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一章. 춘풍 도령 (08)
그림은 사흘 후에 완성되었다. 지성이 탁자 위에 그림을 펼쳐 놓자 류는 탄성을 내질렀다. 만개한 매화 사이로 꽃구경을 하는 정희는 우아하고 기품 있었다. 그의 시선은 꽃을 향했다. 검정의 눈동자는 또렷하고 빛나고 있었고 그의 손은 꽃을 손수 피워내듯 매만지고 있었다.
“도령의 인물화는 볼 때마다 사람의 마음을 건드는 것이 있는 듯하네. 단순히 겉모습만을 종이에 옮긴 것이 아니라 그림만 보아도 그 사람을 눈앞에서 직접 보는 것만 같아.”
“과찬이십니다. 그림이 완성되었으니……, 이제 정 영감님 댁에 그림을 가져다 드려야…….”
지성은 그림을 말다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때마침 사흘 만에 화방으로 돌아온 려운이 그 상황을 목격하곤 다가왔다.
“도령! 지성아! 정신 좀 차려봐!”
“이놈 왜 이래?”
“내 이럴 줄 알았어. 사흘 밤낮을 잠도 안 자고 그림만 그렸거든.”
“약속한 기일이 언젠데. 분명 이달 말일이라 하지 않았었나?”
“그렇긴 한데…….”
류가 지성을 번쩍 안아 들곤 말했다.
“자네가 그림 좀 정 영감님 댁에 가져다드릴 수 있겠나?”
“내가 그 영감탱이 집에 가라고?”
려운이 질색하여 얼굴을 구기자, 류가 길 잃은 강아지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려운이 한숨을 쉬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리자 류가 맑게 웃었다.
“고맙네. 역시 자네는 내 제일 소중한 벗일세!”
류는 그렇게 말하고는 지성의 방문을 발로 밀어 열었다. 한두 번 해본 것이 아닌 듯한 그의 모습에 려운이 고개를 저었다.
“후배 자랑을 그렇게 하더니, 영 성가신 후배를 두었군.”
이게 그 그림인가? 려운은 탁자 위에 도르르 말린 그림을 펼쳤다. 그림을 유심히 바라보던 그는 종이를 정성스레 말았다.
“그림 실력 하나는 뭐, 부실하지 않은 모양이지?”
그는 그림을 들고 화방을 나섰다.
지성의 방. 류는 바닥에 이불을 깔아 지성을 눕혔다.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는 베개가 머리에 닿자 눈을 떴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죄송할 짓은 좀 하지 말게. 매번 쓰러지고, 이게 뭔가?”
“그러게요. 요즘 운동을 게을리하여 그런가 봅니다.”
“헛소리하지 말게. 천하장사라도 잠은 못 이기는 법이지. 누구라도 사흘을 깨어있으면 그리되는 법이네.”
그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평소보다 낮고 거친 것이 화가 난 모양이었다. 지성이 힘없이 웃자 류는 그의 콧날을 톡 건드렸다.
“웃음이 나와? 그대가 쓰러질 때마다 내가 얼마나 가슴을 졸이는지 아느냐고. 급한 것도 없었는데 어찌 그리 몸을 혹사해?”
“죄송합니다. 이렇게 화난 선배님은 처음 봅니다. 그리다 보니 얼른 그림을 완성하고 싶은 욕심에 그리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으니 화 푸십시오.”
“다음부턴 그러지 마시오.”
“알겠습니다.”
지성의 말에 류는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 그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림은 걱정하지 말게. 려운이 녀석이 정 영감님께 가져갔으니. 푹 자고 일어나게. 탕약을 끓여놓을 테니.”
감사합니다, 선배님. 지성이 눈을 감고 새근새근 잠에 빠져드는 것을 보던 류는 제 후배의 머리를 쓸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정 영감의 집 앞. 정 영감의 시종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려운이었다. 갓도 상투도 없이 양반 같지도 않은 행색을 하고 나타난 그를, 하인은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화방에 그쪽 같은 인물은 없었는데.”
“그럼 영감탱이를 불러와 보든가.”
“아니 왜 우리 주인마님을 그리 함부로 부르쇼?”
