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이 안 좋아.
가내 아스타브의 관계 발전 이야기. 회피성향과 그런건 죽어도 못보는 직진뱀파이어의 조합이란.
-2막 드로우 상인 이벤트 관련 썰이 나왔을 때 떠오른 이야기를 두서없이 적어봤습니다.
-탈고 없음, 맞춤법 검사기만 돌렸습니다… 자가만족용이니 이게 뭐야 싶어도 그냥 그러려니 해주세요.
“난 어렸을 때부터 뱀파이어에게 물리는 꿈을 꿨어.”
“아니, 잠깐만…. 물리고 싶다고?”
“그래, 내 피를 마셔주면 힘을 영원히 증가시켜 주는 물약을 네게 줄게. 어때? 원래는 안 파는 건데, 특별히 제안하는 거야.”
“에... 으에에…”
“영혼 빠진 거 같은 소리는 그만 내고, 정신 좀 차려볼래?”
“스읍... 그러니까…. 지금 피를 마셔주면 물건을 내주겠다는 엄청나게 손해 보는 장사를 우리에게 하겠다는 건데.”
“그렇지.”
“게다가 그게 무우우려 힘의 물야악-? 어때. 한 번 해보실 텐가, 뱀파이어 양반?”
부러 농담스럽게, 비꼬는 투로 얘기했다. 무언가를 직면하기를 싫어하는 이가 기묘한 분위기를 도저히 견디기 힘들어 낸 수였다. 이 정도로 비꼬면 저 미묘하게 미친 눈을 가진 상인도 알아들었겠지. 이안은 자신의 짝이 어떤 대꾸를 할지 궁금해져 고개를 들어 표정을 살폈다. 그 순간 직면하고 싶지 않은 것을 직면해버렸지만…
“필요해?”
“어?”
“그 물약.”
“…”
아스타리온은 '한다?'하고 묻듯이, 고개를 옆으로 까딱이며 상인을 흘겨봤다. 누가 봐도 싫다는 티가 나는 얼굴이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바꾸기까지 했다. 표정을 바꾸려고 눈썹과 이마에 힘을 주고 눈을 크게 뜨는 것마저 보였다. 처음으로 직면한 '불호'였다. 그는 자기 손이 떨리는 것을 느끼고 다급하게 아스타리온의 팔을 붙잡았다. 자신에게 하듯, 아니, 제게 하던 것보다 더 과장된 몸짓으로 다가가려는 게 보여서.
“아, 아, 아냐. 필요 없어. 그냥... 해 본 말이야.”
…최악의 대답이었다. 남의 불호를 끌어낸 주제에, 그냥 해봤다니. 그동안 제 입으로 내뱉은 말 중에 제일 끔찍한 대답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아스타리온은 그런 대답에도 이안에게 살짝 고개를 까딱이며 감사 인사를 건네주었다.
“들었지? 우리 위대한 참된 영혼께서는 그딴 거 필요 없다고 하시네. 그러니까, 다른 뱀파이어라도 찾아보라고.”
상인은 무어라 더 말을 했지만 그런게 들릴리가 없었다. 내가 힘을 주어 아스타리온을 잡고 있던 팔을, 그가 그대로 잡아끌어 본래 향하던 목적지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아, 그 드로우... 진짜 지독한 냄새가 났다고. 이만큼 멀어졌는데, 아직도 그 악취가 나는 거 같아.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이미 상인과는 멀어진지 한참이다. 그럼에도 아스타리온은 계속해서 그 상인에 대해 궁시렁거렸고, 주변 동료들이 이제 알겠으니 그만 좀 해라, 라는 말을 내뱉기 전까지도 투덜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곳에 있던 가짜 참된 영혼 네 명 중, 단 한 명만. 그날의 여행을 마무리 짓기 전까지 아무런 말을 내뱉지 않았다.
“자기,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
“... 어? 미안, 못 들었다? 뭐라고 했지?”
아스타리온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한쪽 눈썹을 까딱이더니 다소 비아냥거리는 투로 답을 했다. 눈빛으로 '바보'하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오늘 무슨 날인지 아냐고 물었어. 오늘 드-디-어. 내가 식사하는 날이잖아. 네가 맨날 다쳐서 힘들다고 미루고 미루다가 오늘까지 온 건데. 설마…. 까먹었다거나 그런 건…”
“아... 그랬지. ... 내가 하루만 더 미루자고 하면 화낼 거야?”
“뭐?! 그건 약속이랑 다르잖아! 오늘은 다친 곳도 없는데, 대체 왜!”
