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2020

夢中夢

2019 날조종교

219 by 219
6
0
0

夢中夢

 

이제부터 일어나게될 모든 일을 귀띔해주겠노라. 사탄 눈을 뜨시옵고 하늘의 아이들이 목청 높여 피비린내 울음을 울었다. 억눌린 어둠이 마침내 천하를 물들이고 천사의 날개가 우매함에 불타리라. 잔인한 달의 말씀을 새겨 들으라 명함에도 거짓이 가엽고도 얄팍한 지성을 가리더라. 본디의 섭리가 뒤틀어지매 또 한 번의 혼돈이 도래하노니 인간의 아들은 귀기울여 들으라. Deus vult, abi in malam crucem.

A의 눈이 번쩍 떠졌다. 비가 억수같이 오는 날이었다. 쇠창살이 쳐진 낡고 작은 창문이 때리는 빗소리에 요란했다. 램프 하나만 밝힌 어둑한 방. 뻗댄 손끝에 닿은 묵주가 바닥으로 툭 떨어진다. 막혔던 숨이 터져나왔다. 하아··· 와, 땀. 이미 찐득한 두 손으로 이마며 목가를 닦아냈더니 땀이 한가득이었다. 옆을 더듬어 겨우 손수건을 찾아내 손 먼저 닦는 A. 성긴 손수건 너머로 천장 위로 너울지는 불빛 그림자가 비쳤다. 땀에 흠뻑 젖은 채 손수건 쥔 손 위로 뻗은 A가 멍하니 위를 쳐다본다. 갈라져 달라붙은 머리카락이며 뜨끈한 등이 축축했다. 성미대로 가슴팍까지 잘 덮은 이불도 푹 절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몇 시지··· 세 시, 네 시. 콰르릉. 빗방울이 세차게 외벽에 부딪쳤고 어디서 바람이 새어들어오는지 램프 불빛이 천천히 일렁였다. A의 손 그림자가 커졌다 작아졌다 했다. 천천히 손수건 내려놓았더니 잠시 빛이며 그림자가 위협적인 듯 싶다 잦아든다. 설마 안 꺼지겠지. 열에 들뜬 듯한 A의 얼굴이 매끈하다. 워낙 사나워야지. 천천히 윗몸을 일으킨다. 미처 스며들지 못한 뒷목의 땀이 말라붙은 윗옷 새로 주르르 흘렀다. 워낙 사나워야지. 이불 제쳐두고 맨발을 차디찬 마루바닥에 딛으며 중얼거렸다. 손이 덜덜 떨렸다. 실신할 것 같은 공포가 밀어부친 흔적이 손톱자국으로 잔뜩 남아있었다. 워낙 꿈자리가 사나워야지··· 괜찮아. 금세 새벽 공기에 식은 머리칼이 스석거리며 한기를 전했다. 뒤를 돌아보니 A가 누웠던 자리대로 침대가 푹 꺼져있었다. 심호흡을 하며 물병을 찾는다. 뚜껑이 자꾸 손에서 미끄러져 세 번이나 고쳐잡고 나서야 목을 축였다. 느리게 방의 모습이 눈에 익는다. 돌로 쌓은 길게 빠진 벽, 투박한 나무탁자 위에 거의 닳은 램프. 손에 그제서야 침대보의 감촉이 느껴졌다. 쓰러지듯 모로 누운 A의 몸이 찼다. 피로가 몰려왔다. 떠진 A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다 반쯤 감긴다. 누운 그림자가 벽에 큼직하니 새겨진다. A가 넋을 놓고 앞을 바라보며 의식하며 숨을 쉬었다. 빗소리가 여전히 요란했다. 전부 잊고 싶었다.

"괜찮으세요, 사제님?"

문틈으로 고개를 내민 C가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 살짝 덜 마른 머리카락에 일부러 단정하게 차려입은 걸 보아 새벽기도를 드린다고 막 일어난 듯했다. A는 서둘러 몸을 일으키곤 여태 잠옷차림인 것을 추슬렀다. 느지막한 시간에 침대까지 엉망이니 그가 나타나지 않은 것에 의아한 C가 걱정할 만도 했다.

"악몽이에요?"

"···아마도요."

"내려오셔야 할 것 같아요."

