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제

[설제]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협객 4

동양풍 BL. 오리지널 스핀오프. 자유연재.

DILLO by 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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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지가 소개한 약방은 그들이 머물던 마을을 벗어난 장소에 있었다.

걸어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멀리 나와 도착한 곳은 번듯하게 조성된 마을이었다. 건물이며 길이며 생긴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보통 이런 걸 약방이라고 부르나?”

별로 크지도 않은 고을에 심지어 중심지에서 멀리 있는 약방이라 하기에 자그마하고 허름하며 손때탄 흔적이 있는 장소를 떠올렸던 제헌은 예상과 전혀 다른 모습에 조금 당황했다. 괜찮다고는 해도 조금 큰 규모의 시전 정도를 생각했는데 그런 수준이 전혀 아니었으니까.

“유명 의각 정도는 되는 거 아니야?”

제헌이 끝을 찾으려면 제법 목을 길게 빼야할 것 같은 담장을 따라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잘보면 인근에 나름대로 번화가 같은 게 형성된 것도 이 약방이라는 것에 기대서 생긴 듯한 느낌이었다. 

소지가 히히 웃었다.

“여기가 약방 맞아요. 외부 분들은 다들 놀라시더라고요.”

소지가 열려있는 문 안으로 쏙 들어가자 뒤에 남은 제헌이 설을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했지만 딱히 다른 말을 나누지는 않았다. 결국 두 사람도 소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에서도 사람이 붐볐다. 일하는 사람도 많고 손님도 많은 듯했다. 

“저 사람들은 의원 아냐?”

자주 와봤는지 거침없이 길을 안내하는 소지에게 제헌이 묻자 소지도 그쪽을 슥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의원 맞아요.”

“약방이라며?”

제헌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 다시 물으니 소지가 당연한 걸 물으니 굳이 설명해준다는 듯 대답했다.

“약방인데 의원 나리들도 있어요. 원랜 그냥 약방이었는데 이것저것 많이 생겼거든요.”

“그러면 약방이 아니게 된 거 아니야?”

“원래 약방이니까요. 아, 저기 계신다. 약방 어른!”

여기서 일하는 듯한 사람과 대화 중이던 남자 하나가 소지의 부름에 돌아보았다. 

약방 어른이라 부르는 걸 보면 여기 주인인 듯한데, 이번에도 제헌의 예상과는 좀 달랐다. 나이 지긋한 노부를 생각했는데 중년 정도 나이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주 젊은 연령은 아니긴 했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희끗한 흰머리가 있는 게 보기보다 좀 더 나이 들어 보이는 느낌이었다. 제헌은 저 약방 어른이라는 남자가 흰머리가 일찍 나서 노숙해 보이는 오해를 사는 건지 아니면 나이보다 얼굴이 팽팽한 건지 궁금해졌다.

중년 남자 앞으로 쪼르르 달려간 소지가 느긋하게 뒤따라 걸음을 옮기는 제헌과 설을 향해 삿대질했다.

“정팔 아저씨가 보낸 사람들 데려왔어요.”

“소지, 네가 사람들 안내하느라 매번 고생이다. 그래도 접지른 건 이제 괜찮아 보이는구나.”

“네! 멀쩡해요.”

장원의 푸른 사철나무 아래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퍽 익숙해 보였다. 소지란 녀석이 넉살이 좋기도 했지만 애초에 자주 보는 사이 같았다.

흑운랑인지 정팔인지 하는 이가 부탁한 물건을 소지에게 그냥 맡기는 경우도 많다 했으니 그런 이유로 안면을 텄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반대로, 소지가 이곳을 알고 있었으니 쉽게 맡긴 걸 수도 있고.

소지가 두 사람을 소개했다.

“약방 어른, 여기 정팔 아저씨 부탁으로 온 분들이에요.”

머리가 희끗한 남자가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부족하게나마 약방을 책임지고 있는 이율이라 합니다.”

