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제]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협객 3
동양풍 BL. 오리지널 스핀오프. 백업. 수정본.
낯선 손님들이 속닥거리는 게 퍽 수상했다. 소지가 반사적으로 긴장하는데 마침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지배인이 뭐라고 해뒀는지 설이 잔을 하나 더 가져다 달라고 하자 날듯이 가져왔다. 잔이 하나 더 놓이고 기름지고 비싸보이는 음식이 푸짐하게 차려진 뒤 문이 닫혔다.
“많이 시켰으니 너도 먹어라.”
제헌이 다호를 보는 차에 설이 다호에 손을 뻗었다. 말하지 않아도 척척이었다. 비록 제헌이 시킬 생각이 없기는 했지만 말이다. 제헌은 조금 묘한 표정으로 설이 차를 따르는 걸 바라보았다.
희고 곧은 손이 찻잔을 소년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그러나 향긋한 쟈스민 향이 음식 냄새에 눌리 듯 소지의 관심은 온통 음식 쪽으로 쏠려있었다. 번쩍 들었던 경계심도 잊혀졌다.
“감사합니다.”
소지는 눈치를 살피다 제헌과 설이 모두 식사를 시작하자 자신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제헌도 나름대로 깔끔하게 먹었지만 설은 얼굴을 가린 치렁한 천자락을 걷지도 않은 채로 잘도 먹었다.
소지는 처음엔 눈치보며 깨작거리다가 금방 눈을 빛내며 와구와구 음식들을 입으로 밀어넣었다. 어느정도 배를 채우고 나자 술기운이 날아간 듯했다. 소지는 열심히 먹으면서도 흘끗거리며 두 사람을 살폈다.
설은 다른 얘기는 꺼내지 않고 제헌의 시중을 들듯 살뜰히 챙기기만 했다. 소지가 설을 보고 기루에서 일하는 이를 떠올린 것도 영 근거없지는 않았다. 덩치와 다르게 아주 우아한데 기색에 꾸밈이 있고 제헌의 시중을 드는 게 아주 자연스러워 보인 때문이다.
시중을 받는데 익숙한지 설의 행동에 딱히 신경쓰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음식을 깨작거린 제헌은 제 일행이 입가를 닦아주는 걸 성가시다는 듯 대충 밀어치운 뒤 차로 입을 씻으며 소지가 먹는 걸 구경했다.
그쯤 되니 소지도 지배인에게 설이 말한 이유가 그냥 변명이라는 걸 확실하게 알았다. 이들은 딱히 시중 들 사람이 필요하지 않은 듯했다. 게다가 소지가 설이라는 묘한 사람보다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지배인을 대하던 걸 보면 설이란 장신의 사내가 귀하신 몸인 것 같은데, 그런 설이 제헌의 시중을 드는 걸 보면 제헌이란 남자가 더 높은 사람인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제헌을 따로 보자면 그냥 곱게 큰 도련님이지 그렇게 귀하신 분인지는…….
속으로 이상한 손님들을 살피고 평하면서도 소지의 손과 입은 바쁘게 음식을 집어 먹었다. 만약 이 손님들이 나쁜 사람들이라고 해도 일단은 먹어두는 게 남는 일이었으니까.
와구와구 식사하는 소지를 물끄러미 보던 제헌이 슬슬 지루한 기색을 보이더니만 음식에 정신 팔린 소지의 배를 검지 끝으로 쿡 찔렀다.
“조금만 더 먹으면 터지겠다. 쪼그만 게 열심히도 먹네.”
“아깝잖아요. 맛있는데…….”
“맛있다고?”
“네!”
제헌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맛있는 걸 못 먹어봤구나.”
어쩐지 헛헛한 표정이 된 제헌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곤 맞은편에 앉은 제 일행을 흘겨보았는데, 그 시선을 받은 설은 그냥 묵묵했다.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뭐라 말할 순 없었지만 어쩐지 웃는 낯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을 가린 천 너머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배를 띄운 뒤에는 쉬어갈 곳이 있어요. 거기까지 가면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식탁 위에 놓인 제 손으로 슬그머니 다가오던 설의 손등을 제헌이 찰싹 쳐냈다. 그래도 기분은 좀 풀린 듯했다. 입에 든 걸 우물거리며 두 사람을 물끄러미 보던 소지가 입을 뗐다.
“그런데 손님분들은 왜 이렇게 다니세요? 귀하신 분들 같은데 시종이나… 하인도 없이 다녀요?”
제헌이 피식 웃었다.
“얘나 나나 개털이라 그런 거 없어. 보통 사람들은 시종 같은 거 없이 잘 다니잖아? 우리는 평범한 양민이라고.”
정말이지 평범한 양민 같지는 않은 말이었다. 소지는 더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동시에 무척 궁금해지기도 했다.
