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2024

나흘째 새벽에 까마귀는 그곳에 없는 목소리를 들었다

힐마르와 아나히스

유적 by 량돌
7
0
0

까마귀는 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가지 위에 웅크려 올린 발밑으로 정수리가 몇 개인가 지나갔다. 추격자들에게 숨소리도 들키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숨도 닿을 법한 거리에 이르자 아예 호흡을 멈췄다. 길 위의 정수리는 다행히 얼굴이 되지 않고 지나갔고, 수풀 사이로 뒤통수들이 사라졌다. 그제야 까마귀는 숨을 조심히 뱉었다.

갔어. 한쪽 팔을 옆으로 늘어뜨린 까마귀는 중얼거렸다. 적어도 자신이 그랬다고 생각했다. 지나갔다고. 내 말이 들려, 이 우라질 녀석아? 빨리 기어 내려가. 그리고 도망쳐. 이윽고 그는 나무의 두꺼운 가지 위에서 이리저리 기우는 몸을 추슬러 나무 아래로 내려갔다. 기척을 죽이는 데에 익숙한 발끝이 나뭇가지와 낙엽 쌓인 바닥에 무게가 없는 물건처럼 사뿐히 닿았다. 나무 기둥을 한 손으로 짚고 잠깐 서 있던 까마귀는 입 안에 고인 피를 모아 뱉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입 밖에 내서 확실히 중얼거렸다. 내 이름이 뭐더라? 세발까마귀조의 아나히스가 야영지를 출발한 지 사흘째의 일이었다.

그들이 적진을 향해 하필 까마귀를 날려 보낸 이유는 간단하기 짝이 없었다. 야영지에 남은 인력 중 그가 가장 괜찮은 정찰꾼이기 때문이었다. 정식 레인저가 되자마자 대전쟁에 참전했고, 그 짧은 전쟁의 끄트머리에 두각을 드러낼 만큼 활약한 것도 있지만 뭐 결국 그것은 누가 알 필요까진 없는 노릇이다. 어쨌거나 야영지에 여태 살아서 남아 있는 레인저 중에선 아나히스의 정찰 실력이 가장 믿을만한 것이 확실했다. 아나히스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다 같이 저녁을 먹을 즈음에 자기에게만 내려온 임무가 그렇게 불만스럽지는 않았다. 모두가 그 노련한 정찰병이 해가 뜰 때쯤엔 적군의 영역과 정찰 범위, 병력의 배치까지 상세히 머리에 집어넣어 돌아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새벽 세 시경 야영지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하는 순간에는 어떤 생각을 했더라? 뜨뜻한 피가 몸을 타고 흐르며 옷을 꺼멓게 적시고, 무리하게 움직인 탓에 근육이 결마다 찢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뜀박질 때문에 심장과 폐가 터질 것 같고, 차갑고 아득한 죽음의 숨결이 목뒤에 닿아 오는 와중에도, 감히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을까? 허무하게도 피를 좀 더 흘리고 나자 그나마 남은 얼간이 같은 생각까지 함께 몸 밖으로 빠져나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나히스는 그저 멀리까지 뛰었다. 이러다 진짜 죽겠군. 정찰병은 목구멍에서 자꾸만 솟는 핏덩이를 뱉어내며 생각했다. 웃음이 나왔다. 언제부턴가 그는 동료들이 있는 야영지로 돌아갈 길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부재가 무언가의 시작을 알릴 것이다. 어쩌면 이미 알렸을 수도 있다. 그들이 살아남으려면 단순하고 쉬운 진실을 알아야 한다: 까마귀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를 레인저는 없으므로.

향하는 곳도 등진 곳도 없이 사람은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을까? 아나히스는 덤불과 수풀과 나무와 다른 나무와 또 다른 나무 사이를 온몸으로 헤치며 계속해서 야영지에서 멀어졌다. 웅덩이 물로 입술을 적시고 진흙과 아무 풀이나 씹은 것으로 피 흐르는 자국을 틀어 막아가며 뛰고 또 뛰었다. 처음 이틀은 걸어서 도망칠 만했다. 그러나 사흘째 낮에 추격조와 마주친 후로는 흠집이 적잖이 늘어 구명을 기대하기 어려울 듯싶었다. 야영지를 떠난 지 나흘째 되는 새벽 여섯 시쯤, 정처 없이 걷던 그는 자신이 한계를 마주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온몸 곳곳에서 흐른 피가 뻣뻣하게 말라붙고, 진흙과 먼지가 묻어 옷은 한층 엉망이었다. 얼굴에는 숲을 헤치고 걷느라 쓸리고 긁힌 상처가 가득했다. 화살이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간 옆머리에도 피가 났고, 셔츠의 목깃 안쪽으로 머리에서 흐른 피가 들어가 끈끈하고 붉은 갈색의 자국이 되어 있었다. 살아 있는 것이 더 신기한 꼴이었다. 그런데도 심장이 뛰고 숨이 쉬어졌다. 아나히스는 그 사실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무에 올라가 숨죽이고 있던 사이 숲에는 어스름이 내려와 있었다. 추격조가 향한 반대 방향으로 절뚝이며 걷는 동안 주변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지나온 기억이 없는 전혀 낯선 풍경이었다. 아나히스는 그제야 자신이 꽤 오래전에 잘라낸, 그것도 전쟁터 한가운데에 버렸던 자신의 일부가 아직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기어와 발목을 붙잡으려 했다. 이러다 진짜 죽을 수도 있겠어.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며 생각했다. 그러나 웃으려 해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얼굴의 근육이 마비된 것처럼 굳어 있었다.

