대학교에서 있었던 미술계 세미나에 참석했다. 그의 전공은 미술과는 동떨어진 민속학이기는 하지만, 민속 예술 분야에서 참고를 얻기 위해 초청되었다고 한다.

“나야 종교학 전문이니 실질적으로 도움을 준 주제는 불화뿐이었지.”

“그거 하나 물어보려고 사람을 천안에서 서울까지 부른 건가. 하여간 목에 힘 좀 주는 인간들은…….”

얼마 걷지 않은 것 같은데 금세 교문이 보였다. 천안에서 차를 타고 상경한 교수는 교문 근처 주차장에 차를 대 놓았다고 한다. 은수도 자가용을 끌고 온 건 같았지만 캠퍼스 밖 주차장에 세워두었기에 아무래도 교문에서 헤어져야 할 듯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교수들 사이에서 이것저것 주워들으니 재미있던걸. 이쪽 필드는 좁아서 세미나라도 하려 치면 세미나는 무슨, 술자리가 된다니깐.”

그가 몸담고 있는 종교학의 이야기였다. 종교학이라고 하면 여러 종교를 포괄해 범위가 넓기는 하지만, 실상 신학이나 불교학 같이 하나의 필드를 깊게 파고 있는 이들과는 교류를 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더군다나 그가 특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종교는 민속 종교, 즉 무속인 터라 고립화는 필연적인 흐름이었다.

은수는 제 옆을 걷던 그를 슬쩍 흘겼다. 언제나와 같이 선해보이는 눈은 무표정하게 앞을 바라본다.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재미있었던 거 아닌가?”

무감정한 다갈색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 은수를 향했다. 그가 걸음을 멈추는 일은 없었다.

“아직은 양석민 교수라는 자아를 잘 보호하고 있다는 방증이 된 거 아냐. 자기 필드도 아니고 다른 필드의 세미나에 초청도 되고 말이야.”

포니테일을 흔들며 앞으로 나아가던 양석민 교수는 교문 근처에서 발을 멈춰세웠다. 은수 역시 덩달아 발걸음을 멈춘다. 교문 바로 앞 횡단보도의 신호등은 붉게 빛난 채 여러 학생들의 전진을 억제하고 있다. 석민의 다갈색 눈동자도 비슷한 기능을 하고 있었다. 은수라는 개인에게만.

그의 눈동자는 아주 맑았었다. 신화에 이끌려 연구를 계속하는 연구자의 눈동자에는 호기심과 천진난만함으로 연마된 맑은 빛이 가득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느냐고 한다면 글쎄. 지금도 그의 눈에는 빛이 가득하다. 다만 그것은 연구에 대한 열망에서 발한 게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존속을 위해 전전긍긍하는 광인의 의지에서 발한 빛이었다. 다 꺼져가는 양초가 발버둥치며 내는 마지막 불꽃과 같은 것이었다.

“좀 위험해 보이네, 교수님.”

주위에는 학생들이 많다. 학생이 아닌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그들은 남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도로를 건너고 신호등에 불평하며 큰 목소리로 떠든다. 도로를 꽉 메운 자가용과 택시와 버스는 또 어떤가. 엔진 돌아가는 소리를 내고 클락션을 울리며 두 사람의 대화를 완벽하게 묻어버리는 그들은 어떤가. 자신 말고는 누구에게도 관심을 주지 않는 냉엄한 과밀 도시의 소음은 비밀 이야기에 몹시 적합하다.

“지난 번에 봤을 때보다 살도 좀 빠진 것 같고. 뱃속의 그게 에너지를 더 많이 소모하기 시작한 건가?”

석민은 아주 조금이지만 미간을 찌푸렸다. 속눈썹이 긴 눈가가 찌그러지는 모습을 은수는 관찰하고 있었다.

“그건 아니야. 살이 빠진 건 아마 다른 이유일 테니…….”

“다른 이유?”

