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 1. 이혼을 하려면 일단 (7)
잠들기 전에 동해는 할 일이 많았다. 하슬라도 공문을 받아보았겠지만 동해는 조카가 염려되었다. 수영에 부칠 편지를 쓰고 동해는 덕우에게도 편지를 썼다.
원래 마리한의 부군은 부대를 데리고 나라 바깥에서 오는 위험을 감지하러 돌아다녀야 했다. 이전 마리한인 보문은 부군을 두지 않아 궁에 딸린 병영에서 교대로 나라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20년 전 해적들이 침입하면서 소규모 부대로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때부터 국경을 따라 위협을 감지하고 대응하는 순찰대가 만들어졌다. 하슬라와 아슬라의 아버지인 덕우는 순찰대가 창설될 때 들어갔다.
날이 풀히면 순찰대는 해적을 막으러 해안가로 이동한다. 편지는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동해는 동생이 받아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종이를 한 장 더 꺼내 받아볼 동생의 이름을 썼다.
아주 오랜 옛날에 이곳 사람들은 산과 강을 경계로 땅을 나누어 살았다. 지금 이곳은 눈만 남았다. 가끔 여름에 눈이 녹기도 했다.
마리한은 한철이라도 경작지로 쓸 수 있는 땅을 바랐다. 바닷가는 아직 그런 곳이 많았다. 순찰대장인 너덜은 예전 하슬란 집안 땅이 경작에 적합한지 조사하러 순찰대와 함께 이곳에 도착했다.
덕우에게 이곳은 의미가 깊었다. 인생을 이어가야 할 이유를 찾으려고 갈 곳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헤매다가 덕우는 이곳에 도착했다. 여기서 하슬라와 아슬라를 발견하고 덕우는 자신이 가야할 곳을 깨달았다.
하슬라를 발견한 곳을 지나 해변이 있을 곳까지 걸어왔는데도 모래밭은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더 걸어가려다 덕우는 너덜에게 제지당했다.
“거기부터 바다야.”
한 발을 뒤로 물리자 옆으로 날리는 눈발 사이로 눈이 사르르 허물어졌다. 눈 사이로 은빛 물이 스며들었다. 폭설 속에서 바다는 전혀 푸르러 보이지 않았다. 색을 모두 잃은 바다는 하늘과 땅과 구분할 수 없었다. 덕우는 너덜을 따라 몸을 돌렸다. 아슬라를 발견했을 때는 이곳에 모래가 있었다.
너덜은 순찰대원이 모두 모였는지 확인했다. 모두 있었고 누비옷이 상한 사람도 없었다. 빗어내며 빠진 양털을 모아 천 사이에 누빈 옷은 귀해서 북부로 향하는 순찰대원에게만 지급되었다. 누비옷을 입으면 어지간히 추운 날을 견디지만 이곳에서는 아니었다.
초봄까지도 이곳은 사람이 살기 위험했다. 이번 답사 결과는 그리 만족스럽지 않지만 순찰대원들에게 좋은 소식은 있었다. 편애로 비칠까봐 나중에 알려주려다 보니 덕우가 가장 늦게 알게 되었다. 너덜은 친구 동생이자 순찰대원에게 반가운 소식을 알렸다.
“덕우야, 여기서 바로 사브랑으로 갈 거야. 마리한께서 순찰대 전체에 휴가를 주셨어.”
몸이 매번 일어나던 시간을 기억하고 아슬라를 깨웠다. 수영에서는 해가 뜨기 전에 일과를 시작했다. 아슬라는 큰방에서 잠든 사람을 헤아렸다. 사라진 사람은 없었고 모두 편안히 잠들었다. 자신이나 여기 모인 애들보다는 연쇄살인범이 활발하던 시절에 젊은 시절을 보낸 고모부께서 많이 불안하실 것이다. 수리모도 그럴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니는 잠에서 깼다. 순례객들을 놔두고 마니랑 아슬라는 외양간에 가서 야옹이를 데려왔다. 먼 옛날에 있었다는 수염이 달리고 섬세하고 구멍을 요리조리 통과하는 희한한 동물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 동물이 양이랑 얼마나 닮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야옹이는 집안 양들 중에서 가장 섬세했다. 야옹이는 낯을 심하게 가렸는데 하슬란 사람 발소리가 아니다 싶으면 소리를 질러댔다. 경비도 확실히 세워두고 경비에게 줄 풀과 물그릇도 준비해두고 두 사람은 순례객들은 자게 두고 아침 식사를 준비하러 갔다.
