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록 제1권

第一章. 춘풍 도령 (07)

지성은 저고리를 물에 담갔다. 핏물이 나무 대야에 퍼져 나갔다. 가만히 대야 속의 물이 붉게 물드는 것을 보던 그는 일어나 마저 옷을 벗었다. 제 가슴을 봉해두던 무명천을 풀고 나니 숨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몸에 걸친 모든 것을 내려놓은 그는 길게 숨을 뱉었다.

“춥다.”

그는 몸을 오소소 떨다 욕조에 발을 슬쩍 담갔다. 계속 몸이 찬 상태여서 그런지 물이 조금 뜨겁게 느껴졌다. 은은하게 약초 향이 올라왔다. 온몸의 긴장이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선배님은 목욕물 하나는 참 잘 받으신단 말이지.”

칭찬이 맞는지 모르는 말을 뱉었으나 그래도 기분은 한결 나아진 듯 보였다. 그는 문득 눈을 내려 제 다친 손목을 바라보았다. 상처는 그의 말대로 그리 크지 않았다. 다만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보여준 적 없던 흉터를 류에게 보일 수 없었다. 목덜미 아래부터 팔꿈치 밑까지, 10년 전 그 뜨거운 불길이 남긴 흉터……. 흉터가 홧홧이 타는 듯한 기분에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잠시 그렇게 있다가 제 두 볼을 찰싹 때리고는 눈을 떴다. 그리고는 저를 속으로 다그쳤다.

‘잊어선 안 돼, 이 흉터의 의미를…….’

그는 주먹을 꽉 쥐다가 욕조 옆 바구니를 보았다. 문득 류와 려운 두 사람이 떠올라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비슷해 보이는 점도 얼마 없는 두 사람은 어떻게 벗이 된 것일까? 지성이 느끼기에는 생긴 것도, 류는 오색빛깔의 물감으로 붓을 촉촉이 적셔 그린 것 같은 사람이었고, 려운은 물기 없는 붓에 먹물을 묻혀 날카롭게 내려그은 것 같은 사람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살벌한 분이란 말이지.”

그러나 그리 말하는 지성의 얼굴에는 물감이 물에 번지듯 미소가 번져 있었다.

 

목욕을 하고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욕탕에서 나오던 지성은, 화방 문을 열다가 방긋 웃으며 담요를 들고 서 있는 류를 보고는 황당해하며 입을 열었다.

“예서 뭐하십니까?”

“이걸 들고 있지.”

“왜요?”

그의 말에 류는 지성을 담요로 포옥 감싸며 말했다.

“겨울에 목욕하고 나오면 바깥 온도가 더 쌀쌀하여 고뿔이 들기 쉽지 않은가. 하여 이리 기다리고 있었지. 자네에게 이렇게 담요를 둘러주려고.”

“선배님. 종이 걱정은 안 되십니까?”

“그깟 종이가 뭐라고. 정 영감님께는 양해를 구하면 되는 일이고 종이는 다시 구하면 되지만 그대는 이 세상에 하나뿐이잖소. 소중히 해야지.”

“선배님…….”

류는 지성이 혹 제 말에 감동이라도 한 것인가 하여 기대에 찬 눈을 하고 옆을 바라보았으나 지성은 냉정하게 말했다.

“소름 돋습니다. 이상한 말 하지 마십시오.”

쳇. 류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갓 목욕을 마친 지성의 얼굴이 조금 붉었다. 류는 지성을 부축해 의자에 앉혔다.

“선배님. 전 손목을 다쳤지 다리를 다친 게 아닌데요.”

“어, 어쨌든 다쳤잖나! 환자는 쉬시게.”

“어떻게 이렇게 태평하십니까? 전 지금 조마조마한데요.”

“도령, 마음에 여유를 가지게.”

“여유 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려운이 화방 문을 벌컥 열었다. 손에는 종이 뭉치가 한가득하였다. 지성은 그것을 보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류가 어깨에 둘러주었던 담요가 바닥으로 스르륵 떨어졌다.

“그, 그 종이 설마!”

