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록 제1권

第一章. 춘풍 도령 (09)

*

 

“왔느냐.”

이훈은 문밖 인기척에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말했다. 그의 말에 검은 의복의 사내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청영이었다.

그가 바닥에 꿇어앉자 이훈은 고개도 들지 않고는 손가락에 침을 발라 책장을 넘겼다. 팔랑—. 그 손짓이 어찌나 여유로운지 누가 보면 소설이라도 읽는 줄 알 터이지만, 청영은 그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맡긴 일은?”

“처리했습니다.”

“그래?”

청영의 대답에 이훈은 붓에 적색 물감을 적셔 어떤 장에 쓰인 글자 위로 거침없이 그었다.

“벌레 같은 놈들이야. 기회를 주면 납작 엎드려 사죄하고 감사해도 모자란 판에. 머리가 아둔한 것인지, 나로선 당최 이해할 수 없구나. 그렇지 않니?”

“…….”

“청영.”

“예, 어르신의 말씀이 맞습니다.”

역시 나의 청영이로구나. 이훈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책을 덮었다. 밋밋한 책의 표지에는 거창하고 긴 제목 같은 것은 붙어있지 않고 다만 誤(그릇할 오)라는 글자 하나가 적혀있을 뿐이었다.

“누구더라. 그 서생에 대한 것은 알아보았느냐?”

“윤지성 말씀입니까?”

“윤지성…….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데.”

“아마 항간에 떠도는 소문이 많아 그런 듯합니다.”

“소문이라. 그런 것은 믿을 만한 것이 못되지. 어리석은 자들이 입으로 나르는 것만큼 추접스러운 것이 없거든.”

“알아보니 그 서생은 윤이철의 막내아들이라 합니다. 한성에 온 지는 반년도 채 되지 않았다 하고, 성 외곽 쪽에 집이 있어 이웃들 외에는 알려지지도 않은…….”

청영의 말에 차를 따르던 이훈의 손이 멈칫한다.

“윤이철이 한성에 돌아왔다고?”

“예?”

이훈이 찻잔을 내려놓고는 중얼거렸다. 청영이 제 주인의 눈치를 살폈으나 그로서는 이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가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훈은 다른 것들은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청영을 내보내고는 중얼거렸다.

“보십시오, 형님. 결국 형님도 다르지 않잖습니까.”

그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언제 미소를 지었냐는 듯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

 

며칠 후. 아침 일찍 누군가 지성의 방문을 두드렸다.

“도련님, 주무세요?”

이제 겨우 새벽해가 떠오르는 시각. 벌써 채비를 마친 지성은 홍단의 목소리에 문을 열었다.

“잘 잤니?”

“그럼요. 도련님은 괜찮으세요?”

홍단의 말에 지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늘한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지만 어쩐지 훈훈한 공기가 도는 듯하다. 잠시 후 마당으로 이철과 지훈이 나왔다. 세 사람 모두 만반의 준비를 한 상태였다. 지훈이 제 동생에게 다가와 목에 무언가 둘러주었다. 부드러운 천에 솜을 집어넣어 누빈 목도리였다.

“형님, 이게 뭡니까?”

“네가 추위를 많이 탄다고 아버지께서 만드셨단다.”

내색은 하지 마. 민망해하신다. 지훈의 말에 이철은 헛기침을 해대더니 먼저 대문 밖을 나섰다. 지성은 기분 좋은 듯 헤헤 웃으며 그의 뒤로 따라 걸었다.

세 사람이 도착한 곳은 성 바깥 마을에 있는, 그중에서도 몇 해 전부터 호랑이가 나온다고 하여 인적이 드문 숲의 허름한 초가집이었다.

“다행입니다. 또 사냥꾼들이 호랑이를 사냥하겠다고 설쳐댈까 걱정했는데요.”

“그렇구나. 한데 그들이 어찌 이곳으론 오지 않는 것일까?”