말을 나누니 더욱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적어도 제헌이나 설보단 나이가 많은 게 확실했으므로 제헌이 공손함을 장착했다. 적당한 미소를 더하면 효과가 좋다.

“저는 제헌이고 이쪽은 일행인 설입니다. 산을 지나던 중에 부탁을 받아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장원이 아주 멋지군요. 제가 지내던 동네 약방과는 퍽 다릅니다.”

제헌이 제법 운치 있게 조성한 사철나무를 흘끗 보았다. 약방이라는 곳의 규모도 놀랍지만 그보단 내부를 제대로 관리하는 티가 났다. 멋드러진 사철나무를 배경으로 소지가 약방 어른이라 부른 중년쯤 되어 보이는 이가 온화한 낯으로 인사를 받았다.

“저희 약방을 찾으시는 분들도 좀 더 편하게 들렀으면 해서 장원에도 투자를 하는 편입니다. 좋게 봐주시니 감사한 마음일 뿐이죠. 그나저나 정팔 형님께서 보내셨다니, 한동안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반가운 손님이셨군요. 형님께선 잘 지내시던가요?”

제헌은 날다람쥐처럼 산을 타던 흑운랑- 아니 정팔의 모습을 떠올렸다.

“건강해 보였죠……. 그런데 약방 어른께서는 정팔이라는 분과 잘 아는 사이십니까?”

“제가 이곳에 정착하는데 도움을 많이 주셨습니다. 연고도 없는 제가 약방을 시작하고 괜찮은 거래를 할 수 있었던 건 형님이 아니었다면 어려웠을 겁니다.”

“어려울 때 도운 사람이었군요?”

“그렇습니다.”

옆에서 소지가 끼어들었다.

“처음 약방을 열었을 때 약초꾼도 소개해주고 그랬대요. 맞죠?”

“그래. 그랬지.”

이율이 소지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옛날 생각을 이어가는지 표정이 곧 흐려졌다.

“정팔 형님도 참 안 됐어요. 집으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오래도록 그리운 이를 만날 수 없이 멀리서 애태우며 살아야 하니 겉으로는 씩씩해도 마음이 편하지 않겠지요.”

제헌은 그런 이율을 짧게 응시했다. 하지만 시선을 눈치 챈 설이 제헌을 흘끗 보았을 때는 이미 눈길을 거둔 뒤였다. 

이율은 그저 옛 기억을 떠올리는 듯했다. 회상을 연민으로 마무리한 이율은 가볍게 혀를 차고는 사람을 불러 소지가 들고 있던 약초 꾸러미를 받았다.

“값은 마씨에게서 받으시면 됩니다. 정팔 형님이 종종 다른 물건도 맡기는데 마찬가지로 마씨에게 맡기면 알아서 할 겁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으니 섭섭지 않게 하라 이르겠습니다.”

“한 일이 없어 답례를 받기에도 면구하네요.”

“그럴 리가요. 덕분에 형님께 큰 위안이 되었을 겁니다.”

제헌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선행을 하셨으니 복이 따르겠지요. 두 분의 여정이 무탈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설은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인사를 마쳤다. 정팔이 맡긴 꾸러미를 든 일꾼이 마씨라는 이에게 안내했다.

“마 할멈한텐 제가 데려다 드릴게요. 아저씨는 일 보세요.”

소지는 길을 아는지 거의 앞장서서 갈 기세더니만 아예 안내하던 이를 돌려보냈다. 들어온 길이 아닌 다른 쪽으로 들어가는지라 제헌이 주위를 구경하며 두리번거렸다.

제헌이 보기엔 조금 전에 구경한 시장보다 여기가 훨씬 활기가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주위를 보니 환자만 있는 게 아니라 이곳에서 일하거나 약초 따위를 거래하며 오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실제로 시장보다 소란스럽지는 않았지만 환자들만 아니라면 약방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상단 같은 느낌이지 않은가.

그런 인상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짙어졌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도 갔겠다, 제헌이 소지에게 편히 물었다.