지성은 려운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허리를 숙여 종이를 관찰하던 그는 불쑥 고개를 들고는 말했다.

“펼쳐보십시오.”

“뭐?”

“아, 이렇게 펼쳐보십시오!”

종이를 찬찬히 살피던 지성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갓난아기를 돌보듯 조심하여 종이를 어루만졌다. 이 질감, 이 무늬. 틀림없다. 지성이 보름이 걸려서야 구한 그 종이! 심지어 미세한 차이이긴 하나 종이의 짜임과 품질이 그림을 그리기에는 젖어버린 종이보단 좀 더 좋은 것이었다.

“이 종이 어디서 난 것입니까?”

“누님께서 그림에 관심이 많으시니까 혹 가지고 계시는지 여쭤봤더니 있으시다 하시더군.”

려운은 그리 말하며 류를 바라보았다. 류가 ‘하하’ 하고 멋쩍게 웃었다.

“누님께서 그림에 관심이 있으시다고요? 하면 언젠가 같이 그림을 그려보고 싶네요. 분명 즐거울 것입니다.”

지성이 려운의 손에 들린 종이를 가져가려 하자 그는 종이를 위로 들어 올렸다.

“에이, 주시려고 가져오신 것 아닙니까? 려운. 은근히 짓궂은 구석이 있으시네요.”

“너, 듣자 하니 여인들에게 인기가 많다지. 기방에 거의 산다는 소문도 있던데.”

“대체 그게 무슨 소립니까?”

지성이 려운을 올려다보았다. 려운은 꽤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성은 평소 저에 대한 소문에 그다지 큰 관심이 있는 편이 아니었기에 어리둥절하여 류를 바라보고는 자신이 무슨 실수를 하였는지 묻자 그가 답해주었다.

“그게, 저 녀석이 다른 데는 무심한데 제 누님은 끔찍이도 아끼거든.”

내 말을 오해하신 모양이로구나! 지성은 제가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하고는 예의 바르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면 좋지 않겠습니까? 화방에 모여 같이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하며……,”

“이놈 듣기보다 훨씬 난 놈이군. 홍화정의 기생들도 그 말솜씨로 꼬여냈나 보지?”

웃음을 머금고 있던 지성의 눈은 애써 둥근 호선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진실의 입술이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서늘하게 굳었다.

“려운, 종이를 가져와 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더 무례하게 굴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무례? 내가 무례한가? 기생 치마폭에서 노는 너보단 차라리 무례한 내가 낫지 않나?”

“작작 좀 하십시오!”

지성이 빼액 하고 소리 지르자 류는 올 것이 왔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으십시오! 대체 무슨 소문을 주워듣고 이러십니까? 저도 비꼬기에는 일가견이 있는 편이지만 려운 앞에서는 주름도 못 잡겠습니다. 예인이 다른 예인과 교류를 하고 싶다는 것이 그리 잘못된 것입니까? 제가 누님이면 남동생 단속에 숨이 막힐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려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성을 바라보았다. 류가 키득거리자 지성이 류 쪽을 향하여 말했다.

“그리고 류 선배님! 웃지만 말고 말 좀 해보십시오. 어쩐지 요즘 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이 수군대는 것이 이상하다 했습니다. 저에 대해 무슨 소문이 도는 것입니까?”

“그걸 이제야 궁금해하는 자네도 참. 자네는 자네가 아는 여러 별명으로 불리고 있지만, 한성의 낭자들끼리 도는 애칭이 하나 더 있다네. 홍화정의 음란 서생.”

그러니까 한성에 온 지 석 달 만에 꽃 도령, 학 도령, 두루미 도령도 모자라 홍화정의 음란 서생까지의 별명을 섭렵하게 된 시발점은 결국 홍화정에서 기생 하나를 구하게 된 일이었다.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 지성은 어떤 이에겐 영웅이고 어떤 이에겐 기방을 들락날락하며 매일 밤 온 기생들의 치마 속을 들여다본 음란 서생이 되어있었다. 지성은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람의 선의를 그렇게 곡해하는 것인지.