그래서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명제와 함께 남겨진 아나히스는 끝내 무너지듯 나무 기둥에 기대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나무둥치에 등을 기대고, 조심히 주저앉았다. 구역질이 올라왔다. 빙빙 도는 머리를 숙이고 몸을 옆으로 기울여 피를 뱉었다. 숨 한번 내쉴 사이도 없이 온갖 곳에서 통증이 밀려왔다. 아나히스는 추위를 심하게 타는 사람처럼 벌벌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어린아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머리를 무릎 사이에 묻었다. 그러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저 멀리 아직 어두운 자리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무거웠다. 좀처럼 날개 달린 것의 소리가 아니었다. 그는 그 소리로 미루어 짐작해 다가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도망갈 필요는 없었다. 그가 오랫동안 기다렸던 것, 오랫동안 바라왔던 것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히스는 재회가 기꺼웠지만, 그 자신의 영혼이 정말로 발소리 어딘가에 가까워져 있을까 못내 두려웠다.

아니야. 한참 동안 몸을 웅크리고 신음과 비명을 참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나히스는 어둠 너머를 향해 소리 내어 끙끙대듯 말했다. 아직 아니야. 아직 안 돼. 그는 자신이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알았다. 슬픈 선고처럼 가까워지던 저 멀리 누군가가, 그 말을 듣고 다가오던 발걸음을 돌려 떠나는 것 같았다. 말라붙은 활엽수 이파리가 한차례 쓸어내듯 부는 바람을 타고 떨어져 내렸다. 스산한 바람이 벌어진 살갗을 파고들자 그는 몸을 떨었다. 그리고 비로소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유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아나히스는 듣지도 돌아오지도 않는 이에게 돌아와 달라고 흐느끼듯이 청했지만,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다가오지 않았다. 울음 섞인 숨처럼 그림자는 짧아지고, 발소리를 잃은 어둠이 사물의 등 뒤로 몸을 옹송그렸다.

그리고 마침내 고요했다. 혼자 남겨진 것이다.

다친 몸은 무언가 빠져나가고 남은 잔해처럼 느껴졌다. 그것을 버리고 하늘로 날아가면 이 모든 것이 끝난다는 직감이 들었다. 아나히스는 자신이 새카만 날개를 펼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치 까마귀처럼.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두려웠다. 그리고 죽음이 그를 부른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피가 얼어붙으며 김이 무럭무럭 오르던 설원으로 돌아와, 네가 버리고 간 것들을 도로 가져가라. 너는 완전해지고, 또 무결해지며, 괴로움 없는 곳으로 날아갈 테다. 네 위에, 네 머리 바로 위에 천국이 있단다. 숨을 들이쉬고, 다시는 내쉬지 않으면 그만이란다.

제기랄 날개가 그렇게 무거운데 어떻게 날아가요. 아나히스는 숨을 내쉬며 속삭였다. 이윽고 기대어 앉아 있던 자리에서 억지로 몸을 굴렸다. 땅에 쓰러지듯 엎드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다음에 할 행동은 정해져 있었다. 그나마 멀쩡한 팔을 내밀어 싸늘한 땅에 손가락을 박았다. 나머지 몸을 끌고 발로 간신히 땅을 밀어 앞으로 조금씩 나아갔다. 다른 쪽 팔을 앞으로 뻗어 반복했다. 이미 더러워진 옷이 땅에 끌리며 흙먼지가 묻었고, 그가 지나간 자리에 시커먼 핏자국이 점점이 남았다.

젊은 레인저가 그렇게 하는 것은 딱 폭풍처럼 달리기 좋은 나이가 된 하얀 말 호르헤스 때문도 아니었고, 그가 약속한 사람은 이미 어둠 속에서 발걸음을 돌려 멀어졌기에 만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사랑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것들은 세상에 너무 짧게 머무른 탓에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절망이 된다. 그러는 대신 그는 한껏 미지근한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상온에 너무 오래 둬서 김이 빠진 사과주, 과녁에 꽂히기만 하면 되니 날을 세워 두지 않은 뭉툭한 연습용 화살촉, 마찬가지로 견습 레인저들이 수련용으로 쓰는 나무 단검, 헛소리와 함께 주워섬기는 독한 담배 연기, 온기를 잃고 굳어가는 피투성이 손. 아나히스는 미지근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며 알았다. 그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명령이었다. 한때 옳다고 믿었던 것들을,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믿지 않았던 것들을 다시 불러와야 했다.

