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낮밤] 5화
과대 흑기사는 내가 해줄게.
강은재는 수업을 마치고 고시원으로 돌아왔다. 들어오자마자 가방을 벗어놓고 작은 침대에 낑겨 눈을 붙이려는데, 유이경이 했던 말이 첫 글자부터 마침표까지 빠짐없이 재생되었다.
그는 갖은 애를 쓴 끝에 겨우 잠들었다. 그런데 저녁 10시가 되어 눈을 뜨자, 그 순간부터 유이경이 한 말이 도돌이표를 그리며 다시 머릿속에 울렸다.
샤워를 할 때도, 버스를 타고 거리를 달릴 때도, 가게에 도착해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서빙을 하면서도.
들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이야기라 그랬다.
유이경이 말한 ‘제안’이란 자기 집에 와서 집안일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에 ‘몸으로 갚아라’ 운운했나 보다. 가사 노동도 몸을 쓰는 일은 맞으니까. 강은재는 가사 도우미가 필요하다는 말에 이렇게 대꾸했다.
‘그럼 가사 도우미를 쓰세요.’
그랬더니 유이경은 이상한 말을 했다.
‘못 쓰는 사정이 있어요. 조건이 하나 있는데, 지키기가 어렵나 봐.’
오늘은 목요일인데도 가게에 예약이 꽉 차 있었다. 강은재는 정신없이 술이며 안주를 날랐다. 그러다가 마담과 마주쳤다. 마담은 강은재를 볼 때마다 그에게 향수를 칙칙 뿌리고 어디선가 조그만 왁스를 꺼내서는 머리를 다듬어주곤 했다.
향수가 든 작은 스프레이를 두어 번 맞았더니 걸어다니는 디퓨저 같아졌다. 처음 면접을 봤을 때부터 마담은 선수를 권했지만 강은재는 아직까지 웨이터였다. 그럼에도 마담은 선수를 신경쓰듯이 강은재의 외모에 신경을 썼다.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강은재는 마담이 그냥 남의 머리를 만져주기 좋아해서 그런다고 생각했다. 마담이 손가락으로 강은재의 머리를 빗고 털며 심혈을 기울이는 동안에도, 강은재는 유이경의 제안을 생각했다.
‘조건이요?’
‘응. 말은 조건이지만 사실 간단해요. 비밀, 유지.’
“다 됐다. 너도 이제 나름 우리 가게 간판인데. 이쁘게 하고 다녀야지.”
강은재는 이 가게에서 예쁘다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그런 말을 들을 외모는 아닌 것 같았다. 예쁘다는 말은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질 않았다. 그래서 그런 말이 나올 때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는데, 손님들은 또 그걸 그렇게 좋아했다.
다행히도 유이경이 말한 ‘몸 쓰는 일’에 외모는 포함되지 않는 것 같았다.
‘내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뭘 듣든, 뭘 보든 절대 바깥에 말하지 않는 게 조건이에요. 누가 물어보더라도.’
유이경은 이 말에 덧붙였다.
‘청소 서비스, 가사 도우미, 써 봤지. 그런데 돈 백 만원에 입이 열리더라고.’
어쩐지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집 청소가 굉장히 위험한 일인 것처럼 들렸다….
이 가게에서도 어느덧 두 달 넘게 일했더니 강은재의 얼굴이 어느 정도 알려진 모양이었다. 선수를 지명하듯 강은재를 콕 집어 부르는 손님들이 생겼다.
강은재는 지금도 다른 웨이터 삼촌들처럼 화려한 언변을 구사하지는 못했지만, 손님들은 이상하게도 그런 모습을 ‘풋풋하다’며 좋아했다. 부르는 테이블이 많아진다는 건 팁을 받을 기회도 늘어난다는 뜻이었다. 특히 중년 손님들은 강은재가 갓 스물이라는 걸 알고 나면 팁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강은재는 이 일을 포기하기 쉽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중 이 일만큼 돈을 많이 주는 일은 없었다.
‘시급은요.’
‘시급? 하하, 어려운 일 시키려는데 최저임금 주긴 그렇지. 월 400 어때요.’
원래는 유이경이 뭐라고 하든 거절할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거절하기 힘든 액수였다….
‘왜 저한테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그 사무실 오가면서 후배님을 봤어요. 일 괜찮게 하던데. 웨이터 일 절반은 청소잖아.’
유이경은 벤치에서 일어나며 이렇게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사무실에서 본 지 1주일이 넘었는데, 아직 학교에 내가 창놈이라는 소문이 안 났잖아요. 후배님 입이 무겁다는 것도 증명된 거지.’
이 말에는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강은재는 무의식중에 이 사람은 자신이 호스트바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떠벌리지 않을 거라 믿고 있었다. 이상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없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신이 그의 얘길 떠들고 다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는 건가. 유이경이 자신을 그렇게 봤다는 데 조금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대화가 끝나고 오늘 저녁이 된 것이다.
