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ekaboo!

🔗🤲 😋

난향녹차 by 참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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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2093

Daily report

Status: all green

써니는 조금 심심해 보인다. 내가 심심해서 감정이입하는 중이라고 봐도 되고. 도무지 할 게 없으니 봤던 경기 보고 또 보고……녹화라도 잔뜩 해 와서 다행이지, 아, 젠장. 휴가 한번 나갈 때마다 리그 순위가 하늘로 솟았다 땅으로 꺼졌다 한다니까?

취미가 비슷한 사람도 하나도 없고, 연구소는 정말 재미없는 곳이다. 다들 책상물림만 하고 살았는지 축구는커녕 족구 한번 할 만한 인원도 모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는 98년도 더비전 비디오를 시험관 앞에서 돌려봤다. 추측일 뿐이지만, 써니도 그다지 흥미로워 하는 것 같진 않다. 차라리 세계의 아침식사 영상 보여줬을 때 더 반응이 좋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인마, 이게 얼마나 재밌는데. 네 이름 따 온 내 열두 살 된 할아범 강아지도 공놀이라면 아주 환장을 해요. 드리블이라는 거야, 이게. 크으! 죽여준다. 98년도 더비전이야말로 세상에 다시 없을 명경기였지. 이렇게 동그란 구체를 이리저리 몰고 다니면서, 어, 높이 띄우기도 하고 낮게 굴리기도 하고 그러는 거라고. 전세계가 요 머리통만한 공만 쳐다보고 있는 90분이란 게 얼마나 대단한 현상인지를 네가 어떻게 알겠냐……이러고 중얼거리고 있노라면 족구 한번 안 해주는 망할 동료들이 혀를 차며 지나가는데, 아주 재수 옴 붙은 새끼들이다.

뭐, 됐다. 두 달만 참으면 더 볼 일도 없을 놈들이니까. 올해 마거릿은 그야말로 여당의 주구처럼 구는 중이다. 비용 줄이기에 눈이 돌아서 재계약 면담도 제때 해주지 않을 정도니 말 다했다. 내가 연구소 빨리 나가고 싶단 생각만 하는 상태가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 잡을 생각 없이 대뜸 퇴직금 얘기부터 꺼내던 마거릿과 쥐꼬리만 한 금액에 실망하는 표정을 지으려고 애쓰던 나는 세상에서 제일 떨떠름하고 어색한 면담을 15분만에 마쳤다. 자본주의 만세!

막상 나간다고 생각하니 시원섭섭한 감정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여기 직원 놈들이나 마거릿 때문은 절대 아니다. 내가 유튜브 보여주며 오냐오냐 키운 요 시뻘건 바이오매스 녀석이라면 모를까. 나 없으면 이 무시무시하게 생긴 놈 누가 이름도 불러주고 드리블 묘기도 보여주고 하냐? 20초도 안 되는 쇼츠를 재생하면 털실공처럼 뭉친 덩어리 속에서 커다란 안구 하나가 스르르 떠오르고 갈가리 뻗친 촉수 끄트머리가 꿈틀꿈틀 움직이는데, 공포게임 한 번 안 해보고 자란 책벌레들은 질색할 법한 광경이지만 내가 보기엔 공 차는 흉내 같아서 나름 재밌었다. 흠, 가만. 이 녀석 안구가 언제 생겼더라. 내가 보고서에 안 썼던가?

10/4/2093

제랄드는 급기야 연구실까지 딸을 데리고 오기 시작했다. 소송 때문에 정신없는 건 알겠지만 네 살짜리 어린애를 공동육아하게 생긴 우리 정신을 대신 빼놓을 건 또 뭐냐고 따지고 싶다. 이제 와서 좋은 아빠 흉내 같은 거 내봤자 좀 많이 늦지 않았나? 유니는 진작에 대놓고 불평을 늘어놓더라, 남자들은 다 똑같다고, 애한테 관심도 없다가 양육권 뺏길 것 같단 생각이 들면 그때서야 갑자기 난리가 난다고……내 생각도 비슷하다. 양육권에서 ‘권’ 자를 떼버리면 제랄드도 다시 관심 없어질걸? 그냥 남들이 권리라고 하니까 갑자기 뭐 뺏기는 것 같고 억하심정 들고 그런 거겠지. 애 이름이 애비게일이라고 하더라. 자기소개하는 거 들어보니 제니였다. 그나마 눈치가 빨라서 다행이지. 만지지 말란 건 대체로 안 만지고 하지 말란 건 대체로 하지 않는다. 하루만에 유기체실 비밀번호 알아낸 것만 빼면……제랄드까지 호출당해 헐레벌떡 달려왔을 때는 거의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잔뜩 화난 어른이 제니를 둘러싸고 있었다. 나조차 그 애가 너무 가엾다고 생각했을 정도였지.