A가 맡고 있는 주(主)사제 얘기다. 자격이 되는 사제들 중 순서를 정해 돌아가며 맡는 주사제는 확실히 고된 일이었다. 매일 사제관이 아닌 성당 내부에 마련된 작은 침실에서 자고 새벽같이 일어나 홀로 청소며 기도까지 마치는 것이 하루 일과의 시작이다. 미사를 총괄하여 집전하고 여러 행사도 주관하는 중요한 위치인만큼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 거다. 어린 수도자들에게 가르치기는 그렇게 가르쳤다. C가 여전히 심려하는 표정으로 들어오더니 바닥에 떨어진 성물을 주워 A의 가슴팍에 댄다. 안전히 지켜주소서. A가 C의 손을 감싸 천천히 떨어뜨렸다. 비가 오는 날이라 그랬을 거예요. 조금 늦잠잤을 뿐 괜찮습니다. 그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려는 듯 A는 평소처럼 침대를 정리하고 개어둔 사제복을 집어들었다. 

아니, 집어들려 했다. 사제복은 새카만 벨벳 위로도 보일 정도로 까만 구정물에 젖어있었다. 굳이 손을 대지 않아도 그 축축함에 몸서리가 쳐졌다. 대체···  C와 A의 눈길이 맞닿는다. C의 눈동자 흔들리는데 여전히 멎지 않은 천둥이 제 존재를 과시했다. 콰르르! 그제사 책상 위 전체에 번진 물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옷을 치워보니 제법 큰 금이 벽에 길다랗게 나 있다. 물은 거기서 흘러나오고 있는 듯했다. A가 얼른 이 분위기에서 벗어나고자 멋쩍게 웃었다. 일거리가 늘었네요. C는 아무 말 없다 고개를 끄덕였다. 

A와 C가 새벽기도를 마칠 때까지도 세차게 내리던 비는 날이 밝자 거짓말처럼 개었다. 외벽에 잔뜩 튄 진흙만 쨍한 아침 햇살 아래서 천천히 굳어가고 있었다. 그 덕에 아침부터 쓸고 닦느라 분주한 수도자들 사이로 역시 바쁜 A의 모습이 비친다. 영 좋지 못했던 꿈자리로 몸이 여태 찌뿌둥했지만 몇 달에 한 번 있는 행사를 망칠 수는 없는 것이다. 제단 뒤로 우뚝 솟은 세밀히 조각된 성상과 대천사를 그린 벽화를 비출 촛대 너머에 기다란 탁자가 놓여있다. A는 막 탁자 위 종과 성서 따위의 성물을 정렬하고 한가운데 은접시를 내려놓은 참이었다. 그 준비 정도로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지만 중요한 건 그 다음이었다. 분위기가 좀 더 정돈되고 암막커튼이 모든 창을 가리고 나면 마른 풀로 감싸 일주일간 지켜낸 불씨로 A가 하나하나 초에 불을 붙인다. 고요 속 모든 초가 빛을 발하면 그 때서야 은접시 위에 그 물건이 놓이게 된다. 가죽으로 싸맨 죽은 염소의 혀. 수사가 아닌 주사제만의 손을 거치는 이 상징적인 흉물을 A가 조심히 내려놓는다. 차게 굳기 직전의 미지근한 물컹함은 매번 새로 준비할 때마다 소름이 올라오는 것을 막기 힘들었다. 신의 식기에 어울리는 장식된 접시 위 괴악한 음식에 여태 살아있는 듯한 생기마저 감돈다. 몇몇 수도자들이 두 손 모은 채 고개를 숙인다. 헝겊으로 두어 번 손을 닦고 성서를 펼쳐든 A. 여전히 엄숙한 가운데 A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모두 신의 뜻이라 속이고 꼬드기는 이들에 엄히 이르시매 악마같은 죄는 혀에서 나온다고 하시었다. 뱀의 혀를 지닌 사탄이 대천사Prometheus께 매일 찾아가 달콤한 말을 속삭이기를, 첫째 날은 인간들이 지혜롭지 못하니 이치를 전부 알려준다 하였고, 둘째 날은 인간들이 감사할 줄 모르니 소중한 것을 가져가 일러준다 하였고, 셋째 날은 인간들이 자애를 잊었음에 간음과 야합으로 어우러지게끔 해준다 대천사의 눈을 가리고 하였더니 대천사께서 그리 하거라 대답하였다. 깃털 끝이 검게 변하고 인간들이 감언이설에 속아 서로 멸하고 있는 모습에 뒤늦게 불과 같이 노하시더라. 그릇에 걸맞지 않는 지식과 비극, 색욕이 모두 사탄의 혀놀림임에 크게 비탄하시고 그 혀를 뽑아내어 불태우시니 온 세상의 부패가 깨끗히 사라지고 비로소 평화가 찾아왔다. 이에 혀의 힘에 죽음과 삶이 달려있으매 혀를 조심하라 이르시게 되었다···.