아침밥을 먹고 동해는 지도를 펴서 측량하러 가야 할 곳들을 셌다. 해가 갈수록 샤로 북부에서는 측량을 요구하지 않았다. 올해는 북부에서 아예 요청이 들어오지 않았다. 동부가 대다수였고 어제 남은 일을 마쳤으니 사브랑 주변만 남았다. 동해는 학교 보따리를 등 뒤에 놓고 밥 먹는 아이들을 보다가 아슬라에게 부탁했다.
“슬아야, 나 나갈 때 애들 태워가게 수레에 양 좀 더 매어 줄래?”
“저희 통학차량 있어요.”
“요즘엔 그런 것도 있어? 그럼 빨리 나가야겠다. 정문에서 안 부딪히게.”
“그런 게 있었어?”
어제 애들 학교 보낼 때는 등교시킬 생각밖에 없어서 마니는 그런 게 있는 줄 알아볼 생각도 못했다. 아슬라는 고모부가 자신을 바라보자 얼떨떨했다. 아슬라가 학교 다닐 때는 통학차량이 없었다. 순례객들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졸업해서 까먹었어요.”
“다 같이 가서 데려오는 줄 알아가지고.”
아침에 순례객들이 방문을 나서자마자 우렁차게 야옹이가 울어서인지 아이들은 야옹이가 끄는 수레에 타길 겁냈다. 아이들만큼 야옹이도 아이들을 무서워했다. 아슬라 뒤에 숨어서 뺨을 아슬라 다리에 붙인 야옹이는 이제 울지도 않고 웅크렸다. 아슬라는 아이들을 손짓해서 보내고 양을 쓰다듬었다.
“안 할게, 야옹이는 고모랑 다녀오자. 그럼 좋지?”
양은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살살 쓰다듬어주자 외양간 자기 자리로 돌아가 푹 퍼졌다. 아슬라는 수레를 새로 꺼내러 갔다. 순례객들이 집안 양들이랑 친해지려면 시간이 걸리겠다.
연쇄살인범 하나가 사브랑 대로를 텅 비웠다. 날이 풀리면서 아침부터 안부라도 물으며 다닐 사람들은 집에만 머물렀다. 순례객들 모두가 아슬라를 따라가고 싶어했지만 아슬라는 마니 곁에 최대한 사람이 많이 붙어있길 바랐다. 아이들을 교실까지 데려다주고 아슬라는 통학차량을 신청하러 담임 선생님을 찾았다. 반에서 받는 신청은 끝났고 직접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아슬라는 담당자 사무실로 향했다.
혼자 있으면 연쇄살인범이 접근할까봐 불안하진 않았다. 고모부도 곁에 장정들이 있으니 괜찮다. 아슬라는 수리모가 걱정되었다. 연쇄살인범이 가족을 해쳤다. 게다가 수리모도 범인이 찾는 유형이다. 신청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아슬라는 잠깐 아슬란 저택에 들러서 수리모를 만나보면 어떨까 싶었다.
마리한께서 무슨 뜻으로 배우자를 남성으로 지정했는지 모르겠지만 아슬라는 불쾌하지 않았다. 수리모를 만나고 수리모가 어떤 사람인지 아슬라는 첫눈에 알아봤다. 다른 남성이었다면 아슬라도 다르게 행동했을지 모른다.
수영에 들어가자마자 아슬라는 가족을 제외한 아저씨들을 혐오하면서 성인기를 시작했다. 누나인 하슬라가 전공을 쌓기 전, 그들이 해적에게 몰살당하기 단 며칠 만이었다. 아슬라에게 그들은 성욕으로 가득 찬, 불쾌하고 소름끼치는 이기적인 존재였다. 중년을 앞두고 아슬라는 속병을 앓았다. 중년이 되면 짧은 기간이지만 자신이 본 그들처럼 자신도 허세만 부리고 남을 깔보고 이용할 생각만 하는 파렴치한 존재가 될까봐 두려웠다.