“참나, 돌겠네. 그림을 전해줘야 할 것 아냐!”
대문 밖이 소란해지자 닫혀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영감탱이!”
려운은 그토록 만나기 싫어하던 정 영감을 보고는 간만에 화색이 돌았다. 화방 사람들이 영감님이라 부르던 그는 호칭과는 다르게 그다지 나이가 든 행색은 아니었다. 정말 많이 잡아야 마흔 중반 겨우 되어 보이는 그를 영감님이라고 부르게 한 것을 보면 그 성미가 어지간히 깐깐한 모양이리라.
“뭐야, 이 녀석. 네가 어쩐 일이냐?”
정 영감은 말은 그리 퉁명스레 했으나 제법 반가운 눈치였다.
“그림 전해주러 왔더니 이놈이 날 잡상인 취급하지 뭡니까.”
하하하! 네 녀석꼴을 봐라. 널 누가 양반이라 하겠냐? 정 영감의 말에 려운이 알게 뭐요, 하곤 고개를 돌려버렸다. 정 영감은 려운의 손에 들린 두루마리를 보고는 말했다.
“류가 있는 화방에 들어갔다더니. 심부름꾼 신세냐?”
“나라고 오고 싶어서 온 줄 압니까? 윤 도령인지 뭔지 하는 놈이 쓰러져서 억지로 온 겁니다.”
“또 쓰러졌단 말이냐? 하여튼 고집은 제 아버질 쏙 빼닮았군.”
여간해선 보기 힘든 정 영감의 따듯한 눈빛에 시종이 고개를 갸웃하는데 정 영감이 려운을 끌고 들어갔다.
“뭡니까? 그림 전해주면 됐지 집엔 왜 끌고 갑니까?”
“온 김에 차나 한잔하지 그러냐, 내 제자야.”
차 한 잔 대접하겠다는 그의 말에 려운이 사색이 되어 외쳤다.
“됐습니다!”
잔말이 무에 그리 많아! 려운은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으나 정 영감은 마른 몸에서 힘이 다 어디에서 나는지 그를 끌고 제집 안으로 들어갔다. 시종이 찻주전자를 들여오자마자 문을 걸어 잠근 정 영감은 구석에서 대나무 막대로 려운의 팔을 쿡 찔렀다.
“눈치 없는 녀석 같으니. 지성이 그놈이 이 그림이 뭔지 얘기해주지 않던?”
아니지. 지성이 녀석이 그럴 리가 없는데. 정 영감의 중얼거림에 려운이 뜨끔하여 자신의 사흘을 돌이켜보았다. 아마 그가 저에게 설명하려 했더라도 그러지 못했을 터였다. 지성이 빽 쏘아붙이고 난 후로 화방엔 발길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소문이야 과장되는 법이기는 하나, 제 또래 사내들이 다들 그렇지 않던가. 겉멋만 잔뜩 들어 양반이라는 신분에 우쭐대고 저보다 낮은 이들에게 무례하게 구는 녀석들. 그는 지성이 그런 부류라 생각했다.
“이 그림은 내가 부인에게 생일 선물로 주려 한 것이다.”
“아, 의외…….”
“그러니 네 놈이 그렇게 대문 앞에서 피는 소란을 내가 가만두고 봤을 리 없겠지?”
맞는 말이기는 하나, 그럼 그냥 돌려보내면 되는 일 아닙니까. 려운의 불퉁한 말에 정 영감은 못마땅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눈치 없는 놈. 구실이 있어야 할 것 아니냐, 구실!”
“또 뭘 시키려고 하시는 겁니까?”
“내가 그리 못되어 먹은 스승처럼 보이느냐?”
예. 려운은 입 밖으로 그 말이 튀어 나가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냥 너는 조용히 차나 마시다 가면 돼. 시종들에겐 적당히 일러둘 테니. 제자는 차마 깐깐한 스승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며칠 후, 몸이 회복된 지성은 본가에 갈 채비를 했다. 달마다 이레씩 집에 가 있는 것은 순전히 달거리 때문이었다. 남들처럼 경통증이 있거나 그 기간이 긴 것은 아니었으나 아무래도 류와 같이 생활하다 보니 달거리 기간에는 본가에 가 있는 것이 나았다. 류에게 몸이 허약하여 달에 나흘만 본가에 머물다 오겠다 하였더니, 그가 돌연 “하면 이레는 쉬시오. 그래야 힘내서 화방에 나올 수 있지 않겠소?” 하여 그리된 것이었다.
