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극
플롯을 거부하고 서사의 제시를 통해 스스로 극적 진실을 판단하게 만드는 연극 양식.
대가. 대가라.
엘레나 드 루벨리온은 생각한다. 그리고 말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나에게 뭘 줄 수 있나요?”
모두가 그렇듯, 엘레나에게는 바라는 것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듯, 그것을 모두 얻을 수는 없었다. 아니, 모두와는 다르게, 대부분은 잃어야 했다.
어떤 것은 죽은 남편과 함께 땅에 묻혔고, 어떤 것은 라미레즈의 자그마한 정원에 묻어두었으며, 어떤 것은 독과 함께 삼켜버렸다. 어떤 것은 울음으로 토해냈고, 또 어떤 것은 으깨져 그 작은 카우치에 얼룩으로만 남았다. 그리하여 그의 손 안에는, 간신히 움켜쥘 수 있을만한 거대한 소원 하나만이 남았다.
지금 자신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다. 경애해 마지않는 누군가의 승리. 그의 명성. 그리하여 만세에 울려퍼질, 대륙의 모든 역사서에 남을 하나의 이름. 동시에, 당신이 막아야하는 누군가의 승리.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인데, 당신은 그것을 결코 줄 수가 없어요. 줘서도 안되고. 그러니, 그것은 대가로 적절치 못해요.”
나직한 목소리는 루벨리온의 것이다. 라미레즈의 엘레나는, 단 한 번도 그런 목소리를 내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니, 다른걸 제안하죠. 이것은 대가이고, 말하자면, 숙제에요. 당신이 평생 동안 해야할 숙제죠.”
그러나 이 말은 누구의 것일까?
“사랑할만한 것을 찾아요.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만한 것. 아주 작고 하찮아, 당신의 생존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할만한 것.”
사랑할 것을 찾으라 권유하는 이 목소리는 누구의 것일까?
“예를 들면, 고양이.”
라미레즈의 엘레나는 어릴 적 고양이에게 호되게 긁힌 적이 있다. 그 후로 고양이라면 질색을 했다. 굳이 따지자면, 강아지를 좋아했지. 함께 신나게 뛰어놀 수 있고, 흙투성이가 되어 같이 야단 맞을 수 있는 존재를.
“혹은 미식.”
루벨리온의 조리장은 제법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 뽑히며, 밤의 향연의 음식은 언제나 훌륭하다 평가받지만, 정작 엘레나는 그것을 크게 느낀 적이 없다. 원하는 것을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이미, 예전만큼 먹을 수 없게 된 후였으니.
“혹은 책.”
엘레나는, 어느 쪽이든 간에 책보다는 음악을 사랑했다. 눈 앞에 그려지는 생생한 그림에 열광했다. 얌전히 앉아있는 것에 질리도록 익숙해진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혹은, 비 오는 날의 빗소리. 길가의 풀꽃. 옷에 매달린 보석. 손끝에 맺힌 물방울을.”
이 말은, 이 목소리는, 이 다정은 누구의 것일까? 배역의 것인가, 혹은 그 너머의 것인가. 자신과는 동떨어진 것을, 그리하여 자신을 닮아가지 않을만한 것을 사랑하라 말하는 이는 누구인가.
그녀의 연극은 너무 길었다. 지나친 몰입 끝에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배우가 있다지. 엘레나는 이제야 그를 이해한다. 그녀는 이제 무엇이 연기고,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다. 배역과 배우는 이미 분리할 수 없다. 제 주인의 승리만을 바라는 루벨리온과, 그저 집을 그리워하던 라미레즈는 이제 구분할 수 없다. 모든 것을 그만두고, 루벨리온을 팽개치고 라미레즈로 돌아간다 해도, 그 누구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라미레즈의 엘레나처럼 웃는 법을 잊었으므로.
“그저 흘려보낸 7년. 지독하게 길던 1년, 그리고, 더욱더 길던 4년. 그 모든 시간은, 무언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시간이었어요. 그럼에도,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는 시기가 찾아오던 시간이었고. 나는 그 모든 순간을 기억해요. 그리고, 당신은 그 순간을 겪지 않길 바래요.”
그러니, 당신에게 바랄 수밖에 없다. 자신만큼 어리지만, 자신보다 영리한 당신에게. 열셋부터 연극을 시작해버린, 이미 스물하나가 되어버린 당신에게. 많은 것을 배워야할 나이에 배역을 내세워, 정작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이에게. 그러나 아직 늦지 않았을지 모를 어린 아이에게.
당신은 이것을 거부할 수 없다. 거부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대가니까. 당신이 기꺼이 내놓겠다 자처했으니까. 그러니, 나는 이것을 말하고, 강요할 것이다.
“지금의 당신과, 가브리엘 오 딜라헌트를 구분지을 것을 찾고, 만들어, 지키세요. 당신이 무엇인지 잊지 않도록.”
하나. 이 모든 것이 연기임을 공고히 하라. 배역과 배우를 철저히 나누어라.
“그 모든 것을 불태워 살아남은 후, 뒤이을 목표를 생각해요. 그렇게 얻은 자유를, 권력을, 그 모든 것을, 무엇을 위해 쓸 것인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가질 것인지.”
하나. 스스로를 정의할 것을 쌓아올려라. 원하는 것을 찾고, 없다면 만들어, 제 자신이 누군지를 명확하게 하라.
“그래서, 언젠가 내게 당신을 소개해줘요. 무얼 좋아하고, 무얼 싫어하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옷을 즐겨입고, 요즘 즐기는 취미는 무엇인지.”
하나. 그리하여, 무대에서 내려갈 준비를 하라. 언제든 배역을 벗어던질 준비를 하라.
무대에, 배역에, 그 모든 연극에 통째로 삼켜지기 전에.
“그것만이,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대가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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