글자 하나 하나 매만지며 낭독한 A가 성서를 조심스레 닫아 옆에 내려놓는다. 이제 마지막 단계였다. 뒤에서 대기하고 있을 터인 B가 불씨를 건네주고 그 혀를 태운다는, 불쾌한 냄새가 나긴 하지만 유서가 깊은 절차다. 그분께서 인류에 주신 지혜로 악마를 타진하고자 하는.

"사제님."

등 뒤로 B의 목소리가 났다. 자연스레 A 불씨를 건네받으려 몸을 돌리지만 상황이 다시 이상하게 꼬였다. 그러니까, 불이 타오르며 사그라드는 것을 B가 어찌할 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들고 서 있는 것이다. 가끔 있기도 한 일이었으므로 A는 그저 건네주라 손짓한 후 불씨를 감싸고 바람을 불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마치 물에 젖는 것처럼 지푸라기가 시들어가는 것은 어떻게 설명된단 말인가. 예사로 넘길 일도 아니거니와 새벽의 소동을 생각해본다면. 일순간 정적이 그를 짓눌렀다. 쏴아아. 아연실색한 A의 귓가에 끈덕한 폭우 소리가 쏟아져내린다.

무릎을 꿇은 A가 머리를 침대 맡에 처박고 있다. 주사제용 침실이 아닌 사제관의 원래 그의 방이다. 그의 성미대로 깔끔하다 못해 휑덩그레할 만치 정리된 방. 묵주를 쥐고 꿈쩍 않는 A를 조롱하듯 귓가에 개 짖는 소리며 새 우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꽉 눌러 감은 속눈썹 위로 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잡생각을 몰아내자. 전지전능하신 그분이여··· 생각은 아니고 다만 사사로운 감정이 버겁게 A를 범람한다. 수많은 가정들이 자꾸만 그를 끔찍했던 악몽으로 압도한다. 입에 담기도 싫었다. 떠올리는 것도 불경의 일종이다. 차라리 개꿈이다. 어쩌면 시험··· A가 주사제에 자원했을 때 인수인계를 받으며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이만큼 고된 일이 없다고. 정말 하겠느냐고. 육체적으로 힘든 것이냐 질문하니 그의 얼굴에 비쳤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깊은 신앙심으로 헤쳐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믿을 것은 그분뿐이다. 하나 더 알아야 할 것은, 그분은 인간의 신이시지 신의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는 것을 믿어라. 귀를 막아. 네가 듣는 것 모두 거짓이다. 그래서 A는 불안했던 만큼 신을 찾지 않았다. 계략이다. 그분의 아들아, 네가 두려운 것은 그저 흉흉한 꿈을 꾼 탓이다. 아니, 혹시 악몽이 아니라면.

"사제실로 오시랍니다."

돌연 벌컥 열린 문 뒤에 나타난 것은 황급히 자릴 피하던 A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본 C도, 자릴 대신 정리해준 B도 아닌 엄중한 목소리였다. A가 참고 있던 숨을 탁 놓는다. 때가 왔구나. 비척이며 일어난 A 천천히 걸어나갔다.

사제실은 온통 무거운 분위기에 가라앉아 있었다. 불 꺼진 넓은 방에는 주변에 무수히 놓인 거울들에 반사될 빛 한 줄기 없이 어두컴컴했다. 가운데 자리한 침대에는 젊은 남자가 수족 결박된 채 의식을 잃고 누워있었고. 침대를 둘러싼 서너 명이 인삿말 하나 없이 A를 바라본다. 전혀 예상치 못한 풍경에 멍한 A의 소매 B가 끌어당겼다.

"부마자입니다."

"예···?"

