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발까마귀와 수상한 맥주
망할 맥주나 내놔요
약관을 이미 넘겼다고는 믿기 어려운 그 레인저가 마을에 나타난 것은 어느 한가한 오전의 일이었다.
그는 녹색 망토의 모자를 머리에 뒤집어썼고, 잘생기고 어려 보이는 흰 말의 고삐를 느슨하게 쥐고 있었다. 안장의 앞머리에는 글라디우스가 가로로 놓였고, 등에는 시위를 메겨 놓은 장궁을 멨다. 까마귀 모양으로 세공된 망토 배지가 목 근처에서 둔탁하게 빛났다. 말의 발걸음은 느긋하지도 서두르지도 않은 채였다.
그가 마을 어귀쯤에 도착했을 때 마을 사람들은 이른 아침 식사에 맞춰 이른 점심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목장의 양이며 염소들은 정오에 가까운 햇살을 한껏 받으며 아침부터 씹던 그 풀을 그대로 계속 씹고 있었다. 그다지 무료하다고 표현할 수는 없는 갓 빨래한 옷감 같은 풍경. 덜 말려 쪼갠 장작이 내는 연기. 허리를 잘린 짧은 풀의 비명 같은 날카로운 냄새.
마을 어귀부터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젊은 레인저는 말을 터덜터덜 몰았다. 그러다가 큰길이 시작되는 거리 앞에 말을 멈춰 서서, 그림자 아래 숨은 잿빛 시선으로 길 끝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렇게 하면 마치 자신의 길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알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나 그가 얼마나 먼 곳까지 향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마을에 딱 하나 있는 주점 마구간에 말을 매고 짐가방을 내렸다. 주점으로 들어선 젊은 레인저에게 시선이 쏠렸다. 무슨 일이지? 전쟁이 끝나긴 했나 보아, 레인저가 다 돌아다니고. 이런 동네에 순찰할 게 뭐가 있다고.
젊은 레인저는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고 주인장이 손을 짚은 채 서 있는 바 테이블로 걸어갔다. 짐가방을 발치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그는 바 테이블에 팔을 괴고 모자를 벗었다. 소년티를 못 벗은 앳된 얼굴을 한 그에게서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향기가 훅 풍겼다. 꽃향기도 단순한 풀 냄새도 아닌, 마음이 편안해지는 상쾌한 향기였다.
이유 모르게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주점 주인을 보고 눈을 끔뻑거리더니, 그가 막연히 덜 여문 목소리로 뱉었다.
맥주 한 잔 줘요.
대낮부터 주점에 앉아 불콰한 얼굴을 하고 있던 마을 제일의 술꾼들이 왁자하게 웃었다. 보아하니 레인저 배지를 달고 처음으로 심부름을 나온 견습이나 신참 레인저쯤 되는 모양인데, 뻔뻔스럽게 술꾼들 사이에 껴서 솜털 돋은 얼굴로 이 대낮부터 냅다 맥주를 한 잔 속에 때려놓고 보겠다는 발상이 귀엽기 짝이 없었다.
주점 주인이 바 테이블에 짚은 손을 떼지도 않고 웃었다.
몇 살이냐, 꼬마야. 부모님 허락은 받고 온 게냐?
젊은 레인저는 그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가 바로 했다. 심기가 불편한 것이 분명했다. 그가 바 테이블에 몸을 기대며 투덜거렸다.
술 마실 만큼은 됐어요.
그 레인저는 키가 훤칠하기는 했다. 신수가 훤하다기보단 멀대처럼 큰 느낌이었지만 어쨌거나 덩치가 작지는 않았다. 까마귀 깃처럼 새카만 머리카락은 뒷머리가 살짝 헝클어졌고, 약간 푸른빛 광택이 도는 회색 눈에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아는 이의 눈빛이 어렸다. 앳된 나이에는 좀처럼 갖기 어려운 시선이었다.
주인장이 바 테이블에서 천천히 손을 뗐다. 제 팔을 팔짱 낀 그가 턱을 조금 쳐들고 물었다.
그래? 진짜 레인저는 맞고? 백날 돌아다니는 순찰대원이 이렇게 향기로울 리가 없는데, 어느 집 도련님이신가?
