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밤

[BL/낮밤] 2화

오늘은 서비스로 드리려고 하는데.

INTERLUDE by 렌틸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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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향 다음으로 도착한 것은 베이지색 코트를 입은 남자였다. 그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들어섰다.

“네, 박 실장님. 그러면 R2룸 비워주세요. 지금 보낼게요.”

그 남자는 말하는 도중에 강은재의 어깨를 가볍게 누르고 눈을 마주쳤다. 아마도 가만히 있으라는 뜻 같았다.

그리고 남자가 말하는 ‘박 실장’은 이 호스트바의 마담이었다. 마담이랑 아는 사이인가? 그런데 누구길래 룸을 비우라고 말할 수 있는 거지?

남자와 눈이 마주친 것은 찰나였다. 하지만 강은재는 순간적으로 그가 자신을 유심히 살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 느낌은 찰나였고, 그 다음으로 실감한 건 이 남자가 굉장한 얼굴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눈앞에서 영화관 스크린이 펼쳐진 줄 알았다.

강은재가 잠시 굳어 있는 사이, 남자는 강은재의 얼굴을 보곤 짧게 혀를 찼다. 퍼뜩 정신이 든 강은재는 그 남자의 시선이 머무른 쪽의 얼굴에 손을 대 보았다.

아까 깨진 글라스 파편에 얼굴을 베였는지 손가락에 피가 살짝 묻어나왔다. 그제서야 따끔한 감각이 얼굴에 퍼졌다.

이 남자는 강은재의 얼굴에서 금세 눈을 떼었다. 그러고는 자기가 이 가게의 사장인 것처럼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룸 업그레이드 해 드리겠습니다. R2룸으로 모셔요.”

이 말에 방 안의 선수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제각기 손님들을 부축해 방을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방이 텅 비었다.

그러자 남자는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서더니, 한 손에 깨진 와인 병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신경질적으로 긴 머리를 쓸어올리는 손님의 팔목을 붙잡았다.

“씨발, 넌 또 뭐—”

“사장님, 테이블 정도는 해먹어도 괜찮아요. 근데 이게 사람 장사라. 사람 때려부수면 내가 굶거든.”

“이거 안 놔?!”

손님은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을 치려 했다. 그런데 그녀는 남자의 얼굴을 보더니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몸부림도 멈췄다.

밖에서 보기에는 무슨 마법에라도 걸린 것 같았다. 손에도 힘이 풀렸는지 와인 병이 손을 주르륵 빠져나갔다.

남자는 깨진 와인 병이 소파에 구르는 걸 곁눈으로 보고는 자연스럽게 손님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미소 띤 시선은 계속 그 손님의 눈에 머물렀다.

손님은 갑자기 음소거 버튼이 눌린 것처럼 별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럴 만도 했다. 가게에서 두 달 가량 일하며 다른 가게의 에이스들까지 숱하게 본 강은재의 눈에도 그 남자의 얼굴은 독보적이었다.

특히 웃을 때 휘어져 올라가는 눈이 신기했다. 머리를 반쯤 넘겨 드러낸 이마는 모양이 반듯했고, 콧날은 곧게 뻗어 있었다. 누구의 시선이든 잡아챌 수 있을 만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손님의 시선이 자신에게 완전히 고정된 타이밍에 입을 맞췄다.

그는 전부 들으란 듯, 또 볼 테면 보라는 듯 과장되게 여자의 입술을 핥고 혀를 얽었다. 그 순간 바깥에서 구경하던 손님들도, 강은재도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강은재의 등 뒤로 “어머” 같은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한참이 지나자 손님은 숨이 막히는지 얼굴을 뒤로 물리려 했다. 그러자 손님의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이 뒷머리로 옮겨가더니 손님의 얼굴을 도로 당겨왔다. 그 이후의 키스는 좀 더 거칠었다.

강은재는 여기서 일하며 볼 건 다 봤다고 생각했다. 선수들과 손님이 더한 스킨십을 하는 것도 두 달 동안 엄청나게 봤다. 그런데도 온 몸이 새빨개지는 것만 같았다.

세상에 그 남자와 손님만 남은 것 같은 드라마틱한 키스였다. 이 방에 다른 사람, 예를 들면 자신이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당장 이 방에서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발이 땅에 붙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눈조차 뗄 수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영원 같던 키스가 겨우 끝났다. 남자의 입술이 떨어지자, 손님은 숨을 얕고 짧게 몰아쉬었다. 하지만 남자는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내가 좀 비싸요, 사장님. 그래도 오늘은 서비스로 드리려고 하는데.”