“아, 그렇군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도 욕정이 동하여 밤마다 아주―아주! 어찌할 바를 모르겠으나 보름 안에 정 영감님의 그림을 완성해야 해서 아주아주 바빠질 예정이니까요!”

지성은 펄쩍 뛰어올라 려운의 손에 들린 종이를 낚아채곤 씩씩대며 작업대 위에 펼쳐 놓고는 발을 쿵쿵 구르며 제 방으로 향했다.

“도령이 화가 많이 났나 보네. 려운, 소문만 듣고 도령을 그렇게……, 어? 그새 또 어딜 간 거야?”

 

*

 

“송구하옵니다, 어르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먹물을 뒤집어쓰기라도 한 듯 검은 의복을 입은 이가 한 사내의 앞에 엎드렸다. 사내가 어르신이라 부른 이는 김이훈. 지금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

흑의의 사내가 조용히 고개를 들자 이훈은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네 시선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는다. 너는 지금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은 것이냐?”

“송구합니다.”

이훈은 기분이 상했는지 그대로 종이를 구겨 화로에 던졌다. 그는 그러더니 언제 짜증을 냈냐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래, 청영아. 뭐라고?”

“어르신께서 보낸 살수 둘을 도련님께서 처리하셨습니다.”

“하하하! 그래야 내 아드님답지. 좋다. 어차피 그 두 놈은 이번 임무 때 하고 다닌 꼬락서니가 성에 차지 않아 없애려 생각했었거든. 잘된 일이지.”

호탕하게 웃는 이훈에게 청영은 더 할 말이 남은 듯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할 말이 있으면 해라. 우물쭈물하지 말고.”

“그것이, 도련님께서 그 둘을 처리하기 전에 웬 화공 하나가 지나가다 둘에게 붙들려 있었습니다.”

“화공?”

“알아보니 류와 함께 화방에서 지낸다 합니다. 한데 그가 검을 쓸 줄 알더군요. 검술이 조금 특이했습니다.”

“검술? 정녕 화공이 맞더냐?”

“예.”

“그것은 흥미롭군. 그에 대해 알아보거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청영이 물러갔다. 종이는 어느새 삽시간에 타버리고 검은 재만 남겼다. 이훈이 제 턱밑을 만지작거렸다.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은 그의 눈에는 욕망이 가득 차 있었다.

 

*

 

지성은 작업대 위에 물감과 벼루, 연적, 붓 따위를 내려놓고는 앉았다. 여전히 화가 난 듯 미간에 잔뜩 힘을 주고 앉은 그의 얼굴을 본 류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도령.”

“허리 펴십시오. 잘못한 분은 따로 있는데 어찌 선배님이 안절부절못하십니까?”

“응…….”

“눈치도 보지 마십시오. 대신 사과도 변명도 하실 필요 없습니다.”

“알겠네. 한데 어찌 그릴 요량인가?”

“우리 화방에 들어온 의뢰가 아닌 겁니까? 저는 선배님도 함께 그리시는 줄 알았는데요.”

“아닐세. 정 영감님이 의뢰한 것은 화방이 아니라 도령이거든.”

자네가 그린 인물화가 워낙에 빼어나지 않은가. 류의 말에 지성은 제 볼을 긁적였다. 류는 지성의 머리칼을 수건으로 슬슬 닦아주었다. 두 사람 모두 이런 일이 꽤 익숙해 보였다.

“얼굴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기, 부인을 관찰하고 그려 놓은 것도 있고요.”

실은 정 영감이 이번에 맡긴 그림은 다가오는 봄, 부인의 생일 선물로 줄 것이었다. 그가 화방의 단골 의뢰인이기는 했으나 평소 까다롭고 예민한 성미를 보아서는 제 부인에게 줄 선물을 의뢰하리라고는 두 사람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류는 지성이 펼친 그림을 보았다. 빠르게 그린 듯 간결한 선이었으나 부드럽고 섬세했다.

“약속했던 시일은 이월 말일이고 부인의 생신은 삼월 초. 딱 매화가 필 즘이니 만개한 매화를 그려 넣을 겁니다. 정 영감님과 부인 두 분께서 모두 매화를 좋아하시니까요. 다행히 종이는 구해졌고 시간은 넉넉하니 여유롭게 그릴 수 있겠……,”

에취! 말을 끝내기도 전에 터진 재채기에 류가 걱정스럽게 지성을 바라보았다.

