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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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PS 기반 창작 겜벨


* 신청자 분의 1차 BL 설정을 기반으로 오리지널 게임 설정을 덧씌웠습니다.

* 리네이밍하지 않은 인명, 설정은 전부 저의 창작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기회를 준 적이 없어. 그러나, 하나 간과한 게 있지. 뛰는 심장만큼은 우리의 것이야. 멈출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 최정상에 설 때까지, 신민들이여. 목숨을 바쳐라. 그대들의 심장을 딛고 이 제국을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천년왕국으로 만들테니…

 

 


 

 

“슬황 진짜 씹간지네.”

 

이윤하가 껌을 씹으며 말했다. 지금 ‘렛츠 트레이서즈’ 멤버들이 보고 있는 것은 신규 플레이어블 캐릭터, ‘슬레이어’의 소개 영상이다. 주인공 포지션 캐릭터인 ‘엘리엇’의 원수고, 악당 조직 ‘테란 엠파이어’의 황제였…나? 게임 설정은 잘 모르니까 패스, 패스. 중요한 건 저놈의 성능이다. 기본 장비는 한 방 한 방이 강력하지만 발사 속도와 재장전이 어중간한 리볼버, 주요 운영 방식은 제국 친위대를 이용한 화력 보조. 서포터도 아니고 딜러도 아니고 그런 주제에 에임빨은 엄청 탈 것 같다.

 

“뚜벅이라 근접도 별로겠네. 얘 하느니 그냥 엘리엇 함.”

“딜은 쎄다. 하긴 그거라도 쎄야지. CC도 애매한데.”

“심해도 얘는 안 할 것 같애. 넘 애매함.”

“그래도 디자인은 잘 뽑았다.”

 

껌을 휴지에 뱉어 곱게 싼 뒤 휴지통에 던져 넣는다. 근데 저 영상 보니까 왜 이렇게 기분이 묘하지? 뭐 이상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이렇게 말하자니 좀 웃기지만, 이윤하는 감이 좋았다. 프로로 5년 밥 빌어먹고 살면서 전략이나 정도가 아닌 감으로 때려맞춰 오더하고 이긴 경험도 몇 번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반대 경우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커뮤니티에서 별명이 좋은 의미로나 나쁜 의미로나 ‘윤갈량’인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기 일은 아닐 것 같은데 뭐 어떤가? 에라, 모르겠다. 연습이나 해야지. 애초에 그의 포지션은 ‘슬레이어’가 속한 딜러도 아니다. 탱커지.

 

 


 

 

시뮬라르크가 런칭되고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렛츠 트레이서즈’는 예전만큼 잘 나가지는 않지만 이윤하는 여전히 주장이고, 여전히 리그 흥행을 이끄는 선수다. 반면 일반인 천상계로 이름 높았던 Fantasy는…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특별히 말도 채팅도 하지 않는 그의 성향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너무 좋았던 것 같다. 성격 나쁜 고의 트롤러, 핵쟁이와 게임 하기 싫다는 사람들…어느 순간부터 그는 시뮬라르크 세상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자리를 대체할 사람은 많다.

쓸쓸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것이 인터넷 세상이니까.

 

포지션은 다르지만, 그 중 Innovation이라는 서포터가 있다.

 

피드백 및 기록, 취미로 스트리머를 시작한 유저였다. 태도도 좋고 게임 센스도 출중하여 금방 천상계로 올라왔다. Fantasy의 플레이를 보고 시뮬라르크를 시작했다, Fantasy 덕분에 이렇게 열심히 할 수 있었다고 말할 정도로 Fantasy를 좋아했지만, Fantasy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에 그는 조금 쓸쓸함을 느끼는 듯했다.

 

그리고 그 날도 평소와 다르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다들 이하~ 방송 시작했습니다!”

‘이하~’

‘이노 오빠 하이’

‘이노 형 ㅎㅇㅎㅇ’

‘경 쟁 해 경 쟁 해 나 죽 어’

“아, 채팅 속도…다들 오늘도 와주셔서 감사해요. 음, ‘경학이의삐까키친’님 2만원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벌써 2만원…오늘 신캐 나와서 켜봤어요. 제가 그거 할 건 아니지만 남들이 엄청 하겠죠?”

 

이노의 ‘신캐’ 이야기에 채팅창이 또 한바탕 난리가 났다.

 

‘아ㅋㅋ슬 때문에 진짜 미치겠음’

‘저 에메랄드인데 슬레이어 볼 때마다 토나옴’

‘뭐래↑브론즈일지도’

‘신캐충 역대급인 것 같아요 이노횽도 조심해…’

“아 괜찮아요. 캐릭터 나온지 하루도 안 됐잖아. 원래 신캐 첫 날에는 각오하고 경쟁 가는 거야. 싫으면 게임 쉬어야죠, 하하.”