제니는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고 더듬거리며 진술했다. 고작 네 살짜리가 뭘 안다고 취조씩이나 하려고 들었는지. 이놈의 연구소만큼 비인간적인 직장이 또 없다니까? 제랄드가 어설프게 애를 싸고돌며 화도 내고 애원도 하고 해서 소장이 대충 물러나주긴 했는데, 내 보기엔 그냥 그가 작년부터 소장 라인을 타서 눈감아준 것 같기도 하다. 다 끝나고 생각해 보니 걔는 내내 혼자서만 놀았단 말이지. 대체 숨바꼭질을 누구랑 한 건데?

12/24/2093

난 애가 싫어.

몇 번이나 말했잖아, 마누라한테도 그랬다가 이혼당했다고. 그래, 나 한번 갔다 왔다. 요즘 세상에 그게 뭐 대수야? 갔다는 게 연방교도소만 아니면 됐지. 젠장, 진짜 깜빵 밥 먹어봤다고 해도 어쩔 건데. 이 연구소보단 덜 삭막하고 사람 사는 냄새도 날걸?

냄새 하니까 또 열받네. 이래서 암만 대가리라고 해도 책상물림만 해본 새끼들 앉히면 안 된다니까? 연구자란 놈들은 죄다 정치를 못해서 문제고 어쩌고저쩌고. 아니 그러는 소장 자식은 뭐 제대로 따온 프로젝트가 있긴 해? 전임이 때려치우고 나간 것밖에 없잖아, 우리. 정치도 비빌 구석에다 비벼야 잘했다고 손뼉이라도 쳐 주지. 연구소 안에서만 이놈 저놈 모아다 공화당 민주당 쎄쎄쎄 놀이나 하고 자빠진 게 뭔 얼어뒤질 정치력이냐? 유기화학의 유 자도 몰라서 맨날 어디서 무슨 냄새가 나네 뭐가 새는 것 같네 지랄염병이나 떨고 사람을 새벽 네 시에 다 깨워서 펄펄 날뛰고……어린애 간수 못해서 애가 밤마다 기어나가 노는지 아닌지도 몰랐던 건 제랄드 자식인데 책임은 왜 내가 같이 져야 하냐고. 아 그 새끼가 자기가 이틀치 번 선다고 했다니까, 교도소에선 카드 못 치는 것도 죄거든. 어. 여기 말하는 거 맞아.

이리 새고 저리 새는 건 애비게일인지 뭔지 하는 꼬마 하나뿐이었는데 무슨 실험체 유출이 어쩌고저쩌고……그랬으면 우리가 여기서 팩맨이나 하고 있었겠어? 진작에 신나는 이승탈출 찍었겠지. 저거 얌전한 거 봐, 좀 소름끼치게 생기긴 했어도 별 거 아니라니까, 애초에 저거 가지고 뭐 살아있다고 할 수는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가끔 술마시거나 게임하다 돌아보면 눈깔이 이쪽을 향하는 것 같긴 한데, 쟤도 여기가 심심하겠지. 구경하라고 해. 최소한 우린 두 발로 돌아다닐 자유라도 있잖아. 말하자면 저게 죄수고 우리가 간수인 셈인데, 여긴 아무튼 쇼생크는 아니니까. 그리고……씨발, 또 내가 졌어?

1/1/2094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머리카락 보인다

머리카락 보인다

머리카락 보인다

찾았다

피카부!

써니는 정말 똑똑해. 한 번 가르쳐준 말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거든. 난 엄마 집 주소도 벌써 잊어버렸는데.