"잡귀라고 여겼는데 가벼운 게 아니었어요. 지금은 기력을 잃고 혼절했지만 깨어나면 어떻게 될지 몰라 사제님을 불렀습니다."

침대에서 역한 냄새가 났다. 물 썩는 냄새.

"그렇지만···,"

A가 침을 삼켰다.

"제가 도움이 될까요."

"사제님. 사제님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 얘기가 아니라··· ···. 반론하려던 A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기로 한다. 사사로운 - 그렇다고 여기려 하는 - 문제보다 이 사람의 구마가 먼저다.

···주르륵, 똑. 똑. 젖은 침대 시트에서 구정물이 흘러내린다. 기도문을 읊는 A의 의식이 자꾸 그 곳에 달라붙는다. 똑, 똑. 첨벙. 옷자락이 젖어들고 발 위로 물방울이 떨어진다. 울부짖는 소리가 희미하다. 악취. 사고가 옅어진다. A는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다잡곤 눈을 떴다. 움푹 패인 그의 눈가가 A를 응시하고 있다. 당신 딴 생각하지? 고개 든 A에게 느껴지는 다른 이들의 시선. B가 A 빤히 바라보며 A가 읊다 만 부분을 나지막히 읽는다. 정신 차리란 듯이. 장송곡처럼 힘이 빠지는 B의 음성이 침대를 어루만지고, 순간, 물이 넘친다. 숨이 꼴닥꼴닥 넘어가는 소리만 남고 흠뻑 젖은 A 놀라 뒷걸음질쳤다. 입술 비틀린 부마자가 몸부림치는 모양새가 흐린 눈앞을 휘젓는다. 절대 땀일 수가 없는 물이 부마자의 몸에서 새어나와 침대를 적시다 못해 범람한 것이다. 사제 하나가 급히 A를 제치며 처치에 나서고 다른 이들과 눈빛을 주고 받은 B가 A를 데리고 침대서 멀리 떨어뜨린다. 물이··· 어떻게 저 물이. 황망히 중얼거리는 A의 손을 B가 꽉 잡는다. 축축하다.

"아까 일 때문에 그러세요?"

"조금··· 집중이 어려워서. 괜찮아요. 계속 할 수 있어요."

"지치셨나봐요. 나가서 쉬셔야겠어요."

"그렇지만··· 부제님. 방금 건 제 탓이 아니라 부제님이···,"

"나가서 쉬세요. 지금 제정신이 아니시잖아요."

나긋하지만 강경한 목소리다. 뒤늦게 A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그래야겠죠. 이 상황에서 쉬는 게 되겠느냐만은. A가 고개를 끄덕이곤 문고리를 잡았다. 그보다 B가 A를 문으로 인도한다. 그 등에 손을 얹는가 했던 B가 팔에 힘을 싣는다. 쾅. A의 눈 앞에 문만 우뚝 섰다. 이제야 겨우 힘을 빼자니 기시감보다 누적된 피로가 몰려온다. 어쩌면··· 정말 피곤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분명 착각했던 거라고. 쉬면 될 일이겠구나. 사고가 막혀 안 돌아가기 시작하고 A는 그저 성당 안을 가로질러 걷는다. 누군가 옆을 스치고 급히 뛰어가는 소리며 문 너머 기도문 소리마저 몽롱히 들린다. 푹 자고 일어나자.

그날 A는 누가 와도 모를 만큼 곤히 잤다. 꿈은 전혀 꾸지 않았고 사실 거진 이틀을 내리 잤다. 다만 누군가 깨운 듯 화들짝 일어난 것이 찝찝한 것은 그제와 같았다. 그래도 꿈을 꾸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이다. 하루 종일 그 생각으로 피곤할 일은 없을테니. 개운해진 정신과 상반된 굳은 몸은 눈꺼풀 들어올리는 것도 힘겨웠다. 무슨 소리가 들리나. 비정상적으로 고요했다. A가 겨우 몸을 일으킬 때까지 바깥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지금 시간은··· 낮인데. 낮이라면 신자나 수도자들의 인기척이 있어야 할 터였다. 이상하네. 주사제 침실 문을 열자 텅 빈 성당이 눈에 들어온다.

성당 안을 헤매던 A의 눈에 들어온 C에 A는 철렁 떨어진 심장을 겨우 추스르며 달려갔다. 격식을 지켜 차려입고 심각히 누군가와 대화를 하던 C는 A를 발견하자 표정 밝아진다. 