 

오늘은 누구 부르지 않고 일단 솔랭 해볼게요. 그 말에 채팅창은 랭킹 점수의 명복을 비는 말이 우수수 쏟아진다. 아무리 그래도 전담 탱커나 하야부사 랭커 한 명은 데려가는 게 좋지 않겠냐. 이노는 그저 허허 웃을 뿐이었다. 솔직히 말해, 지원가 유저는 늘 무시당한다. 은근히 자존심이 센 – 그걸 드러내지는 않지만 – 이노로서는, 이런 때야말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언제나와 같이 Fantasy의 영상을 키며 매칭을 기다린다. 천상계의 매칭 대기는 기본 10분 이상을 소요한다. 그 사이 Fantasy의 영상을 보며 시청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이노 방송의 소소한 컨텐츠다. 너무 길어지면 메일로 받은 저랭크 시청자의 플레이 영상 피드백을 진행하기도 하고…그러다 어떤 시청자가 지금 보고 있는 Fantasy의 플레이의 어떤 점이 좋았냐, 이런 질문이라도 하면 제대로 호랑이의 꼬리를 밟은 꼴이 되는 거다. 그때의 이노는 멈출 수 없다. 일사천리로 이 영상의 매력을 알아봐주었냐며 좋아한다. 왜 그런 말을 꺼냈냐! 우수수 올라오는 원망의 채팅에도 아랑곳않고 이노는 말한다. 또 말한다. 그의 팔불출 같은 자랑을 멈추게 한 것은 시뮬의 매칭 완료 음성이었다.

 

“…아무튼, 그렇다니까요. 일단 매칭 완료 누르고, 아군 조합 좀 볼게요.”

‘이노에게 그분 이야기를 하면 맨날 이런다고’

‘어 맞아맞아 놀랍지만 그건 사실이야’

‘아 진짜 슬레이어 칼픽 보소;;’

‘천년왕국ㅠㅠ(팀원 심장으로 세움)’

 

6명의 팀원 중 확정 픽은 딜러 슬레이어와 엘리엇, 탱커 신위, 이러면 메인 탱커 하나와 힐러 두 명이 빈다. 슬레이어는 서브 딜러, 엘리엇은 사거리가 짧은 암살자. 신위는 진영 붕괴에 특화된 딜탱…탱커와 힐러 두 명이 필요하다. 이카루가 할게요. 그렇게 말하자 한 유저가 말했다. 그럼 저 시나토요. 이걸로 힐러 두 명은 정해졌다. 메인 힐러 시나토, 서브 힐러 이카루가. 남은 한 명은 말없이 같은 딜탱인 페르마를 고른다.

 

(홍팀 vs 백팀)

탱커 페르마 / 신위 vs 트리니티 / 카이트

딜러 슬레이어 / 엘리엇 vs 밀그램 / 하야부사

힐러 시나토 / 이카루가 vs 셰이디 / 아미타

 

현재 메타에서 핫한 픽이라면 단연코 신위와 셰이디, 이카루가. 신위는 런칭 초기에 등장한 캐릭터지만 시뮬 최상 판정의 돌격기와 걸출한 범위의 군중제어 결전기의 시너지가 하도 좋아 ‘리워크 아니면 국밥’이라고 타 서브탱커 유저들에게 원성을 들을 정도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기본 제공 실드 외의는 피해 감소가 없다는 건데, 이것을 커버하는 것이 지난 시즌의 뜨거운 감자였던 이카루가다.

 

이카루가라 하면 지난 시즌 런칭된 ‘서브테러 생츄어리’의 신 캐릭터. 같은 진영의 캐릭터인 하야부사의 숨겨진 형으로, 진중하고 자존감이 낮은 동생과 달리 유쾌하고 능글맞은 인물이다. (그래서 여성 유저들이 성우의 열연까지 더해서 많이 좋아했다나 뭐라나) 성능적으로는 ‘힐러’하면 떠오르는 ‘직접적인 회복’이 아닌 ‘피해를 맞지 않도록 보호’하는 특이한 지원 방식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서브 힐러로서 완벽한 강점을 가지고 있어 프로 리그에서도 능력을 검증받아 널리 쓰이게 된다.

 

즉, HPS가 부족하더라도 유틸리티를 앞세운 픽이 요즘 대세라는 것. 그만큼 힐의 총량, 힐을 줄 대상이 제한되니 딜러는 각자도생이 가능한 캐릭터를 기용하게 된다. 그 대표주자가 육각형 딜러 밀그램과 생존기가 다양한 엘리엇. 고로 두 팀의 픽은 매우 정석적이고, 변수가 있다면 양쪽의 딜러 – 슬레이어와 하야부사일까.

 

‘하야부사가 신들려서 다 짜르거나’

‘슬레이어가 칼같이 봉쇄하거나’

‘근데 둘 다 충챔이라 모르겠음ㅋㅋㅋ’

 

하야부사는 시뮬 유일의 캐리형 근접 암살자, 슬레이어는 안티캐리형 서브 딜러로 연구되는 뚜벅이. 1대1 상성만 보면 하야부사가 유리하지만, 팀 한타에서 힘을 못 쓰는 하야부사가 슬레이어의 느리지만 강력한 CC에 당하고 그대로 집중포화를 당하는 구도가 나온다면 이노의 팀이 유리하다. 하지만, 슬레이어 유저의 닉네임은…

 

<슬레이어>

밤색다람쥐

(무국적)

‘누구지.’

