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

커뮤 by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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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이 열리고, 화려한 마차가 중부에 들어선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환히 웃는 엘레나가 중부에 발을 디딘다. 황금으로 주조된 칼날이 가득한 땅 위로.

엘레나의 손을 낚아챈 아르망이 말한다.

너는—

조금더정숙하게입어야지그런옷을입었다가는품격을떨어뜨릴뿐이다외모에신경을써야하지않겠어?언제까지고손에풀물묻은어린애처럼굴수는없지않나일이있을때마다친정에징징거리지말고대화를해야지내가틀린말을한것도아니고자꾸그리외부인과만시간을보내면내체통이어떻게되겠나이봐살을빼니더욱예쁘지역시내말대로하는게맞았지그래너는아직어리고모르는것이많아그러니울지말고화장좀고쳐원래사내란그리구는게당연한거야아무것도모르는계집애인척은그만하지그래야만스런동남부에는통했을지몰라도여기서그런어설픈짓거리가통할거라생각하나저길보게비웃고있지않나내가옆에없었다면무슨소리를들었을지모르겠군자어서정신차리고일어나나갈시간이야

그리고, 암전. 잠시 후, 무대는 다시 밝아진다. 붉은 드레스를 걸친 엘레나는 인형처럼 미소짓는다. 아르망은 그 손을 단단히 붙들고 인사한다. 꽃가루가 휘날리고, 오케스트라는 경쾌한 무곡을 연주한다. 두 사람은 무대를 누비며 춤을 춘다. 그 움직임에 오차 따위는 없다.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엘레나는 아르망의 리드에 따라 발을 움직인다.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그들은 완벽하게 춤을 마무리한다. 여전히 이어지는 박수 속, 눈 깜박한 사이에 인터미션은 끝난다.

무대 위에는 새로운 등장인물이 등장한다. 엘레나는 알로이스 람베르가드를 만난다. 모든 빛은 그에게 향한다. 엘레나는 어둠 속에서 생각한다. 그를 영원토록 경애하리라고. 알로이스의 웅장한 아리아가 끝난 자리에서, 그 어떤 빛도 없는 곳에서, 엘레나는 작게 노래한다. 나의 경애는, 영원히 당신을 향할 거에요. 나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될거에요……. 그 어떤 조명도 할애되지 못한 조연의 노래는 박수소리에 묻혀 사라진다.

아르망은 1년 간의 투병 끝에 죽는다. 그의 무덤가에는 장미가 화려하게 피어난다. 엘레나는 그 무덤 가에 앉아 속삭인다. 당신이 조금만 더 다정했다면, 당신을 죽이지 않았을텐데.

극은 점차 빨라진다. 4년은 순식간에 지난다. 왕세자가 죽는다. 알로이스 람베르가드는 야심을 드러낸다. 엘레나는 다짐한다. 그를 위해 모든걸 기쁘게 바치겠다고……. 그리고, 그는 정말로 그리 했다.

알로이스 람베르가드는 마침내 자신이 앉아야할 자리에 앉는다. 엘레나는 그를 보좌한다.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 헌신한다. 그리하여 여덟 왕국에는 영광이 찾아오고, 알로이스 람베르가드의 이름은 이 땅 위에 영구히 새겨진다. 그를 칭송하는 찬가를 끝으로, 무대를 막을 내린다.

이상이, 이 극의 완결이다.


대본의 지면은 한정적이고, 모든 등장인물의 이야기를 실을 수는 없다. 당연히도 조명과 대사는 주인공에게 편중된다. 엘레나의 드 루벨리온의 후일담 같은 것은 당연히도 중요하지 않다. 그러니 그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니 무대에 오르지 않는다. 그러니, 배우 또한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굳이 생각해보자면, 그래. 아마도 아르망과 같은 결말을 맞이하겠지. 누가 준비했을지 모를 음모에 빠져, 누가 넣었을지 모를 독을 먹고, 그 누구도 믿지 못하고, 죽을 용기조차 내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여생을 보내다 초라하게 죽는 것. 그리하여, 그 어디에도 이름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것. 지면을 할애할 가치도, 무대 위에 올릴 가치도 없는 시시하고 찝찝한 결말. 생각해보라. 누가 이런 결말을 보기 위해 적막한 극장에 남는단 말인가.

그러니, 그 대답을 요구받으면 당황할 수밖에. 그런건 없어요, 라고 대답할 수밖에. 혹은, 알아서 잘 살지 않을까요? 하는 두루뭉실한 대답을, 하는 수밖에는…….

그 순간, 누군가의 손이 자신을 붙든다. 그 손의 주인은 방금 전까지 같은 무대에 섰던 이다. 사랑스러운 가브리엘. 희고 단정한, 부드러운 손.

아니, 그것이 정말 가브리엘이었던가?

엘레나는 눈을 깜박인다. 그는 다시 무대 위에 서있다. 앞에는 상대역이 서있다. 아름다운 가브리엘과 상냥한 엘레나는 대화를 나눈다.