"세상에··· 사제님. 막 일어나셨어요?"

"네··· 눈을 뜨니까··· 성당이 너무 조용하던데요. 무슨 일이라도 났어요?"

A의 물음에 살짝 표정 경직되는 C다. 

"참 잔인한 달이에요. 그렇죠?"

"왜요?"

"대지가 깨어나고 생물들이 숨을 틔우는 시기잖아요. 그런데 그 때 눈을 떠선 안 되는 것들도 피어나니까요."

C의 시선이 굳게 닫힌 문에 가 닿았다. 그제야 이곳이 먼젓번의 사제실 앞이라는 걸 깨닫는 A.

"···그리고 그만큼 현혹되기 쉽기도 하지요."

"겨울은 추우니까요. 저도 겨울 싫은데."

"B 부제님 이상한 소리 마세요."

왜인지 젖은 머리 털어내며 C, B 쏘아본다. 목에 두른 수건이 더럽다. 의아하게 보는 A를 눈치챘는지 C가 덧붙였다. 

"부마자가 몇 명 더 찾아왔어요. 이끌린 것처럼. 듣기로는 상황이 심상치 않대요. 당분간 구마 일에만 집중할 예정인가봐요. 저도 방금 돕고 오는 길인데··· 연쇄성을 주시해야 한다던가."

C의 말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스산한 새 울음소리가 정적을 가로질렀다. 어디선가 들어온 찬 바람이 그들을 감싸고 흩어진다. 하늘이 또 어둑하다.

"···부정 타라고 판 깔아주는 듯한 날씨네요."

"그래서 안할 거예요?"

B가 자긴 가야한다며 묵주를 고쳐 찬다. 일손은 없는데 붙들린 영혼들은 많다면서. 제법 의연한 모양새다.

"저도 갈게요."

아까부터 우물쭈물하고 있던 A 발걸음 뗀 B를 붙잡았다. 먼젓번에 거의 쫓겨나다시피 나온 기억에 꺼려지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가 주사제다. 흉흉한 꿈 탓에 잠시 주춤했던 것일테고 이런 시기에 나서서 처리하지는 못할 망정 숨어있기만 할 수는 없었다.

"사제님은 마저 쉬세요."

뒤를 돈 B가 A를 가만 응시하더니 미약하게 미소지었다. 다만 그것도 잠시이고 표정이 미묘하게 굳더니 그대로 걸어나가는 B. 아···. A는 앞으로 내딛었던 반 발짝 도로 거두었다. 꼬인 분위기에 C가 A 어깨를 살짝 토닥여온다. 걱정되어서일 거라고.

"B 부제님이 도움이 많이 되고 있다나봐요. 타고난 재능이라도 있는 것 같다고요. 방식이 좀··· 격한 게 흠이어도."

"격하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C가 놀라 제 입을 막더니 이내 곤란한 표정 짓는다. 들은 말을 전해도 되는지, 이미 불안정한 A에게 굳이 알려야 할지로 갈등하는 것 같았다.

"그게··· 부마자를 거의 반 죽여서 구마한다고 해야 하나. 어젯밤엔 사제님 한 분이 미쳤냐며 부제님을 떼어내서 거의 드잡이까지 갈 뻔했어요."

A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그런데도 그냥 내버려둬요?"

"저도 몰라요, 효과가 좋다니까···."

제가 말했다고 하시면 안 돼요. 마지막 말을 남기고 C는 이만 가봐야겠다며 급히 자리를 떴다.

그 주는 끔직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부마자가 쌓이다 못해 근처의 신학생마저 빙의돼 감금된 일까지 벌어지니 암울한 분위기가 찐득히 가라앉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의 신앙심이 부족한 탓이다. 끼니까지 거르며 필사적으로 기도를 올리는 무리들이 생겨났고 그에 대한 하늘의 대답은 어느 날 제단에 가득히 쌓여있던 짐승 혀였다. 누가 장난을 치느냐며 그 흉물들을 죄다 쓸어담아 치우던 부제들의 손이 공포에 압도돼 덜덜 떨렸다. A는 최대한 고개를 돌리며 자꾸만 구마의 진행도만을 물을 뿐이었다. 숨이 쫓기듯 가쁘다. 이것은 무너지고 있는 게 아니고 잠깐의 운수 나쁜 시기일 뿐이라 외운다. 그러나 잠에서 깰 때마다 이미 두려울 정도로 잘 알고 있는 것이 A을 응시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A이 지나갈 때마다 공공연한 수군거림이 그를 더 밀어붙였다. A 사제님이···, 주사제는 뭘 하나. 고개가 들어지지 않았다. 발걸음을 바삐한 A가 호흡을 가다듬고 다다른 문에 노크한다. 주교의 방이다.

