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낮밤] 8화

드셔야 돼요.

INTERLUDE by 렌틸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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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간밤에 벌어진 일의 전말이었다.

유이경은 조금 후회했다. 뭐하러 깰까 봐 조심조심 했을까. 깨든 말든 확 올려서 옆구리를 볼걸.

강은재가 놀라며 일어나면 ‘한번 어떻게 해 보려고 그랬다’고 말했어도 됐을 것이다. 어차피 강은재도 제 소문을 들었을 테니 그런 멘트를 치면 적당히 넘어갈 수 있었겠지. 괜히 미적거린 자신이 우스웠다.

‘하지만… 이 강은재가 정말 ‘강은재’일까.’

그가 임상재와 만나고 이별한 건 모두 어릴 때의 일이었다. 어릴 때는 아이를 찾을 능력이 없었고, 어른이 되어 능력이 생긴 뒤에는 수소문을 할 곳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이 가진 정보 자체가 적었다. 그래서 무식한 방법을 썼다. 전국에 있는 스물한 살 짜리 강은재를 전부 확인하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어 보이면 직접 찾아가기도 수차례였다. 그리고, 번번이 허탕이었다.

이쯤 되면 매몰 비용을 포기할 만도 하다. 한때는 전부 묻고 살아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끝의 끝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이를 바꿔 스무 살의 ‘강은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만난 것이 이 강은재였다. 조사를 하다 보니 뜻밖에도 유이경이 관리하는 업소에 출근하는 듯했고, 심지어 유이경이 다녔던 대학교에 합격했다고 했다. 유이경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죽어 있던 학적을 살렸다….

유이경이 상념에 빠져 있을 때 1층 침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문틈 사이로 난감한 표정을 한 강은재의 얼굴이 빼꼼 보였다. 유이경은 피식 웃었다.

“잘 잤어요?”

“네….”

사실 강은재는 유이경이 침실을 나간 뒤로 결국 한숨도 더 자지 못했다. 아침 7시가 되어서야 밖으로 나갈 용기가 났다. 이른 시간이니 유이경은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자고 있었으면 했다.

그런데 침실에서 나오자마자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유이경과 마주쳤다. 혹시나 아직도 샤워 가운을 입고 있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그는 티셔츠에 헐렁한 트레이닝 팬츠를 입고 있었다.

유이경의 집은 2층짜리 펜트하우스로, 거실 창이 있는 벽이 2층까지 이어져 있어 층고가 높았다. 창 밖은 테라스였지만 딱히 식물 같은 건 없고 난간이 낮아서 도시의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이른 아침의 여린 빛이 거실을 가득 메웠다. 강은재는 용기를 내어 침실 문을 확 열고 거실로 나갔다.

“저… 선배님. 어제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런데 유이경은 뭐라 대답을 하지 않고 씨익 웃으며 “흐음” 소리만 냈다. 강은재는 온몸에 식은땀이 뻘뻘 흘렀다. 잠 못 드는 시간 내내 제발 자신이 잘못 봤기를 바랐는데, 유이경의 입가에는 아까 새벽에 봤던 상처가 아직도 있었다.

소파에 팔짱을 끼고 편안하게 기댄 유이경은 안절부절 못하는 강은재를 잠시 구경했다. 강은재로서는 유이경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유이경은 겉보기와는 달리 머릿속이 꽤 복잡했다. 지금껏 그는 어떤 강은재를 만나든 친절했다. ‘진짜 강은재라면’이라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입술을 맞댄 적은 없었다. ‘진짜 강은재’라면, 이건 대형사고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강은재는….

“선배님…. 저 어제 실수한 거 없나요. 집에 업혀온 거 말고도요. …기억이 안 나서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유이경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소파에서 단숨에 일어나며 말했다.

“응, 업혀온 거 말고는 실수한 거 없어요. 술버릇 얌전하더라. 자기 집처럼 쿨쿨 잘 자던데.”

이렇게 말한 유이경은 부엌의 식탁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콩나물 해장국이 담긴 면기와 반찬 따위가 놓여 있었다. 방금 데운 모양인지 국에서 뜨거운 김이 폴폴 솟고 있었다. 그제서야 해장국 냄새가 코에 들어왔다.

“아침 먹고 가요.”

강은재는 식은땀이 더욱 솟는 기분이었다.

“혹시… 선배님이 직접… 만드신….”

“아니? 사왔죠. 근처에 잘하는 집이 있어서.”

