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 1. 이혼을 하려면 일단 (6)
마니는 이불을 안아든 채로 멍하니 큰방을 향해 걸었다. 아슬라는 마니 품에서 이불을 빼내어 자기 어깨에 걸쳤다. 남은 순례객은 이제 두 손으로 셀 수 있었다. 마니와 아슬라 뒤를 따라서 순례객들은 자기 짐을 들고 큰방으로 이동했다. 큰방 문가에 자신과 고모부 자리를 이불로 잡아두고 아슬라는 고모부를 불렀다.
20년간 마니는 아슬라가 갈 수 있었던 좋은 길을 막았다는 이유로 수리모를 미워했다. 그렇다고 가학적인 살인범한테 걸려서 수리모가 고통스럽게 죽길 바라지는 않았다.
하슬란을 떠나는 순례객들은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신속하게 떠나길 권고했다. 40년 전에는 오직 하슬란과 아슬란에서만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어제 아슬란에서 피해자가 나왔으니 하슬란도 그들에게는 위험해보였다. 떠나면서 그들은 가족들이 알려준 사건 경위도 말해주었다. 남은 순례객들은 들었던 내용을 빠짐없이 마니에게 전달했다.
그 집에 그 나이 남성이면 수리모가 맞았다. 게다가 피해자는 수리모 이름이 수놓인 초롱도 들고 있었댔다. 40년 전에는 순례객들에게 경각심을 주려고 그들을 모아두고 사건 경위를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집안 바깥에서 수리모가 알던 사람 대부분이 연쇄살인범의 피해자가 되었다. 사브랑에 있는 자기 또래 중에 안 그런 사람 있겠냐만은. 살인범에게 공격당하는 순간 수리모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깨달았을 것이다. 수리모가 겪었을 끔찍한 마지막을 떠올리다가 마니는 수리모의 벗을 떠올렸다. 순찰대가 돌아오려면 한참 멀었지만 중간에 보급하러 들를 곳에 편지를 부치면 덕우도 소식을 들을 것이다. 동해가 돌아오면 아슬란에 어떻게 조의를 표할지도 의논해야 한다. 해야 할 일이 몰려오는데 마니는 자꾸만 수리모 생각이 났다.
“고모부, 아슬란에 언제 가세요?”
“오늘은 아슬란에서도 힘드실 거고 이따 가려고.”
“저도 같이 갈게요. 수리모가 괜찮은지 만나보려고요. 마리한께서 수리모도 집에 가있으라고 하셨대요.”
몰려오던 생각이 확 사라졌다. 마니는 눈을 끔적였다.
“그럼 이번에 아슬란에서 돌아가신 분은 누구시지?”
“누가 돌아가셨어요? 마리한께서 집안에 무슨 일 없냐고 하시더니 인사가 아니었나봐요.”
궁에 다녀와서 아슬라가 전할 소식은 두 가지밖에 없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마리한께서는 보고를 받으셨을 테니 세부사항까지 다 아셨을 것이다. 더 알아볼 기회가 사라져서 마니는 아쉬웠다.
“마리한께서 다른 말씀은 하시지 않고?”
“솔뫼는 괜찮다고 하셨어요. 아슬란 어르신께서 돌아가신 줄은 몰랐어요.”
“아슬란에 연쇄살인범이 다시 나타났대요.”
남아있던 순례객 중 하나가 대화에 끼었다. 다른 순례객들도 앞다투어 말했다.
“혼자 있는 순례객만 죽인대요.”
“남편이나 아들도 안심할 수 없대요.”
“죽을 때까지 때려서 죽였대요.”
젊은 남자들은 들려오는 대화로 봐서 아슬라에게 소식을 알려줘야 한다고 판단했다. 아슬라가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면 주변을 경계하고 자신들을 보호해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하슬라 장군과 그 동생 얘기를 들어온 젊은 순례객들은 아슬라가 하슬란 저택에 배치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크게 안심했다. 순례객을 살해하는 범죄자라도 근 20년을 밤바다에서 기어올라오는 해적들을 무찔러온 아슬라는 이길 수 없다. 하슬라 장군께서 여기 계시면 좋았겠지만 지금 그들에게는 아슬라밖에 없었다.