“약방 어른께서 꽤 인덕이 있나 봐? 아주 활기차네.”

제헌의 말에 소지가 심드렁히 답했다.

“돈 없는 사람들은 거의 공짜로 봐주기도 하니까 좋은 곳이긴 하죠.”

“너 같은 꼬맹이 말이지? 그 개똥같은 지배인이 있는 곳보단 여기가 더 낫겠네. 약방 주인이란 사람이랑 안면도 있어 보이던데 차라리 여기서 일거리를 찾아보지 그랬어?”

제헌이 흘긋 살폈지만 소지의 옆얼굴에선 별다른 동요를 찾을 수 없었다.

"약방 어른이야 사람 좋아보이지만, 사실 저기 뒤를 봐주는 사람들은 좀 구리거든요. 게다가 아무나 일할 수 있는 곳도 아니고요. 그리고 지금 일하는 데면 나쁘지 않으니까요."

"별일도 아닌 걸로 맞으면 나쁜 거지."

"뭐 그건 별로긴 해요."

아무렇지 않게 말한 소지가 주위를 둘러보곤 목소리를 좀 낮추어 이어 말했다.

“약방과 마주한 곳에 큰 건물이 야화객잔이라고, 강 건너에 흑단 표국에서 관리하는 곳이에요. 거기랑 약방도 관련되었다는 얘기가 있어요. 뭐 그냥 소문이긴 한데……. 뒤에서 봐주는 사람이 없으면 이렇게 큰 약방이 어떻게 지금처럼 평화롭겠어요?”

그도 맞는 말이긴 했다. 하지만 제헌의 생각으론 이런 규모 장원을 포함한 곳을 그냥 약방이라고 부르는 부분이 더 이상했다. 물론 약방에서 환자 상태를 살피고 치료도 하는 거야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긴 했지만 말이다.

들어오면서 보기에도 규모가 상당했는데 안쪽으로 공간이 더 있었다. 제헌은 설이 뒤에서 오는 걸 확인하며 소지를 따라갔다.

“그럼 그 표국이랑 연결이라도 해달라지 그래? 잡무 볼 사람이 필요할 수도 있잖아. 키만 좀 더 크면 쟁자수로 일할 수도 있는 일이고.”

“그쪽은 진짜로 험한 일을 하는 곳이라 제 명에 못 죽을 걸요? 거기 소문이 구려요. 마 할멈! 나 왔어!”

소지가 쪼르르 달려간 방향에는 입구에서 본 것과 다른 종류의 좀 더 작은 사철나무가 있었고 그 옆에 놓인 의자에 조그만 노파가 앉아서 장죽을 물고 있었다.

“방금 불 붙였는데 아무튼 쉴 틈을 안 준다니까.”

“약방 어른이 그거 피우지 말랬는데.”

“내 맘이야. 그 양반이 창고 앞에서 피우지 말라고 해서 여기서 피우잖냐. 대체 무슨 일이기에 예까지 사람들을 달고 왔어?”

서목태 같은 눈이 까맣게 반짝이며 두 사람을 보았다. 설이 슬그머니 제헌의 뒤에 붙었다. 제헌이 힐끗 설을 돌아보았지만 늘어트린 천에 가려 딱히 보이는 게 없었다.

그러는 사이 소지가 다시 받아든 꾸러미를 들어올렸다.

“정팔 아저씨가 보냈어.”

“그 인간도 어지간하이. 이거 들고 그거 이리 줘봐라.”

소지가 멀뚱멀뚱 장죽 걸이 역할을 하는 동안 마씨가 꾸러미에 들어있던 걸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하는 양이 묘하게 태가 나는 게 모르고 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제헌은 정팔이 준 꾸러미에 담긴 것 중에 몇 가지 알아보는 정도였다. 마씨가 쳐준 금액을 별 대거리 없이 받아든 제헌이 소지의 안내를 받아 약방에서 나갔다. 이번에도 또 들어올 때랑 다른 길이었다.