 

천상계 랭크 뛰면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다. 아무리 그래도 건너건너 알게 되는 게 천상계 매칭이라…아니야, 그래도 팀을 믿어 보자. 채팅창 내에서 아군 슬레이어에 대한 불신이 끓어오르자, 결심한 이노가 목소리를 내었다.

 

“자자, 다른 분들에 대한 비방 좀만 자제해주시고요. 타 스트리머나 타 선수 언급도 자제해주실게요. 너무 심하면 일시 밴합니다~”

 

일단 해 봐야 아는 거지.

 

게임 시작, Let it Fire!

 

 


 

 

게임을 좋아했다. 그리고 원래 그런 걸 좋아했다.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세상을 배경으로, 파쿠르를 하고 화려하게 총기를 난사하는 캐릭터들의 액션, 그 뒤에서 오가는 어두운 거래, 그런데도 꺾이지 않고 자신만의 정의를 사수하려는 인물들이 있다.

 

B는 시뮬라르크라는 세계 속에 심취해 있었다. 예를 들어, 하야부사를 픽하면 그 순간만큼은 ‘누구보다도 악을 미워하며 범인 검거를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서브테러 생츄어리 제1의 수사관이 될 수 있다. 엘리엇을 픽하면 그 순간만큼은 ‘자기 나라의 자유를 꿈꾸며 위험과 협잡 뿐인 세계에 발을 내딛은’ 율도 스테이션의 하나뿐인 기장이 될 수 있다. 운 좋게도 피지컬 뇌지컬 다 받쳐주는 플레이어였다. 조용히 이 세계에 빠져들고 싶었다. 이입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소통이 필요한 포지션보다 혼자 잘 하면 되는 딜러 포지션에 집중했다. 악의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러면 되는 줄 알았던 것이다. 그걸로 충분하다 여겼던 것이다.

, <화제의 인물 Fantasy, 저도 만났습니다>, , <하야부사의 정석, Fantasy로 알려주마!> 그런 영상이 유투브를 열 바퀴 반 돌아도 B는 신경쓰지 않았다. Fantasy는 언제든 끄고 킬 수 있는 스위치처럼 느껴졌다.

 

언제부터였을까, 사람들의 관심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아, 뭐야. Fantasy잖아. 남자의 목소리다. 죄송한데, 그거 본인 실력 아니시잖아요. 여자의 목소리다.

 

‘내가 왜 핵쟁이랑 게임을 해야 하냐. 진짜 진 빠지네. 닷지 합니다.’

‘밀그램 결전 보고 합법핵 합법핵 그렇게 부른다지만, 기본 총까지 그렇게 맞춰요? 환장하겠네. 그냥 님은 평소에도 핵 쓰고 다니는 거죠?’

‘이윤하 방송 봤음. 하야부사가 어케 저렇게 죽이냐?’

‘저런 새끼는 게임을 하면 안 돼. 세탁하고 프로 하면 X같을 듯.’

‘니가 닷지 해라. 닷지 안 하면 던진다. 난 핵쟁이랑 겜하기 싫어.’

 

어떻게 증명해야 하는가.

그 생각보다, 어떻게 도망쳐야 하는가.

 

그래서 그만뒀다. 지나가는 것조차 금방이었다.

 

 


 

 

30초 경과. 거점 쟁탈은 일진일퇴, 퍼스트 킬은 아직이다. 각 팀의 메인 탱커인 페르마와 트리니티가 1선에서 방벽을 치고, 밀그램과 슬레이어는 간간히 포킹, 자잘한 생채기는 힐러가 제깍 복구하는 상황. 엘리엇과 하야부사는 주변을 돌며 각을 보고 있다. 채팅창은 ‘엘리엇이 셰이디를 자르면~’, ‘하야부사가 이카루가를 자르면~’같은 입시뮬이 한창이지만 이카루가를 잡은 이노가 보기에 이 게임의 키는 딜러에게 있지 않다.

 

“원, 투, 쓰리, 얏호~”

“핫!”

‘아…!’

 

아군 페르마가 너무 앞에 나와있다. 그에 따라 사거리가 짧은 슬레이어는 엄폐 지역을 벗어나 활지로 나가야 했고, 아군의 1/3이 움직임에 따라 메인 힐러인 시나토 역시 움직여야 했다. 필연히 벌어지는 간격을 놓치지 않은 상대 카이트와 하야부사가 사이를 파고든다.

 

이동기도 없는 딜러에게 암살자 하나, 서브 탱커 하나.

 

페르마와 신위가 뒤를 돌기엔 늦었고, 시나토가 끼자니 같이 물린다. 엘리엇은 차라리 상대를 무는 게 낫다고 생각했는지 이미 후방 포지션을 잡고 있다. 이노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간다. 이 상황에서 최선의 플레이는 무엇인가? 슬레이어는 버리고, 엘리엇에게 붙는다?

 

“친위대, 앞으로!”

 

‘?’

‘뭐임?’