강은재는 오늘 유독 심하게 불러다녔다. 귀에 꽂은 무전기에서는 서빙 호출이 쉴 새 없이 오는데, 들어가는 방마다 잠깐 앉았다 가라며 강은재를 끌어다 앉히곤 했다.
선수들이 눈치를 주는 게 느껴졌지만 강은재는 꿋꿋이 술을 따르고 팁을 챙겼다. 미움을 받아도 어쩔 수 없었다. 동료들에게 잘 보인다고 사채 이자와 병원비를 낼 돈이 생기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손님들이 예뻐하면 돈이 생긴다.
여기서 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생각이 이렇게 흘렀다. 하지만 밤에 일하는 건 체력이 좋은 강은재에게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솔직히 유이경의 제안을 덥석 물고 싶었다. 그가 부른 금액은 월 400만원, 업무는 청소와 세탁 같은 집안일, 추가 조건은 비밀 유지.
다만 사대보험은 당연히 안 되고 현금으로 받아가야 한댔다. 계약 관계가 아닌 게 차라리 나을지 모른다. 돈을 안 주면 바로 그만둬 버려도 되니까.
그러나 돈 못 갚았다고 사람 손가락을 자른다는 사채업자, 선수들 사이에서도 소문난 걸레, 안 하는 약이 없다는 약쟁이…. 이 사람과 얽히면 호스트바보다 더 깊은 곳으로, 미지의 어딘가로 빠질 것만 같은 본능적인 경보가 울렸다.
집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입막음 조로 돈을 주는 거라면, 대체 그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뜻일까? 지금의 강은재는 돈이 된다면 뭐든 할 수 있었지만, 그것도 지금 이 자리로 되돌아올 수 있을 때의 얘기였다.
강은재는 핸드폰을 켜고 문자를 적었다. 범죄에 연루되기는 싫었다. 유이경이 체포당하는 걸 직접 보기도 싫었다.
[선배님, 죄송하지만 저는 사정이 안 되어서 못할 것 같습니다. 좋은 사람 찾으시길 바랍니다.]
이후로 며칠이 빠르게 흘러 개강총회 날이 되었다. 원래대로라면 첫 주에 했어야 했는데 불참자가 워낙 많아 한 주가 미뤄졌다.
학교와 일을 병행하기 어려울 거라 예상은 했지만, 낮에는 수업을 듣고 밤에 일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 더 지치는 일이었다. 학교에 다녀오면 바로 잠을 잤다가, 일하고 돌아오면 아침 일곱 시였다. 고시원에서 씻고 다시 학교에 오면 강의 시간에 졸지 않는 데만도 에너지를 다 써야 했다.
며칠 전 유이경의 제안을 거절한 강은재는 조금 긴장했다. 하지만 유이경은 담백하게 알겠다고 답장했을 뿐이었다. 그 뒤로도 몇 번 더 마주치긴 했지만, 강은재의 이유 모를 걱정과는 다르게 유이경은 웃으며 눈인사를 했다. 불편한 건 강은재 혼자뿐인 것 같았다.
그렇다. 강은재는 유이경이 불편했다. 그런데 김혜지가 옆에서 자꾸 ‘선배님이 개총에 오시는지 물어보라’며 강은재를 달달 볶았다. 자기는 유이경에게 직접 번호를 받은 게 아니니 연락을 하기가 좀 그렇다는 이유였다. 강은재는 조금 버텨보려다가 결국 김혜지에게 졌다.
그는 같은 강의실에 앉아 있는 유이경에게 문자를 보냈다.
[선배님, 개강총회 오시나요.]
답은 간결하게 왔다.
[안 가요.]
강은재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가사 도우미 제안을 거절한 직후라 아무래도 껄끄러웠다. 그러나 강은재의 친구들은 하늘이 무너져라 좌절하며 속닥거렸다.
“왜! 왜 안 오신대?”
“여쭤보면 안돼? 고학번이라 불편하신가? 완전 상관없는데.”
“빨리 여쭤봐. 왜 안 오시는지. 안 오시는 이유 내가 제거한다.”
강은재는 결국 김혜지의 성화에 못 이겨 문자를 하나 더 보냈다.
[왜 안 오세요?]
보내놓고 보니 말이 조금 이상했다… 따지는 것 같기도 하고. 이번에도 답은 간단하게 왔다.
[아저씨가 거길 가서 뭐해요.]
옆에서 밀고 들어와 강은재의 핸드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김혜지와 최동우는 탄식을 뱉었다.
“미친, 어떤 선배들은 못 껴서 난린데 이경 선배는 진짜…. 사랑해요 선배.”
“몇 살인데 아저씨라 그러지? 그렇게 나이 안 많아 보이는데.”
김혜지와 최동우가 떠드는 동안 문자가 하나 더 왔다.