1/7/2094

신년 벽두부터 이혼소송 거하게 말아먹는 중인 직속 상사의 불륜 상대가 소장이었고 둘이 격리구역에서 붙어먹다가 괴물 눈깔 보고 벌거벗고 도망나왔던 게 CCTV에 찍혔으며 그거 기록 삭제하겠답시고 오밤중에 경보 시스템 잘못 건드려 무장군인들이 유기체실에다 총알까지 몇 방 갈겨놨다는 사실을 휴가 끝나자마자 전해 들었다. 직장 꼬라지 환상적이네. 이게 폐쇄연구소인지 폐쇄병동인지.

키시는 내가 이런 농담을 던질 때마다 질색하지만 알 게 뭔가 싶다. 우리 교수도 그랬어, 말본새 못 고치면 인생 말아먹을 거라고. 근데 그 새끼 말 고분고분 잘 들어서 우리 랩 사람들이 어떻게 됐더라? 하나는 교내심리상담 받다가 늙다리가 자기 랩에선 그딴 거 용인 못한다고 지랄염병을 떨어대는 바람에 연구 그만두고 사라졌고, 하나는 진짜 못 견디고 폐쇄병동 들어갔고, 교수 발바닥 핥는다고 욕 먹던 나는 이딴 오지에 처박혀서 남들 삼시세끼 배불리 먹을 시간마다 이상하게 생긴 괴물이나 들여다보고 있게 됐지. 전임이 인수인계란 단어도 모르는 미친 새끼였던 건 덤이다. 옛말 틀린 거 없다는 말부터가 틀렸다. 참으면 복이 오는 게 아니라 인생을 말아먹을 수도 있다.

하……아니다, 됐다. 일하다 보니 튄 자식 마음은 좀 이해할 것도 같다. 시험관 속 괴물을 하루 세 번씩 들여다보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 자체로 사는 게 고역이거든. 여기 안 들어왔으면 정부가 세금으로 이딴 거나 만든다는 사실 따윈 모르고 살 수 있었을 텐데. 생명공학이란 게 원래도 통상적인 미감과는 동떨어져 있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건 정말……차원이 다르다. 뭐 이렇게 시뻘겋고 징그럽게 꿈틀거리고 눈알 하나 희번득 두리번거리는 걸 만들어놨는지 모르겠다니까? 보기만 해도 역겨워서 밥 먹기 전마다 보고 올리라는 윗선 얼굴에 대고 토하고 싶었다. 네놈들 같으면 이런 거 들여다보다가 스파게티가 잘도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다, 엉?

물론 이것도 다 살려고 하는 짓이다 보니 지금은 핫소스 추가한 토마토 스파게티도 잘만 먹을 수 있게 됐지만.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데 사실 멀리서 봐도 비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그냥 웃긴 것도 같다. 이제 우린 식당까지 가기도 귀찮아서 여기 죽치고 앉아 레토르트 스파게티나 데워먹고 어디 팔아먹지도 못할 세금도둑 괴물 녀석이 파스타라면 포크와 젓가락 중 뭐가 더 집어먹기 편할지 시시껄렁한 토론에나 열을 올린다. 이 모든 코메디를 가지고도 제랄드와 소장이 서로를 ‘좋은 친구’라고 표현했다는 사실을 이길 수는 없다는 게 진짜 정신나간 것 같지? 어? 괴물아, 네 앞에서 뒤엉켜 붙어먹던 것들이 지들이 친구란다. 나 참, 아주 아담과 이브도 친구라고 하지 그래.

3/26/2094

마거릿, 삼만 번쯤 말했어요. 좋아요. 삼백 번쯤. 그건 진짜예요. 작년 내내 하루가 멀다 하고 말한 거니까 그 정도는 돼요. 이 프로젝트까지 취소되면 우린 무일푼으로 내쫓기게 될 거라니까요?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에요. 이미 건드릴 수 있는 부분은 다 삭감됐다고요. 아니, 건드리면 안 되는 부분까지요. 격리구역에서 나오는 것들은 위험도로 따지면 핵폐기물이나 마찬가진데 더는 처리용액도 사들일 수가 없어요. 저기 이차선 도로 지져서 콘크리트 녹여다 바르기라도 하고 싶다고요, 지금.

