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같이 살아요
[1차] 외과의사 '대니얼 마이어스' x 뱀파이어 화가 '올리비아 바넷'
둘의 첫만남을 쓴 글입니다.
총 8,562자
맞춤법 검사 진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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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눈을 뜨니, 처음 보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천장만 봤는데도 병원은 확실히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천장이 남색인 병원은 내가 알기론 없으니까. 고개를 돌려보니, 두껍고 어두운 커튼으로 가려진 커다란 창문이 보였고,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고풍스러운 가구와 화려한 장식이 보였다. 그 가구와 장식들은 확실히 자연광이 부족한 방에 우아함과 매력을 주었다.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이려는데, 갑자기 머리가 코끼리가 그 위에서 뛰어다니는 것처럼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내 입은 마치 사막이라도 된 것처럼 건조했다. 나는 고통을 참으며 눈을 감기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려고 애썼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딱딱한 길바닥에 쓰러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고, 지금의 나는 처음 보는 방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누군가가 길에서 나를 발견하고 여기로 데려와 침대에 눕혔다고 추측했다. 그 누군가가 적어도 나를 해칠 생각이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눈을 비볐다. 어지럼증이 뒤늦게 나를 덮쳤다. 이곳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침대에서 나와서, 자연광이 부족한 방에 햇빛을 좀 들여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문 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간 후 커튼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때, 갑자기 내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커튼에 손대지 마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내 손가락이 커튼에 닿기도 전에 공중에서 멈췄다. 나는 마치 뭔가를 하다 들킨 사람처럼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내가 본 것은 그림자 속에 서 있는 한 여자였다. 그녀는 방의 어둠과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검은 민소매 드레스를 입고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동자는 신비롭고 고혹적인 느낌이 담긴 붉은색이었다. 그녀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마치 움직이는 대리석 조각상을 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 그러나 단호한 어조로 한 번 더 말했다.
"커튼에, 손대지, 마요."
여러모로 당황스럽긴 했지만, 어쨌든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나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알았어, 알았어요. 손 안 댈게요."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온화하지만 권위감이 담긴 목소리로 나에게 명령했다.
"그럼 이제 침대에 앉아요."
일단은 그녀가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기에, 나는 천천히 침대에 앉았다. 내가 침대에 앉자, 여자는 근처에 있는 의자를 끌고 와 침대 옆에 놓고, 그 위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녀의 모든 행동은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부드럽고 우아했다. 잠시 나를 살펴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여기가 어딘지 알겠나요?"
그녀의 질문을 듣고 나는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책상 위에 놓인 책이나 벽에 걸려 있는 액자의 그림처럼 아까는 보지 못했던 방의 사소한 디테일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쨌든 자연광의 영향을 별로 받지 못하는 어두운 방이고, 내가 모르는 장소라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알아낸 건 없었지만, 일단 가장 가능성이 높은 답을 내놓기로 결정했다. 이 이상으로 침묵을 유지하고 있으면 그녀가 화를 낼 것 같았고, 뭔가 그녀를 화나게 만들면 좋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집인 것 같은데요.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예상이 맞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맞아요. 여기는 내 집이에요. 거리에서 의식을 잃은 당신을, 제가 찾아서 여기로 데려왔어요."
"어…. 고마워요?"
그러고 보니 어제 응급 환자가 많이 와서, 일이 좀 고단했었다. 아마도 병원에서 일하던 도중 잠시 바람을 쐬러 산책을 나왔다가 길에서 그대로 쓰러진 것 같았다. 일단 그녀가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장본인이라는 걸 알았으니, 이제 중요한 건 그녀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선행을 한 이유였다. 그렇지만 그녀의 표정은 정말 읽기가 어려워서, 나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갈피조차 잡을 수 없었다. 이게 만약 싸움이라면, 내가 훨씬 불리했다.
"그건 그렇고, 당신. 내가 누군지는 알아요?"
