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낮밤] 9화

난리만 나지.

INTERLUDE by 렌틸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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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이경이 나간 뒤, 강은재는 부엌에서 조심스럽게 집을 둘러보았다. 이제야 제대로 보게 된 유이경의 집은 정말 넓었다. 유이경네 집으로 경영학과 전체가 엠티를 와도 될 정도였다. 이런 집을 펜트하우스라고 하던가. 다른 사람들이 하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는 정말로 돈이 많은 것 같았다.

신세를 졌으니 뭐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주인 없는 집을 여기저기 뒤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강은재는 먼저 세탁실을 열어 보았다. 놀랍게도 건조기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주저없이 자신이 어제 씻지도 않고 잠들었던 침대의 시트와 얇은 이불을 걷어 세탁기에 넣었다.

아까 유이경이 들고 나왔던 라탄 바구니는 세탁기 옆에 놓여 있었다. 위에 덮인 티셔츠를 걷어 본 강은재는 다시 한번 놀랐다. 피가 한 두 방울 묻은 수준이 아니었다. 피 뿐만 아니라 흙이 허옇게 말라붙어 있거나, 정체 모를 기름 때가 묻어 있는 옷도 있었다.

‘이걸 전부 세탁기에 넣고 돌릴 생각은 아니었겠지?’

이 어수선한 옷바구니를 제외하면 유이경의 집은 깨끗했다. 무슨 정리 전문가가 주기적으로 다녀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애초에 물건 자체가 별로 없었다. 만약 자신이 가사 도우미를 했더라도, 집이 이렇게 깨끗하고 밥도 잘 안 먹는다면 월급에 비해 업무량이 무척 적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은재는 혹시 다른 세탁물이 있을까 싶어 드레스룸에도 조심스럽게 들어가 보았다. 이쪽도 정리가 잘 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모자나 가방 따위를 두는 용도인 듯한 격자 모양 진열장이 눈에 띄었다. 모든 칸이 텅 비어 있었는데, 그중 구석에 있는 한 칸에만 하얀색 볼캡 모자가 놓여 있었다. 모자는 투명한 백에 들어 있기까지 했다.

유이경이 볼캡 모자를 쓰는 건 상상이 잘 안 갔지만… 두상이 작으니 잘 어울릴 것 같다. 다른 세탁물은 보이지 않았다.

강은재의 핸드폰은 거실 테이블 위에 충전이 완료된 상태로 놓여 있었다. 핸드폰까지 챙겨준 걸 보면 유이경은 의외로 세심한 듯했다. 아무튼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김혜지와 최동우 말고도 다른 동기들의 연락이 꽤 와 있었다.

확인해 보니 어제 자신이 뻗은 후 김혜지가 회비를 걷어 개총을 마무리하고, 다시 사람들을 모아서 4차까지 달렸다고 했다. 김혜지는 그렇게 달리고도 일찍 일어난 모양인지 답장이 빨랐다.

[잘 잤냐?]

[우리가 너 사는 고시원이 어딘지 몰라서]

[이경 선배가 너 데려간 거]

[나 어제 너 대신 고생 많이 했음]

[갚아라]

[아직 이경 선배 집이야? 선배 집 보여줘]

[빨리]

[당장]

이래도 되나? 남의 집을 맘대로 보여줘도 되는 건가? 강은재가 망설이는 사이 김혜지가 영상 통화를 걸었다. 강은재는 하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

— 빨리! 360도 각도로 보여줘! 이경 선배 집!

“남의 집인데….”

— 너만 입 다물면 아무도 몰라!

아무리 생각해도 김혜지는 유이경에게 정말로 미쳐 있는 것 같았다. 강은재는 한숨을 쉬고는 자신이 있는 거실에서 핸드폰을 빙 돌렸다. 김혜지는 핸드폰 액정 속에서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 좋은 집 사시네. 개멋있다 진짜….

“이제 됐지. 끊는다.”

— 응! 쉬어라!