사왔다고 해도 문제였다! 이렇게나 폐를 끼치다니. 강은재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하지만 호의를 거절하면 더 문제였으므로 어색하게 식탁에 가서 앉았다. 유이경은 그 모습을 보며 실실 웃더니, 잠시 다른 방으로 갔다가 칫솔을 하나 들고 와서 식탁에 내려놓았다.

“칫솔은 여기. 그리고 바디 워시나 수건 같은 거, 다른 물건들 다 써도 돼요. 샤워 가운도 더 있으니까 꺼내 둘게.”

유이경의 집 식탁 의자는 특이하고 불편하게도 목이 긴 바 의자였다. 엉거주춤 걸터앉은 강은재가 유이경을 올려다보았다. 유이경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평소와 똑같았다.

만약 꿈이 진짜라면. 진짜 자신이 어제 유이경에게 입을 맞췄다면 그가 이렇게 평온할 리는 없겠지? 그리고 또 하나. 입을 맞춘 게 꿈이라면, 선배가 자신의 티셔츠를 벗기고 있었던 것도… 꿈이겠지?

강은재는 지푸라기를 붙잡듯이 유이경의 기색을 열심히 살폈다. 그 조심스러운 모습은 당연히 유이경의 눈에도 띄었다.

“뭘 그렇게 눈치를 봐요? 술 먹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럼 아침부터 먹어요.”

이 말에 강은재는 어색하게 숟가락을 들었다. 유이경은 이것까지 보고는 웃으며 자리를 떴다.

강은재가 천천히 밥을 먹는 동안 유이경은 욕실에서 씻었다가,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가, 옷을 정리하는 등 조금 부산스러웠다.

특히 유이경이 욕실에서 샤워 가운을 입고 나왔을 땐 밥이 코로 들어갈 뻔했다. 손과 입은 밥을 먹고 있는데, 나머지 감각 기관들의 주의는 온통 유이경에게 쏠렸다.

그래도 콩나물 해장국은 술술 들어갔다. 국이 거의 바닥을 보일 때 유이경이 드레스룸에서 나왔다. 그는 늘 학교에서 보던 것보다 좀 더 어른스러운 차림을 하고 있었다. 채도가 낮은 색상의 넥타이까지 매고 있어서 그렇게 느껴지는 듯했다. 그리고 그는 빨래가 들어 있는 듯한 라탄 바구니를 들고 나왔다. 그런데 라탄 바구니에 시선을 내린 강은재는 몸이 흠칫 굳었다.

…피.

다른 옷으로 덮어 가린 모양이었지만 그 틈새로 검붉은 얼룩이 스쳤다. 그리고 유이경은 눈치가 빨랐다.

“봤네?”

강은재는 천천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이 말을…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데.

하지만 유이경은 당황하지도 않고 이렇게 말했다.

“저번에 가사 도우미 제안했을 때, 조건 얘기했던 거 기억하죠.”

“네.”

“후배님이 안 하겠다고 단칼에 거절한 건 지금도 참 서운해요. 그래도 그 조건은 지켜줬으면 좋겠는데.”

“…알겠습니다.”

유이경은 일전에 자신에게 가사 도우미 일을 제안하며 엄청난 액수의 월급을 불렀다. 대학생이 아무리 애써도, 웨이터를 하며 아무리 팁을 받아도 벌기 힘든 돈이었다. 처음에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돈이 ‘입막음’을 위한 거라면 납득이 갔다.

만약 자신이 어디다가 “이경 선배 집에서 피 묻은 옷 봤어. 대박”이라고 말하고 다닌다면… 학교에서의 이미지가 추락하는 건 둘째치고, 선배는 경찰에 잡혀갈지도 모른다.

다행히 강은재는 놀란 정도에 비해서는 얼굴에 티가 잘 안 나는 편이었다. 유이경은 조금 난처한 기색만이 어려 있는 강은재의 얼굴을 보며 마음에 든다는 듯 웃었다. 강은재는 아까 침실에서 나올 때보다 피를 본 지금이 더욱 차분해 보였다.

“보통은 이 정도만 봐도 깜짝 놀라서 친구들에게 떠들거나 인터넷에 글을 쓰거나 하거든. 나는 안 놀라는 가사 도우미가 필요했어요. 다시 생각해도 후배님을 놓쳐서 참 아깝네.”

만약 유이경네 가사 도우미를 한다면 언젠가 자신도 ‘공범’으로 잡혀 가는 게 아닐까? 그런 의심이 짙어졌다.