무게가 줄어든 허리를 손으로 짚으면서 석민은 고개를 저었다. 딱히 너한테는 하고 싶지 않은 말이라는 제스처였다. 대강 짚이는 바가 있었지만 은수는 일단 눈감아주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부탁을 하나 하고 싶은데, 은수야.”

“교수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드려야지.”

석민은 작게 한숨을 내뱉곤 입을 열었다.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파란색으로 변하는 것과 동시였다. 억제되었던 이들이 물밀듯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과 동시였다.

“혹시 이 주변에 괜찮은 식당 아니?”

그렇게 동생을 좋아하던 인간이 어쩌다가 저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딱히 내막을 알고 싶지도 않고 현황도 자세히 파고 싶지 않다.

서울을 제 손바닥처럼 들쑤시고 다니는 은수는 그의 취향에 맞는 식당을 소개해주었다. 자기 대신 운전대를 잡아준 제자한테 한끼를 사야할 것 같다고 했다, 그런 메뉴면 그 애도 맛있게 먹을 것 같다고도 했다. 고맙다며 인사하던 석민의 얼굴을 은수는 세 시간이 지난 지금도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동생을 좋아하던 인간이…….

동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은수는 어쩐지 옅은 상념에 빠진다.

양석민에게는 목숨을 빚졌다. 그는 은수가 동생을 끔찍이 아끼는 걸 보고 자신과 동질감이 들었다며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자칫하면 동생과 함께 죽을 뻔했던 은수를 동생과 함께 구해주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는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

은수는 그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뱃속에 인간이 아닌 무언가를 품고 살아갈 수 있을 리 없다고 여겼다. 그것을 품었다가 인간의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뭉근하게 녹아내린 이들을 몇 번이고 보았다. 뱃가죽을 찢고 흘러나오는 검붉은 장기와 촉수와 기타 신체 일부였던 피하조직의 융합체를 은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계속해서 보고 있었다.

석민은 그러나 오래 살아남았다. 민속학 연구자라는 특성을 살려 전국을 돌아다니며 제 몸을 건사할 방법을 찾은 모양이었다. 그가 관심을 두고 있던 무속은 상상 이상으로 모독적인 종교와 닿아 있었다. 그것만은 그에게 행운인 일이었다.

“내 곁에는 다음 숙주 같은 건 없지. 그러니 내가 죽으면 그건 세상 밖으로 튀어나와 갈 곳 없는 분노를 거세게 표출하기 시작할 거야…….”

그러니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해치울 방법을 고안해야 한다. 석민 그 스스로 해치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미 시간이 너무 흘러버렸다. 몸속에 뿌리를 박은 그것에 칼날을 박는다면 그것의 숨이 끊기기 전에 숙주인 석민이 먼저 죽고야 말 것이다. 죽은 숙주에서 튀어나온 그것은 분명 연약한 인간뿐인 이 세상을 망가뜨리려 들 것이고…….

“그렇게는 안 되지. 희태가 살고 있는 세계를 멸망시켜서야 안 될 일이야. 방법을 찾아야 해…….”

최근에 만난 그는 드디어 방법을 찾은 것 같다고 했다. 자신을 막을 새싹을 찾아 충분히 길러두는 데 성공했다고도 했다. 이 정도면 제가 죽어도 그것이 세상을 집어삼킬 일은 없을 거라고.

은수는 그 새싹이라는 사람을 알고 있다. 한참 전 그의 연구실에 들렀을 때 우연찮게 얼굴을 보았다. 여우를 닮은 남자였다. 신을 받지 않은 저주를 받고 있는 가여운 신받이기도 했다. 양석민의 자살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이기도 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전혀 알지 못하는, 그저 반상 위의 말에 불과한 개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양석민은 그에게 지나칠 정도의 호감을 가지고 있다.

자신을 죽일 아이에게 애정을 쏟는 게 결코 좋은 일은 아니라는 걸 분명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

무슨 생각인 건지 알 수가 없군.