정말 영상통화의 용건이 이것뿐이었나 보다. 김혜지는 미련없이 전화를 끊었다. 김혜지와 최동우 외에도 연락할 곳에 연락을 다 돌린 강은재는, 다음으로 ‘피 지우는 방법’을 검색했다.

찾아보니 과산화수소 같은 약품이 필요하다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걸 찾겠다고 남의 집을 뒤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밖에 나가서 사오자니 자신은 이 집의 비밀번호를 모른다. 한번 나가면 다시 들어올 수 없다. 그래서 강은재는 정석적인 방법을 쓰기로 했다.

찬물로, 손빨래 하기.

세면대에서 한참을 낑낑대다 보니 옷의 피가 많이 빠졌다. 셔츠를 주무를 때마다 붉은 물이 빠져나가는 걸 보며 강은재는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유이경은 대체 뭐 하는 사람일까.

그에 대한 이야기야 차고 넘치게 들었다. 전직 선수, 현직 사채업자. 그럼 이 피는 추심을 하다가 사람을 해쳐서 묻은 걸까. 그러면 피를 지우고 있는 자신은 정말로 불법 추심이라든가 상해죄의 공범이 된다. 그리고 자신이 이렇게 한다고 해서 유이경이 이 옷을 다시 입을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폐를 끼쳤으니 뭐라도 하고 싶었다.

‘하아….’

마음이 복잡했다. 학교에서 만나는 유이경은 정말 그냥 선배 같았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그가 사는 세계는 여기가 아니다. 유이경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려웠다. ‘유 실장’으로 대해야 할지, ‘이경 선배’로 대해야 할지. 유이경은 어느 쪽도 상관없어 하겠지만.

옷이 상하지 않게 조심조심 주무르느라 빨래에만 한참이 걸렸다. 그는 건조가 끝난 침대 시트를 다시 매트리스에 끼우고 이불도 각을 맞춰 잘 펼쳐 놓았다.

오늘은 토요일이라 자신도 출근을 해야 했다. 고시원에 들르기보다 가게에 일찍 나가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는 유이경이 준 칫솔을 쓰고 욕실을 빌려 샤워를 했다. 평소 유이경에게서 나던 향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았다. 하지만 유이경의 냄새와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체향이 섞여서 그런 걸까. 바디 워시 통에는 따로 라벨이 붙어 있지 않아서 무슨 제품인지는 알 수 없었다.

강은재는 손빨래를 끝낸 옷들과 수건도 건조기에 돌린 뒤 잘 개켜서 드레스룸에 갖다 두었다. 자신이 어젯밤 이 집에 미쳤던 영향을 모두 원상복구 했다.

오피스텔을 나서자 서늘한 봄바람에 머리가 마구 흩날리고 햇빛이 눈을 찔렀다.

‘아.’

강은재는 집을 나오고서야 이상한 점 하나가 떠올랐다. 유이경의 집은… 모든 방의 문이 열려 있었다. 저번에 급하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약을 먹었던 그가 떠올랐다. 창이 넓은 집에 사는 것도, 방 문을 열어두는 것도 혹시 폐소공포증 때문일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고층에 사는 걸 보면 심각하지는 않은 듯했지만.

강은재 스스로는 아직 자각하지 못했으나, 그는 유이경에게 궁금한 게 정말 많은 상태였다. 강은재는 오피스텔 앞에 작게 조성된 녹지를 가로지르며 유이경에게 문자를 보냈다.

[선배님, 저 지금 나가요. 재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욕실도 잘 썼어요. 학교에서 봬요.]

[응. 학교에서 보자.]

어쩐지 유이경의 반말을 보자 몸이 또 간지러운 것 같았다.

조금은 민망하고, 또 조금은 낯선 토요일이었다.

***

그날 밤, 유이경은 공사가 중단된 어느 상가 건물 3층에서 바깥을 내다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콘크리트 골조만 올라간 채로 공사가 멈춘 탓에 창문이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건조한 바람이 유이경의 트렌치코트 자락을 훑고 건물 안을 돌며 우웅, 하는 소리를 냈다. 으슥한 곳을 귀신같이 잘 찾아내는 양아치들이 벌써 술이며 본드를 불고 남긴 흔적이 건물 안에 그득했다. 어설픈 그래피티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담배가 반쯤 타들어갔을 때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유이경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연기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장 형사님, 조폭 영화 너무 감명 깊게 보신 거 아니에요? 왜 자꾸 이런 데서 보자고 해.”

