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백
쾅, 하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몸이 흠칫 놀라며 튀어오른다. 4년, 아니, 5년이 지났는데도, 기억이란 이리도 지독하다. 그러나 그 덕분에, 엘레나는 몰려드는 수치와 함께 정신을 차린다. 그래, 이래서였지. 이런, 별 것도 아닌걸로 떨게 되는 모습 같은걸, 절대, 너에게는, 네게만은, 절대로…….
“…보여주기 싫었으니까. 이렇게 될 걸 알았으니까!”
새된, 비명 같은 외침과 함께 엘레나가 기어코 자리에서 일어난다. 앞에 놓여있던 잔은 바닥으로 떨어져 형체도 알 수 없이 깨져나간다. 산산조각난 찻잔의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어떤 것은 당신을, 어떤 것은 엘레나를 거칠게 할퀴고 지나가며 기어이 핏자국을 새긴다. 남은 찻물은 끝내 드레스에 얼룩을 남긴다.
“처음에는, 그냥 다 그런줄 알았어. 결혼도 하지 못한 네게 물을 수 없으니, 참았어. 그 다음에는, 그러면 안된다 생각했어. 그래도 이제 내 남편이니까. 그러니까 내가 조금만 참으면, 다 괜찮다고, 그렇게 생각했어. 그 다음에는, 이미 결혼한 여자와 미혼인 남자가 자주 만나는건 좋지 않다고 그래서, 그래서 말을 안 했어. 나중에 알았어. 내가 멍청하게 속았다는걸. 멍청하게, 미련하게, 그 말에 넘어가서, 날 도와줄 이들을 내 손으로 잘라내고 있었다는걸…….”
매일같이 보는 이의, 매일같이 반복된 말은 엘레나의 감각을 마비시켰다. 감각을, 감정을 일그러뜨리고,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끔 만든다. 그리하여, 감각을 어긋나게 하고, 믿던 것을 믿지 못하게 하여, 손으로 쥐고 있던 것을 하나하나 놓게 만든다.
“다, 다 그런 줄 알았어. 다들 이렇게 사는거구나, 했어. 그런데, 이상하잖아. 다들 그런다는데, 왜 나는, 왜 나만, 이렇게 힘든지. 다들 웃는데, 왜 나만 그러질 못하는지. 내가 이상한 것 같아서, 그래서 말할 수가 없었어. 눈치챘을 때는…….”
허, 하고, 누구를 비웃는지 모를 비웃음이 배어나온다.
“…이미 늦었지. 나는 라미레즈의 엘레나처럼 구는 법을 잊은 후였으니까.”
울지 못하는 이의 고개가 젖혀진다. 창백한 뺨은 갑작스러운 흥분에 벌겋다. 눈시울이 붉어진채로 결국 울지는 못하고, 다시금 당신을 바라본다.
“그래도, 상관 없었어. 여기 있는 사람들은, 그들은 모르니까.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고, 어떻게 웃고 우는지 모르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넌 알잖아.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웃고 울었는지 다 알잖아!”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선명히 기억나는 것들이 있다. 고작해야 다음날의 수업을 고민하고, 어떻게 하면 찾아올 친구를 놀릴까 고민하던 시간 같은 것들. 친구가 놀랐다는 이유로 웃고, 고작 벌에 쏘여 울고, 별것 아닌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종일 깔깔거리다가 손을 흔들던 나날 같은 것들. 다음에 봐, 루그. 이런 말을 하며 손을 흔들고, 침대에 누워 내일의 상상을 하다 잠들던 시간 같은 것들.
제가 기어이 죽지 못하게 하던 것들.
그래서, 결코 입을 뗄 수 없게 만들던 것들.
“그래서, 그래서 싫었어. 널 죽어도 보기 싫었어. 너에게, 가족을 잃은 너에게 가서, 이따위 모습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 널 만나면, 나는, 결국 이렇게 될테니까.
이래서 널 보고 싶지 않았어……. 이딴 모습, 절대, 너한테만큼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
흐느낌과 같은 고백을 뱉은 후에야, 두 손이 얼굴을 덮는다. 엉망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어떻게든 보이지 않으려 용을 쓴다. 흔들리던 몸은 기어이 몇 걸음이나 뒷걸음질쳐, 겨우 카우치에 닿고, 주저앉는다. 그리고, 울듯이 웃으며 묻는다.
“내 남편이, 정말 병으로 죽었다 생각해, 루그?”
(*너무 길어져서 로그로 드립니다… 편히 답해주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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