남자는 이렇게 말하며 손님의 팔과 허리를 정중하고도 부드럽게 놓아주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소파에 앉으며 그녀를 자연스럽게 자기 무릎에 천천히 앉혔다가, 다시 등을 받치며 소파에 눕혔다.

그러고는 다정하게 몸을 숙여서 그녀의 뺨에 다시 한 번 짧게 입을 맞추었다. 손님이 조금은 다급하게 그의 팔을 붙들었다.

“너도 선수야? 왜 초이스 때 안 들어왔어?”

“선수가 아니니까? 그래서 말했잖아요, 서비스라고.”

“여기는 메인보다 서비스가 낫네.”

남자는 웃으며 말을 받았다.

“서프라이즈?”

손님은 언제 병을 깨부수고 사람을 쳤냐는 듯 웃고 있었다. 남자는 그런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작게 손짓을 했다. 이건 나가라는 뜻 같았다. 강은재는 뭐라도 정리를 하려다가, 다른 웨이터가 고개를 가로젓는 걸 보곤 얼른 몸을 뺐다.

유리 조각과 음식 따위로 난장판이 된 방의 문이 천천히 닫혔다. 그 문틈 사이로, 여자에게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입을 맞추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 방을 정리하라는 무전을 받고 다시 갔을 땐 남자도, 여자도 없었다. 다만 소파에 지포 라이터가 떨어져 있었다. 여자의 원피스에는 주머니가 없었으니 아까 그 남자의 것 같았다. 강은재는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고, 깨진 술병이며 엎어진 안주 따위를 치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까 그 키스씬이 머리를 떠날 줄 몰랐다. 그 이후로 들어간 방에서 어느 손님이 팁을 꽂아주며 엉덩이를 더듬었는데도 놀라는 걸 잊었다.

오늘따라 퇴근 시간이 빨리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강은재가 대기실에서 웨이터 유니폼을 벗고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있을 때였다. 마담이 아까 뺨을 맞고 술병도 맞을 뻔했던 선수를 달래고 나오다가 옷을 갈아입는 강은재와 마주쳤다. 마담은 은재를 보곤 사근사근하게 얘기를 붙였다.

그는 강은재에게 여러모로 공을 들이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웨이터로 들였지만, 가게 분위기를 익히고 손님 대하는 법을 배웠다 싶으면 바로 선수로 데뷔시킬 작정이었다. 그래서 아까 그 진상 손님 때문에 강은재가 이 일에 정이 떨어지지 않길 바랐다. 항상 무표정한 녀석이라 이번에도 별로 놀랐을 것 같진 않았지만.

“우리 은재, 아까는 놀랐지? 그래도 그간 일하면서 봤겠지만 그런 손님 생각보다 별로 없어. 알지?”

“네, 알아요.”

평소였다면 여기서 대화가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아까 그 장면 때문일까, 아니면 그 향 때문일까. 강은재는 평소와 달리 한 마디를 더 묻고 말았다.

“그런데 실장님, 아까 그 사람은….”

“그 사람? 아, 유 실장? 어휴, 여기 또 얼굴만 보고 낚이는 어린 양이 나오는구만. 모르는 게 나은 인간이야.”

강은재가 의아한 눈을 하자 마담은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동전 모양을 만들어 보이며 말했다.

“사채 하거든.”

…생각도 못했다. 사람을 다루는 것도, 키스도 너무 능숙해서 어디 다른 가게에서 온 선수라고만 생각했었다.

“오늘도 수금하러 온 건데, 걔는 완전 돈에 미친 새끼란다. 아까 그거 좀 정리했다고 티씨 10만원을 지가 가져가더라니까.”

“아….”

“그리고 사채업자 만날 일이란 게 뭐가 있어. 돈 갖다 바칠 때랑 추심당할 때밖에 없잖아. 그러니까 안 만나는 게 좋은 족속이지.”

마담은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하다가 덧붙였다.

“너 저기 영화동에 C클럽 알지. 거기 마담이 유 실장 쪽 돈 못 갚아서 도망갔거든. 그랬더니 손가락을 잘랐대. 1억에 손가락 하나씩, 세 개. 그 손가락 자른 놈이 유 실장이야. 돈을 꿔도 그쪽 돈은 절대 꾸지 마라.”

강은재는 순간 마음이 말도 못하게 복잡해졌다. 사실 그는 사채업자를 수도 없이 만나봤기 때문이다. 안 만나는 게 좋은 족속이라는 마담의 말에는 십분 공감했다.

강은재가 웨이터 일을 시작한 것도 사채 빚 때문이었다. 할머니가 몇 년간 편찮으셨다. 그 병원비와 생활비를 감당하다 못한 할아버지가 상의도 없이 사채를 빌렸다.