“당신을 무어라 부르면 될까요?”

“가브리엘이라고 불러주셔도 되어요!”

(두 사람은 웃으며 서로를 쳐다본다. 평화롭고 목가적인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불협화음이 끼어든다.

“이런 자리가 아니라, 조금더 개인적인 자리에서 만났다면 더 좋았을지도요.”

“그 사람이 그림으로 녹여내고자 하는 의중이 무엇인지는 아직 갈피를 잡기 어렵더라고요….”

“무엇이 거울이고, 무엇이 현실이었을까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조금은 제멋대로 굴어도 될텐데.”

“그런 고민들로 머릿속이 가득차 버리거든요.”

아름다운 음악을 망치며 끼어드는 불협화음에,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조금은 급하게 무대의 불이 꺼진다. 불이 켜지기 전, 암흑 속에서, 막간의 순간, 들려서는 안될 것이 들려온다.

“그러니, 만약, 만약에 당신이…”


그리고, 이곳. 관객 하나 없음에도 이어지는 무대 위. 배우는 눈을 뜬다. 상대역은 묻는다. 대본에는 없는 질문을 하며, 있어서는 안될 감정을 보이고, 협의되지 않은 눈물을 흘리고……. 배우는 감히 무대 위에서 스스로를 보인다. 그러면서 제게 묻는다. 재차 묻는다. 그저 사는 것만이 아니라면, 무얼 해야하냐고. 생존이 아닌 다른 꿈이란 무엇이냐고.

그러나 그 순간, 모순적이게도, 엘레나는 생존의 꿈을 꾼다.

아, 나는 죽을 수는 없겠다. 그래서는 안되겠다. 그리 죽어서는 안되겠다.

그 깨달음은 책임으로 이어진다. 엘레나는 기어이 책임을 새로 배웠다. 잠시 잡았다 놓게 될거라 생각했던 손은, 자신을 단단히 잡아 끌어당긴다. 감히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말라는듯, 너는 내가 내민 손을 기어이 당기고 말았다.

엘레나는 단 한 번 내밀었던 손을 놓는다.

그리고, 당신을 끌어안는다.

눈이 질끈 감긴다. 그러나 품안에 닿은 온기는 따스하다. 엘레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말한다.

“나는, 이렇게 누군가를 끌어안고 싶었던 것 같아요. 혹은 끌어안기고 싶었던 것도 같아요.”

여기서부터 시작해보자.

“당신은 어떤가요?”

드디어 맞닿은 체온이, 드디어 전할 수 있게 된 위로가, 따뜻하냐고. 그리하여, 이 온기가 마음에 드냐고.

“나는, 이렇게 당신을 끌어안고 있는 것이 좋아요. 우리가 이렇게, 솔직히 말할 수 있게 되어 기뻐요. 당신 앞에서는 웃지 않아도 되어서, 당신이 내 앞에서는 웃지 않아서 좋아요.”

너는 이미 시작했으니까. 너는 나 또한 배역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지. 그렇게 시작하는거야. 그렇게 바라고, 그렇게 원해야해. 너는 이미 무언가를 원하기 시작했어. 그러면 멈출 수 없어.

“당신은 이제 시작한거에요. 나에게, 엘레나를 알려달라 했죠. 알려줄게요. 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을. 웃지 않고, 울고, 화내고, 소리치고, 마침내 모든 것을 벗어내고 뛰쳐나가는 순간의 얼굴을 보여줄게요. 나조차 모르는 얼굴을 알려줄게요.”

나 또한 마찬가지야. 나는 이제야 극이 끝난 후의 나를 생각할 수 있어. 그 모든 것이 끝난 후에도, 나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 나의 삶은, 여전히 이어질테고, 또, 누군가를, 무언가를 사랑할 수 있을테고…….

“당신은 많은 것을 사랑하게 될거에요. 그간 사랑하지 못했던, 사랑할 수 없었던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될거에요. 그리하여, 살고 싶어질거에요. 그저 목숨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매일 잠자리에 들 때, 다음날의 삶을 기다리게 될거에요.”

바람 같은, 축복 같은, 혹은 오래 전부터 하고 싶었던, 듣고 싶었던 말이 흘러나온다. 엘레나는 품안의 작은 이를 꽉 끌어안고 있는힘껏 속삭인다. 오직 나만을 위해, 오직 너만을 위해, 오직 우리만을 위해, 우리는 마음껏 피고 질거야. 그래서, 우리는 행복해질거야. 영영 아름답지 않아도, 영영 빛나지 않아도, 그래도 우리는 행복해질거야…….

“내가 알고 있는 모든걸 알려줄게요. 봄의 첫눈을 틔우는 목련을, 가장 짙은 향을 피우는 장미를, 높이 솟은 해바라기를, 한겨울의 동백을. 나를 살게하는 모든 것을. 끝끝내 내가 살게 만든 그 모든 것을.”

그리하여, 나는 너를 기어코 살게 만들어, 행복하게 만들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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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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