[일해야 해서.]
강은재는 작게 “아” 소리를 냈다. 문자를 받고 나서야 떠올랐다. 유이경은 저번에 가게에 수금을 하러 왔다고 했다. 그가 이 근처 유흥업소에 수금을 다니는 사채업자라면… 그의 근무 시간도 아마 자신과 비슷할 것이다.
“일이 있으시대.”
결국 강은재는 문자와 거의 다르지 않으면서도 의미는 완전 다른 말로 친구들에게 유이경의 답을 전달했다.
유이경은 수업이 끝나고도 강은재에게 별다른 인사를 하지 않고 훌쩍 사라졌다.
***
한 학기 공지사항 전달이 끝나자 개강총회는 금세 술판이 됐다. 어색한 자리일 법도 한데, 이번 학년에는 유독 외향적인 학우들이 많았다. 적극적으로 자리에 끼려는 고학번 선배 무리도 있었다.
아무튼 개강총회의 모든 테이블마다 꼭 한번씩 유이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곤 했다. 강은재는 과대라는 이유로 테이블마다 인사를 다니며 한 잔씩 받아먹느라 술이 조금 빨리 올랐다. 오늘은 가게에서 휴일을 받아놔서 다행이었지만, 누적된 피로 때문에 더 빨리 취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유이경에 대한 정보를 많이 모을 수 있었다.
일단, 그는 완전히 아싸 노선을 걷기로 한 듯했다.
“와, 너한테도? 나한테도 핸드폰 없다고 했다니까!”
강은재는 자신에게 유이경의 번호가 있다는 사실을 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동아리도 하나도 안 든 것 같더라.”
그렇겠지. 학교를 왜 오는지도 모르겠다.
“존나… 쓸데없이 잘생겼어. 거지같이 입고 오기라도 하든가.”
그러니까….
“시계 봤냐? 그거 4천 만원짜리임.”
그렇구나….
“그 선배는 천연기념물 같은 거야. 삵 같은 거. 희귀하고, 귀엽고, 아무도 못 기르고.”
테이블을 돌던 강은재가 겨우 친구들이 있는 자리로 돌아왔을 때 김혜지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유이경에 대한 관심은 타과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학교 사람들끼리 모인 인터넷 커뮤니티에 “이 사람 누구냐”고 묻는 목격담이 심심치 않게 올라왔다. 하지만 유이경은 모두를 아주 일관성 있게 쳐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호프집 한쪽 테이블이 소란스러워졌다. 고학번들이 앉은 긴 테이블이었다. 그 테이블에서 강은재를 찾았다. 개총에 과대가 어디 갔길래 코빼기도 안 보이냐는 거였다. 강은재는 한숨이 나왔다. 아까 분명 90도로 허리를 꺾어 인사했는데 그걸로는 모자랐던 모양이었다.
결국 강은재 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아이들이 모두 고학번 테이블에 낑겨 앉게 되었다. 고학번 선배들은 무척 신나 보였다. 강은재는 술 게임에 대충 분위기를 맞추며 앉아 있었다.
그런데 고학번 중 하나가 치킨 뼈를 버리는 스테인레스 통에 소주며 맥주, 사이다는 물론이고 치킨무 국물까지 전부 섞기 시작했다. ‘칵테일’이라면서 그 음식물 쓰레기 위에 파슬리를 얹는 것까지… 완벽한 진상이었다.
강은재는 바로 한 마디 하려 했다. 하지만 옆에 있던 김혜지가 그의 팔을 잡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것보다도 집안이 좋다고 알음알음 소문이 난 선배들이었다. 하지만 강은재는 하려는 말이 있으면 꼭 하는 사람이었다.
“선배님, 이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야, 니가 안 걸리면 그만이지 왜 시비야?”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사람들은 표정이 완전히 어두워진 강은재를 두고 다시 술 게임을 했는데, 하필이면 김혜지가 걸렸다. 강은재는 건성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지만 주저없이 자신이 흑기사를 하겠노라고 나섰다.
“워우— 멋있다!”
“남자답다!!”
“뭐라고 하더니 지가 마시네? 웃긴다.”
“아, 여자애가 마셔야 재밌는데. 까비.”
속이 끓었다. 이걸 친구에게 마시게 하느니 자신이 먹는 게 나았다. 강은재는 두 손으로 스테인레스 통을 잡고 입가로 가져갔다. 시큼하고 역한 냄새가 훅 끼쳐왔다. 그런데 문득, 그 역겨운 냄새 가운데서 언젠가 맡아 본 적 있던 청량한 향을 맡았다.
“과대 흑기사는 내가 해줄게.”
그렇게 스테인리스 통을 뺏긴 것도,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유이경이 그 음식물 쓰레기를 거침없이 마시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저마다 떠들던 테이블의 무수한 시선이 곧 여기에 집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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