"그래서 지금 그 허무맹랑한 얘길 믿으라는 겁니까?"

꽉 말아쥔 A의 손 안에 자꾸 땀이 찼다. 논리도 없이 오직 감만으로 풀어놓은 이야기이기에 쉽게 받아들여지리라 예상한 것도 아니지만.

"저는··· 꿈에서 계시를 받았다 생각합니다. 악이 깨어나고 대천사께서 힘을 잃으시는 계시를요. 세상이 악에 사로잡힐 거고 지금 사태가 시발점이···"

주교가 크게 헛기침을 했다. A를 어떻게 보고 있을지 뻔했다. 고개를 숙이고 선 A와 맞은편 책상 너머의 주교, 불편한 침묵이 몇 초 흘렀다.

"그보다 좀 더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으십시오. 설사 그게 사실이라 해도 해결방안은 뭐란 말입니까."

A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놓았다.

"···B 부제를 추방해야 합니다."

주교의 얼굴이 이그러졌다.

"앞장서서 누구 못지 않게 구마에 힘쓰고 있는 B 부제 말입니까?"

"구마 방식이 도를 넘었단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저희는 사람을 보호해야 함이 우선인데···"

"A 주사제. 그 말은 본인이 더 잘해낼 수 있다는 뜻이겠지요?"

말이 가로막힌 그대로 목구멍에 박혀 나오지 않는다. 그건··· A의 시선이 갈 곳 잃고 떨었다. 우직히 걸어온 성직자로서의 지난 날들에서 깨어져 나온 조각들이 등을 향해 낙하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사제님. 스트레스가 심하신가봐요."

사제관의 제 방에 틀어박혀있던 A를 먼저 찾아온 건 B였다. 약간 땀이 찬 손이 A의 차가운 손을 감싸잡는다.

"요새 흉흉한 일이 연이어 터지다보니 사제님이 혼란스러운 것도 이해해요."

복잡한 감정에 죽 시선 맞추지 않는 A에도 B는 부드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죄는 혀로 짓고 천냥 빚 말로 갚는단 말이 있잖아요. 사제님 주교님이랑 무슨 대화 하셨는지 알아요. 이것도 소문이지만."

놀랄 것도 없다. 이미 별것이 다 소문으로 나도는 걸 알고 있었던 A기에 됐다며 손사래쳤다.

"그리고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요. 주사제 박탈이랍니다. 말로는 이번 일 때문이 아니라 방만한 태도 탓이래요. 귀한 자릴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역시 아무 말 않는 A. 오히려 짐을 덜 수 있으니 다행이라며 B가 작게 위로했다.

"당분간 D 사제님이 주사제를 맡아주신대요. 공란으로 비워둘 순 없지 않냐면서요."

"···D 사제님은 아프셔서 쉬고 계시지 않았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마 적임자가 없다나봐요."

주사제 침실에 있던 사제님 물건은 누가 싸놨길래 제가 챙겨왔어요. B가 등 뒤에서 쌌다 하기도 소박한 종이가방 하나를 침대 옆에 내려놓는다. 바빠서 오래 못 머무른단 B는 떠나기 전 문가에 서서 A를 한 번 바라보았다.

"제가 사제님 몫까지 잘 할게요. 신경 쓰지 마세요."

꼭 당부하듯 한 마디를 남기고.

콰르릉. 미약한 천둥 소리가 A의 멍한 정신 위로 울려퍼졌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다. 어두컴컴한 방 천장 벽지 무늬를 하릴없이 세던 A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얇은 이불이 사르륵 흘러내린다. 비가 오나. 작은 창문으로 내다보니 빗방울은 없고 홀로 우뚝 서있는 성당만 보인다. 고요하다. 아무도 없구나. 그러고보니 오늘 밤에는 구마가 없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다. 한참을 가만히 앉아있던 A 조용히 신발을 신고 문고리를 돌렸다. 뒤숭숭한 마음에 홀로 기도라도 드릴 요량이었다.