정말로 영화에 나오는 형사처럼 가죽 점퍼에 운동화를 신고 등장한 장대훈은 유이경의 말에 조금 뻘쭘해졌다.

“아니이, 여기가 근처에 CCTV도 없고 해서 좋단 말이다.”

이 건물이 자리한 상원4동은 한참 재개발 때문에 여러 다툼이 벌어지는 곳이었다. 여기처럼 소유권 분쟁 때문에 공사가 중단된 건물도 꽤 되었고, 오래된 동네다 보니 CCTV가 많지 않았다. 어떤 수사든 CCTV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경찰에게는 골치 아픈 동네고, 어떻게든 CCTV를 피해야 하는 범죄자들에게는 기회의 땅이었다. 그래서인지 작고 영세하며 무슨 짓이든 다 하는 사채 사무실도 상원동에 꽤 많았다.

“아무튼, 너 말이야. 함부로 개인정보 서류 뽑다가 걸리면 큰일 나는 거 알아, 몰라? 이게 대체 몇 번째 뺑이치는 거냐고. 이럴 거면 마약 거래 현장 하나 덮치게는 해 줘야지.”

“저번에 하나 설계해 드린 걸로 드디어 승진하셨잖아.”

“그렇게 힘들게 승진했는데 개인정보 조회한 걸로 징계 먹거나 짤리면 얼마나 우습냐….”

유이경은 이 말을 듣고는 장대훈을 웃으며 쳐다보았다. 잡설은 그만하고 정보나 내놓으라는 표정이었다. 이 형은 옛날부터 엄살이 참 심했다. 물론 장대훈도 여기 오래 있을 수는 없었으므로 서류 봉투부터 건넸다.

“내가 먼저 살펴봤는데, 너 이번에도 꽝이다. 나이부터 다르니까 당연한가. 애초에 성부터 다르지만. 사회 통념이란 게 있는데 말이야, 정말로 아주머니 성을 따랐겠냐고.”

“강은재 다 뒤져보고 안 나오면 임은재 뒤질 거니까 걱정 마세요.”

유이경은 갈색 서류 봉투에서 하얀 종이 몇 장을 조금 꺼냈다. 강은재의 가족관계증명서였다. 유이경이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장대훈이 추가로 설명을 했다.

“특이한 게 하나 있어. 이번 강은재는 부모님 나이가 많아. 지금 거의 칠순이시다. 부부 금슬이 엄청 좋았나. 암튼, 앞으로 이런 서류까지는 부탁하지 마. 이거 걸려가지고 기사 나오면 나 유명인 돼버린다고. 유명인 되면 지금처럼 편하게 연락도 못해요. 지금까지의 내 노고에 감사한 줄 아시고.”

이렇게 줄줄이 말한 장대훈은 유이경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이경은 피식 웃으며 장대훈의 손에 USB 하나를 떨어뜨렸다.

“형사님이 말한 업소 CCTV에요.”

“내가 갔을 땐 고장나서 안 찍혔다고 했는데!”

“걔네도 빠져나갈 구멍 필요한데 안 챙겨놨을까.”

“고맙다!”

유이경과 장대훈은 보육원에서 같이 자란 사이로, 지금은 공생 관계였다. 보육원에서 투닥거리며 자랄 땐 상상하지 못했던 미래였다. 유이경은 사채업의 특성상 발이 굉장히 넓었다. 그의 돈을 빌린 유흥업소만 해도 백여 군데가 넘었고, 유흥업소에서 각종 사건의 증인이 되는 사람들은 더 많았다.

장대훈은 이 거대한 네트워크를 마음껏 꺼내 쓰는 대신 ‘강은재’들에 대한 정보를 유이경에게 넘겼다. 물론 장대훈이 보기에 유이경은 그냥 삽질을 하는 중이었다.