나는 그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일어나자마자 그녀가 나타났기 때문에 나에게는 이 방을 탐구할 시간이 전혀 없었고, 그녀가 내 앞에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자신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얘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정체를 내가 알 방법은 전혀 없었다.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이상한 강렬함으로 번뜩였다. 정말 갑자기 일어난 현상이었기 때문에 내가 잘못 본 건지, 아니면 살짝 열린 커튼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햇빛에 번뜩인 건지…. 어쨌든 내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다리를 바꿔서 꼰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말은 마치 벽돌처럼 나를 강타했다.
"그럼 내가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여기서 살아서 나가는 걸 걱정해야 하지 않겠어요?"
등골이 오싹했다. 그녀의 특징이 다시 한번 내 눈에 들어왔다. 창백한 피부, 붉은 눈동자. 그녀는 정말 조각상이라도 된 것처럼 미동도 없이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붉은 눈동자로 마치 나를 압도할 것처럼 계속 쳐다보자, 두려움이 내 안에서 스멀스멀 피어나기 시작했다. 마치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걸린 사슴이라도 된 것 같았다. 그녀의 '인간이 아닌 것 같은' 특징을 보니, 내가 봐도 정말 말도 안 되는 가설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가?'
하지만 그건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그건 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인간이 상상해서 창조해 낸 존재일 것이다. 판타지 소설에나 나올 법한 그런 존재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대에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만약, 정말 만약, 그녀가 내가 생각하는 그 존재가 맞았다면, 나는 정말 큰 위험에 빠져 있었다. 어쩌면 여기서 살아서 나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위험에.
내가 그녀의 정체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그녀는 여전히 시선은 나를 향한 채 고개를 반대쪽으로 까딱였다. 그녀의 움직임은 고급스러워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오싹했다.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녀가 내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였다. 파인 드레스 너머로 그녀의 가슴골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계속 그곳으로 시선이 향하는 내가 정말 미웠고 짜증이 났다. 그런 나의 사투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이미 눈치챘을 것 같은데, 나는 뱀파이어에요."
'아, 그것만은 제발 아니길 빌었는데.'
피를 먹는 뱀파이어. 나는 뱀파이어에게 발견되어 뱀파이어의 집으로 옮겨진 것이었다. 긴장에 아주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 앞에 있는 여자가 나를 해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온몸이 그대로 굳었다. 그런데 문득, 내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사실에 의문이 들었다. 뱀파이어인 그녀가 내 피를 마시고 싶었다면, 내가 기절했을 때 충분히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녀가 흡혈이 아닌 다른 의도로 나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 게 아니라면, 내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설마, 살아있는 먹잇감을 가지고 놀다가 서서히 죽이는, 그런 이상한 취향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내 생각을 전혀 모르는 건지,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나 같은 뱀파이어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초인적인 힘이죠. 비록 내가 여자 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당신을 쉽게 이길 수 있어요. 그리고 당신을 순순히 보내줄 생각은 없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나에게 한 걸음 가까워질 때마다 나는 본능적으로 움찔거렸다. 내 옆에서 몸을 숙인 그녀가 내 귀에 부드럽게 속삭였다. 내가 알고 있는 뱀파이어의 특징과 똑같이 차가운 그녀의 숨결이 내 귀에 닿았을 때 소름이 돋았다.
"당신은 지금 뱀파이어의 공간에서 뱀파이어를 만나고 있어요. 그런 당신이 이곳을 살아서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녀의 말이 허공에 무겁게 걸렸다. 그리고 동시에 이 사태의 무게가 내 어깨를 짓눌렀다. 나는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에 부닥쳐 있었다. 최대한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물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당신이 저를 살아서 보내줄 거죠?"
그녀는 팔짱을 끼고 강렬하고 흔들림이 없는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간단해요. 내 부탁을 들어주면 돼요."
'피를 달라는 건가?'
"나와 같이 살아요."
