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2024

케드라스

광풍과 서리의 소네트 - 러닝 로그 모음

유적 by 량돌
3
0
0


01

간밤 꿈에는 그리운 이의 젖은 발이 나왔다.

이곳에서 꾸는 꿈이 숲이 부리는 수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새파란 신입 감시자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거스르지 못하고 흘러든다. 숲을 바라보고 누워 그 안에 있을 늙은 흑마법사의 불결한 흔적을 생각하다 잠들 때. 숲에서 나서 숲에서 죽을 사람이 되기 전의 기억을 되새길 때마다 있었던 꿈. 물 아래 그림자처럼 덮쳐드는 꿈. 박제된 시간은 무람없이 찌르고 들어와 추억까지 닿는다. 그가 밟은 모든 땅과 봐 온 세상이 간밤 꿈으로 쏟아져 나온다. 소금기 가득하고 습한 공기. 분주한 말소리. 걸음. 발소리에 지나지 않는, 형체 없는 여정.

여자는 바닷가에 서 있다. 흰 거품 어린 파도가 밀려와 여자의 젖은 발을 다시 씻어낸다. 완벽한 주름을 그리며 다리를 가리는 천. 여자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길 바랐는지도 몰랐다.

무릎을 꿇고 여자의 발에 입 맞췄다. 앞으로도 두 번은 하지 못할 말을 속삭였다. 여자는 말하지 않고 그는 오래도록 그 앞에 엎드려 있었다. 대답을 기다린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어떤 말도 알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마를 대고 엎드린 자신과 지팡이를 들고 서서 그것을 바라보는 자신이 있다. 여자의 얼굴은 아직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영영 기억나지 않을 것이다.

지팡이를 든 그가 말했다. 이제 몸을 일으켜 떠나라.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남자의 대답은 느리게 돌아온다. 꼭 제가 해야 하는 일입니까?

네가 그 일을 하게 될 것을 안다. 일어나라.

그렇게 말한 뒤, 그는 여자를 해변에 두고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 아직 차가운 물. 흉통을 짓누르는 압력. 눈을 떴을 때 소금기 어린 바람은 간데없다. 시리게 젖은 눈가와 죽어가는 깜부기불. 케드라스는 손을 들어 눈가를 닦았다. 그뿐이었다.

02

파도 소리 어린 꿈에서 깨어나니, 다시 죽은 이끼 더미와 고목의 사이다.

케드라스는 일어나 앉은 채, 잠들기 직전까지 후임과 나눈 말에 대해 생각했다. 당신은 도통 다른 곳에 있는 상상이 안 가서요. 이곳에 속한 사람이라기보단 당신이 곧 이 숲 같은. 그래 뭐 그런 느낌이라. 후임의 말이 썩 틀리지 않았다. 숲으로부터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숲을 알아야 했고, 숲에 관한 사실을 속속들이 알수록 그는 숲이 되어갔다. 그 말은 한편으로는 무언가 잊어 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리라. 절대로 잊고 싶지 않았던 것들이나 잊지 않겠다고 한 것들을.

또는 바닷가의 냄새를.

자리에서 일어나자, 불침번을 서던 대원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케드라스는 시선을 향해 고개를 까닥여 보이고 봉인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움직일 때마다 팔다리에 가느다란 안개가 휘감겼다. 그는 절대로 거스를 수 없는 하나의 법칙을 생각했다.

모든 마법은 단 하나의 법칙에 패배하기 위한 사투다.

바로 어떤 것도 영원하지는 않다는 사실.

봉인에 이상이 생기는 것을 그는 이례적인 일이라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매번 일어나는 일이다. 인간을 이루는 모든 요소―육체, 정신, 기억―처럼, 봉인 마법도 마찬가지로 시간에 마모되고 깨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마법사는 봉인구 앞에 섰다. 검은 안개가 새어 나오고 있다. 지긋지긋한 독기. 구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마법진을 더듬는다. 식이 파훼된 자리를 찾아 따라가던 손끝이 멈췄다. 그렇지. 여기 있군. 식끼리 충돌한 게 아니라 단순히 노화와 마멸로 약해진 것이라면 다른 마법사들의 봉인 마법으로 충분히 보수할 수 있다.

케드라스는 먼저 금이 간 자리에서 새어 나오는 독기를 먼저 막으려 식을 이어 붙였다. 푸른색 빛을 내며, 마법진이 금간 자리를 빼곡히 메웠다. 이 자리에 다른 마법사들이 각자의 봉인을 덧붙여 강화해 두면, 이변이 없다면 몇십 년은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다음엔 봉인 강화를 위해 주입해 둘 마력을 끌어올린다. 거침없고 거대한 물길을 바꾸는 듯, 그러나 조급함 없이 부드럽게. 부름에 답해 마력이 맺히자, 그의 입매가 호전적인 웃음을 그리며 휘어졌다. 전투의 흥분과 목숨의 위협에서만 얻을 수 있는 기쁨을 그는 숨기지 않았다. 그만큼 큰 힘이었다. 봉인이 그의 마력과 함께 주변의 독기를 빨아들이는 것이 보였다. 곧 이곳을 지난 마법사들의 수많은 흔적 위로 그의 봉인이 덧붙는다. 죽은 자가 남긴 위대한 마법들. 법칙을 거스르는 경이.

일이 끝나자, 그는 치켜들었던 두 팔을 내리고 봉인구 속의 어둠을 잠시 바라보았다. 인사를 건네듯 눈을 감았다. 떨리는 숨을 뱉었다. 어둠이여. 다시 보게 될 거다. 이것은 오로지 패배를 위한 저항이니까.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케드라스는 눈을 뜬다. 빛 들지 않는 녹색 눈동자.