‘아니 X발’

 

“하야부사의 돌진기는 속도가 빠른 대신 판정이 좁다. 옆으로 피할 수 있다면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친한 스트리머의 말에 이노는 이렇게 대답했더랬다.

 

“근데 그거 입시뮬이잖아.”

그러자 그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어, 맞아. 입시뮬이다.

사람 반속이 그렇게 빠르면 개나소나 프로하지.

 

‘근데 내가 왜 그 입시뮬을 눈 앞에서 보고 있지?’

 

당연히 슬레이어가 탱커 쪽으로 붙을 거라고 생각했던 하야부사는 아군 탱커 쪽으로 조금 빗겨 돌진기를 사용했다. 그걸 예상한 슬레이어는 일부로 반대쪽을 향해 이동하여 그걸 피했다. 그리고 미리 넉백 판정이 달린 스킬을 깔아 하야부사를 아군 탱커 쪽으로 밀어낸다. 사격을 하며 천천히 걸어오던 카이트 역시 판정이 널널한 넉백기에 맞고 페르마, 신위가 있는 곳으로 날아간다. 날아가는 사이 슬레이어의 데미지 배율이 비정상적인 리볼버까지 맞았으니 빈사 상태고, 그걸 신위의 스킬로 마무리.

 

어그로가 완전히 슬레이어에게 끌렸으니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던 시나토는 힐에 집중할 수 있었고, 카이트에 의한 피해는 이걸로 중화할 수 있었다. 이러는 사이 엘리엇은 세이디와 아미타를 따는 쾌거를 이뤘고, 4명이 넉다운을 당했으니 거점은 순식간에 먹혀 1라운드 홍팀의 승리. 다음 라운드도 그 다음 라운드도 ‘밤색다람쥐’의 완벽한 캐리.

 

‘프로리그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랬으면 슬레이어 주의보 떨어졌을테니까…’

 

이 말만이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2년만이었다. 시뮬라르크의 화면.

화려한 신규 캐릭터 예고 영상과 군가를 어레인지한 로그인 음악.

 

‘드디어 슬레이어가 실장됐구나…’

 

단순한 변덕이다. 유투브 알고리즘이란 변덕스러운 것이라, 가끔 알 수 없는 영상을 띄워주기도 한다. B가 시뮬라르크 플레이 영상을 접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였다. Innovation이라는 저 유저, 자신과 포지션은 다르지만 요즘 잘 나가는 스트리머인 모양이다. 썸네일만 봤으면 지나쳤겠지만 B의 동체시력은 그 제목을 놓치지 않았다.

 

‘[편집자 CUT] Innovation님의 Fantasy 사랑은 멈추지 않아~’

 

내가 잘못 봤나. 게임 접은지가 언젠데…혹시나 하는 마음에 영상을 봤다. 사실 별 내용 없었다. Innovation이라는 스트리머는 길고 긴 천상계 매칭 사이사이에 주로 자신의 과거 플레이를 돌려본다. 그리고 매칭되면 게임을 한다. 아미타는 율도 스테이션 소속의 캐릭터로, B가 플레이하던 시절에도 있던 캐릭터였다. 그 포텐셜을 이만큼 끌어내는 걸 보면 상당한 실력의 소유자다. B의 두 눈이 바쁘게 움직인다.

 

…정신을 차려보니 시뮬라르크 로그인 화면이다.

 

‘잠깐 정도면 괜찮겠지…’

 

B가 가볍게 숨을 내쉰다. 키보드와 마우스가 바쁘게 움직였다. 승리, 승리, 승리, 승리! 이전 주력 캐릭터였던 밀그램과 라멘트는 일부로 손대지 않고 하야부사와 엘리엇 같은 극한의 원맨 캐리 지향형 캐릭터를 픽한다. 오랫동안 접었으니 어디까지 통하나 보고 싶어서였다.

 

‘이 정도인가…’

얼마나 연승을 한 건지…친구 추가 요청이 우수수 쏟아지고(전부 거절했다), 귓속말로 욕도 쏟아지고(전부 차단했다), 정말 답이 없는 몇몇 판 빼고 일방적인 B의 학살이었다. 골드에 배정되어 순식간에 에메랄드, 다이아…뭐, 꾸준히 하면 레전드 복귀도 가능할까. 잊어버리려고 노력을 했는데도 여전히 손과 감각은 시뮬라르크를 잊지 못했나보다.

 

그날 이후로 B는 퇴근하고 집, PC방에 들러 시뮬라르크를 했다. 역시 다이아부터는 억지로 캐리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그만큼 게임이 재미있었다. 순조롭게 마스터에 올라갔고, 약간의 고생 끝에 레전드를 달았다. 워낙 조용하고 빠르게 일어난 일이었기에, 그리고 B가 채팅도 보이스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천상계를 체크하는 스트리머들도 어떤 프로게이머의 비밀 연습 계정이겠거니, 하고 넘어갔다.

 

그런 상황에서 B가 이노를 만난 것이다.

 

 


 

 

“친위대, 앞으로!”

“즉결심판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군. 섬멸하라!”