그녀가 한 말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고, 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뱀파이어와 함께 산다니. 미친 소리처럼 들렸지만, 내가 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나는 그녀가 한 말의 진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표정을 읽으려고 애를 썼지만,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그녀의 붉은 눈은 내 영혼을 꿰뚫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그녀에게 뭔가 저항할 수 없는 묘한 끌림을 느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목소리는 교활하고 유혹적이었다.
"한 가지 좋은 점을 말하자면, 우리 집은 당신이 일하고 있는 병원과 아주 가까워요. 걸어서…. 한 10분 정도?"
그녀는 이렇게 덧붙이기 전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설마 그 정도 거리도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약한 건 아니죠?"
그녀가 내 직장이 어디인지 알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나는 지금까지 그녀에게 나에 대한 얘기를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내가 병원에서 일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그녀는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당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 당신의 옷을 잠깐 살펴봤어요. 지갑에 명함이 있던데요, 외과의사 '다니엘 마이어스' 씨?"
"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내 반응을 보더니, 나를 안심시키려는 것인지 가볍고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아, 지갑에 있는 돈은 건드리지 않았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난 도둑질할 만큼 가난하지도 않고, 애초에 지갑에 돈이 많이 있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녀는 마치 내 반응이 별거 아닌 문제라도 되는 것처럼 손을 흔들었다. 반면에 나는 계속해서 심호흡했다. 이 여자는 위험했고, 그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무언가가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리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는 나에게, 10분 거리에 있는 그녀의 집에서 살 수 있게 해주겠다는 그녀의 제안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비록 동거인이 뱀파이어라서 목숨을 걸어야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그녀의 제안을 정말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의 고민 끝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나는 내가 의도했던 것보다 더 퉁명스럽게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녀가 원한다면 나를 쉽게 제압할 힘을 가진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동시에 첫 만남에 '뱀파이어'라는 자신의 정체를 말하는 그녀의 솔직함은 나에게 흥미롭게 다가왔고,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신비로운 본성에 끌리게 되었다.
내 대답을 들은 그녀가 길고 고운 손가락 하나를 들며 말했다.
"요구 사항이 하나 더 있어요."
'요구 사항이 또 있다고?'
갑자기 내가 잘못된 선택을 내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제 와서 바꾸겠다고 하면 그녀도 마음을 바꿔 나를 죽여버릴 수도 있었다. 나는 침을 한 번 꼴깍 삼킨 후에 물었다.
"…뭔데요?"
"일주일에 한 번, 당신의 피를 마시게 해주세요."
그녀는 사무적이고도 부드러운 목소리와 마치 일상적인 대화의 일부인 것처럼 침착한 말투로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일주일에 한 번, 그녀가 내 피를 마신다…. 나는 침착하고 우아하게 서 있는 그녀를 힐끗 보았다.
"내 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두려움을 감지했는지, 그녀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적당히 먹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수백 년 동안 뱀파이어로 살았는데 그 정도 자제력도 없겠어요?"
'수백 년 동안 산 뱀파이어'라는 말에 소름이 척추를 따라 내려갔다. 내 앞에 있는 우아한 여인이 사실은 전설 속에 등장하는, 오래 산 존재라는 사실을 납득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가 손을 들어 자신의 검은 머리카락 한 가닥을 귀 뒤로 넘겼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열린 입 사이로 뾰족한 송곳니가 잠깐 보였다가 사라졌다.
'저게 내 피부를 뚫으면, 주사를 맞는 느낌일까? 아니지, 야생동물의 송곳니처럼 찢어지는 느낌이려나?'
그녀의 제안에 두려움보다 호기심을 먼저 느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을 때, 나는 드디어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궁금증으로 인해 그녀의 제안에 넘어가려던 참에, 갑자기 마음 한구석에 무언가가 걸렸다.
"제 몸 상태가 얼마나 엉망인지 알고 하는 말이에요? 알면 제 피, 먹기 싫어질 텐데."
내 말을 들은 그녀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는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전 술도 많이 마시고, 담배도 자주 피우거든요."