“그야 간단한 일이죠. 그들에게 다른 산에서 호랑이를 봤다는 소문을 흘렸거든요. 언제 누가 본 줄도 모르는 호랑이보단 화방의 윤 도령이 봤다는 호랑이를 잡는 것이 좀 더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너, 그 별호를 싫어하지 않았었나?”

“싫어하긴요. 이용할 수 있다면 뭐든 이용하는 것이 좋지요.”

지성은 벽 옆에 세워놓은 검 세 자루를 챙겨 지훈과 이철에게 건네며 말했다.

“지방의 작은 마을도 아니고, 이렇게 우리 세 명이 한 달에 한 번씩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검술을 연습할 수 있는 장소가 어디 흔하려고요.”

그의 말에 이철과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성은 가볍게 몸을 풀고는 검을 바로잡고는 지훈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검을 맞대려는데 이철이 끼어들어 말했다.

“두 사람 모두 실전처럼 임하거라.”

지훈의 시선이 지성에게로 옮겨갔다. 지성은 길게 숨을 뱉고는 검을 빼 들었다. 결심한 것이로구나. 지훈은 애써 미소 지었으나 제 손에 들린 것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예를 갖추고 이철의 신호에 따라 검날을 맞부딪히기 시작했다. 깊은 산중이라 날이 추웠음에도 몸에 열이 빠르게 올랐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두 사람의 검술이 닮아 보일 터였으나 지성의 검이 학이라면 지훈의 검은 독수리였다. 지성의 것은 빠르고 예리했고 지훈의 것은 한 번 한 번이 묵직하게 내렸다.

“형님, 진검이라고 너무 봐주시는 것 아닙니까?”

“너야말로 처음이 아닌 것 같은데?”

그의 말에 일순 지성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지훈의 검날이 기회를 잡고 파고들며 지성을 궁지로 몰자 그는 저도 모르게 습관처럼 예전에 쓰던 검술을 빼 들었다. 비 오던 그날 숲에서 자객들을 상대하던 때처럼, 춤을 추는 듯 가벼우면서 우아한.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그 차이를 이철이 모를 리 없었다.

“그만.”

“아버지.”

두 형제가 숨을 가쁘게 쉬며 이철을 바라보았다. 지성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햇볕이 푸르렀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너의 검술은 네 아버지와 어머니의, 특히 어머니의 검을 닮았다. 그건 뭇 사람들의 눈에 띌 뿐 아니라 네가 네 존재를 스스로 세상에 드러내는 꼴이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한다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

지성의 고개가 힘없이 떨어진다. 맞는 말이지만 너무나 쓰린 말이다. 참담했다.

“네가 죄송해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죄송할 일이지. 장군과 부인께, 그리고 너에게.”

“저는…….”

어찌 아버지께서 제게 사과를 하십니까? 아버지가 아니었더라면 지금껏 살아있을 수도 없는 목숨인 것을요. 차마 뱉지 못하는 말들이 목구멍에 차올랐다. 지훈은 지성의 표정을 살피며 조용히 검을 집어넣었다.

“죄책감을 느끼지 말아라. 잊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기 위함이며 숨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

 

흐음음– 알 수 없는 콧노래 소리가 화방에 퍼지자 려운이 방문을 획 열어젖히고는 소리 질렀다.

“그 이상한 노래 좀 그만 부를 수 없냐!”

“너무하네. 이건 자네가 알려준 노래가 아닌가.”

“내가 언제……!”

“잊어버렸는가? 어렸을 적에 자네가 좋아하던 아이가 알려줬다던 그 노래 말일세.”

류의 말에 려운의 얼굴이 벌게졌다. 묘한 얼굴로 그가 말했다.

“류, 네 놈이!”

“자네, 한 가지만 하게. 화를 내는 건가, 아니면 부끄러워하는 건가?”

“시끄러워! 너야말로 오늘 그놈이 돌아온다고 어린애처럼 들떠있기나 하고 말이야.”

“자네나 그 얼굴이나 어찌 해보게.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나까지 부끄러워질 판이니.”