액수는 5백 만원. 5백 만원은 어느 새 5천 만원으로 불어났다. 할아버지가 이자를 내지 못하자 사채업자가 다시 빚을 내게 만든 결과였다.

이자를 못 내는 일이 잦아지자 사채업자들은 직접 찾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 중 아까 그 남자처럼 하고 다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저렇게 젊은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직업이 사채업자라니. 껍데기와 내용물이 안 맞는 느낌이었다.

마담은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기 좋아하는 사람이고, 강은재는 반응이 작긴 해도 사람 말을 잘 들어주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마담은 강은재 앞에서 특히 말이 많아지곤 했다.

“뭐, 유 실장은… 정확히 말하면 쩐주 집사야. 작은 사채들 관리하는. 그래서 직접 수금 나오는 일 별로 없는데 오늘은 웬일이래? 나도 간만에 얼굴 봤다.”

그런데 마담은 뭔가 억울한 게 있는 모양이었다. ‘유 실장’ 얘기를 하면 할수록 말이 점점 많아졌다. 강은재는 10분 만에 ‘유 실장’의 화려한 전적을 알게 되었다….

“아니, 원래는 걔가 디빠에서 굴러먹던 애거든? 근데 내가 걔 스무살 때, 제일 이쁠 때 딱 발굴해서 메인까지 만들어 놨어. 잘 나갈 때는 장난 아니었다, 진짜. 근데 어느 날 갑자기 뒤도 안 돌아보고 하루아침에 그만두는 거야. 알고 보니 쩐주 눈에 들어서 거기 붙은 거 있지. 내가 그날 속상해가지고 우리 가게 술을 다 처먹었잖아.”

“그러셨군요.”

“하여간 재수도 없고 정도 없는 새끼. 유 실장 다녀간 날엔 소금 뿌려라.”

“네.”

책상에 엎드린 강은재가 여기까지 어젯밤 일을 되짚었을 때였다. 강의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강의 시작 10분 전이라 문은 수도 없이 열고 닫혔다. 그런데 어째서 이 소리에만 몸을 일으키게 됐을까.

아마도 문이 열린 순간, 소란스러웠던 강의실이 일순 파도가 퍼지듯 조용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강은재는 비척비척 일어났다. 여기는 대형 강의실이라 의자가 계단식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강은재는 중간쯤에 앉아 있었기에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의 얼굴이 너무나 잘 보였다.

그는 어제, 아니, 몇 시간 전과는 다른 코트와 옷을 입고 있었다. 반만 넘긴 머리는 그새 미용실에라도 다녀온 것처럼 깔끔했다.

“조교인가…?”

옆에서 동기인 김혜지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문을 들고 들어온 남자는 빼곡한 좌석 중앙에 난 통로 계단을 걸어 올라왔다.

“모델인가…?”

김혜지는 얼이 빠진 목소리로 다시 중얼거렸다.

”겠냐? 복학생인가 보지.”

다른 동기인 최동우가 가장 정답에 가까운 듯한 답을 내놨다. 하지만 목소리는 김혜지와 마찬가지로 얼이 빠져 있었다.

강은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 강의실에 들어온 사람은 분명… 유 실장이었다. 몇 시간 사이에 잊어버리기에는 너무 강렬한 얼굴이었다.

돈을 못 갚았다는 이유로 사람 손가락을 잘랐다던 사람. 어제 진상을 부리던 손님에게 다짜고짜 입을 맞춰서 소란을 해결했던 사람. 과거에 대단했다던 선수.

강은재는 하룻밤 사이 이 남자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았다. 그리고 하나같이 잊어버리는 게 더 힘든 자극적인 이야기들이었다.

너무 빤히 쳐다본 탓일까? 유 실장은 시선을 느꼈는지 강은재 쪽으로 눈을 돌렸다. 강은재는 순간 흠칫했지만 그의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저 남자에게는 이상하게도 그런 초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눈을 마주치기만 하면 고개를 돌릴 수 없도록 만드는.

강은재와 눈이 마주친 남자는 몇 시간 전과 똑같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룸의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도 피부가 유난히 희다고 생각했는데, 아침 햇살을 맞은 얼굴 피부는 어제보다 더했다. 김혜지는 기대도 안한 미남의 등장에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기까지 했다.

기시감이 들었다. 여기는 강의실이다. 지금은 햇빛이 환한 아침이다. 그런데도 강은재는 순간 자신이 밤에, 업소에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강은재의 밤과 낮의 세계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그의 주변 어떤 사람도 이 세계를 넘나들진 못했고, 그래서도 안 되었다.

그러나 이 남자는 너무도 손쉽게 그 두 세계를 휘저어 하나로 만들어버렸다. 눈 앞이 흔들리는 기분마저 들었다. 잠은 저 멀리로 달아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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