 

‘…저거 핵 아님?’

 

처음에는 작은 의문이었다. 이윤하는 ‘그 단어’가 나오자마자 작은 한숨을 흘린다. 닥치고 있으면 떡밥 식겠지, 뭐. 단순하게 생각하려고 했지만 트수들 생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핵 이야기를 하는 놈이 한 놈, 두 놈, 늘더니 순식간에 채팅창이 그 이야기뿐이다.

 

‘에임핵 아냐?’

‘저런 애가 있는데 연습생으로 안 끌려가?’

‘윤하형~ 형은 어케 생각해?’

 

“…여기서 페르마 안 가져가면 바보겠지?”

 

식은땀이 흐른다. 이윤하는 정말, 정말, 저 핵 유저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단순히 프로게이머라서 그런 건 아니다.

 

‘읽씹 지린다’

‘상대 슬레이어 에임 좀 보라고’

‘윤이딱 윤이딱 신나는 노래 나도 한 번 불러보자’

“아니, 거기서 ‘이윤하는 2등이 딱이야’가 왜 나오냐?”

 

차라리 윤이딱 이야기나 해라. 속으로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드래프트 픽 기다리는 동안 방송 매니저들에게 도와달라고 카톡을 했다. 야, 핵 이야기하는 놈들 싹 다 어떻게 좀…근데 무슨 구실로 쫓아내죠? 그렇게 말하니 정말 답이 없네. 이윤하의 안 좋은 예감이 적중했다면, 이쪽 판이 ‘또’ 한바탕 시끄러워질 것이다.

 

한편 B는 PC방에서 연승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손에 잘 맞는데? 밀그램 이후로 인생 픽을 찾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원래도 히트스캔 무기를 선호했는데, 슬레이어의 리볼버는 정확히 맞출 수만 있다면 게임 내 최고의 데미지 밸류를 자랑했다. 그걸 끌어내는 것은 어디까지나 게이머의 눈과 손, 그리고 센스…괜히 뿌듯해지는 B였다.

 

“여러분, 이하~ 오늘은 사람 많네요? 무슨 일 있었나. 아, ‘커피콜라그리고캔따개의미학을아시나요’님? 닉네임 재밌네요. 2만 원 감사~ 바로 경쟁전 가볼게요. 매칭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머리 아픈 이윤하.

아무것도 모르는 이노.

마냥 기분 좋은 B.

 

‘GAME SET!’

- 매칭되었습니다 -

 

각자 다른 생각과 사정에 골몰하는 세 사람이 같은 판에서 만났다.

한 명은 홍팀, 두 명은 백팀.

 

‘이놈의 천상계. 매칭되면 보는 놈이 다 거기서 거기라 X같다, 진짜.’

이것은 TracerZ_’PRIMA’, 홍팀 이윤하의 생각.

 

‘저번에 봤던 그 슬레이어야. 어쩌면, 저 사람…Fantasy?’

이것은 Innovation, 백팀 이노의 생각.

 

‘이번에도 슬레이어를 할 수 있을까…슬레이어 하는 거 티 많이 낸 것 같은데. 그래도 슬레이어를 뺏어가는 건 상대로서 손해겠지?’

이것은 밤색다람쥐, 백팀 B의 생각.

 

주사위는 던져졌다.

 

 


 

 

사람은 자기가 정의롭다고 생각할 때 가장 위험하다. 너 아니면 주장 없다, 주장이나 할 정도면 다 컸다. 그래봤자 20대 초반 아닌가? 이윤하는 이제부터 팀의 주장이 되라는 말을 들었을 때, 하룻밤을 뜬눈으로 꼬박 새웠다. 그래도 나는 스물한 살, 쟤네는 미성년자. 그러니까 뭐라도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나아가서는 이 판을 지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게임에 미친 백수일 뿐이다. 시뮬라르크 프로리그가 승부 조작이나 핵 같은 시시한 이유로 망하게 두지는 않는다. Fantasy는 그 의무감에 걸려 넘어진 운 나쁜 녀석이었다.

 

“이거 핵이야.”

“진짜?”

“하야부사 저렇게 못 해. 나도 못 해. 애초에 탱커 포지션이니까 할 일이 없긴 한데, 아무튼 저거 핵이야. 저런 놈은 게임 하면 안 돼.”

 

Fantasy에 대한 여론이 급격히 나빠진 건 그때부터였다. 이윤하가 생각 없이 흘린 한마디로부터. 리그 탑급 프로게이머가 봤을 때 핵이니까 저놈은 핵쟁이. 사람은 자기가 정의롭다고 생각할 때 가장 위험하다. 그럼 자기가 뭘 해도 그게 정의로운 줄 알거든.

 

‘내가 왜 핵쟁이랑 게임을 해야 하냐. 진짜 진 빠지네. 닷지 합니다.’

‘밀그램 결전 보고 합법핵 합법핵 그렇게 부른다지만, 기본 총까지 그렇게 맞춰요? 환장하겠네. 그냥 님은 평소에도 핵 쓰고 다니는 거죠?’