강에 배를 띄운다면 꽤 멀리 가겠다는 소리다. 척 보기에도 곱게 크고 편히 살아온 이들 같은데 위험과 고생을 각오하면서까지 어디로, 왜 떠나려는지 의문이었다. 죄를 지어 야반도주라도 하는 걸까?
“이쪽에 볼일이 있어요? 아니면 어디 가시는 중이세요?”
“오래 머물진 않을 거야.”
소지는 돈 아까운줄 모르는 손님들의 변덕이 계속되는 동안 그들 옆에 붙어서 콩고물을 주워먹으리란 다짐을 굳혔다. 어차피 오래 머물지도 않는다 했으니 그동안은 그들의 동정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솔직히 행색부터 전부 의심스러운 사람들이기는 했지만, 굳이 자신 같은 사람을 노리거나 할 이유도 없고 말이다. 소지는 자신이 범죄 표적으로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소지가 더는 위에 음식을 밀어넣는 것도 못할 정도로 잔뜩 먹은 뒤에 식사가 끝났다. 수상한 손님들은 미리 셈을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내일 아침에 찾아 와라.”
“예. 걱정마세요.”
“걱정 안 해.”
다음날 아침에서도 조금 이른 시간에 소지가 손님들이 머무는 방을 찾았다. 혹시나 그대로 도망갔다 할까 봐 부러 이른 시간이었다. 물론 지배인이 시킨 일이다.
지배인은 은자를 낸 손님들이 죽으라면 진짜 죽으라는 식이라 내심 불만을 느꼈지만 소지는 그걸 대놓고 드러내진 않았다. 속으로만 욕했다.
하지만 지배인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손님들이 하는 얘기나 별난 점이 있으면 일러바치라고 하기도 했다. 하여간 귀찮은 놈이다.
방 앞에 서서 귀를 기울여 보니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그런지 안에서 들리는 인기척은 없었다. 일부러 그리 크지 않은 소리로 고했다.
“소지입니다.”
아직 자는 것 같은데 그만 돌아갈까 하던 소지는 호기심에 문틈을 벌려 슬쩍 안을 들여다 보았다. 새벽 어스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지만 실내는 아직 캄캄하게 잠들어 있었다. 당연하게도 별다른 게 없었다.
훔쳐 보는 게 걸려서 좋을 건 없으니 그만 물러나려던 소지가 멈칫했다. 새어드는 박명이 옅게 깔린 어둠과 뒤섞인 곳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방금 그게 뭐였지?
의아하게 안을 좀 더 보던 소지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나기 무섭게 소리도 없이 문이 반쯤 열렸다. 시야를 가리는 시커먼 어둠에 고개를 든 소지가 눈을 홉떴다.
여명이 밝아오는 바깥과 달리 어둑한 실내에서도 확연하게 눈에 들어오는 은은한 달빛이 유백색 옥돌 위를 폭포수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인간의 몸이라기 보다는 산수화같은 광경이었다.
소지가 보는 앞에서 느긋하게 허리끈을 묶은 설이 나긋하게 검지를 세워들어 입술 앞에 대었다. 침묵을 요구하는 손짓이었지만 흐리고 창백한 빛만이 새어드는 새벽에도 선명한 설의 푸른 눈동자에 소지는 휘둥그레 뜬 눈으로 질문을 참지 못했다.
“서쪽에서 오셨습니까?”
물에 젖은 약돌처럼 반짝거리는 소지의 시선을 내려다 보며 설이 손을 천천히 내린 뒤에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몸을 닦을 수 있도록 걸러서 끓인 물과 천을 준비해서 한 시진 후에 오거라.”
끓인 물 값으로 소지의 손에 동전을 떨어트린 설이 문을 닫았다.
한 시진 후에 준비한 것을 받은 설이 물건만 들이고 다시 문을 닫았다. 수고했다는 인사는 아니어도 동전이라도 떨어질 줄 알았는데 떨어진 게 없었다. 새벽에 받은 건 땔감을 써 끓인 물을 받아오느라 본전이었다.
큰 돈은 잘 써도 사소한 치하는 없는 사람이라면 소지에겐 아쉬운 일이다.
소지는 닫힌 문 앞에서 멀뚱히 기다리며 자기 처지를 생각했다. 당연히 뾰족한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아침부터 물이 든 대야를 옮기느라 힘들긴 했지만 그 외에는 딱히 할 게 없었다. 설이라는 색목인의 태도를 보건대 앞으로도 소지가 실제로 시중을 들 일이 없을 듯했다.
꽤 지루했다. 그래도 일이 많은 것보다는 없은 편이 낫기는 했다. 어제는 기분이 풀린 지배인이 먹을 걸 싸가라고 해서 주방에서 평소보다 넉넉하게 얻어갈 수 있었다.