“근데 이경아. 이게 대체 몇 년째냐. 나도 임 형사님 일은 안타까워. 우리한테 참 잘 해주셨으니까. 그치만 지금 은재를 찾는대도 어쩌게. 난리만 나지.”

“그냥 잘 지내는지 알고 싶은 것뿐이에요.”

장대훈은 ‘잘 지내는지 알고 싶어서’ 8년 동안이나 이 짓을 한다는 게 납득이 안 갔지만, 어차피 유이경은 예전부터 좀 미친 놈 같은 면이 있었기에 더 말하길 그만두었다. 애초에 좋은 대학 합격해 놓고 갑자기 호빠에 들어가고, 그 다음에는 쩐주 밑으로 들어간다는 게 정상인의 선택은 아니잖은가?

“그래… 니가 니 손으로 니 힘 들여서 삽질한다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냐. 근데 전국에 니가 안 본 강은재도 이제 별로 없을 거다. 그럼, 다음에 접선할 때는 더 생산적인 대화를 하자고.”

먼저 자리를 뜬 건 장대훈이었다. 그는 정말 영화라도 찍고 싶은 건지 늘 ‘접선’이라든가 ‘정보원’ 같은 단어를 쓰곤 했다.

오늘 유이경이 건넨 USB에는 어느 단란주점의 CCTV 영상이 들어 있었다. 어느 조폭이 다른 조폭을 찔러 살해한 단순한 사건인데, 흉기가 발견되지 않았고 용의자가 범행을 극구 부인하는 바람에 진척이 안 되고 있었다.

이걸로 조폭 하나를 잡아 넣을지, 더 모았다가 조직을 일망타진 할지는 장대훈이 결정하겠지만, 그 칼부림을 낸 조폭은 유이경이 힘을 빌리고 있는 조직의 반대 세력 사람이었다. 장대훈이 어떻게 하든 유이경에게는 이득이다.

유이경은 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욕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강은재가 썼을 칫솔이 보이지 않았다.

‘가져간 건가.’

하지만 혹시나 싶어 욕실 쓰레기통을 열어보니 칫솔은 거기에 얌전히 들어 있었다. 성격이 보이는 부분이었다. 칫솔 하나도 허투루 가져가지 않는다. 쓰레기통에 넣은 걸 보면 강은재는 이 집에 다시 올 생각도 없었던 모양이다.

유이경은 칫솔을 꺼내 투명한 지퍼백에 담고, 다음으로는 진열장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볼캡 모자를 챙겼다. 이것은 그가 장대훈에게 말하지 않은 퍼즐 조각 중 하나였다.

강은재에게 청소 일을 권한 건 진심이었다. 일단 ‘강은재일지도 모를 강은재’가 밤에 업소에서 고생하며 돈을 버는 게 싫었다. 그리고 청소 일을 시작하면 머리카락 하나라도 집에 떨어뜨릴 것 아닌가. 하지만 그 제안은 아무래도 개연성이 너무 없었는지 대차게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어제가 기회였다. 옆구리를 확인하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칫솔을 쓰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유이경은 거실의 소파에 앉으며 칫솔과 볼캡 모자를 낮은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두 손을 모아 입 앞에 대고 팔꿈치로 두 무릎을 짚었다.

만약 강은재가 진짜 ‘강은재’라면….

그렇다면 임상재는 강은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자신의 아이를 숨길 작정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서류상의 나이와 실제 나이가 다른 것, 가족관계증명서가 이 모양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공식적인 서류에 헛점을 만드는 임상재의 전략은 통했다. 자신부터가 경찰의 힘을 빌리면서도 강은재를 찾는 데 확실하게 고생을 하고 있었으니까.

유이경은 그가 뒷돈을 받는 비리 경찰이었다는 것도, 자살이라는 것도 믿지 않았다.

자신의 삶이 한 편의 영화라면, 이쯤에서 전환점이 되는 장면이 나와 줘야 한다. 그간의 삽질을 봐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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