“벌써 고뿔이 든 것 아닌가?”

“그럴 리가요.”

“자네 말대로 시간도 많이 남았는데 오늘은 차라리 쉬지 그래?”

“아닙니다. 목욕하는 동안에 부인의 손끝에 어떤 색을 쓸지까지 정해놨는걸요. 지금 해야 합니다.”

그럴 거면 여유롭게 그릴 수 있겠다는 말이나 하지 말 것이지. 툴툴거리는 자신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지성의 모습에 류는 한숨을 쉬었다. 지성은 그림 의뢰가 들어오면 기한을 얼마나 주든 상관없이 빠르게 그려냈다. 어떤 그림은 하루 만에 그려내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림의 질이 떨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짧은 시간, 그의 그림은 제 체력으로 먹을 빚고 제 혼으로 채료를 만들어 종이 위로 설색設色해내는 것만 같았다. 이 고집을 어찌 꺾을 텐가. 류는 그저 하던 대로 머리카락이나 말려줄 뿐이었다.

“그냥 두셔도 되는데…….”

“새삼스레 뭘 그러나? 내가 말려주지 않으면 수건으로 대충 둘둘 감고 있을 거면서.”

“매번 귀찮으실 텐데요.”

“어렸을 적 누이에게 자주 해주어 그 생각나고 괜찮네. 그리고 다른 때 같으면 몰라도 이번에는 절대 거절하지 말게. 난 그 그림은 그릴 자신이 없으이.”

하긴 평소에도 류는 정 영감의 그림 의뢰는 되도록 피하고 싶어 했다. 바쁜 그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문중의 어른인 정 영감님이 글공부를 도와주셨는데 아무래도 꽤 엄하게 수업을 하신 모양이었다. 소름이 돋은 듯 으으― 하는 제 선배의 손길에서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했다.

지성은 조용히 웃고는 분채 물감이 든 단지들을 열었다. 화사한 색감이 정 영감의 부인과 아주 잘 어울렸다. 그의 이름은 강정희. 바를 정正 자에 빛날 희熙 자를 썼다. 그는 꽤 나이가 들었음에도 여전히 고운 사람이었다. 단순히 외모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강한 사람 같았어. 양반가에서 나고 자라 틀에 짜인 삶을 사는 줄로만 알았는데.’

지성은 물감을 적신 붓을 종이 위로 내렸다. 그는 예전에 저잣거리에서 본 정희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그 누구보다 합리적이고 분별력이 뛰어난 사람 같았다. 그러다 마당극이 열리자 그는 이끌리듯 사람들 속에 뒤섞였다.

‘목소리는 힘이 있었고 눈빛이 맑은 분이셨지. 겨울이었는데도 봄이 온 것 같았어. 그런 활력을 그림에 담으려면…….’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지성의 붓질은 거침이 없었다.

류는 깜빡 졸다 지성의 재채기 소리에 깨어났다. 지성의 머리를 말려주는 도중에 저도 모르는 사이 잠이 든 것이어서 팔이 조금 아팠다. 해가 저물어가는지 주홍빛 볕이 창가로 들었다. 류는 지성의 작업대 위로 눈을 돌렸다. 그는 감탄을 마지않았다. 지성의 밑그림은 벌써 마무리 단계였다.

“한데 도령이 그렸던 그림은 정면이지 않았나?”

“받는 분이 정 영감님이었다면 시선을 정면으로 하여 그림을 보는 이와 눈을 맞추듯이 그리는 것도 좋을 테지만, 받는 분이 부인이잖습니까. 본인과 눈이 마주치는 것은 조금 부담스러울 수 있지요. 정 영감님이 선물하시는 것이니 그 시선에서 부인의 모습을 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지성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그림 그리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가 붓을 드는 동안에는 말을 걸기조차 힘들었으므로, 류로서는 어찌하여 그렇게 무리하여 그림을 그리는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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