만신창이가 된 몸을 끌어 기어가면서, 아나히스는 끝내 한때 양치기였다던 어느 선임 레인저에 대해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런 생각이었다. 꼬리가 세 개인 늑대는 어떻게 하려고 했을까. 그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날 길을 궁리할까. 그러다 끝내 허공에 대고 묻고 만 것이다. 혹시 방법 있어요, 대장? 저는 잘 몰라서 여기서 그만둘까 해요.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배지는 반납해야겠죠?

그런데 대답이 돌아왔다. 난 너랑 나 둘 중에 네가 더 참을성 있는 쪽인 줄 알았는데. 마치 늑대가 까마귀 옆에 있고, 생사의 고비를 함께 넘기고 있는 양. 수없이 그래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앞으로도 망설임 없이 그럴 것처럼. 허름한 바에서 테이블을 깨부숴가며 취객과 싸운 뒤에 서로의 터진 입술이며 코피 흐르는 얼굴을 주거니 받거니 비웃던 어느 날, 비릿하고 찝찔하고 따가운 맛이 나던 싸구려 술처럼 입 밖으로 피가 쏟아진다. 젊은 레인저는 생각한다. 지금 자신은 숲에 있는 게 아니라, 사실은 어디에도 없으며, 그가 자신이 세발까마귀 아나히스임을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은 오로지 취객의 지갑으로 술값을 계산하며 집기값까지 물어주겠다고 바의 테이블에 동전을 와르르 쏟고 웃던 그날 그 기억이고, 그날 함께 있었던 늑대뿐일지도 모른다고.

이내 주변을 향해 열려 있던 감각이 차츰 둔해지고 정신이 흐려졌다. 그런데도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했다. 점점 머릿속에서 말이 사라져갔다. 물이 필요한 것도 같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입 안은 미끈거리고 젖어 있었는데. 늑대의 목소리가 물이 아니라 제기랄 술이 필요한 거라고 투덜댔다. 그 덕분에 모든 것이 희뿌연 가운데 대답할 말이 생각났다. 입 좀 다물어요, 대장. 술이 필요한 건 나도 알아요.

그래? 그럼 닥치마.

아니에요. 뭐라도 좋으니까 계속 떠들어요. 제발.

손가락 끝에 피 젖은 흙이 끼고, 마침내 생각이며 감각이 빠짐없이 흐릿해지는 순간이 왔다. 관성과 본능으로만 움직였다. 가장 단순하고 지배적인 생각조차 언어를 얻지 못했다. 힘이 빠지고 춥고 어지럽다는 지각은 있었지만, 그것들을 정확히 말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들렸다. 아나히스는 그 말이 사실 아무도 입 밖으로 내지 않은 말임을 알았다. 선언된 적 없는 언어가 파고든다. 늑대의 목소리는 대체로 단호했고, 불필요할 정도로 실제 말씨보다 다정했다. 계속 움직여. 가야 해. 아니, 멈춰. 기다려. 소리를 들어 봐. 다가오고 있잖아. 어서 얼굴 가리고 숨어. 그러면 돼. 너라면 안 들킬 수 있을걸. 넌 까마귀잖아.

진짜가 아니다. 아나히스는 알면서도 목소리를 따라갔다. 하지만 따라가도 따라가도 여전히 갈 길이 남아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언어가 되지 못한 모든 순간이 또 다른 그가 되었다. 그가 고백하지 못한 사실과 전하지 못한 감정. 느끼지 못했던 공포와 기억하지 못할 사유思惟. 그가 고작 인생의 2년을 보내며 설원 위에서 서슴없이 잘라낸 그의 일부가 발목을 붙들고 늘어졌다. 그것들 때문에 그는 가져본 적 없이 잃어버렸고, 기대한 적 없이 실망했으며, 분노한 적 없이 용서했다.

기어가는 것이 힘에 부칠 때쯤, 소년의 끝자락에 아나히스가 자주 그랬던 것처럼 간신히 반항적인 물음이 언어를 입고 튀어나왔다. 지금 제가 이러고 있는 꼴을 보면 대장은 뭐라고 할 건데요? 뭐라고 놀리는 게 좋겠어요? 목소리는 잠시 침묵한다. 늑대의 목소리는 목소리일 뿐 진짜가 아닌 것을 아나히스도 알았다. 진짜가 아닌 것은 진실을 말할 의무가 없다. 그래서 목소리는 그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피 묻은 손에 고이 쥐여 주었다. 괜찮다고 하겠지, 이 자식아. 다 괜찮으니까 돌아오기나 하라고.

땅바닥에 얼굴을 대고 얕은 숨을 몰아쉬면서 아나히스는 자기가 그런 말을 듣길 바라기라도 한 것인지 생각해 보려 애썼지만, 사실은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는 아직 먼 곳에 있었고 자신이 있어 마땅한 곳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것만이 사실이었고,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