나이는 피할 수 없었다. 수리모를 만나고서 아슬라는 걱정과 불안이 가라앉았다. 아슬라는 처음부터 수리모에게 호감이 생겼다. 수리모랑 이야기를 나눌 때는 사람이 사람과 대화하듯이 편안하고 자연스러웠다. 수리모 덕분에 아슬라는 처음으로 중년 남성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성립했다. 그 때문에 아슬라는 수리모를 걱정했다. 자신이 겪어왔던 이상한 아저씨 수가 훨씬 많았다. 위태로운 상황에서 수리모를 옹호해줄 동성 또래는 적을 것이다. 특히 지금처럼 연쇄살인범이 돌아다닐 때는. 아슬라는 수리모를 돕고 싶었다.
모퉁이를 돌아서 사무실 입구로 향하다가 아슬라는 눈에 익은 남성을 발견했다. 자신을 등진 남성은 건물로 감싸인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수레가 왜 건물 안까지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곁에는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새하얀 양 두 마리가 수레에 매여 있었다.
“수리모?”
이틀 궁에서 수리모를 보지 못했을 뿐인데 형산은 평생 살아온 곳이 스산하게 느껴졌다. 사람이 적진 않았다. 사브랑에서 궁은 오늘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간 곳이었다. 아직 학교가 열려 있어서 학부모들은 학교에 이어서 궁에도 찾아왔다. 성인이 아닌 피해자는 없었지만 아들을 둔 부모들은 자식이 살인범에게 첫 예외가 될까봐 염려했다.
교장선생님 앞으로 공문을 보내놓고 형산은 학부모들을 떠올렸다. 자신을 키워줬고 염려해주는 사람들은 있다. 둘 모두 형산 곁에는 없었다. 어머니이자 이전 마리한이었던 보문은 해적을 소탕하자 궁을 나가셨고 수리모는 나정이가 자라자 꼬박꼬박 궁을 나가 잠들었다. 어릴 때는 그렇지 않았다. 힘들고 불안할 때면 어머니께서 위로해주셨고 어머니께서 바쁘시면 수리모가 자신을 돌봐주었다. 나정이가 태어나기 전에 형산이 갓 성인이었을 때도 그러했다.
수리모는 점심 설거지를 하다가 손을 닦고 형산을 맞이했다. 어머니랑 점심 먹다가 시작된 논쟁은 아까까지 계속되었다. 하도 답답해서 형산은 대화를 그만두고 수리모를 찾았다.
“점심이 모자랐어요? 뭘 더 드릴까요?”
“그거 때문에 온 거 아니에요.”
“무슨 일 있어요?”
수리모는 자신이 부르면 언제나 다정하게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봐주었다. 공손하고 다정했지만 항상 선이 있었다. 성인이 되면서 형산은 남자들이 아빠로든 삼촌으로든 어떻게든 아이와 유대감을 쌓고 집안에 스며들려는 모습을 많이 봤다. 방금 전 어머니께서는 수리모가 떠나고 싶다면 뜻을 들어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오늘 아침상과 점심상을 내올 때도 수리모는 떠나고 싶다고 하지 않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할지 침착하게 기다려주는 사람은 자신이 뭘 원하는지 몰랐다.
“그냥 궁에서 사시면 안 돼요?”
“집에서 다녀야 편해요.”
형산이 하는 말을 듣고 수리모는 안심하며 웃었다. 누군가에게는 웃으며 할 답변은 아니었다. 아기 때부터 보살펴주고 어머니를 보필하는 사람을 다른 집에서는 남편이나 아버지로 불렀다. 자랄 동안 형산에게 그런 사람은 있었지만 수리모는 아빠라고 부를 때마다 머쓱해했다.
