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밤

[BL/낮밤] 6화

내 소원은, 너네 다 집으로 꺼지는 거야.

INTERLUDE by 렌틸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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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주는 더럽기도 더러웠지만 양이 상당했다. 그러나 유이경은 숨 한번 돌리지 않고, 또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그걸 한 번에 마셨다.

강은재를 비롯한 모두가 크게 오르내리는 그의 목울대만 멍청하게 쳐다보았다. 자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 상황을 모르던 테이블에서도 이쪽을 보고는 수다를 멈추었다. 

“뭐야, 뭔데?”

“저 선배가 과대 흑기사 해준다는데.”

“저걸 저렇게 마셔?”

“토 나온다.”

호프집 전체가 작게 수군거렸다. 곧 유이경의 입에서 스테인리스 통이 떨어졌다. 스테인리스 통이 서서히 내려오며 점차 드러나는 표정은 놀라웠다. 눈썹은 살짝 찌푸려져 있었지만 입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혀를 내밀어 입술까지 핥더니 두 손가락으로 혀를 살짝 훑었다. 대체 언제 넣었던 건지, 그의 손가락에 꼬불거리는 털이 잡혀 나왔다. 그는 털을 장난스레 흔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고학번들은 이 기세에 눌려 말이 없어졌다. 그중 한 명이 눈에 띄게 몸을 움찔했다. 유이경은 그를 보며 더욱 진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스테인리스 통을 던지듯이 놔버렸다.

그는 서 있었기 때문에, 꽤 높은 곳에서 자유낙하를 하게 된 가엾은 스테인리스 통은 엄청난 소리를 울리며 테이블을 요란하게 굴렀다. 그러자 통 안에 남은 닭뼈와 약간의 액체가 사방으로 튀겼다.

닭뼈 하나는 직접 폭탄주를 말았던 사람에게 날아갔다. 닭뼈를 맞은 고학번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와, 이 미친 새끼가….”

“흑기사 해줬으니까 소원 빌어야겠다.”

유이경은 강은재가 앉은 의자 바로 뒤에 서 있었다. 강은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스테인리스 통을 내던진 유이경은 두 손으로 강은재가 앉은 의자 등받이를 짚었다. 강은재의 등에 손가락이 살짝 닿았다.

그 은근한 압박감, 유이경이 두르고 들어온 약간 서늘한 공기, 그에게서 나는 특유의 향, 마지막으로 술기운까지. 이 모든 감각이 합쳐지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유이경은 무대에 선 배우처럼 주위를 둘러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방금 역한 술을 마셨다곤 생각할 수 없는 밝은 미소였다. 하지만 강은재는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아니나다를까 유이경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이랬다.

“내 소원은, 너네 다 집으로 꺼지는 거야.”

굳이 따지자면 유이경은 강은재에게 소원을 말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뻔뻔하게 그냥 제 희망사항을 늘어놓았다. 음식물 쓰레기 국물 같은 폭탄주를 웃으며 원샷한 것, 스테인리스 통을 던진 것, 거기다 이런 소원까지 합쳐지자 그의 이미지가 완전히 뒤집혔다.

이런 행동에서 느껴지는 건 ‘멋짐’ 같은 게 아니었다. 웃으며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 유이경은… 학교 생활을 힘들게 하고 싶어서 미친 사람 같았다.

후배 군기를 잡고 싶어서, 선배 대접을 받고 싶어서, 알량한 권력을 휘둘러보고 싶어서 진상을 부리는 사람은 오히려 파악하기 쉽다. 알기 쉬우니 대응할 방법을 결정하기도 쉽다. 그게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방향의 답이라 해도 말이다.

하지만 미친 사람은… 답이 없다. 

“너 유이경이지? 창놈 짓 하다 걸려서 진즉 자퇴한 줄 알았더만. 왜 이제 기어나와서 지랄이야? 너는 옛날부터 분위기 깨는 게 취미더라?”

“기억해주니 감사하네. 근데 너는 나이를 어디로 처먹었길래 폭탄주를 이렇게밖에 못 말아? 촌스럽게.”

“뭐 이 새끼야?”

고학번 중 머리가 짧고 덩치가 제법 큰 사람이 벌떡 일어나더니 테이블 너머에서 손을 뻗어 유이경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여기저기서 저마다 놀라는 소리와 함께 ‘창놈이래’ 따위의 반향이 들렸다.

강은재가 지금까지 유이경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도 고학번의 한 마디에 다 허사가 됐다. 도대체 학교 다닐 때 어땠길래 동기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오지? 하지만 강은재는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바로 일어나 둘을 떼어놓으려 했다.

“선배님, 놓고 말로 하시죠.”

“너나 놓고 앉아, 이 새끼야.”

하지만 강은재는 앉지도, 고학번의 팔을 잡은 손을 떼지도 않았다. 유이경은 테이블 너머로 거의 끌려갈 지경인데도 웃고만 있었다. 

“왜 과대한테 뭐라고 해? 과대가 새우야? 등 다 터지네.”