들어나 보자며 팔짱까지 끼고 마음에 안 든다는 티를 내는 그였다. 하지만 이안은 거기에 대고 무어라 변명을 하지도 못하고, 삐질삐질 땀만 흘리고 있었다. ... 변명할 말도 없었으니까.
“... 됐다. 보니까 딱 견적 나와. 딱히 이유도 없는 거지 지금?”
“내일 두 배로 먹게 해줄게…”
“내가 바라는 게 그런 대답이 아닌 거 알 텐데.”
“…”
“하... ... 잠이나 자. 진짜 됐으니까.”
무슨 대답을 해야 했을까. 사실 알고 있지만 내뱉지 못한 말을 다시 목구멍 안으로 집어넣으면 비릿한 맛이 감돌았다. 이안 그가 습관처럼 깨문 입술에서 나는 맛이었다. 그는 뱀파이어가 아니었기에, 그 맛에 즐거움을 느끼지도 못했고, 그저 약간의 역겨움이 느껴질 뿐이어서. 애꿎은 모랫바닥에 피 섞인 침을 내뱉어서 제 안에서 울렁거리는 느낌을 없애보려 했다.
배고픔에 잠 못 이루던 뱀파이어는, 이 야심한 밤에 누군가의 인영을 발견했다. 다만 그 인영은 꽤 익숙한 것이라, 근처에 둔 소검을 든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다른 이들이 깨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을 뿐.
“어디 갔다 왔어? 설마... 또 몰래 고구마라도 먹고 있던 건 아니겠... 어?”
배고파하는 자신은 내버려두고 혼자 야영지 물자라도 털고 있는 줄 알고 퉁명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가던 그는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익숙한 역겨운 냄새와, 맛있는 냄새. 그 두 가지가 섞여 제 콧등을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두 가지 냄새 모두 자신에게 익숙한 것들이었다.
아스타리온은 급하게 몸을 일으켜 이안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갈수록 향은 더욱 짙어졌고, 구역감과 허기짐을 동시에 자극하는 알 수 없는 감각에 입을 틀어막은 채로 말을 걸 수밖에 없었다.
“너... 그 상인한테 다녀온 거야? 이 밤에? 진짜 미친 게 분명하지. 넷이 뭉쳐 다녀도 포션을 달고 사는 게 그림자 땅인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무런 대답 없이, 그는 아스타리온에게 물약 하나를 건넸다. 드로우 상인이 팔던 것과 같은 모양, 하지만 아주 살짝 다른 약병. 미묘하게 조금 더 고급스러운 포장 상태였다. 아마 낮의 ‘그’ 물약일 거다. 다만 조금 꼬질꼬질 더러웠고, 병에 붙은 스티커에서는 약간의 혈향이 풍겼다. 제가 자주 맛보던 혈의 향이. 아마도 다친 상태로 병을 쥐어 피가 묻은 것일 테다.
“너... 지금 이거 하나 가져오려고 거기를...”
말도 다 끝마치지 못하고 그의 모습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알아봐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배고픔은 둘째치고, 제 배 안에서 울렁거리는 이 기분 나쁜 무언가가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 것 같아서.
“... 이걸 왜 가져왔는데?”
한참 또 오랫동안 이어지는 침묵. 답답함에 못 이겨 대답을 재촉하려던 순간, 그제야 입이 열리고, 기다렸단 목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꽤나 눅눅하고, 축축해서. 그때 강가에서 들었던 속마음처럼.
“미안해서 그랬어.”
“... 뭐가? 뭐가 미안했는데 나한테.”
“그냥…. 다.”
“'다'라는 대답은 제대로 된 대답이 아니잖아. 똑바로 말해줄래?”
조금 강압적이긴 해도 말투 자체는 부드러웠다. 제대로 된 대답을 원하지만 기다릴 수 있단 뜻이었다.
“... 너한테, 그런 농담한 게. 네가 싫어하는 게 눈에 보였어. 하기 싫었잖아. 그치? 그런데 나는…. 그런 걸 농담이라고 내뱉었다는게…”
미안하다는 말을 두 번씩이나 내뱉지는 못했다. 알량한 자존심? 그런 하찮은 것은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이안은 거리의 부랑아로 살면서 자존심 같은 생존에 필요 없는 것은 내다던진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지 못했던 것은, 잘못을 직면한다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 말을 내뱉게 되는 순간, 아스타리온의 기분을 나쁘게 만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는 것을 온전히 자각하게 되니까. 직면이 무서워 모든 것을 회피하는 자여서 그랬었다.