수리모는 본인이 자란 집이라서 아슬란 저택을 편하게 여기는지도 모른다. 형산은 그래서 수리모를 범인이 잠잠해질 때까지 아슬란 저택에서 머물도록 명했다. 마음 같아서는 수리모를 솔뫼랑 함께 자기 곁에 두고 싶지만 이제까지 형산이 봐온 수리모라면 반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수리모?”
재차 부르고나서 아슬라는 이 사람이 수리모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세가 달랐다. 돌아선 모습을 보고 아슬라는 직감을 확인했다. 수리모가 아니었다. 이런 오해도 한두 번이 아니었는지 상대방은 얼굴을 굳히고 있다가 인사했다.
“저는 수리모 형입니다.”
“미안합니다, 미처 못 알아봤습니다.”
수리모의 형은 수레와 양을 놔두고 아슬라에게 다가왔다. 곁에 있던 양들은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편히 쉬었다.
“수리모를 만나러 가십니까?”
“시간이 되면 뵈러 가려고 합니다.”
“요즘 수리모가 일이 많아서 만나기 어려우실 겁니다.”
상중이니 수리모도 손님맞이며 고인을 위한 준비를 하느라 힘겹고 경황이 없을 것이다. 언제 수리모를 만나러 가서 수리모의 형까지 같이 하슬란에 가있자고 설득해야 할지 아슬라는 고민했다. 그제 잠깐 만났을 때 아슬라는 이 사람이 수리모와 함께 사는 가족이라고는 짐작하지 못해서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그럼 나중에 뵈러 가겠습니다.”
“그게 모가 정말로 말씀드리려던 뜻이겠습니까?”
이제야 아슬라는 그제 저녁에 집안 사이를 가르며 다가왔던 사람을 알아봤다. 저녁 어스름에 봤을 때는 수리모랑 닮은 모습이 있는 줄 몰랐다. 그때 수리모의 형은 아슬라가 많이 봐왔던 아저씨들과 비슷해보였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수리모가 큰일이라도 낸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오로지 아슬라는 사브랑에 온 지 얼마 안 되고 자신이 다른 집안일을 모르기 때문에 그때 개입하지 않았다.
아슬라는 수리모와 이 사람이 함께 살아온 사람이라고 인식하지 못한 이유를 찾아냈다. 자세도 그렇지만 말투도 달랐다. 수영에서 사귄 친구인 새미는 루미를 배우자로 맞은 후에 루미를 닮아 좀 더 차분해지고 말수도 적어졌다. 행동도 작아지고 좀 더 조심스러워졌다. 하지만 수리모의 형은 태어났을 때부터 수리모와 지냈을 텐데도 얼굴만 닮은 다른 사람이었다. 어쩌면 일찍 장가들어서 다른 집안에 동화되었나보다. 아슬라가 말이 없자 수리모의 형이 말을 이었다.
“모는 당신과 거리를 두고 싶어합니다.”
“수리모가 왜 거리를 두고 싶어합니까?”
“당신을 생각해서 그러지요. 모가 당신에게 아버지뻘 아닙니까.”
“제 또래는 다들 혼인했거나 할 마음이 없습니다. 더 어린 사람을 찾을 수는 없잖습니까.”
혼인을 간절하게 바라지도 않았지만 아슬라는 이 형이라는 사람 말에 동의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둘 사이 거리는 수리모 말고 다른 사람과 할 이야기도 아니었다. 수리모의 형은 끈질기게 대화를 이었다.
“집안끼리도 멀어진 지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그저께 뵈었을 때는 다들 반가워하셨습니다.”
“아버님께서 수리모와 사이가 멀어지셨다는 이야기도 들으셨을 겁니다.”
“다시 만나면 반가워하실 겁니다.”
“게다가 아슬라 님께서는 수리모가 좋아할 만한 남성도 아니시잖습니까.”
이 말은 아슬라도 받아치기 어려웠다. 당연히 수리모가 아니면 모를 내용이겠지만 대화 상대는 수리모의 가족이었다. 수리모가 형에게만 자신을 두고 솔직하게 얘기했을지도 모른다. 아슬라는 수리모의 형이 말하길 기다렸다.