도련님이라는 말에 끝내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진 젊은 레인저가 으르릉거렸다. 미처 걷어내지 못한 반항적인 어투가 튀어나왔다. 젠장, 그러잖아도 오늘 일진 사나운데 당신까지 이러지 말고 망할 맥주나 줘요.
그가 몸을 바 테이블 위로 기울이자 상쾌한 향내가 더 짙어졌다. 여느 귀족이라고 해서 그런 향기가 몸에 배어 있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그것은 인간의 향기가 아니었다.
전쟁 중에 견습 딱지를 떼고 일반 순찰 임무에 투입된 지 햇수로 3년이 되어가는 세발까마귀 조의 레인저 아나히스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미지근하다 못해 뜨뜻하게까지 느껴지는 싸구려 맥주였다. 제조 과정에서 부족한 재료를 채우기 위해 뭐가 들어갔는지 정확히 모르는 술. 마실수록 정신이 또렷하고 차분해지는 요정의 마법 허브차의 대척점이라면 응당 그런 음료일 것이다. 적어도 그가 알기로는.
지난 열여섯 시간을 엘프 마을에서 보내느라 차를 몇 잔이나 받아마셨는지 셀 수도 없었다. 본부에서 엘프 사령부로 보내는 서신 하나를 전달하는 게 임무의 전부였는데 그것도 엘프 마을에서는 귀한 손님으로 치는 모양이었다. 목욕과 잠자리, 식사, 차 몇 잔을 대접받고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를 말을 한참이나 조곤조곤 속삭여 주고 나서야 요정들은 그를 놓아주었고, 아나히스는 당분간은 풀 우린 물이라면 뭐든 간에 거절할 작정으로 엘프 마을을 나섰다.
그러고 나서 그가 처음으로 찾은 술 비슷한 것이라도 파는 곳이 이 고원의 산골 마을 주점이었다. 그 와중에 떡하니 달고 있는 까마귀 배지에도 불구하고 ‘진짜 레인저’인지 의심까지 받다니. 젊은 레인저는 언짢은 기분을 숨기지 않고 눈썹을 찌푸렸다.
근래 살기 어려운 사람들이 순찰대원 행세를 많이 한다고는 하지만 진짜를 알아보지 못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외려 전쟁이 경험 있는 선임 레인저들을 쓸어간 지금, 아나히스 정도 되는 레인저를 찾아보기가 더 어려웠다. 아나히스는 그 사실에 대단한 유감도, 자부하는 마음도 갖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그가 레인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혹은 다분히 모욕적이었다. 실제로 지금 제 몸에서 굉장히 좋은 향기가 났고 그가 그 사실에 신경을 썼기 때문에 더더욱.
아나히스는 그래서 향기로운 레인저를 처음 보느냐고 시비조로 말을 꺼냈다. 술집의 주인장은 그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래서 아나히스의 엉덩이를 걷어차 쫓아내려고 바 테이블을 빙 돌아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술꾼들이 왁자한 가운데, 모르는 동네에서 사람을 때려눕히게 생겼으니 이거 참 낭패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오히려 환영한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인 아나히스를 막아선 것은 수염을 멋지게 기른 어느 드워프였다.
사내는 자기가 두 잔 사는 걸로 할 테니 가서 맥주나 내어 달라고 그다지 정중하지 못한 투로 말했다. 그러고는 주먹을 말아쥔 채 멀뚱히 서 있는 젊은 레인저의 옷깃을 움켜잡고 그를 끌고 가 테이블 앞으로 내던졌다. 쩔쩔매며 그에게 끌려간 아나히스는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은 뒤에야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조잡한 솜씨로 만든 의자는 왼쪽과 오른쪽이 불균형했고, 그래서 약간 삐딱한 자세로 앉아야 했다. 곧 주인장이 잔 두 개를 들고 와 그들의 앞에 하나씩 놓았다.
망할 맥주 여기 있으니 마시고 제발 깽판이나 놓지 말게.
고맙습니다.
드워프 사내가 말했다. 자네가 진짜배기 레인저인 건 결코 의심 안 해.
아나히스는 대답했다. 저도 증명할 생각 없어요.
그놈 말투 하고는.
칭찬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 인간과 한 드워프는 약속이라도 한 듯 잔을 들어 부딪쳤다. 거품 어린 수상한 색깔의 액체가 그 서슬에 흔들리며 조금 넘쳐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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