‘이윤하 방송 봤음. 하야부사가 어케 저렇게 죽이냐?’

‘저런 새끼는 게임을 하면 안 돼. 세탁하고 프로 하면 X같을 듯.’

‘니가 닷지 해라. 닷지 안 하면 던진다. 난 핵쟁이랑 겜하기 싫어.’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가.

그 생각보다, 어떻게 도망쳐야 하는가.

 

그래서 침묵했다. 잠잠해지기까지 금방이었다. 2년이 지났다. 그가 생각 없이 저지른 죄의 증거가 턱밑까지 다다른 이 순간.

 

[팀] TracerZ_’PRIMA : 나 신위 함

[팀] TracerZ_’PRIMA : 잘하자

극도로 단순 무식한 방법이 하나 있다. 악성 핵 유저인든 Fantasy든, ‘밤색다람쥐’가 포커스를 못 받을 정도로 찢어발기면 그만 아닌가. 프로와 일반인은 왜 다른가. 다를 이유가 있으니까 다른 것이다. 스트리밍 중 프로는 자신의 역량을 100% 발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윤하는 이번 판에 뭐가 됐든 200% 발휘하기로 결심했다. ‘프로리그의 명품 조연’, ‘리그 제일의 신위’. 그가 작정하고 흔들면 어떤 딜러도 집중 못 할 것이다.

 

‘유치하지만 어쩔 수 없지.’

 

또한 졸렬하지만, 그것 역시 어쩔 수 없지.

 

“필승! 제국을~ 위하여~ 하하.”

“명심해라. 시뮬라르크도 전쟁이다.”

 

예상대로, 백팀의 마지막 픽은 메인 힐러 셰이디와 서브 딜러 슬레이어. 셰이디야 요즘 핫한 힐러고, 슬레이어는 밤색다람쥐의 시그니처 픽이니 당연하다. 저 셰이디는 Innovation라는 스트리머였던가. 게임 시작 선언 – Let it Fire!와 함께 이윤하의 신위가 누구보다도 빨리 거점을 향해 뛰쳐나간다. 역시 게임 최강 판정의 돌격기를 가진 캐릭터다.

 

(홍팀 vs 백팀)

탱커 트리니티 / 신위(이윤하) vs 페르마 / 수오미

딜러 밀그램 / 애쉬레이 vs 히로익마니아 / 슬레이어(B)

힐러 아미타 / 이카루가 vs 셰이디(이노) / 마에스트로

 

TAP키를 눌러 전적 창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메인 탱커로 언제나 무난한 페르마를 뺏긴 건 아쉽지만, 육각형 딜러 밀그램에 괜찮은 실력의 이카루가가 있으니, 유지력은 괜찮다. 상대 메인 조합은 셰로익. 제공권과 조합만 보장되면 미쳐 날뛰는 히로익마니아에게 전담 힐러 셰이디, 원거리 강화제를 투여하는 마에스트로를 붙여 믿어보겠다는 건가. 이 조합을 카운터치기 위해 홍팀은 히로익마니아의 하드 카운터, 저격수 애쉬레이를 마지막으로 골랐다. 그러니 그건 애쉬레이를 믿고 배제한다. 무는 건 슬레이어 뿐. 어느 쪽의 신뢰가 더 강한지의 싸움이다.

 

한편 그로부터 조금 전,

백팀 채팅창에서는…

 

[팀] 밤색다람쥐 (슬레이어) : 님들

[팀] 밤색다람쥐 (슬레이어) : 잠만요

 

‘?’

 

밤색다람쥐가 처음으로 채팅을 쳤다. 그것만으로 이노의 가슴이 울렁거린다. 그 사람 바로 옆에서 게임을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아니, 아니지. 지금 스트리밍 중이니까 정신 차려야지. 이노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아, 이분 말도 할 줄 아네요~’ 어색하게 멘트를 쳤다.

 

[팀] 밤색다람쥐 (슬레이어) : 힐러 히마님만 봐주세요

[팀] 밤색다람쥐 (슬레이어) : 수오미님만 있으면 됨

[팀] 밤색다람쥐 (슬레이어) : 신위 저만 볼 듯 들어오는 거 쳐내고 히마 프리딜하면 이겨요

 

확실히 백팀의 조합은 유명한 히마 랭커, 히마의 희망, 히마의 천재 ‘참새엄마비둘기’를 중심으로 한 히마왕자 조합이 맞다. 신위는 슬레이어를 볼 거라는 판단도 틀린 건 아니다. 그런데 1선에서 시야 틀 탱커 하나를 빼서 슬레이어 ‘따위’에게 붙여주라고?

 

‘아니, 슬레이어를 고른 입장에서 양심 없이 나불대?’

 

…극단적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는 마에스트로가 있었다. 자기에게 붙으라는 말을 들은 수오미도 ‘어…’라고 떨떠름한 한숨을 흘린다. 웬만하면 들어 보자고 하는 천상계라지만 평소 팀원이랑 소통 안 한다는 ‘밤색다람쥐’가 한다는 말이 다짜고짜 명령질이라니 그건 좀 별로였다.

