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2024

아나히스로부터

얼음 낀 파도를 담아

유적 by 량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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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입니다.

제 안부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 듯해 급히 전합니다.

저 객사는 고사하고 뻔뻔하게도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걸 잘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여기 사정을 보면 좋게 쳐줘도 살아남은 것에 가깝겠죠.

어쨌든 어딘가에 숨은 붙어 있다고만 알아두시면 될 것 같습니다.

지금 있는 곳은 북쪽 바다입니다. 설원을 건너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다음에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람에 며칠은 꼼짝없이 이 해안가에 갇혔습니다. 잉크가 병째로 얼어서 글씨를 쓸 수가 없고, 차갑고 짜고 습한 바람에 종이가 망가지기 일쑤라 보통 편지는 생각도 못 하는 곳이죠. 해조류나 물고기보다는 유빙 낚을 일이 더 많은 해안가는 도무지 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불 앞에서 잉크병을 녹이면서 간신히 실없는 말이나 쓰고 있어요. 당신이야 글씨가 형편없어도 어떻게든 읽을 테죠. 제가 당신 편지를 들고 매번 씨름하는 거랑 비슷하게. 그래요. 이건 먼젓번의 수많은 편지에 대한 복수입니다.

당신 편지도 지금에야 제대로 읽어 봤습니다. 몇 주 전에 폭풍 숲을 떠날 때 받아왔는데, 늘 그렇듯 실없는 이야기일 테니 심심할 때 읽으려고 일부러 아껴 두었어요. 그리고 당신 편지는 언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시시콜콜하니 그게 참 좋습니다.

은화 두 닢은 지킨 걸로 해 두세요. 아무리 그래도 조그마한 꼬맹이에 불과한 제가 선임 레인저인 데다가 대장까지 단 당신 푼돈을 뺏는 것도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있는 대로 불평은 다 했지만 여기도 꽤 마음에 듭니다. 물론 끔찍하게 심심해요. 집중할 만한 구경거리가 창밖에 치는 무시무시한 파도뿐이니까. 그래도 보고 있다 보면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안부를 궁금해할까 덧붙이지만, 말을 여기까지 끌고 올 수는 없어서 호르헤스는 중간에 있는 마을에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오고 보니 여기 북쪽 끝자락에도 사람이 살고 있는 것 아십니까? 어느 노파가 지난달까지는 살았다던 외진 오두막을 빌려 쓰고 있습니다. 가끔 집 안에 혼자 있는 게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만 빼면 다 괜찮아요. 파도 소리가 하루 종일 들리고, 손가락이 떨어질 것처럼 춥고, 바람 소리를 사람 소리로 착각하고 깜짝 놀랄 때도 있지만.

편지를 아껴뒀다 읽길 잘했습니다. 지금부터는 생각거리가 떨어지질 않겠어요. 왜냐하면 지금부터 당신이 그 양몰이견을 보고 저를 생각한 이유에 대해 곱씹을 거니까요. 그러면서 혼자 멋대로 삐졌다가 용서도 하면 적당히 눈폭풍이 멎어 있을 것 같습니다.

편지는 설원을 다 지나 적당한 마을에서 폭풍 숲 앞으로 보낼 겁니다. 저는 해안선을 따라 계속 남하할 거고요.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저보다는 편지가 먼저 폭풍 숲에 도착할 겁니다. 답장은 제때 닿지 못할 수도 있으니 대충 바다 쪽으로 수소문해서 보내 주세요. 때가 늦어도 그렇게 신경 쓰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신도 목 빼고 기다리지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니까 언제나처럼, 대단히 긴급하지 못한 이야기를 보내 주세요.

사실은 쓸데없는 이야기일수록 좋겠습니다.

태양의 보살핌 있기를.

아나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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