“이번엔 조금 오래 쉬어도 될 듯한데.”
“됐습니다. 열흘은 무슨.”
지성의 말에 류는 내심 걱정스러운 눈치였으나 더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저 물끄러미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만 보십시오. 얼굴 닳겠습니다.”
“화방은 걱정 말게. 자네 몫까지 열심히 일할 터이니.”
“알겠습니다. 이레 동안 고생 좀 해주십시오.”
지성이 떠나고 류는 의자에 앉아 멍하니 화방 문을 바라보았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려운은 류의 멍한 눈빛에 흠칫하고는 말했다.
“뭐냐? 왜 죽상이야? 꼭 실연이라도 당한 것 같군.”
“도령이 없는 며칠 동안 뭐하지?”
“왜, 어디 갔냐?”
“몸이 허약해서 쉬려고 달에 이레 정도는 본가에서 지내거든.”
형편없는 놈. 려운의 구시렁거림에 류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지금 뭐라고 했나?”
“그렇잖아. 체력이 그리 약하면 고집이나 부리지 말 것이지, 픽픽 쓰러져선. 영 성가신 녀석이야.”
“도령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말게.”
류는 빙긋 웃으며 이야기했으나 려운은 알 수 있었다. 류가 지금 화를 내고 있음을. 려운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류가 원체 정이 많기는 하지만 어째서 지성이라는 그 녀석 이야기만 나오면 저렇게 열을 내는 것인지. 그래 봤자 고집불통에 기방에나 들락날락하는 녀석이거늘. 류는 속으로 제 화를 누르며, 탁자 위의 주전자로 손을 뻗었다.
*
“막내 도련님 오셨어요!”
대문 앞에서 까치발을 하고 목이 빠질 듯 길을 보고 서 있던 홍단이 마당으로 뛰어 들어가며 말했다. 한 시진째 바늘에 실을 꿰어 수를 놓는 둥 둥 마는 둥 하다가 겨우 세 땀을 찔러 넣은 성연은 명랑한 목소리에 버선발로 뛰쳐나왔다.
“마님, 신이요! 신 신으셔야죠!”
“아, 참. 내 정신 좀 봐.”
신에 대충 발을 끼워 넣고는 대문 밖으로 달려 나왔다. 멀리 지성의 모습이 보이자 그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지성아!”
손을 흔드는 제 어머니를 발견한 지성이 잠시 멈춰 섰다가 웃으며 같이 손을 흔들었다.
“어째 얼굴이 이리 까칠하니? 살도 좀 빠진 듯하고.”
그가 지성의 팔뚝을 주무르며 말했다. 그 손길은 너무나 다정하였다.
“어머니도 참. 달마다 그러시네요. 어머니 말씀대로라면 저는 뼈만 남아있을 거예요.”
“그치만, 한성에 온 뒤로는 얼굴 보기도 힘이 드니 그렇지.”
아쉽다는 듯 그의 볼을 쓸어주는 성연의 손을 그는 꼭 잡아주었다. 두 사람은 대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삼십 보도 안 되는 길을 삼백 보는 되는 듯 천천히 걸었다. 왜냐 물으면 아쉬워서일 터였다. 성연은 지성이 화방에 들어가고 매 순간을 아쉬워했다. 사랑하는 나의 아이, 나의 막내.
“아버지와 형님은 아직이시지요?”
“그래. 한 시진 후에야 도착하실 터이니 들어가 쉬렴.”
지성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곤 제 방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들어온 방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성연의 성미대로라면 적어도 이 방은 홍단이나 쇠돌이에게 부탁하지 않고 날마다 손수 걸레질하셨음이 분명하였다. 지성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어머니도 참.
잠시 후, 앉아 졸고 있는 사이 누군가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누구인지 말하지는 않았지만, 지성은 알았다.
“형님!”