겨울 이불은 무거워서 아슬라는 순례객들 몫까지 자신이 들어다 방에 가져다주려 했다. 하지만 이날 이때부터 연쇄살인범이 사라졌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순례객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아슬라 뒤만 졸졸 따라다닐 예정이었다. 연쇄살인범이 들이닥치면 아슬라는 살인범만 상대하면 되도록 그들은 각자 이불을 들고 위태롭게 큰방으로 다시 돌아갔다. 순례객들 말을 듣고 고모부가 걱정되어서 아슬라가 고모부 뒤를 따라다니던 중이라 자연스럽게 하슬란 저택 내 남성들은 모두 모여 다녔다. 그 때문에 마니는 아슬라에게만 말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다. 아슬라의 생각은 아슬라가 염려하는 또 다른 남성에게 가있었다.
“아슬란에는 언제쯤 갈 수 있을까요?”
“저희도 같이 가서 조의를 표하면 안 될까요?”
“아슬란에 같이 가요.”
“아슬란 분들이 마음도 추스르시고 문상 받으시면 가자. 당장 가면 손님맞이하느라 힘드셔. 조문 받는 데 며칠은 걸릴 거야. 이제 겨우 검시 들어갔을걸.”
사브랑에서 조사관을 맡은 화정은 전임 조사관인 미리가 남겨둔 기록 중 40년 전 것을 꺼냈다. 궁에 보관된 40년 전 연쇄살인범 증거물과 조서를 가지러 가는 것보다 이 편이 빨랐다. 인수인계를 시작했을 때 미리는 자신이 처음 조사관이 되었을 때 맡았던 사건을 이야기해주었다.
두 번째 일어난 살인이 첫 살인과 연관이 있다고 밝혀졌을 때 순례객들은 연쇄살인범이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아무리 밤산책을 피하고 가족들과 함께 있으라고 알려도 순례객들은 모여 있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몇 사람씩은 밤에 집을 나섰다. 피해자는 급격하게 늘어났다. 유족들은 신원을 확인한 뒤에 한동안 생활 자체가 힘들었다. 실종으로 처리하긴 했지만 정황상 연쇄살인범의 피해자가 되어 시체조차 찾지 못하는 경우가 급증했다. 당시에는 빈 무덤이 많이 생겼다.
미리가 퇴직하고 얼마 안 되어서 연쇄살인범이 다시 나타났다. 화정은 자신이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일인지 고민했다. 미리에게 편지를 쓰려다 화정은 종이를 넣어두었다. 수영에서 종이를 만들면서 전보다 종이를 구하긴 쉬워졌지만 여전히 귀한 물건이었다. 글씨를 쓴 종이라도 다시 쓰곤 했다. 화정은 일어나서 검시실 문을 열었다.
아슬란에서 만드는 비누 중에는 검시실 같은 곳에 들어가는 특수한 비누도 있다. 향이 없고 씻고 나면 손이 매우 건조해졌다. 겨울에 이 비누를 자주 쓰면 손등이 갈라졌다. 먼 옛날에는 손을 보호해주고 검시에 영향을 주지 않는 아주 얇은 장갑이 있었다고 했다. 가질 수 없는 것은 놔두고 화정은 앞에 놓인 시체를 살폈다.
유족들 모두가 한번씩 보고 확인한 터라 신원은 확실했다. 미리가 들려줬던 예전 범행보다는 덜 잔혹했다. 하루에 세 명이 발견되었을 때 미리는 온종일 사건 현장에서 남은 두개골 파편을 찾아 제자리에 연결했다. 과잉 살해는 갈수록 심해졌고 어느 순간에 피해자는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다. 반가운 일이었을 텐데도 미리는 범인이 사망했기보다는 휴지기에 들어갔다고 여겼다. 그 말을 들었을 때 화정은 웃었다.
“죽었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요? 40년이 지났는데 다시 시작하진 않을 것 같아요.”
