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마법이 풀린 밤

어떤 이름에 관한 이야기

유적 by 량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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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라 그웬돌린 델라니는 짧은 순간, 유년의 조각을 돌이킨다.

사람의 마음을 흔들고 지나가는 숲의 봄바람, 터지는 꽃망울과 발목께를 스치는 젖은 풀, 소리로 가득한 그림자 속의 내달리는 작은 동물들. 맨발로 푹신한 흙 위를 걸었던 기억. 뒤에서 그를 소리 높여 부르는 목소리. 달리기 시작한다. 길게 늘어지며 에이라, 산들바람이 둥글려 살며시 깨뜨리고 마는 가녀린 이름에 대해.

그리고 에이라는 그 자리에 서 있다.

맨발이 딛고 선 거칠고 반반한 벽돌에서 한기가 올라왔다. 두 쌍의, 굳은살 배긴 맨발이 나란히 땅을 밟고 있다. 초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등을 훑고 지나가자 몸의 털이 오소소 일어선다. 바람에 베인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는 손에 쥔 것을 다잡는다. 모든 것이 미끄러져 지나갈 것 같다. 사슴 머리뼈에 돋은 뿔을 한 손으로 쥔 에이라는 그것의 무게에 대해 생각한다. 죽음의 무게다. 고통의 무게이며, 하룻밤 유희로 뒤집어쓰기엔 속절없이 오래된 물건이다. 단지 에이라는 그렇게 했고, 그렇기에 잠시나마 죽음일 수 있었다. 밤새도록 묘지와 비석 위에서 춤추는 슬픈 그림자.

죽음은 자신이 뱉은 말을 되새긴다. 수천 번 귓가에 울려도 끝내 잊어버리고 말, 희미한 목소리. 희미하게 속삭여 말을 거는 소리. 무엇으로 돌아가야 하길래. 죽음은 속삭여 대답한다.

당신이 없는 세상으로.

손끝이 차갑다. 맥동하는 심장의 감각이 이제는 거기에 없다. 잔인한 사실처럼, 손가락 끝에는 바람만이 느껴진다. 자정이 지나고 무도회는 끝났다. 당신이 없는 세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어리광 묻어나는 손짓, 부스러지는 웃음, 부유하며 산란하는 빛을 뿌리는 먼지, 먼지는 먼지로, 재는 재로 돌아간다.

죽음은 열두 번째 종소리에야 물러난다. 그리고 에이라 델라니가 남았다가, 이내 죽어 없어진다.

제 손으로 뒤집어쓴 허물을 다 벗고, 시그리드는 긴 침묵 뒤에 고개를 든다. 이제는 없는 것을 돌이키지 않는다. 기어코 떠날 것을 그러쥐지 않는다.

당신이 없는 세상에서야 내가 무엇을 사랑했는지 깨닫고 싶지 않아요.

속삭임이 하늘로 날아간 사위는 조용하다. 세상과 유리된 것처럼, 오래 걷는 자들이 슬퍼하는 연유처럼. 시그리드는 눈을 내리깔아 당신의 맨발을 바라본다. 풀에 조금 가려진 발목에 삼각형으로 남은 점이 보인다. 왜 저기에 천사가 세 번이나 입 맞추었을까. 짧은 순간 그는 그렇게 생각한다.

당신은 말한다.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네게 상처가 되는 건 이번으로 족해.

시그리드, 시그리드……

시그리드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았다. 허무하게 바스러지는 당신을 놓는다. 당신이 옳다. 아무것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발 무겁게 하는 모든 것을 놓고, 혼자서 떠나야 한다. 언젠가는, 그리고 어디선가는.

시그리드는 가슴에 난 커다란 흠집에서 마지막으로 무언가가 떨어져 나오는 것을 느낀다. 발치에 그것이 떨어져 박살난다. 산산조각이 난 탓에 원형은 알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이조차 발 무겁게 하는 한낱 마음에 불과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당신에게 다가간다. 당신의 뺨에 가볍게 입술을 누른 그는 망설임 없이 떨어진다. 아무 말도 필요 없다는 듯, 시그리드는 당신이 둘러 준 로브를 벗어 당신의 손에 쥐여 준다. 한 손에는 사슴 머리뼈 가면의 뿔을 쥔 채, 다른 한 손에는 푸른 비단 구두를 땅에서 집어든다. 그는 희미하게 웃는다. 구름이 달빛을 반쯤 가린다. 그늘진 자리에 당신과 그가 있다.

당신 발을 무겁게 할 수는 없죠……. 미안해요.

어떤 말도 덧붙이지 않고 그는 돌아선다. 몸을 돌린 순간에야, 그제야. 시그리드는 깨닫는다.

이것은 오로지, 어떤 이름에 관한 이야기다.

시그리드는 맨발로 걸음을 한 발짝씩 옮긴다. 성큼거리는 걸음은 아니지만 붙잡을 수 없을 만큼은 충분히 빠르게. 시그리드는 젖어드는 뺨으로 말한다. 턱에 맺히는 물방울로, 떨리는 숨으로 말한다. 뒤돌아보지 않는다. 절대로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칸 모히른.

나는 그 이름을 알아요.

마법이 풀린 밤에는 바람이 불었고,

푸르스름하게 빛나던 마지막 물망초 한 송이가 그의 발치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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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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