 

[팀] C00L“ALL0UT!” (페르마) : 양심 없음? 그럼 슬레이어 고르면 안 되지. 얼마나 잘하는진 몰라도 픽하는 것 자체만으로 좀 그렇거든요.

 

백팀 유저 쿨 올 아웃(약칭 쿨올아)는 욕은 안 해도 비꼬면서 말꼬리 잡고 늘어지는 걸로 유명한 유저였다. 툴툴대는 성격 탓에 프로 데뷔도 못 했다나 뭐라나. 그러나 이번에는, 그의 말에 몇 명이 동조하는 듯하다. ‘밤색다람쥐’는 마이크를 켜지 않았다. 그냥 채팅으로 ‘그런가요’, 치고 말았을 뿐. 이노는 쿨올아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 이상 Fantasy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으면 했다.

 

“쿨올아님, 이번 라운드만 해보죠.”

 

그가 Fantasy가 아니라도 좋으니까,

 

“진다고 진짜 죽는 거 아니잖아요. 지면 저 리폿하셔도 되고.”

 

이 순간, 시답잖은 이유로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내 이론이 맞다는 걸 증명하겠어.”

“반드시 지킨다! 내 명예를 걸고”

“믿음직한 히어로의 등장이시다!”

“어차피 쓰다 버릴 말일 뿐이야…”

“그분의 뜻에 따라, 인류에 영광을. 큭큭…”

“우리 함께 전장의 멜로디를 바꿔볼까요?”

 

Let it Fire!

신호가 떨어지자, 백팀의 캐릭터가 일제히 리스폰 구역에서 뛰쳐나왔다. 셰이디를 고른 이노가 슬레이어의 상황을 한 번 체크하고, 회복 메커니즘을 이어야 할 히마의 뒤를 쫓는다. 히마 하나로 천상계까지 올라온 ‘참새엄마비둘기’는 원챔 유저였다. 그거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지만, 할 수 있다면 어마어마한 밸류를 뽑아내는 소위 ‘장인’.

 

“비상!”

 

히마가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거점에 신위요, 빠르네. 촉새 같은 히마의 보이스가 경쾌하게 귀에 때려 박힌다. 누구 찾는 것 같은데?

 

“누구?”

 

쿨올아가 말했다.

 

“몰라. 일단 페르마가 가봐요.”

“완벽한 수식, 완벽한 방어!”

 

쿨올아의 페르마가 수식 방벽을 전개하며 거점을 향한다. 수오미는 공중의 히마에게 방벽을 전개한 뒤 바로 슬레이어에게 붙는다. 슬레이어는 최대한 애쉬레이의 눈에 띄지 않으려는 건지 엄폐물에 숨어가며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회복 메커니즘을 히마에게 전개한 셰이디는 시야를 보는 것 이외에 할 게 없었다. 마에스트로는 페르마에게 붙었고…

 

“샤디, 인류에 영광을…”

“폐하, 제 이름은 셰이디에요.”

 

슬레이어와 셰이디. 두 캐릭터가 스쳐 지나가자 상호작용 대사가 출력된다. 이노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것도 잠시, 신위다. 신위는 페르마와 마에스트로는 안중에도 없다는 것처럼 빠르게 슬레이어게로 붙는다. 수오미는 군중 제어 스킬이 없다. 방벽을 활용하고, 데미지를 흡수하고, 그 데미지를 역으로 방출하는 형태의 탱커다. 군중 제어의 달인인 신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반면 슬레이어의 군중 제어는 느렸다.

 

“친위대, 앞-”

“나약하군.”

 

신위의 주먹이 슬레이어를 강타한다. 슬레이어가 엄폐물 사이로 삼은 것이 되려 히마의 엄호사격을 방해한다. 어쩔 수 없이 그쪽은 배제하고, 페르마가 마킹하는 구역을 공격한다. 누굴 버리고 구하느냐를 빠르게 결정하느냐도 랭커의 조건이다. 그러나…

 

“버러지 같은 것.”

 

신위, 슬레이어 컷.

밀그램, 수오미 컷

애쉬레이, 히로익마니아 컷.

 

순식간에 3연살.

 

마냥 당하고만 있던 건 아니라 히마가 이카루가를 몸통 직격 폭발로 날려버리기는 했다. 그러나 3데스 대 1데스는 차원이 다르다.

 

“쟤네 리스폰 맞출 때까지 좀만 농성하죠.”

“네, 저 힐팩 먹고 바로 올게요.”

 

쿨올아와 마에스트로가 말했다. 이노 역시 슬레이어와 히마가 죽은 김에 잠시 페르마에게 붙었다. 다른 신위와는 보고 파고드는 각 자체가 다르다. 저래서야 마치 하야부사 아닌가…슬레이어가 가장 먼저 리스폰되었다. 수오미, 히로익마니아는 조금 뒤였다. 열을 맞춰 달려와 복귀한다. 상대는 힐러와 힐팩으로 벌써 전선을 복구했다.

 

“이카루가도 이쯤 됐음 왔겠다.”