구중궁궐도 아니고 생각보다 더 넓고 복잡한 구조였다. 이렇게 큰 약방이 이런 작은 동네에 들어서는 것부터 어렵지만 만약 들어선다고 해도 운영이 쉽진 않을 터였다.

뒤가 구린 놈들이 뒷배라는데, 그놈들이 자선사업을 할 리는 없으니 여러모로 수상쩍은 약방이었다.

제헌은 마지막으로 약방의 현판을 돌아본 뒤에 그곳을 떠났다. 지나치게 수상한 냄새가 풀풀 풍겨서 오히려 알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약방을 나서며 보니 과연 제법 으리으리한 객잔이 눈에 들어왔다. 제헌이 게슴츠레 객잔을 보다 턱을 긁적였다.

“이 마을 규모에서 감당할만한 수준은 아닌 듯한데?”

약방에 이어 객잔도 수상하다니! 게다가 둘이 연관까지 있다 하니 이 정도면 오히려 손대면 안 될 것 같았다. 본능이 경고를 보냈다.

“가장 윗층은 중앙이 비어있는 듯해요.”

죽립에 천까지 뒤집어 쓰고서 어찌 봤는지 설이 하는 말에 제헌도 슬쩍 살폈다. 열린 창 너머로 바로 벽이 보이긴 했다.

“그냥 공간을 잘게 나눴을 수도 있지.”

황급히 뒤따라 나온 소지가 두 사람이 보는 방향을 보더니 대뜸 영업 문구를 읊었다.

“이 주변에서 제일 좋은 객잔입니다. 야화객잔을 구경하려 먼곳에서 오는 분들도 있어요. 특히나 하늘이 보이는 중앙의 좋은 자리에 앉으려면 운도 있어야 하거든요. 다른 곳엔 없는 명물이죠.”

지나치게 매끄럽게 나오는 소개 문구에 제헌이 의심스럽다는 듯 소지를 내려다 보았다.

“너 혹시 저기서도 일하냐?”

“그럴 리가요. 원체 유명하고 좋은 데긴 한데,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소문이 좀 찝찝해서요.”

소지가 말한 소문이라면 흑단표국이라는 곳과 연관 있고 거기가 위험하다는 얘기인 듯했다. 제헌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아까부터 원하면 당장에라도 저기서 일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한다?”

소지는 헤헤 웃고 말았다. 제헌도 픽 웃었다.

제헌이 야화객잔을 올려다보았다. 겉보기엔 4층 높이까지 보이긴 했지만 길을 지나는 이들에게 보이기 위해 실제 맨 윗층은 길을 따라서만 폭이 좁게 만들어두어서 실질적으론 3층까지라고 봐야했다.

화려해 보이려 일부러 그리 만들었으니 말하자면 꼼수다. 저 지붕 아래에 저것 외에 또 어떤 것들이 숨겨져 있으려나?

제헌은 야화객잔 지붕 너머 색이 물들어가는 하늘을 잠시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시간도 이리 됐으니 저녁은 저기서 먹자. 내부 구경도 할겸. 이왕이면 좋은 자리에 앉아 보자고.”

“저, 이런 말은 송구한데 이 시간엔 자리를 잡기가 어려울 걸요?”

“원래 운은 돈으로 사는 거란다.”

소지의 시선이 아까부터 조용히 있던 설을 향해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늘어트린 천 사이로 표정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빙긋 미소짓는 듯했다.

“당신을 위한 특별한 자리가 있는지 알아볼까요?”

“그냥 좀 가자, 제발.”

제헌은 나긋하다 못해 살살거리는 말이 소름돋는다는 듯 몸서리를 치며 등에 불을 밝히기 시작한 객잔으로 들어섰다. 

결론적으로 운은 돈으로 살 수 있었다. 


이번편은 이전에 공개하지 않은 분량입니다. 펜슬에 업로드하는 김에 새로운 내용도 올려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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