당신이 야망이 있는 것도 알겠고 의회의 관심이 다른 데로 가서 초조한 것도 알겠는데, 알긴 알겠는데, 이렇게 생각해 봐요. 이젠 취소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단계라고……아직도 이해 못하겠어요, 마거릿? 저건 우리밖에 감당 못해요. 폐기도 못하고 어디 내다 팔 수도 없고 공공연히 성과를 발표하는 건 더 말이 안 되죠. 증거인멸? 말이 되는 소릴 해요. 그만두려면 적어도 작년에 그만뒀어야지. 난 저 눈깔, 저 소름끼치는 거 튀어나온 날부터 알았다니까요. 글렀구나……아주 글러먹었구나. 마거릿, 당신은 알아요? 좆됐다는 걸 깨달은 순간에 찾아드는 형언할 수 없는 절망감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어떤……쾌감……무거운 책임감에 근거한 기쁨……그런 거, 느껴본 적 있어요? 당신도 여기 책임자잖아요. 나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처럼은 되지 않겠다는 소명의식……그런 걸 인지한 순간에 드디어 내가 미쳤구나 싶어서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어지는 기분, 몰라요?

난 저게 무섭고 끔찍해서 가끔은 잠도 안 와요. 바이오매스, 말은 그럴듯하지. 인간은 창조주의 기분을 추측하려고 해선 안 돼요. 나 같은 게 신이나 자연이나 그런……그런 게 된 양 한 순간이라도 어깨가 올라가면 안 된다고요. 여기 연구자들은 다 미친 새끼밖에 없어요. 날 포함해서요, 마거릿. 그렇지 않고서야 누가 좋다고 사막 한가운데 폐쇄연구소에 자길 몇 년씩 가둬놓고 평생 스펙으로 써먹지도 못할 극비 연구에 삶을 허비하겠어요? 저 괴물이 징그럽다고 생각하는 놈도 재미있다고 여기는 놈도 다 미친 거예요. 우리 같은 것들은 감히 무언가를 낳고 기른다는 표현조차 빌려선 안 되는데, 난 제니를 여기 데려오고서야 그걸 알았어. 너무 늦게 깨달은 거예요. 맙소사, 루시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살을 찢어 저 애를 낳고 피와 땀을 먹이며 키운 거지? 모성은 사람과 괴물을 가르지 않는 거였어. 우리가 만들고 알아서 자란 것들은 전부 괴물이야…….

그래요. 내가 아무리 애를 사랑하지도 않는 쓰레기 같은 아빠라고 해도……책임, 책임이란 게 있단 말이에요. 젠장! 소송에서 이기든 지든 이제 그런 건 상관없어요. 나는, 그리고 마거릿 당신은 이 프로젝트 절대 못 버려. 우린 이 앞에서 붙어먹은 책임을 다해야 하고……내 미래든 내 딸의 미래든, 그런 거창한 생각 따윈 하지 않더라도, 이게 더 많은 사람의 공포가 되는 날엔 정말 모든 게 끝장날 거라고요. 영원히, 영원히 비밀번호는 우리끼리만 아는 거예요. 어떻게든 예산을 따내고 책임자 공석 만들지 않고 버텨서, 기다리고 인내해서 아무도 내가 느낀 기쁨을 모르게 해줘요. 미친 사람은 미친 사람끼리 모여있어야 하는 법이잖아요? 마거릿! 나는 저 괴물에게 눈알을 달아주라고 지시한 적이 없어요. 맹세코……뭔가를 본다는 행위를 상정한 적조차 없다고요, 난 저게 살아있기를 바란 적도 없는데!

……마거릿?

알았어, 나도 사랑해요. 우리 친구 맞지. 그래. 지금 그런 이야기나 할 때가……

마거릿? 당신 맞아요? 얘기하다 말고 어딜 간 거야?

이거 당신 목소리가 아닌 것 같은데? 장난치지 말고 이리 와요. 지금 그럴 분위기가

아빠랑 약속

밤에 돌아다니지 않기

비밀번호는 엄마 집 주소가 바뀌어서

머리카락 보일라 98년 리버풀 홈 경기에서

친구 공 드리블

스파게티 세계의 아침식사 팬케이크

컴퓨터 축구 씨발 또 내가 졌어

제니가 불쌍해 아직 어린애잖아

써니

프랑켄슈타인의 예산

나는 친구야

아직 살아있네?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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