그러던 강은재는 정말 중요한 일이 하나 떠올랐다. 그는 세탁실에 라탄 바구니를 놓고 나오는 유이경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유이경은 곧 외출할 것 같은 차림이었다. 급했다. 아까는 유이경이 시키는 대로 하느라 전혀 신경을 못 썼는데, 어제 술을 먹은 건 자신이나 유이경이나 똑같았다. 그런데 해장국은 자기 혼자 먹었다.

“선배님은 아침 안 드세요?”

밥은 중요한 문제였다. 강은재는 조부모님 손에 자라는 동안 아침을 거른 적이 단 하루도 없었다. 주말에도 일찍 일어나 아침을 먹었고, 고시원에 사는 지금도 편의점 삼각김밥을 먹을지언정 밥을 꼭 챙겨 먹었다. 이러다 보니 남이 밥을 안 먹으면 무척 신경이 쓰였다.

한편 유이경은 눈을 조금 크게 뜨고 강은재에게 잡힌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좀 웃겼다. 벤치 옆자리에도 앉지 않을 정도로 내외하던 애가, 밥 얘기를 하자고 손목을 잡는다고?

그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감출 생각도 않으며 대답했다.

“난 원래 아침 안 먹어요.”

“드셔야 돼요.”

강은재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뭐라도 만들어 드릴게요.”

“응?”

강은재는 유이경이 말릴 새도 없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냉장고를 벌컥 열었다. 그런데… 이 집 냉장고에는 말 그대로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냉장고는 양문형으로 굉장히 컸다. 그래서 문을 열기 전까지는 이렇게 빈곤한 꼴일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냉장실에는 500미리짜리 생수병과 각종 술 따위가 들어 있었다. 그 흔한 달걀 하나 없었다.

식재료는 하나도 없는 와중에 술의 종류만은 무척 다양했다. 유이경은 조금 머쓱한 듯 뺨을 손가락으로 긁으며 말했다.

“아. 원래 상온에 둬도 되는데. 나는 술 차갑게 먹는 걸 좋아해서.”

그쪽이 문제냐.

강은재는 혹시나 싶어 냉동실도 열어보았다. …얼음밖에 없었다. 동그란 얼음틀이 열 개는 들어 있는 것 같았고, 각얼음 봉지도 몇 개가 쌓여 있었다. 얼음이며 술은 부자인데 어째서 먹을 건 하나도 없는 거지?

해장국은 자신이 다 먹어 버렸다. 유이경에게 먹일 게 없다.

순간적으로 “가사 도우미 할게요”라는 말이 튀어나갈 뻔했다. 강은재는 하릴없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뭐라도 사 드세요.”

“아니, 정말 괜찮아요. 아침 잘 안 먹어.”

강은재는 또 순간적으로 잔소리가 나갈 뻔했다. 하지만 어제 자신을 이고지고 집까지 데려온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아서 꾹 참았다. 유이경은 자신보다 어른이지만, 이 냉장고는 단언컨대 어른다운 냉장고가 아니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자기가 먹은 해장국 그릇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냥 놓고 가요.”

유이경은 이렇게 말했지만 강은재의 양심은 그럴 수 없었다. 강은재는 말없이 물을 틀어 그릇을 헹군 뒤 수세미에 세제를 짜서 닦기 시작했다. 밥을 사다준 사람에게 설거지까지 시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음. 벌써 가사 도우미 일 시작한 것 같은데.”

“아니에요.”

“흐음.”

유이경은 설거지를 하는 강은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자신을 등지고 있는 강은재를 향해 입을 떼었다.

“나 이제 나가봐야 돼서. 밤까지는 안 들어오니까 편하게 있다 가요. 월요일에 학교에서 보겠네.”

강은재는 등 뒤로 유이경이 움직이는 기척을 느꼈다. 가는 모습은 봐야 했다. 이번에는 그가 유이경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어제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러고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세요.”

이 말을 들은 유이경의 걸음이 멈칫했다. 현관으로 향하던 유이경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그는 조금 주저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느낌은 찰나였고— 그는 강은재를 돌아보며 웃었다.

“그래. 그럼 그럴까, 은재야?”

유이경을 알게 된 이후로, 강은재는 그가 웃는 얼굴만을 봐 왔다. 하지만 지금의 미소는 조금 달랐다. 말로 꺼내자면 이상하지만, 강은재는 유이경이 진짜로 웃는 모습을 처음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이경은 곧 인사를 건넨 뒤 집을 나섰다. 이 커다란 집에는 강은재 혼자 남겨졌다. 강은재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어쩐지 어딘가가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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