눈앞에 펼쳐진 도심의 도로에서 운전대를 돌리는 걸 깜빡하고 다른 차의 뒤꽁무니에 보닛을 처박기 전에, 은수는 빠르게 머릿속의 화제를 전환했다.

“본격적으로 화풍이 바뀌기 시작한 건 대학교 3학년 때부터. 그 전까지는 좀 더 실험적인 시도를 많이 했다고 해. 원래 같았으면 붓으로는 쓸 수 없는 물건으로 그림을 그린다거나, 비 오는 날 나무 밑에 캔버스를 눕혀두고 물방울이 떨어진 모습을 밑그림으로 삼는다거나. 사실 프로들의 세계에서는 이미 한번씩 모습을 보였던 방식이지만 학교 안의 학부생이 교수의 권위를 거부하고 제 마음대로 창작하는 과정이 주변인들에게는 신선하게 비쳤다는군.”

선글라스를 벗은 맨눈의 김민석은 웬일로 블레이저를 다 입고 나타났다. 안에 받쳐 입은 연한 색의 티셔츠는 구김이 거의 없다. 조금 긴 머리를 이마 뒤로 넘겨 묶은 걸 빼면 전체적으로 단정해 보인다. 어딘가의 신도시에서 세 살 정도의 아이를 두고 열심히 살아가는 젊은 가장처럼도 생겼고, 유명하지는 않지만 이따금 연속극의 감초로 입에 오르내리는 배우처럼도 생겼다. 물론 그가 이렇게 멀쩡한 삶의 레일에 올라탄 인간처럼 가장하고 나타난 이유는, 단지 은수가 그를 불러낸 곳이 서울의 대형 미술관이었기 때문이다.

이름만 아는 외국 작가의 예술 작품 앞에서 은수는 뒷짐을 지고 그렇게 말했다. 전시관을 두리번거리는 일반 관객들은 그들의 동행인에만 관심이 있을 뿐 예술 작품이나 남에게는 전혀 눈과 귀를 향하지 않는다. 민석은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미묘하게 불량한 태도로 그녀의 조사 결과를 들었다.

“대학교 3학년 때부터는 좀 더 정통적인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뭐 그런 말인가?”

다음 작품으로 걸음을 옮기며 민석이 물었다.

“그런 셈이지. 캔버스에 물감이 푹 젖은 휴지를 던지지도 않고, 폐기처분 직전의 자동차에서 뜯어온 엔진 안의 기름을 쥐어짜내 물감으로 만들지도 않고. 그저 여타 평범한 학생들처럼 파레트에 물감을 풀어 캔버스의 스케치 위에서 붓을 놀리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이런저런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눈에 튀는 일은 관둬버린 거 아냐? 나 학교 다닐 때도 있었어, 그런 애들.”

“너따위 범인凡人이랑 예술가는 사고의 흐름이 달라.”

은수는 간단하게 일갈했다. 민석은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지만 뭐라 따지지는 않고 그저 눈앞의 작품에 시선을 두었다. 다음 작품 앞에서 도란도란 이야기하던 남녀 커플은 서로를 보고 배실배실 웃다가 통로를 따라 다음 전시관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런 말을 듣는다고 자신의 특색을 꺾을 인종이 아니라는 말이지. 정서불안으로 주변의 평가에 휘둘리는 것 같으면서도 다음 작품을 보면 그의 특색은 고스란히 살아있다. 그런 게 예술가라는 족속이야.”

그러나 그는 대학교 3학년, 자신의 특색을 꺾고 무난한 서양화로 전향했다. 색은 좀 어둡게 쓰는 경향이 있었지만 전체적인 틀은 서양화의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주변인들은 그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전위미술을 버리고 보편성의 필드로 도망온건가. 소나무하면 전위미술 아니던가. 그런 그의 전향을 아쉬워하는 교수도 몇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했지.”