토벌하러 나간 이들에게 손이나 보태야겠군. 그는 가볍게 걷기 시작했다.

03

소리가 끊어진 순간 그는 되뇌었다. 이것은 값싼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지척에 짙어진 안개에서는 바다 냄새가 났다. 항구의 비린 냄새도 해변의 서늘한 냄새도 아닌, 그저 대해의 가운데. 그 먹먹한 소금기와 공기. 물과 사람 사이에 둔 배. 바람이 불지 않는다. 물도 흐르지 않는다.

케드라스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살필 것이라고는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게 사방에 안개가 짙었기 때문이다. 손에 들고 있었던 것은 지팡이가 아니라 사공이 젓는 기다란 노였다. 환영을 이루는 진을 부숴야 할 텐데, 느껴지는 마법의 흔적이 없었다. 누가 만든 함정이더라. 기억나지 않았다. 떠오르는 것이 전혀 없다. 주변은 고요했고, 적어도 오래도록 두려워하던 것이 나오지는 않을 것 같아 편안했다.

그가 생각했다. 무엇을 두려워했더라?

생각을 멈추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남자는 노를 젓기 시작했다. 고요한 물에 파동이 일며 배가 나아갔다. 안개를 뚫고 그는 그저 앞으로 배를 몰았다. 눈 위에 얹은 동전 두 닢을 뱃삯으로 받고 영원히 승객을 태우는 사공처럼. 느리게 꾸준히 앞으로 갔다. 노가 바닥에 닿는 느낌이 들 때쯤 고개를 들어 앞을 보자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배가 곧 해변에 닿았고, 내려선 자리까지 파도가 닿았다. 소금물이 발을 적셨다. 맨발에 모래와 따뜻한 물이 닿는 느낌이 기꺼웠다.

남자는 입을 열어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의 기쁨과 스스로 조각내는 듯한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는 그 자리에 서서 대답을 기다렸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불렀다. 이번에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남자는 해변을 따라 걸어갔다. 모래사장 따스한 바다 발을 간지럽히는 흰 거품 저 멀리 바람에 흔들리는 얇고 주름진 천 가려진 다리 젖은 발 휘날리는 머리칼 그는 문득 뛰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케드라스.

먼발치에서 여자가 외쳤다. 그녀는 남자에게 한시라도 더 빨리 안기려 젖은 고운 모래 위를 뛰어오고 있었다. 그제야 남자는 자신이 돌아왔음을 알았다. 있어 마땅한 곳에 있음을 알았다. 고개를 숙인 채 여자의 말을 오래 짓씹던 남자는 마주 달려가는 대신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분노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여자가 품 안으로 뛰어드는 순간에 그는 검을 내질렀다. 뼈가 부러지고 심장이 꿰뚫리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마법사는 중얼거렸다.

케드라스. 나를 그리 부르라.

04

마물이 덮쳐드는 것을 보는 동시에, 그는 순식간에 봉인의 진을 수십 개 겹쳐 시전했다. 독기를 밀어내 가두는 청명한 마력이 발밑에서부터 뽑혀나와 신경과 맥을 타고 올랐다. 그리고 영창. 앎의 언어. 그가 대양을 건너 증명해낸 것들.

마법사가 외쳤다. 명멸하라!

그리고 세상이 그렇게 했다.

한순간 벼락처럼 내리꽂힌 빛줄기가 마물을 짓이기고 흩어낸다. 비산하는 피와 살점. 케드라스는 검을 횡으로 크게 휘두르며 땅을 박찼다. 그의 발걸음 아래 빛으로 그려진 마법진이 나타났다. 땅이 아니라 마법진을 딛듯이 뛰쳐나가면서 생각했다. 빨리 끝났으면 좋겠는데.

그는 검을 내지르면서 생각했다. 봉인의 진이 이렇게까지 약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얼마 전 타계한 마탑의 마법사―이름이 뭐였더라?―가 남긴 마력이 다했던가? 그래서 부서진 건가?

진을 처음부터 다시 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많은 마법사들이 봉인을 만들기 위해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 그나마 남은 자들은? 아니, 마탑에 그나마 남은 마법사들과 어린 마법사들을 모두 데려온다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다. 언제부턴가 마물이 숲 바깥으로 새어나가는 일이 드물어지면서 무딘 평화가 내려앉은 탓이다. 그게 아니라면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지쳤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가 그런 것처럼.

다섯 발로 뛰는 짐승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입 비슷한 곳에서 떨어져 검보라색의 땅을 적시는 시커먼 액체. 땅은 타들어가는 소리를 내며 수렴했다. 그는 지팡이를 휘둘러 마물을 후려쳤다. 무언가 박살나는 감각은 뒤늦게서야 앎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직후 지옥 문을 여는 듯한 괴성이 들렸다. 돌아보는 순간 이빨과 발톱과 채찍 같은 꼬리가 쇄도했다. 나무의 머리칼을 흔드는 미풍이여! 칼날 같은 바람이 날아가 온몸으로 세상을 저주하는 짐승의 심장을 꿰뚫는다.

살과 피. 가죽과 뼈. 올바른 모습이란 없다. 괴로운 모습만이 있을 뿐.

살육의 현장 위로 뛰어올랐다. 마법진을 밟고 허공에 떠올라 섰다. 검은 피가 떨어지는 지팡이를 던져 올리고, 범위 내의 대상을 마탄이 추적하는 마법을 시전했다. 푸른 빛이 하늘을 덮었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피에 젖은 녹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카테고리
#오리지널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