“애쉬레이부터 어케 해야 함. 쟤가 히마 보니까 답이 없네.”

 

[팀] 밤색다람쥐 (슬레이어) : 애쉬 제가 짜르고 올게요

 

“아니, 아까부터 왜 저래. 저 양반.”

 

쿨올아가 투덜거렸다.

 

“…님이 뚜벅뚜벅 걸어가면 걘 와이퍼로 튈 듯? 아니다. 답 없으니까 그냥 가세요. 쓸모도 없으니까 그냥 가시고요.”

“그래도 근접전 슬레이어가 세잖아요. 믿어보죠.”

 

이노의 말에 쿨올아는 툴툴거리면서도 다시 방벽을 전개했다. 슬레이어는 혼자서 뒤를 돌고, 히마는 대놓고 눈에 띄지 않으면서 포킹만 쏘는 상황. 그러자 이윤하는 혼란스러웠다. 아니, 슬레이어 이 새끼 어디로 갔지? 이번 판은 게임 접고 싶을 정도로 슬레이어만 털어야 했는데.

 

“어.”

“왜요?”

“즉결심판이다.”

 

슬레이어, 애쉬레이 컷.

 

순식간이었다. 리볼버로 헤드에 한 방. 아니, 미친. 하야부사도 아니고 누가 슬레이어 같은 단거리 히트스캔 뚜벅이 딜러로 암살하러 가. 이윤하의 상식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려진 맵의 구조에 따르면 이미 슬레이어는 아군에게 합류했을 거고, 이윤하가 버벅댄 순간 히마는 날았을 거고, 제공권을 보장받은 히마야 당연히…

 

“영웅의 유산을 받아라!!!”

 

히로익마니아, 밀그램 컷.

히로익마니아, 아미타 컷.

히로익마니아, 이카루가 컷.

 

미쳐 날뛰지, 당연히. 파일럿도 장인인데…이윤하의 두 번째 단점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한번 말리면 끝없이 말리는 거.

윤이딱이 괜한 말이 아니라는 거.

 

[전체] TracerZ_’PRIMA : GG

 

결과는 홍팀 2, 백팀 3으로 백팀의 승리. ‘밤색다람쥐’는 5연속 슬레이어 픽으로 약간 부진했던 1라운드를 빼면 4라운드 내내 활약했고, 금번의 스포트라이트에 선정되었다. 2년 전 자신의 시그니처 신위를 무참하게 썰어버린 하야부사를 떠올린다. 플레이 스타일은 정반대지만, 파일럿은 분명 똑같을 것이다.

 

‘내가 졌다, Fantasy! 이긴 적도 없지만, 졌다고!’

 

이윤하가 전적창을 보며 속으로 소리쳤다. 후련한 기분이었다. 그조차도 그런데 Fantasy의 팬을 자처하는 이 남자, 이노의 기분은 또 어떻겠는가? ‘밤색다람쥐’의 스포트라이트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보며 감격한다. 이것은 Fantasy다. 또는 Fantasy의 재림이다. 채팅창에서는 끝없이 반복되는 슬레이어의 플레이를 보며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이노는 드물게도,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 완벽한 에임과 카이팅…

 

‘매니저 1 (관리자) : 이노님’

‘매니저 2 (관리자) : 채팅창 어카죠? 큰일남’

‘Innovation (관리자) :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이지. 그러고 보니 아까보다 지나치게 빨라지긴 했다. 이노는 살짝 속도를 늦춰 시청자들의 반응을 살핀다. 믿을 수 없는 반응이었다.

 

‘저 새끼 핵이야.’

‘사람 에임이 저렇게 똑 떨어질 수가 있냐고’

‘이노횽 좋아할 때가 아님. 저거 잘하는 게 아니라니까?’

 

이노의 손이 파르르 떨려온다. 한편 같은 시간, 같은 판에서 플레이 한 이윤하의 방송 채팅창도 다르지는 않았다.

 

‘예전에 핵쟁이 있었잖아. 걔 복귀한 거 아님!?’

‘닉네임 뭐였냐 그 Fantasy였나 그 새끼’

“타 스트리머 또는 게이머 언급하지 마라, 일시 밴 들어간다~”

‘지금 프로게이머가 핵쟁이 게임하는 거 무시하는 거임?’

‘Innovation이 스포트라이트 돌려보던데 형도 함 보던가’

“오케이, 넌 밴이야. 너도 밴이고, 오늘 칼춤 좀 춰보자. 어?”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B도 안온한 밤을 보내고 있지는 않았다. 몇 번의 고의 트롤과 욕설, 악의로 가득 찬 친구 추가를 받고 나서야 그는 어썰트 넷 아이디 이외의 친구 추가를 받지 않는 옵션과 모르는 사람에게 귓속말이 오는 것을 차단하는 옵션을 사용했다. Fantasy가 떠나고 1년쯤 뒤에 생긴 기능이었다. 그래도 닉네임이 그대로인 이상 게임하기가 힘들었다. 열 판에 세 번은 이상한 사람이 꼬이는 기분. B는 또 막다른 길에 다다른 기분이었다.

 

‘정말…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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