뭐야? 려운이 류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대는데 화방 문이 열렸다. 지성이었다. 그는 이 광경에 한숨을 내쉬었다.

“바쁘신데 제가 방해되었다면 나가드릴까요?”

“도령, 왔소!”

류가 예의 그 웃음을 지으며 지성을 바라보자 려운은 쯧–하고 혀를 차곤 마루에 걸터앉았다.

“제가 뭘 가져왔는지 한 번 보십시오.”

“그거…….”

집 나갔던 주인을 맞은 강아지처럼 웃던 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지성이 의기양양하게 탁자 위에 내려놓은 것은 갖가지 과자와 떡 등의 주전부리가 담긴 찬합이었다.

“저번에 어머니께서 깜빡하셨다고 더 신경 써서 만들어주셨습니다. 화방에 사람이 늘었다고 하니 평소보다 곱절로 해주셔서 들고 오는데 팔이 빠지는 줄 알았지 뭡니까.”

어깨를 주무르는 시늉을 하는 지성의 표정을 보아하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크지 않은 찬합이었으나 펼쳐 놓으니 달고 고소한 냄새가 은은히 퍼졌다.

“매번 이리 신경을 써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소. 마침 배가 고프던 참인데, 도령. 먹어도 되겠는가?”

“당연하죠. 려운, 오셔서 같이 드십시오.”

지성은 생긋 웃으며 려운을 향해 말했으나 그는 됐다고 말하곤 밖으로 나가버렸다.

“려운은 아직도 제가 성에 안 차시나 봅니다.”

“글쎄, 미안하여 그런 것이 아닐까? 멋대로 자네의 뜻을 곡해하지 않았나.”

“미안해하는 것 같지는 않던데요. 못 보셨습니까? 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이 얼마나 차게 가라앉으시는지. 저는 일부러 이렇게 달지 않은 주전부리들도 만들어왔는데요.”

“아, 자네는 모르지? 저 녀석 보기 하곤 다르게 달곰한 것을 무척 좋아한다네.”

류가 꿀떡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정말 예상과 많이 다른 분이시네요. 붓을 잡으신단 것도 그렇고, 식성도 그렇고.”

“한데, 자네가 이것들을 만들었다고? 어머님께서 싸주신 것 아니었나?”

“이 많은 것을 어찌 어머니께 맡기고 태평하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조금 거들어드린 것뿐이지요. 여기서 제가 만든 것은 몇 개 안 됩니다.”

그래? 그의 말에 류는 찬합 속의 것들을 유심히 살펴보다 나지막이 읊조렸다.

“이게 도령이 만든 것이지? 이 매작과.”

“어찌 아셨습니까?”

“글쎄, 예인의 감이라 해두지.”

류는 하나 집어 입에 물었다. 바삭하고 고소하며 달지 않은 것이 퍽 마음에 들었다.

“선배님 입맛엔…….”

“맛있네.”

지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한 류는 잠시 말이 없더니 헤실헤실 웃었다.

“난 뭐든 좋아. 달지 않아도.”

“그러십니까? 다행입니다.”

류가 뒷말을 강조하여 말했지만, 지성은 눈치채지 못한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화방 장부를 살폈다. 이레 동안의 의뢰는 두 건. 모두 서예 작품이었고 딱히 지정한 이는 없어 류가 작업을 한 모양이었다.

문득 지성은 려운의 실력이 궁금해졌다. 그는 어떤 식으로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려낼까. 주로 어떤 색을 즐겨 쓸까. 그 거칠어 보이기만 한 손이 애초에 붓을 잡는다는 것 자체를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보기 전까지 누군들 믿겠는가. 지성은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대뜸 류를 향해 말했다.

“한데 선배님. 려운의 솜씨는 어떻습니까?”

“뭔가? 도령. 그래도 몇 달 먼저 화방에 들어왔다고 견제하겠단 건가?”

“아니, 뭐, 견제까지는 아니고요. 그냥 좀…….”