은수가 중얼거렸다.

“그래서 내가 딱히 시키지 않았는데도 발품을 파신 건가.”

민석이 등을 쭉 펴선 슬쩍 웃었다. 은수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작년 봄에 있었던 그 일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더군.”

전시장을 메운 작은 웅성거림이 새삼스럽게 인지된다. 다른 관람객들도 이런 웅성거림을 인지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으리라.

“그 사람은 분명히 예술가 족속이야. 자신의 예술을 위해 수단도 방법도 가리지 않는 인간들. 하지만 정신의 어딘가가 절망적으로 비틀려 있다. 예술가들이야 정서불안을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지만 그 사람은 좀 이상하지. 정서가 불안하기는 커녕 아주 메말라 보였어. 그런데도 클라이막스에서는 누구보다 예술가다운 정신을 가감없이 드러냈지? 그러니까 비틀리고 뒤틀린 절망적인 정신이라는 거야.”

민석은 무언가 생각하고 있는 듯 반응이 없었다.

“SNS를 쭉 봤지. 일러스트레이터라고 한 게 거짓말은 아니던데? 캐주얼한 화풍의 디지털 그림을 공장처럼 찍어내고 있더군. 그러니까, 정말로 공장처럼. 머릿속에 떠오른 걸 손이라는 프린터로 그려낸다. 그런 걸로는 제 욕구를 충분히 해소할 수 없지. 예술성이 떨어지잖아. 예술도 아니고 그림도 아니고 그저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거에 불과한 단순 노동일걸.”

“그래서 그 사람은 욕구가 충분히 해소되지 않았다는 건가?”

“오늘은 웬일로 말이 좀 통하네.”

“시끄러.”

“욕구가 충분히 해소되지 않았다고 할까. 해소 자체가 되지 않았던 거지. 그러니 예술가로서의 감정은 메말라 간다. 자기 안에 그런 게 있었던가 의심스럽게 느껴질 무렵, 마침 갤러리 사건을 마주해선 한동안 잊고 있었던 예술의 혼을 불살라버린 게 아닌가.”

그러니 그는 비틀리고 뒤틀리고 절망적인 정신인 것이다. 대학 시절 누구보다 예술가다운 행보를 보였던 그는 어느 순간 예술가로서의 본능을 억압하고 살아간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다. 빈곤한 예술가들처럼 캔버스를 살 돈이 없는 것도 아니다. 지금의 그는 손이 빠른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충분한 수익을 얻고 있다. 예술가로서의 본능이 아예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그랬던 거라면 작년 봄의 끔찍한 사건에서 그런 역할을 맡았을 리 없다. 돈과 본능이 충분한 인간이 예술을 포기할 이유는 사실상 없다.

은수는 제삼의 이유를 생각해야만 했다. 추측은 어렵지 않았다. 내재적인 이유가 아니라면 외재적인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내재적인 이유는 본능과 흥미뿐이다. 외재적인 이유는 돈과 환경과 그리고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나는 말이지, 전세계의 미술가들을 따라가려고 노력해. 요즘은 노력이랄 것도 없지. 인터넷이 워낙 잘 발달되어 있잖아. 남의 관심으로 먹고 사는 미술가들은 정보의 바다에 자신의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흘리기 위해 전전긍긍하거든. 그들이 하루하루 업데이트하는 정보를 스마트폰으로 확인해. 오늘은 누가 어디에서 전시회를 열고, 다른 사람은 작품을 어느 정도 완성했고, 또다른 누군가는 사람을 만나 영감을 얻고. 이렇게 과하게 연결된 시대가 설마 내가 죽기 전에 찾아올 줄이야. 정말 영광인 일이지.”