하지만 아스타리온은 그런 이야기는 알지 못했다. 생각 탐지 반지는 이미 효력을 다해서 어딘가에 내다 버린 지 오래였거든. 그저 지금 그에게 제일 신경 쓰이는 부분은 이쪽일 것이다. 낮의 그 일을 계속 신경 썼다고?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제 이마라도 경쾌하게 탁, 하고 치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니까... 지금 이 짓 하려고 나한테 피 주겠다는 약속도 잊고, 야영지로 올 때까지 말도 없었단 거야? 그와 동시에 뱃속에서 느껴지는 울렁거림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아, 제발. 이러면 안 돼 아스타리온.
“그거 때문에 거길 혼자 쳐들어가서, 이거 하나 훔쳐왔다고…”
“...사실 하나는 아니고…”
말과 동시에 품 안에서 우르르, 약병이 쏟아져나왔다. 아스타리온은 가끔 이안의 절약 정신-감자 세 개로 스튜 십이 인분 만들기 같은 짓들 말이다.-을 보며 우리 물자도 많은데 꼭 그렇게 거지 근성을 보여줘야겠어? 하고 장난스레 놀렸었지만, 오늘은 정말, 그동안의 근성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본 것 같았다.
“난 이렇게 많이는 못 먹는다.”
“왜?! 너 먹으라고 가져온 거야! (For you.)”
젠장... 젠장! 조금 전까지의 눅눅하다 못해 곰팡이 필 것 같던 목소리는 어디로 가고, 평소 같은 앙칼진 목소리로 대꾸하는 건지. 계속해서 울렁거리는 것이 느껴지고, 그것은 어느새 배를 타고 올라와 아스타리온의 가슴께, 목구멍까지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이를 애써 부인하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제발, 그런 말 좀 하지마. 그 모든 게 다 나 때문이라고? 다정도 하시지. 카사도어도 나한테 그런 적은 없었다. 그 역겨운 가족 행세를 하면서도 그딴 표현(For you)은 쓰지 않았다ㄱ…”
“네 기분이 나빠지는 일은 없길 바랐단 말야.”
“... 뭐?”
“네가 항상, 웃었으면 했어. 비아냥거리는 투여도 좋으니까, 웃으면서 장난이나 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잠깐만, 너…”
“... 네가 안전하길 바라고, 더 강해져서 카사도어는 신경도 쓰지 않고 살았으면 했어. 그래서 몰래 다녀왔어…”
아스타리온은 토하고 싶은 느낌을 간신히 참아냈다.
“네가 걱정돼.”
결국 목 끝까지 차오른 울렁거림은 머릿속까지 어지럽히기 시작했고, 그 순간만큼은 머릿속 올챙이의 존재감보다 그 울렁거림이 더 강력했다. 속으로만 되뇌던 욕설을 결국 입에 내뱉으며, 자신의 입가를 틀어막던 손을 내려 그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올챙이 대신 제 뇌를 조종하기 시작한 울렁거림의 목소리를 따라서. 이젠 외면할 수가 없다.
“... 정말?”
이안은 아스타리온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끌어안았으니까. 공격에 찢어진 옷이 벌어지고, 상처가 드러남에도 앞에 있는 이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것처럼 제 온기를 나눌 뿐이었다. 아스타리온은 잠시 벙찐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여 이안의 상처가 난 팔을 조심스레 핥았다. 가끔 입술을 지분거리기도 했고, 또 가끔은 제 손가락으로 어루만지기도 했고.
“... 나 그 드로우랑 엎치락뒤치락 해서 냄새날 텐데.”
“흐음,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는 표현은 좀 야한 거 같다.”
“이런 순간에도 너는... ... 그리고 따가워.”
“참아. 나도 배고픈 거 참고 있었어.”
“할 말 없게 만드네…”
하, 누가 할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제 입가에 묻어있는 피를 닦아내던 아스타리온은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나는... 오히려 고마웠어. 이안 네가 그렇게 말했던 게. 너는 그저 역겨운 농담이나 내뱉었다고 생각하겠지만, 200년 동안 나에겐 그런 에둘러 말하는 농담도 없었고, 난 그냥 남이 시키는 대로 했었어. 그래서 그랬던 거야. 네가... 너한테 그게 필요하다고 말했으면, 그냥 참고 했었을 거라고. 그게 지금까지의 내 생활 방식이었어.”
“... 하지만 나는, 카사도어도, 네 주인도 아니니까. 이젠 그런 생각 안 했으면 해. 넌... 내 동료잖아.”
“... 그래, 동료 좋지. ... 그런데 ‘이게’ 동료가 맞나?”
“... 사실 나도 이젠 모르겠다. 나 이런 적 처음이라.”
“그건... 영광이군.”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며, 그날 밤의 일을 마무리 지었다. 내일도 그들은 또다시 길고 긴 여행을 떠나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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