그녀는 그 사실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흡연자라는 사실은 알고 있어요. 당신 코트 주머니에서 담배 케이스와 라이터를 발견했거든요."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서더니, 책상 위에서 뭔가를 집어 들어 나에게 가볍게 던졌다. 나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받았다. 내가 피우는 담배가 담긴 종이 케이스였다. 그것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팔짱을 낀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제 지갑 말고도 참 많은 걸 봤나 보네요?"
"거기에 있었으니까 발견한 거죠."
그녀를 바라보면서 나는 호기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진짜 동기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경계심을 느끼는 건 당연했지만, 그녀에게는 나를 끌어들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좋은 생각인지 완전히 확신은 할 수 없었다. 나처럼 건강이 무너진 사람의 피를 마시면 그녀한테도 안 좋은 영향을 줄 텐데. 그것으로 인해 그녀가 나를 홧김에 죽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나는 주저하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요?"
"사람 잡아먹다가 경찰한테 쫓기는 것보다 나아요. 만약 당신이 피를 줄 수 없다면, 적어도 병원에서 혈액 팩이나 가져다줘요. 당신, 의사잖아요?"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녀의 주장은 꽤 논리적이었다. 적어도, 내가 부인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녀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고, 그녀에게 피를 준다는 것 말고도 '혈액 팩'이라는 나름 안전하고 합법적인 대안이 있다는 건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녀가 평범한 인간이 아닌 뱀파이어고, 나를 하나의 먹잇감으로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여전히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 모든... '살벌한' 말을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한테 밥이나 같이 먹자고 말하는 것처럼 말했다. 나는 내가 손에 쥐고 있는 담배 케이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될까요?"
그녀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나는 그것을 허락의 의미로 해석했다.
"인간인 나를 뱀파이어인 당신의 공간에서 살게 하는 이유가, 정말 그냥 피 때문인가요?"
내 질문에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있지만…. 그냥 요즘 외로워서 그래요. 난 이렇게 오랫동안 혼자 살아왔거든요. 내가 마지막으로 사람과 교류한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아요."
그녀의 말을 들으니 또 쓸데없는 호기심이 생겨서,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이 당신의 공간으로 데려온 사람이 저 말고 또 있었나요?"
"있었어요. 이곳은 아니었지만."
"그럼 당신이 데려온 사람들은 다 살아서 나갔나요?"
그녀는 턱을 괸 채로 대답했다.
"그건 당신의 상상에 맡기겠어요."
그녀는 완전히 미스터리였고, 동시에 내가 맞추고 싶은 퍼즐이었다. 그녀의 알 수 없는 아우라와 불안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는 믿고 싶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녀가 침착하고 자신감 있게 말하는 방식, 아니면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고독감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녀는 나를 죽이지 않고 자신의 집에 데려와 내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렸다. 그건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뱀파이어가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고, 내가 그녀를 믿게 만드는 하나의 발판이 되었다.
"그럼 동의한 걸로 알고 있을게요."
그녀가 다시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 어쩔 수 없었다.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짐을 챙겨올게요. 필요한 물건만 최소한으로."
여전히 이것이 좋은 선택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내 목숨은 조금이라도 연장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뭐 어쨌든, 일단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내 이성을 최대한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그때, 그녀가 내 불안한 마음을 감지하기라도 했는지 말했다.
"참, 제 이름은 올리비아 바넷이에요. 편하게 올리비아라고 불러요."
올리비아 바넷. 내가 그녀의 이름을 머릿속으로 되뇌는 사이, 그녀는 그사이에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 특유의 부드러운 몸짓으로 방을 가로질러 걸어가 문을 열고 나갔다. 방에 혼자 남으니까, 몸에 남아있던 마지막 긴장이 사라졌다. 분명히 나는 지금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녀와 묘하고도 이상한 관계를 느꼈다. 어쨌든 나는 내 삶이 이 묘한 뱀파이어 여인과의 만남 이후로 결코 예전 같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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