“그래, 그 녀석이 붓을 잡는단 것이 아무래도 못 미덥다는 말이로군.”

지성이 민망한 듯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인이라고 다 같은 것을 잘하는 것은 아니지. 도령은 인물화, 나는 산수화. 물론 도령이 산수화를 내가 인물화를 못 그린다는 말은 아니고.”

“그렇지요.”

“그 녀석은 특히 서예 솜씨가 뛰어나다네. 이번 의뢰 작품들을 쓴 것도 내가 아니라 그 녀석의 붓이었거든.”

장부를 덮던 지성이 화들짝 놀라 다시 책장을 넘겼다. 잘못 본 것이 아니고 눈을 비비고 다시 한번 쳐다보아도 려운의 이름이 아닌 류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게, 려운이 그놈이 장부에 제 이름을 적는다고 하니 아주 질색을 하지 뭔가.”

“어째서요?”

“려운도 나처럼 본명이 아니거든. 그래서 려운이라고 적으려고 하니까 그건 또 싫다더군. 뭐 본인 말로는 얼마 있지도 않을 텐데 장부에 흔적을 남기는 것이 싫다 했지만, 적어도 스승님 오실 때까진 있을 테고. 내가 보기엔 그냥 부끄러워하는 것이었는데 말이야.”

그렇군요. 그래서 그냥 려운이라고만 불러도 된다고 하셨던 것이로구나. 지성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언젠가 꼭 려운의 글씨를 보고야 말겠노라 다짐했다.

 

*

 

홍화정. 어둠이 내려앉은 이곳은 낮보다 활기가 넘쳤다. 제일 큰 방을 제외하고. 오늘, 큰 방인 모란방에는 불도 켜져 있고 분명 사람도 많이 모여있음에도 웃음소리 하나 없이 적막했다. 기생들은 눈치를 보았고 마루를 거니는 발걸음도 조심스러웠다.

“애심 형님. 저리 많은 양반들이 모여서 뭘 한답니까?”

“조용히 해. 알아봤자 좋은 일 하나 없는 일이겠지. 우린 그냥 모른 체하고 조용히 시키는 일만 하면 되는 거야.”

모란방에 모인 양반들은 열다섯으로 나이대는 저마다 달랐고 몇몇은 이 모임에 처음 초대되어 안면도 없는 상태였으나 딱히 불편한 기색은 없어 보였다. 그들은 이따금 문 쪽을 바라보며 누군가 오길 기다리는 눈치였다.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방으로 들어섰다. 청영이었다.

“대감께선 아니 오셨나?”

“어르신께서 바쁘시어 제가 대신 이 자리에 참석하였습니다. 청영입니다. 가끔 이렇게 얼굴 뵐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의 말에 양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께서 부탁드린 일은 처리들 하고 계시는지요.”

“그럼. 여부가 있겠는가.”

“한데 오늘 어찌 이리 모두 모이라 하신 것인지.”

젊은 서생의 말에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이훈이 있었더라면 감히 상상조차 못 할 질문이었다. 청영은 담담히 품에서 무언가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푸른 비단을 덧대어 만든 두루마리였다.

“어르신께서 말씀하시기를, ‘거사에 대한 결의를 굳건히 하고자 그 맹세를 다지고자 한다. 불만이 있다면 이 결의문을 쓰기 전에 나가라.’고 하셨습니다. 거사에 참여하고 싶지 않으신 분들은 이만 가보셔도 좋습니다.”

그의 말에 조용하던 모란방이 술렁였다. 잠시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던 젊은 선비 하나가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갈 때였다. 가만히 무릎 꿇고 앉아있던 청영이 칼을 뽑아 가차 없이 그의 등 뒤에 꽂아 넣었다. 저의 뱃가죽을 뚫고 나온 칼을 바라보던 선비는 피를 토해내며 쓰러졌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경우요!”

“제가 언제,”

청영의 눈이 푸르게 빛났다. 그 시선이 방에 있는 이들을 죄 훑었다.

“살아나가셔도 좋다 하였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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