“수리모가 정말 당신에게 마음이 있었다면 그만큼 가까워질 기회도 많았는데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냇가에 씻을 때든 별채에서 주무실 때든…….”
“당신이 참견해도 될 일이 아닙니다. 우리 일은 수리모랑 이야기하게 두십시오.”
괜히 들었다. 아슬라는 수리모의 형을 피해 수위실로 향했다. 수리모의 형이 수리모랑 친한지는 몰라도 당사자도 아닌 사람이 할 말이 아니었다. 아슬라가 곁을 지나가자 수리모의 형은 아슬라를 불렀다.
“그럼 이것만 기억하십시오. 당신에게 보이는 수리모가 진짜일지를요. 점잖고 친절하게 보이지만 당신도 알 겁니다. 당신이 부군 후보일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20년 전인데 당연히 바로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 일이라곤 훈련장에서 나오고 마침 누나도 수영에 있겠다 아슬라는 필요한 짐만 꾸려서 곧바로 미래를 찾아간 것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또 무슨 헛소리를 할까 싶어서 아슬라는 걸음을 재촉했다. 발소리는 따라오지 않았다.
“수리모를 멀리하십시오. 내 동생이라 아끼지만 다른 사람에게 가까이하라고는 못하겠습니다.”
할 말만 하더니 수리모의 형은 곧바로 수레를 타고 자리를 떠났다. 신청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서 아슬라는 수리모를 보려고 아슬란에 들르려 했다. 갑자기 휴교령이 내려서 모든 학생들이 집에 돌아가는 통에 통학차량은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탈 수 있대서 수레를 가져온 아슬라는 아이들을 태워갔다. 수위 아저씨 부탁을 받고 가는 길에 몇 명 더 태우기까지 했다.
점심을 먹기 전에 동해에 이어 아슬라와 아이들이 돌아오자 마니는 마음이 놓였다. 상상 속에서는 연쇄살인범이 주요 무기로 알려진 삽을 들고 아슬라 뒤를 살금살금 따라다니며 훔쳐보다가 크게 삽을 휘두르곤 했다. 멀쩡하게 돌아온 아슬라는 양들에게 물을 떠다주었다.
한눈에 봐도 순례객들이 아슬라가 잠깐 안 보인 동안 마니 곁에 얼마나 붙어있었는지 보였다. 동해는 마니가 숨 좀 쉬면서도 안전하게끔 아슬라와 둘만 두고 순례객들을 모아서 집안에 있는 장비들을 소개하러 떠났다. 아슬라는 조금 아쉬웠다. 고모는 20년 전에 수리모가 자신이 어떤 관련이 있었는지 아실 분이다. 다행히 옆에 고모부가 계셨다. 마니가 평생 바라던 순간이 마니를 습격했다.
“고모부, 제가 훈련장 퇴소하고 수리모한테 무슨 일 있었어요?”
“어, 어?”
아슬라가 힘겨운 수군 생활을 뒤로하고 돌아오면 탈영 벌금을 챙겨주면서 간악한 서기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 말하는 모습을 마니는 수도 없이 상상했다. 꿈으로도 꾸곤 했다. 며칠 지나서는 전공을 세운 하슬라를 따라 돌아온 아슬라에게 그간 한 고생을 위로하면서 수리모가 꾸민 음모를 알려주려고 했다. 당장 수리모 준다며 누룽지 굽던 아슬라에게도 마니는 수리모가 조카를 마리한의 부군으로 앉혔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막상 자신이 바라던 순간이 오자 마니는 쉽게 말하지 못했다.
수리모가 부군 후보 훈련장에서 아슬라를 내보냈는지 아닌지는 자신이 확인할 수 없었다. 솔뫼가 부군으로 뽑혔다고 알린 사람은 수리모지만 원래 잡다한 일은 서기가 했다. 어느 것 하나 아슬라에게 사실이라고 말해주기 부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자 마니는 입을 열기 힘들었다.
“제가 입대하고 나서 수리모가 저랑 관련될 일이 있었어요?”
“일?”
“수영에는 소식이 오지 않았는데 수리모랑 제가 연관된 일이 있나 해서요.”