다만 원래 이러는 것인지 아니면 혹시나 지배인이 손님들에 관해 보고 들은 걸 전하라고 한 걸 알고 일부러 따돌리는 건지 신경 쓰였다. 혹은 새벽에 소지가 살펴보려고 한 것 때문에 저러는 걸 수도 있고. 색목인인 걸 들켜서 저러나?
소지는 한족 사이에서 확연히 다른 색을 한 자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사실 내심 반가웠다. 동지애까지는 아니어도 그쪽에서도 조금은 반가운 마음일 줄 알았는데 더 차가운 태도인 건 하찮은 이와 비슷한 취급을 받기 싫어서 그런 걸지도…….
귀한 사람들 시중 드는 일에 관해 소지가 아는 바가 전혀 없으니 판단할 기준도 없었다. 소지랑 공통점이 있다는 게 불쾌한 걸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이유일 수도 있었다.
물론 소지 입장에서야 상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저쪽에서 거리를 두면 주머니 넉넉한 손님들에게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받아먹기 힘들 테니 그게 좀 마음이 쓰였다.
한참 후에 제헌이 문을 벌컥 열고 나오다 앞에서 기다리는 소지를 보고는 거의 비명 지르기 직전까지 갔다가 멈췄다.
“뭐야? 왜 여깄어?”
“시중 들라면서요.”
“아… 깜짝 놀랐네. 계속 거기 있었냐?”
보아하니 아침에 낑낑대며 물이 든 대야를 들고 온 소지의 고생을 전혀 몰랐던 게 틀림 없었다. 그러면 뭐 대야가 제 발로 걸어서 계단을 오르기라도 했을 거라 생각했나?
속으로 투덜거린 소지가 설을 힐끗 보았다. 설은 어제 저녁처럼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린 차림이었다. 지금 태도만 보면 오늘 새벽 소지에게 모습을 보인 걸 크게 신경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아예 소지 자체에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다.
소지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밝은 색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나름대로 공손하게 대답했다.
“세숫물 가져오고 여기서 있었죠.”
“아.”
아무래도 정말로 대야에 발이 달린줄 알았던가 보다. 지금 입고 있는 있어보이는 남색 장포 차림도 그렇고 소지는 제헌이 제법 사는 집에서 귀하게 살았으리라는 추측에 확신을 더했다.
아무도 감추지 않은 대야의 비밀을 뒤늦게 알아차린 제헌이 계면쩍은지 괜히 멀쩡한 옷차림을 한 번 매만진 뒤에 소지에게 말했다.
“꼬맹아, 동네 길은 좀 알지?”
“당연하죠. 제가 사는 동네인데요.”
“안내 해 봐. 구경 좀 다니자.”
“제가 공자님들을 확실하게 모시겠습니다. 저만 믿으십쇼.”
그렇게까지 재밌을 건 아닌데 소지가 굽신거리는 걸 보고 제헌이 와하하 웃었다.
호언장담하긴 했지만 딱히 관광지는 아닌지라 크게 보러다닐 건 없었다. 있다 해도 제헌이 많이 걷기 싫다고 먼 곳은 다 퇴짜 놓는 바람에 정말로 그냥 산책 정도로 그쳤다.
그나마 작은 길을 따라 시장 거리가 있어 소지가 안내했다. 제헌이 노점에서 파는 잡동사니를 구경하며 다니고 설이 그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제헌이 물건을 고르면 자연스럽게 설이 값을 치르고 구입한 걸 들고 따르는 걸 보면 설이 하인인 것 같은데 설의 태도 자체는 전혀 하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소지는 이들의 관계가 무엇인지 볼 수록 헷갈리는 기분이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시전이나 노점에서 자잘한 물건을 구경하던 제헌이 소지에게 말했다.
“약방으로 가자.”
처음부터 그들이 산에서 채취한 약초 따위가 든 꾸러미를 챙겨 나왔기 때문에 소지도 자연스럽게 안내할 수 있었다.
“거기 아마 그렇게 비싼 건 안 들어있을 거예요.”
돈 쓰는데 머뭇거리는 기색이 없는 손님들의 금전 감각으로 혹시나 기대했다가 약방에 가서 실망할까 봐 소지가 슬쩍 선수쳐서 말해놓았다. 그래도 뜨내기라 속여먹진 않을 곳으로 각별히 안내하겠노라 입도 털었다.
제헌이 심드렁히 말했다.
“군자는 모름지기 신의를 아는 법이다. 약조를 했으면 지켜야지.”
그깟 돈 따위가 아니라 약속을 지키려는 의도라는 제헌의 말에 소지는 여기 군자가 어디 있느냔 말을 눈치껏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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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완을 쓰게 하고 싶으니 나중에 써야겠어요.
이번까지는 백업이고 다음편부턴 새로 쓴 내용입니다.
펜슬에 업로드하기 전에 살짝 수정했더니 갑자기 저장한게 날아갔어요. 깜짝 놀랐네요. 다행히 복구해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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