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L]성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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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마지막 해가 저물었다. 좋은 곳에 데려가 주겠다며 C가 K를 대뜸 호텔 최상층의 최고급 레스토랑으로 데려가더니, 선물이라며 눈 앞에 펼쳐진 야경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평소의 그의 모습에서 상상할 수 없는 세련되고 고급진 느낌의 서프라이즈였다. 아니, 평소의 그가 세련되지 않았다는 건 딱히 아니지만...
K는 식탁 위에 놓인 요리와 술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성인이 되어서 이제는 자신도 술을 할 수 있었다. 그런 기념으로 보통은 레드 와인을 마실테지만, 오늘의 메인 코스가 흰 살 도미여서 그런지 생선 요리와 어울리는 화이트 와인이 글라스에 담겨 투명하고 예쁜 빛깔을 자랑하고 있었다.
곱게 차려진 정찬에서 시선을 들어 올리니 C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고 고개를 갸웃하자 피식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는다. 곧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식사가 시작되었다.
포크로 찍어 내자마자 폭 잘리는 살을 입에 넣자, 입안에서 부드럽게 흩어진다. 꽤 수준급의 요리였다. 이런 최상급 파인 다이닝은 낯설었지만 그래도 돈값을 꽤나 하는 곳이라는 건 요리에 무지한 자신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한참을 식사에 집중하다 화이트 와인으로 목을 축였다. 잔을 내려놓자마자 자연스럽게 손등 위로 맞은 편에 앉은 이의 손이 겹쳐졌다.
“올해 마지막 밤이네.”
“...그렇네요. 그런 중요한 시간을 저랑 같이 보내도 되는 건가요?”
“너라서 가능한 거야.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C는 시선을 돌려 야경을 흘끗 바라보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K의 손 위에 얹은 남성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손등을 쓸었다. 자주 있었던 행위인 듯 꽤나 자연스러운 접촉이었고, 여성도 딱히 제지하는 기색 없이 묵묵히 있었다.
“남들이 다 하는 것, 우리도 해보면 어떤 느낌일까 해서 와 봤는데. 뭐, 나쁘지 않네.”
“...저는,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좋아요.”
“...뭐...”
“간부님과 이렇게 단둘이 한 해의 마지막을 넘기는 거. 그리고 일부러 자리를 마련해준 것도.”
K가 살며시 미소지으며 장난치듯 손등을 만지작거리는 C의 손을 겹쳐 마주잡았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
잠시 멍하니 여성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의 목덜미가 순식간에 붉어졌다. 자신을 보며 미소짓는 K의 얼굴을 보자 순식간에 취기가 가시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C가 고개를 떨궜다.
“...간부님?”
“...윽. 아니야. 너무 마셨나... 헛것이 보이는 것 같기도...”
“방으로 돌아가실래요?”
살짝 걱정스러움이 묻어나는 음성으로 묻자, C가 비틀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나며 뒤로 밀렸다. K는 자연스럽게 그를 부축해 레스토랑 밖으로 나섰다. 점원에게 눈짓으로 식탁 위의 팁을 가리켜 보이는 것도 잊지 않고.
*
C를 붙든 채 어두운 레스토랑 아래층에 위치한 객실 안에 불도 켜지 못한 채 들어가니, 어느새 12시가 가까운 시각이었다.
곧 해가 넘어갈 것이다. 그럼 이제 자신도 성인.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는 나이가 됨과 동시에... 흘끗 옆을 바라보자 C가 붉어진 얼굴로 멍하니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심 놀랐으나 티를 내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척 그를 소파에 앉혔다. C는 여전히 K를 앉은 채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쳐다보시다 얼굴 뚫어지겠어요.”
“...”
보랏빛 눈동자가 새어 들어온 달빛을 받아 일렁였다. 그 빛을 하염없이 좇던 C가 그녀의 손을 끌어 자신의 옆에 앉혔다. 무의식중에 나온 행동이었다. 좀 더 그 색을 감상하고 싶어서. 일렁이는 색채 안에 갇히고 싶어서. 괜히 K만 상사의 이런 행동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불안함의 징조가 아니었다. 이건...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요?”
“...K.”
드디어 그의 입에서 한 음절이 뱉어졌다. 그와 동시에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조금 새어 들어왔다. 그때 깨달았다. 아, 드디어 해가 넘어갔구나. 지금부터는 1월 1일이다.
이 방 밖에서는 한 해를 무사히 넘긴 걸 축하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왁자지껄하게 나고 있을 것이다. 갑자기 가슴 밑에서부터 주체할 수 없는 긴장과 기대가 피어올랐다.
“저도 이제... 성인이네요.”
“......”
안 될 걸 알면서도 시도해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K는 소파 위에 놓인 그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아까 C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자 그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게 시발점이었다. 아니, 자신이 방금 한 그 한마디가 먼저 불을 지핀 것일 수도 있었겠지만. 손이 뒤집혀 깍지를 끼더니, 돌연 몸이 옆으로 넘어가더니 세상이 뒤집혔다.
아직 취기가 도는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와인향이 미세하게 났지만 그게 싫지는 않았다. 최대한 태평한 척하려고 했으나 스스로의 얼굴 또한 달아오르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마치 그 변화가 상황에 대한 동의라 생각한 듯, 그가 천천히 몸을 겹쳐왔다. K는 제 감정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몸을 열어 그를 받아들였다.
딱히 말은 필요 없었다. 행위가 모든 대답을 대신 해줄 수 있는 것 마냥 두 사람은 서로의 숨을 탐했다. 조심스러웠던 첫 접촉에 비해 시간이 지날수록 격렬해졌다.
마음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실 술에 취했다는 건 핑계였다. C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이건 그저, 그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의 기다림이 너무 길었고, 그 기다림이 고되었고...
그래서 0시가 되었다는 걸 깨닫자마자 참아왔던 것을 저도 모르게 터트려버린 것이다. K는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티 내지 않고 그가 쏟아내는 모든 것을 받아내었다. 말없이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만이 그녀가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달빛이 이지러지는 시간. 간간히 옷깃 스치는 소리만이 어두운 거실 안을 꽉 채웠다. 남은 것은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고정된 공간 속에서 유일하게 흘러가는 것만이 답해줄 것이다.
─그만큼 기다림이 길었으니. 서로를 속박하는 감정은 고되었던 만큼 깊어지고, 함께한 시간 동안 쌓아왔던 것이 빛을 보리라.
누군가의 가슴 속 기대가 환희로 변했다. K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그 해의 첫 번째 태양이 조금씩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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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도서관 - 비문학 전집 루펠리언 타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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