“없었어. 편지도 없고 들른 적도 없었지.”
“그럼 아무 일도 없었나보네요.”
동해가 순례객들을 이끌고 돌아오자 마니는 살아났다. 차라리 순례객들을 꼬리에 달고 다니는 편이 건강에 좋겠다.
동해가 다른 집에는 없을 장비를 보여줘도 순례객들 반응은 똑같았다. 와 신기하다! 이제 아슬라님께 가요! 마니가 좀 쉬고 나면 아슬라 숨통을 틔워주고 싶었는데 안 될 모양이다. 동해는 아슬라에게 눈짓해두고 마니를 데리고 집안 마당 가장자리를 따라 걸었다. 순례객들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 남편은 아직도 넋이 나갔다.
“좀 쉬었어?”
“아슬라가 옛날 얘기를 물었어. 훈련장에서 나오고 수리모한테 무슨 일이 있는지.”
“애한테 왜 그런 말을 꺼내?”
드디어 남편이 일을 쳤다. 언젠간 수리모에게 복수하고 말겠다더니 동해는 마니가 이럴 줄 알았다. 군인만 가득한 곳에서 민간인들과 교류가 가능한 곳에 왔으니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도 알고 집안도 안정적인 이가 아슬라랑 알고 지내면 좋겠다고 여겼는데 남편은 앙갚음이 먼저였다. 마니는 아내에게 혼나자 억울했다.
“내가 안 했어, 아슬라가 꺼냈지. 오자마자 갑자기 물었어.”
“아슬라한테 당신이 평소 하고 다니던 말 다 했어?”
“아무 말도 안 했어.”
자신이 봐온 남편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동해는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마니는 저 멀리 외양간에서 순례객들에게 양들이 놀라지 않으면서 곁에서 양을 쓰다듬는 법을 가르쳐주는 아슬라를 바라보았다. 하슬라와 아슬라에게도 그랬고, 수영에서 올라온 아이들에게도, 운정이에게도 그랬지만 아이들에게는 올바르고 좋은 것을 보여줘야 했다.
“아슬라한테 말하려니까 그게 정말 사실인지 모르겠어서.”
“잘했어.”
기운을 북돋아주면서 이 기회에 마니가 수리모에게 품은 원한을 없애버릴 수도 있겠지만 동해는 아슬라가 오늘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듣고 왔는지가 중요했다. 잊으려고 했는지 수영 생활이 바쁘고 힘들어서 잊었는지 아슬라는 한 번도 부군 후보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오늘까지는. 남편 손을 꼭 쥔 채로 동해는 외양간을 향해 마당을 빙 둘러갔다.
점심을 먹기도 전에 아슬란에서는 문상객을 맞을 준비를 마쳤다. 아직 시신이 검시소에 있어서 주검이 도착해야 준비를 마칠 것이다. 태화가 보기에 찾아올 손님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연쇄살인범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에는 집집마다 집주인과 다른 가족 1명만 문상을 가서 인사하고 부조를 하고 왔다. 이번에도 그럴 듯싶다. 태화는 일을 마치고 임시로 지낼 집으로 내려가는 동생을 지켜보았다.
사촌형 말이 옳았다. 수리모가 홀로 있으면 연쇄살인범의 표적이 될 수 있었다. 사촌형의 말을 듣고 다른 가족들도 두세 명씩 모여 지내기로 해서 모두들 짐을 싸러 갔다. 집안에 남자는 이제 둘뿐이라 수리모 짝은 사촌형이 되었다. 사촌형이 이미 수리모의 짐을 전부 자기 집에 옮겨두어서 수리모는 몸만 가면 되었다. 수리모는 몸을 돌려 자신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사촌형의 집은 대문에 가장 가까워서 다른 곳으로 오가기 편했다. 하지만 까마귀떼와도 한적한 대나무숲과도 멀었다. 사촌형이 준비해준 자기 방에 들어가서 수리모는 한숨을 쉬었다. 다른 건 다 있었지만 필사하던 책이 없었다. 가는 김에 까마귀들 밥도 주려고 수리모는 볶은 거저리를 챙겼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