햇빛이 아닌 달빛이 비추는 내부는 아무 일도 없는 것마냥 차분하고 아름다웠다. A가 걷는 아주 작은 발소리만 짧게 남았다 사라진다. 천천히 A가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평온함이 차오른다. 공허함을 평정심이 채우자 문득 D 사제 생각이 난 A가 주사제 침실을 향했다. 보지 못한 것이 꽤 오래된 데다 아직 성치 않은 몸으로 이런 어지러운 상황에 주사제를 맡는 게 버거울 그를 만나지 않는다는 것은 안 된다. 얘기라도 나누면 혼란한 지금이 아닌 예전의 저 자신이 될 수 있을 거란 희망도 희미하게 있었다.

주사제 침실 앞은 일부러 빛이 들지 않게 지어져 어둑했다. 중앙에 붙어있되 가장 화려해야 할 신을 모시는 곳과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형체만 겨우 분간할 수 있는 시야는 A도 알고 있었지만 그게 익숙해졌단 뜻은 아니다. 눈을 두어 번 깜작인 후에야 침실 앞 사람 크기의 검은 것을 인지한 A가 다가가며 살짝 목소리를 내 D 사제의 이름을 불렀다.

그 검은 형체가 A에게 빠르게 다가와 거의 밀쳐내며 뒤로 끌어낸 것은 순식간이었다. 균형 잃어 휘청이는 A를 붙잡고 어슴푸레 빛이 내리는 곳까지 끌고간 후에야 그것은 제 어깨에서 A 얼굴 떼어냈다.

"사제님, 소리 내지 마세요."

B였다. 사뭇 심각한 표정을 한 B가 죽 침실 쪽을 주시하며 방금 전보다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건 D 사제님이 아니에요. 들어가시면 안 돼요. 절 믿으세요."

D 사제가 아니라니. A가 당황한 눈길로 B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침실에서 낯익은 목소리의 짧은 비명이 울렸다. 여의치 않고 A의 목덜미를 더 세게 안은 B는 놓아달란 움직임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제 말 못 믿으세요?

"제발, 제발··· 그렇다면 뭐라도 해야죠, 부제님이, 저도···"

A가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으며 B를 떨쳐내려 하면 할수록 B는 그를 단단히 껴안아 막는다. 괴이한 소리에 정신이 없는 A의 귓가에 B의 음성이 계속 흘러든다.

"이미 늦었어요. 여기까지 나오진 못할 거예요. 전, 너무··· 무서워서. 사제님. 어디 가지 마세요. 저는 사제님 믿어요. 사제님 말 믿어요. 이 악마들 속에서 사제님과 저만 남겨진 거예요."

"잠깐, 잠깐만요···"

"사제님도 저 믿잖아요. 그렇죠. 그분께서 서로를 믿고. 사랑하라고 하셨잖아요. 사제님, 저 두려워요."

말이 점점 들릴듯 말듯 옅어지지만 강력해진다. 혼미하다. 왜 이렇게 달게 들리는지. 반대하려는 사고가 벽에 가로막혀있다. 괜찮아요. 흐트러진다. B가 더욱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부드럽게 감긴 속눈썹이 당황한 A의 시야에 들어왔다. 밀어내려는 A의 손을 B가 쥐어잡는다. A의 눈을 B가 가린다. 틈새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혀가 숨을 농밀하게 감싸고 죄책감과 기시감이 번졌다. 이러면···, 어지러운 머리 속 잠시 놓친 정신이 순식간에 딸려가 악마의 죄에 감긴다. 맞닿은 몸과 맞비벼지는 입술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천천히 입 안을 훑는 혀와 제 살덩이가 얽히고 있는 장면이 A의 눈앞에 펼쳐졌다. 누가 저를 보면 어떡하지. 단 맛의 죄가 질척하게 A를 어루만져온다. 껄끄러운 감촉이 불쾌한 환각을 불러오고 상극과 상극이 맞닿아 주체없이 감각에 이끌린다. 낭송하던 기도문과 화려하게 새겨진 십자가의 형태가 흐릿해진다. 꼭 원래 자신이 이렇게 설계된 것마냥 아득해져 두렵다. 태초로 추락하는 본분이 너무나도 달큰하고 둔해서 겁이 나. 이제야 옳다는 목소리가 연거푸 전신을 감싼다. 그야말로 정상적이지 않다. A가 손을 B의 어깨 위에 올렸다. 그러기 무섭게 B의 손이 A의 손을 제 허리로 잡아 내린다. 왜냐며 묻기도 전에 B가 A를 단상 위로 밀어 넘어뜨렸다. 압박해오는 상체보다 여전히 키스해오는 B에 더 숨이 막혔다.