남녀 커플이 지나간 연결통로를 걷는다. 조명이 어두운 전시관으로 이어졌다. 은수의 뒤를 따르던 민석은 어느 순간부터 말이 없어졌다. 지금은 자기가 끼어들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예술 타령에 저도 모르게 작년 봄의 체험이 되살아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연결통로를 나와 가장 처음으로 보인 건 커다란 한 장의 그림이었다.

<인간의 조각 IV>, 202X, 캔버스에 유채, 333.3×248.5cm

조각이라는 메타포를 누구보다 좋아하는 해외 작가의 작품.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하지는 않지만 업계 내에서는 나름의 인지도가 있는 작가였다. 캔버스에 그리는 회화뿐만 아니라 설치 미술이나 미디어 아트에도 손을 뻗어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데, 회화와 설치 미술, 그리고 미디어 아트 각각의 표현력과 방향성이 상이하게 달라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인터뷰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 테지만 그는 외부와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다. 인터뷰는 거절하고 메일은 읽지 않으며 출품 후 전시 때에는 대리인을 내세운다. 당연하게도 얼굴도 나이도 성별도 결코 알려지지 않았다. 완전한 복면 작가인 것이다.

민석은 턱을 조금 당겨 3미터짜리 캔버스를 살폈다. 미간에 새겨진 주름은 작품의 독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걸 선연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은수는 조각난 피사체를 덧칠한 붓터치를 뜯어보았다.

소나무의 졸업 작품에서 보았던 붓터치는 그곳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아니, 이곳의 붓터치가 소나무의 졸업 작품에 고스란히 남았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 사람의 졸업 작품을 보고 왔어.”

“졸업 작품?”

뭔가에 홀린듯이 작품을 바라보고 있던 민석이 눈동자만을 굴려 은수를 쳐다보았다.

“미술대학은 졸업할 때 자기 작품을 하나씩 만들어서 전시하지. 거기에 출품한 그 사람의 작품을 보고 왔다는 말이야.”

그리고 은수는 손가락을 들어 그림의 특정 부분을 가리켰다. 민석의 눈동자가 다시 굴러 그곳에 꽂혔다.

“그 작품과 이 작품의 붓터치는 이상할 정도로 닮아있어.”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은수를 쳐다본다.

희미하게 남성용 향수의 냄새가 풍겼다.

남들이 본다면 우리도 데이트 중인 커플로 보일까.

웃긴 상상이었다.

“그때 그 사람이 그랬지? 누굴 찾고 있다고.”

소나무는 자신의 스승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렇게 말했다.

자신은 그 사람을 찾기 위해 일생을 바쳤다고도 했다.

“우리가 먼저 선수 쳐 보자고.”

“여기까지 와서 할 소리는 아니지만.”

“아니지만?”

“그렇게 큰 미술관에 걸릴 정도의 화가면 당연히 그 사람도 알고 있는 거 아니야?”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그 사람 성격에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거 같고. 화가랑 이미 얘기 다 끝난 거 아닐까? 얘기를 해 봤는데 자기가 찾던 사람은 아니었던 거지. 그러니 작년까지 계속 누군가를 찾고 있었던 거고.”

“그것도 역시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럼 우리가 여기까지 온 이유가 없잖아.”

“그것도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무슨 꿍꿍이야?”

“하지만 그럴 리 없을 수도 있겠지.”

“무슨 소리야?”

“그 정도로 똑같은 붓터치와 테마를 가지고 둘 사이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건 이상해.”

“단순한 우연일수도 있잖아.”

“아니, 우연일 리 없어.”

“…….”

“일러스트레이터는 알 수 없었지만 우리 같은 조사원들은 알 수 있는 게 있을지도 모르지.”

“상당히 그 사람한테 집착하네.”

“궁금하잖아. 누굴 찾고 싶어서 무서운 짓까지 마다하지 않고 있는지.”

“그건 나도 궁금하긴 하지.”

“그럼 여기까지 온 이유가 성립하는 셈이야. 이제 더 이상의 불평불만을 입에 담으면 갑판 밖으로 밀어버리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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