“와, 진짜 이게 대가리에 총을 맞았나….”

“그래, 대가리에 총을 맞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걸 만들어서 먹일 생각을 하겠어.”

“선배님도 그만 좀 하세요!”

이제는 강은재가 미칠 것 같았다. 결국 유이경에게도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런데 유이경은 딱히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강은재를 한번 보고는 순순히 대답했다.

“알겠어요.”

그는 이렇게 대답하더니 정말로 입을 다물었다. 말린다고 말려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쉽게 진정할 줄은 몰랐다. 강은재는 잠시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아싸로 지낸대도 굳이 같은 과 사람과 트러블을 만들어서 좋을 게 뭘까. 강은재도 아까 고학번들에게 “이건 아닌 것 같다”고 말하긴 했지만, 유이경은 판을 엎다 못해 박살을 내버렸다.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이럴 수 있는 이유는 알 것 같았다. 유이경은 적을 학교에 두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에게 학교는… 취미 생활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의 본업은 어차피 학생이 아니니까. 사람들이 자기를 뭘로 보든 별 상관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유이경은 괜찮다고 해도 강은재는 신경이 쓰였다.

어쨌든 유이경은 깨진 술병을 들고 난동을 부리던 사람도 온순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 고학번 선배는 어쩐지 유이경에게 상대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쩌면 저번처럼 갑자기 입을 맞춰서 상황을 종료시켜 버릴지도…? 

생각이 이런 망상까지 흘러갔을 때였다. 한참 멀리 나간 강은재의 머릿속 상상과는 다르게, 유이경은 멱살을 틀어잡히고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엄지손가락만 펼쳐서 제 등 뒤를 가리켰을 뿐이다. 

유이경이 가리키는 대로 시선을 옮겼더니 몇몇 학생이 이 난장판을 핸드폰으로 찍고 있었다. 까딱하면 어느 커뮤니티에 ‘모 대학교 술자리 가혹행위 현장’ 따위의 제목으로 얼굴 다 나온 영상이 올라올 수도 있는 것이다. 닭뼈를 맞고 벌떡 일어나 유이경의 멱살을 잡았던 고학번은 그걸 보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썅, 뭐 구경 났어?!”

같은 테이블에 있던 다른 선배들도 그제야 한 마디씩 얹었다.

“개총 왔으면 술이나 처먹어라.”

“야, 폰 안 내려?!”

닭뼈를 맞은 고학번은 씩씩거리며 유이경을 내팽개치듯 놓았다. 유이경은 조금 비틀거렸지만 곧 단추가 떨어진 셔츠를 여미며 균형을 잡았다. 놀랍게도 계속 웃는 얼굴이기까지 했다.

더 앉아 있을 수 없게 된 고학번들은 저마다 거칠게 제 짐을 챙기고는 순식간에 우르르 자리를 떴다. 굳이 유이경과 강은재의 어깨를 치고 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선배들이 퇴장하자, 그제서야 참았던 숨을 내뱉듯이 여기저기서 말이 쏟아져 나왔다.

“웬 똥군기래.”

“쪽팔리니까 갔다 보다.”

”앞으로 저 선배들 얼굴 어떻게 보냐.” 

사람들은 방금 일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이경이 증발해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고학번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유이경과 강은재의 눈치를 보며 술만 마셨다.

그때 유이경 앞으로 무언가가 쑥 내밀어졌다.

“저, 선배님. 저 가글 있는데요.”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이주희라는 여학생이 가방을 뒤적이더니 작은 가글을 유이경에게 건넨 것이다. 그녀는 지난번 유이경에게 번호를 물어봤다가 ‘핸드폰 없다’는 소리를 들었던 경영학과의 퀸카였다. 그럼에도 가글을 건넨 행동은 어떤 말보다도 확실한 호의였다. 하지만 유이경은 또 철벽을 쳤다.

“아, 괜찮아요. 지금 갈 거라서.”

“그럼 가지세요.”

이주희는 유이경의 손을 잡아 아예 가글을 쥐여주고는 자기 자리에 다시 털썩 앉았다. 김혜지는 유이경의 소매를 덥석 붙잡았다. 

“선배, 입가심이라도 하고 가세요. 저녁은 드셨어요?”

“음, 아까 그거 먹었더니 배부른데. 그럼 담배만 한 대 피고 올게요.”

유이경은 이쪽을 보지 않는 이주희를 향해 말했다.

“고마워요.”

유이경이 그대로 뒤돌아 걸음을 옮기려 하자 김혜지는 얼른 자기 가방에서 담배를 챙겼다. 최동우도 의자에 스프링이 달린 것처럼 튀어오르며 외쳤다.

“저도 같이 가요!”

강은재도 조금 비틀거리며 유이경의 뒤를 따랐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상관없었다. 유이경이 그냥 성격이 더러운 인간이라 이런 깽판을 쳤을까? 그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쩐지 지금 고맙다고 말하지 않으면 영영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강은재의 직감은 맞았다. 유이경은 가게 문을 나서더니 그대로 다른 길로 가려 했다. 김혜지가 유이경의 트렌치 코트 한쪽 소매를 덥석 붙들었다.