그가 반갑게 문을 열고 나오자, 마루에 앉은 사내가 보였다. 지성의 형인 지훈이었다. 그는 입매를 부드럽게 올려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지성이 지훈의 옆에 가 앉고는 해사하게 웃었다. 제 아우를 잠깐 살펴보던 지훈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너 또 그림 그리느라 며칠 밤이라도 지새웠어?”
“형님은 어찌 이리 눈썰미가 좋으신지, 절대 거짓말은 못 하겠습니다.”
“농이 나오냐?”
지훈이 제법 엄한 표정을 지었으나 지성은 류가 짓는 웃음을 떠올리며 헤실헤실 웃었다.
“아하하! 형님이 그렇게 화를 내셔도 하나도 무섭지 않은데 어찌합니까? 분발하셔야겠습니다. 그래서야 아이들이 수업을 잘 따라오겠습니까?”
지훈은 그의 말에 금방 표정을 풀고는 지성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 때렸다.
“화방에 보내 놓았더니 어째 농을 치는 법만 배운 것 같구나.”
“걱정하지 마시란 말입니다. 안 그래도 화방 선배님에게 이미 잔뜩 혼나서 앞으론 무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참, 이번에 화방에 새로 오신 분이 있는데……,”
재잘재잘. 지성이 하는 이야기들을 잠자코 듣고 있던 그는 부드럽게 제 아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속상했겠구나. 그 사람이 널 멋대로 단정 지어버렸으니.”
“그래도 괜찮습니다.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닌걸요. 아버지는요?”
“아마 널 기다리고 계실 거야.”
그의 말에 지성은 긴장되는 듯 침을 꼴깍 삼켰다. 겨우 대청마루 하나에 지훈의 방 하나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아버지의 방이었으나 어쩐지 그 곱절은 되는 듯 멀게만 느껴지던 방이었다. 지성의 표정을 본 지훈이 그의 등을 톡톡 두드려주었다. 지성은 옅게 미소 지어 보이고는 아버지의 방으로 향했다.
“화방 일은 어떠하냐?”
방으로 들어오는 지성을 힐끔 보고는 대뜸 내뱉은 말이었다. 윤이철은 아차 하여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멋쩍은 듯 찻잔을 채웠다. 아마 지성과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매사에 침착하고 말수도 적은 이철은 지성의 앞에서는 잔소리가 늘었다. 지성은 그러나, 남들은 다 알아차릴 법한 그것을 저 혼자만 인지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아버지의 앞은 여전히 어려운 모양이었다.
“좋습니다. 적성에도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쭈뼛거리며 바닥에 꿇어앉는 지성을 보며 이철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편히 앉아라.”
“예, 아버지.”
그가 자세를 고쳐 앉자 이철은 그의 앞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따듯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지성은 조심스레 잔을 들었다. 손끝에서 온기가 옮겨와 서서히 손바닥에 퍼졌다.
“오늘까지 결단을 내리기로 하였지. 그래, 어찌하겠느냐?”
“…….”
“네가 어떤 길을 걷는다고 해도 널 탓하지 않을 것이다. 끝까지 응원할 것이야. 포기하고 싶다면 그리해도 좋다. 만일 이 일로 우리 식구가 위험해진다 하더라도 기꺼이 널 도울 것이라고 모두 이야기를……,”
“아니요.”
이철의 말을 잠잠히 듣고 있던 지성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에 빛이 어렸다. 흔들림 없이 올곧고 힘 있는 눈동자다. 그는 제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전부 안다는 듯 확고히 말했다.
“아닙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그리 두지 않을 것이니까요.”
“지성아.”
“누군가를 디딤돌로 삼아 오르며 이뤄내는 일은 제게 의미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아버지. 제 주변 사람조차 지켜내지 못하면 세상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뒤엎는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나도 널 믿으마.”
이철은 무언가 망설이는 듯하더니 지성의 손 위로 제 손을 얹었다. 지성은 조금 놀란 얼굴로 제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철의 시선은 한없이 깊고 진중했다.
“하지만 명심하거라. 본래 사람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단다. 뭐든 혼자 해결하려 들지 말고…….”
그의 말에 지성은 알아들었다는 듯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러나 이철의 미간은 여전히 근심으로 주름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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