"아, 아···"

켈록. A가 숨을 토해냈다. 긁는 소리가 기어나왔다. 눈앞이 흐려졌다뿐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식은땀이 바싹 마른다. 다시 굳게 다문 입이 온통 시뻘갰고 숨을 내쉬기만 했다. A의 팔을 꽉 부여잡은 B가 그를 찍어누르고 있었다. 전엔 그가 이렇게 무거운지 몰랐었는데. 간헐적으로 울렁이는 목울대가 아파 발버둥 쳐도 공포가 계속 스며들었다.

"사제님. 저 보세요. 정신 차려보세요. A. 여기 봐."

자애로운 눈길이 그에게 내렸다. A가 겨우 나오다 만 소리를 삼키며 B에 힘겹게 눈을 맞췄다.

"사제님이 그랬죠. 네? 어디다 숨겼어. 망할 공물인지 뭔지. 내 것 어디다 숨겼냐고. 도둑놈의 자식들 다 똑같아, 기껏 일러주고 일깨워줬더니 혓바닥을 뽑아가?"

이내 점점 날이 서는 눈빛과 목소리. A가 보는 앞에서 천천히 유세 떨듯 혀를 길게 내밀어 입술을 핥는다. 짓눌리는 기운에 A는 고개 돌리기는커녕 눈조차 떼지 못했다.

"돌려달랬더니 나약하게 뒤져버린 놈이 혹시 네가 경배하는 대천사신가?"

B의 눈이 번뜩였다. 형제께서는 언제나 피비린내가 나시었다. 목깃과 머리칼마다 불경하고 맛있는 손길이 닿아있었다. 새붉은 눈자위가 희번득하고 짙은 눈썹이 성호를 긋는 신성한 손가락과 닮았다. A가 숨 가쁘게 몰아쉬며 차오르는 피를 뱉는다. 쩌적. 동시에 손목의 묵주알에 금이 가더니 깨져버리고.

"대천사께서 날개가 꺾이고 새 숨이 불어넣어지셨다. 사탄의 정의가 천하에 도래하신다. 믿을 것만 믿으라 이 말이야."

단숨에 태도 바꿔 윗몸 A에게 밀착한 B가 킬킬 웃었다.

"그 놈 시체라도 끌고 인간 따위에 기생한 이유가 따로 뭐겠어. 넌 이미 본 거잖아. 그렇지?"

퍽 다정한 척 차디찬 손이 A의 목선을 훑는다. 어르는 투로 매끄럽게 내려간다.

"사제님, 그거 하나만 건네주시면 되는데. 저 사랑하시잖아요."

탐미적으로 훑는 눈길에 들어온 튿어진 묵주를 집어든 B가 아무렇지 않게 제 손에 감곤 천사 연기를 해댄다. 마지막 기회야.

"사제님. 바야흐로 새 시대입니다. 찬양받던 뒤떨어진 그분이신지,"

아무도 웃지 않는 가운데 웃음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아니면 네 목덜미와 수많은 영혼의 목숨을 쥐고 있는 나인지 선택하도록."

A의 눈꺼풀에 B의 손끝이 닿는다. 그러자 눈이 부시고 경이롭게도 사방이 밝아지는 환각을 겪는다. 축복이···

"그분의 아들아."

B의 목소리가 달콤하게 울렸다. 일순 아득해지는 흰 화폭에 먹이 부어지는 희롱의 쾌감. 씁쓸한 석탄의 향이 A를 덮친다. 까마귀의 깃털이 우수수 내렸다. 온통이 몽롱했다. 의식이 끊긴다.

"Deus vult, abi in malam crucem."

A의 눈이 번쩍 떠졌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