“선배! 담배 핀다 그러시고선 집에 가려고 하셨죠?”

최동우가 다른 쪽 소매를 붙들었다.

“가실 때 가시더라도 담배 핀다는 말씀은 지키십쇼!”

유이경은 후배 둘에게 팔을 하나씩 잡힌 채로 약간 곤란한 듯 웃었다. 약간 뒤늦게 따라나온 강은재는 네 사람 중 유일하게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었다. 도망칠 수 없게 된 유이경에게 이 비흡연자가 말했다.

“선배. 담배 같이 피워요.”

“속은 괜찮으세요?”

김혜지가 담배 연기를 뱉으며 물었다. 이 넷은 지금 호프집 건물 옆쪽 흡연구역에 모여 있었다. 유이경은 매너 좋게도 지포 라이터로 김혜지와 최동우의 담배에 불을 붙여준 뒤에야 자기 담배에 불을 붙였다.

강은재는 건물 벽에 등을 살짝 기대고 쭈그려 앉아 있었다. 폭탄주를 마신 건 유이경인데 이상하게 자신의 속이 안 좋았다. 유이경이 지금 쓴 라이터는 며칠 전 자신이 돌려줬던 지포 라이터였다. 강은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돌려주길 잘했다.’

유이경은 웃으면서 김혜지의 물음에 대답했다.

“뭐, 닭고기 들어가서 그런지 맛은 괜찮던데요.”

이 말을 들은 최동우가 혀를 내밀고 우웩, 하는 표정을 했다. 그러고는 열받는다는 듯이 말을 우다다 쏟아냈다.

“다들 선배 멋있다고 생각할 거예요. 아까 그 새끼들 가만히 놔뒀으면 이상한 왕게임도 했을걸요. 어디서 못된 것만 처 배워가지고.”

김혜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근데 오늘 어떻게 오셨어요? 안 오신다고 하셨잖아요.”

유이경은 이 말을 듣더니 묘한 미소를 지었다. 강은재는 뜨끔했다. 지금이라도 그와 자신이 문자를 나눌 때 바로 옆에 친구들이 딱 달라붙어 있었다고 이실직고를 해야 하나 싶었다. 그때 최동우가 끼어들었다.

“아니, 내가! 숙취해소제 먹으려고 편의점에 가는데! 선배님이 딱 걸어가고 있는 거야. 그래서 막 모시고 왔는데… 이렇게 돼서 죄송해요.”

“후배님이 죄송할 게 뭐 있어요.”

“그래도 덕분에 은재가 덜 찍혔어요. 이 자식 성격상 분명 거기서 ‘선배님, 이건 옳지 않은 문화입니다’ 같은 소리까지 했을걸요. 그 대사를 막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건 강은재가 들어도 맞는 말이었다. 그 말을 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제 고학번들의 머릿속은 말 안 듣는 과대가 아니라 미친 유이경이 점령했을 것이다. 지금쯤 다른 술집에서 신나게 유이경을 씹고 있겠지.

강은재는 어쩐지 등이 점점 벽에 붙으며 몸의 무게중심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술이 올랐다. 지금 말해야 했다.

“…고맙습니다.”

“강은재, 정신이 좀 들어?”

김혜지가 낄낄 웃으며 제 종아리로 강은재를 툭 쳤다. 그런데 강은재는 김혜지가 친 방향대로 넘어지려 했다. 반대쪽에서 최동우가 다리로 그를 받치며 따라 웃었다.

“과대니까 자리마다 인사 다니면서 한 잔씩 했거든요. 야, 여기서 뻗으면 아무도 너 못 업고 간다. 정신 차려.”

“근데 선배님, 진짜 집에 가실 거예요? 쫌만 계시다 가면 안 돼요? 다들 선배님 되게 궁금해 해요.”

“글쎄, 궁금한 건 아까 풀렸을 것 같은데. 내가 이상한 사람이란 거 이제 다 알았겠죠.”

“에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좀 이상해도 잘생겼으면 다 되는 건데, 선배님은 잘생김. 그럼 됨.”

“맞아요. 아, 근데요 선배님, 시계 구경해도 돼요? 그거 제 드림 시계예요.”

김혜지와 최동우가 유이경과 제대로 대화를 나누는 건 이번이 처음일 텐데, 셋은 원래부터 아는 사이처럼 대화가 잘 통했다. 강은재 혼자 말이 없었다. 그는 아까 들은 얘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창놈 짓 하다 걸려서 진즉 자퇴한 줄 알았다’는 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애써 지키려 했던 유이경의 이미지가 그 자식들이 뱉은 말 한마디에 다 망하지 않았는가…. 강은재는 괜히 옆에 있던 돌을 주워 앞으로 휙 던졌다. 

“얘 봐라? 완전 꽐라 됐네.”

“강은재! 지금 누우면 안돼! 버텨!”

“야!”

강은재의 귓가에서 친구들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한없이 잠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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