“지금은 원하는 걸 가졌으니까 멈췄겠지. 하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처럼 교류할 수 없는 사람이 계속 원하는 걸 가질 수는 없을 거야. 사회나 집단에서 배제되든 원하는 것이 사라지든 다시 가질 수 없게 되면 그때 시작하겠지.”
여성을 공격한 적은 없지만 미리는 여성도 피해자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초기에는 20대 순례객 외에도 40대인 남편, 20대 아들처럼 순례객이 아닌 다른 대상을 공격했다.
갈수록 훼손 정도가 심해져서 미리는 범인이 사회 규범에 맞게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보았다. 엄청난 분노와 원한을 품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 대상이었다. 여성, 어린이, 어르신, 병약자를 강압적으로 대하는 특징이 있을 거라고 봤지만 용의자 중 절반이 머리가 반쯤 사라져서 나타났다. 혹은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다.
미리는 당시에 범인을 20대 순례객으로 추정했다. 가설이 맞다면 순례객이 아닌 사람들이 사망한 이유도 설명됐다. 범인에게는 집안 남성들 또한 자신이 차지할 지위를 누리는 방해물이었다. 그래도 순례객이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한데 모여 지냈을 텐데 공격성이 두드러지는 사람은 보고되지 않았다. 발견된 피해자 중 누구도 저항한 흔적이 없었다. 만나서 안전하다고 느낄 만한 대상이 공격적이고 사회 규범에서 벗어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지만 상반된 특징에 모두 해당하는 사람은 찾기 어려웠다.
40년 전과 달리 시신의 두부는 함몰되지 않았다. 피가 닦인 얼굴은 바로 알아볼 정도였다. 시신의 소매 안쪽에 피가 묻어있으니 의식을 잃기 전에 본인이 닦았을 가능성이 있다. 화정은 오늘 현장에 가서 이 사람과 똑같은 얼굴을 둘이나 봤다. 고인과 얼굴이 똑같던 어르신은 나서서 초롱을 치워주시려고 했다. 어르신께는 조사에 필요하다고 정중히 말씀드리고 화정은 초롱을 담아왔다. 사건은 밤과 새벽 사이에 벌어졌다. 범인은 초롱을 보고 피해자를 습격했을 것이다. 40년간 살인범은 이제 없다고 안심하고 살아왔을 분께서 겪었을 마지막이 화정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손과 옷은 온통 풀물과 흙물이 들었다. 현장에서 핏자국과 쓸린 땅을 따라갔을 때 화정은 대나무숲에 도달했다. 발견 장소인 시내에서 떨어진 곳이었으니 아직 의식이 있었을 때 피해자는 도움을 요청하려고 이동했을 것이다. 범인은 특징적인 행태로 가장 먼저 전면에서 후두를 가격해 파열시켰다. 피해자는 음성으로 도움을 바라진 못했을 것이다. 연쇄살인범이 이번 사건 범인이 맞다면 그가 옮겼을 리는 없다. 연쇄살인범은 한 번도 피해자를 살려두거나 사건 현장에서 옮기지 않았다. 미리가 남긴 기록을 보면 피해자들은 발견 장소에서 살해되었다.
어쩌면 40년이 지나면서 범인은 사람들의 행동 양식을 익히고 범행을 주저하고 현장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세월이 흘러서 체력이 전보다 떨어졌거나.
점심을 준비할 동안 마니는 한 순례객을 주시했다. 아슬라 뒤로 졸졸 따라오는 순례객들 사이에서 한 사람이 유독 행동이 어색했다. 확인하면 서로 피곤해져서 요즘은 믿고 넘어가지만 가끔은 이런 일이 생긴다. 마니는 아슬라에게 부탁했다.
“밖에 솥 걸어둔 거 치워야겠다. 돌도 좀 치워줄래? 끝에 한 분은 저랑 같이 식사 준비해주세요.”
순순히 돌아온 순례객은 마니를 도와서 수저를 준비하고 반찬을 그릇에 담았다. 자신이 잘못 알아봤을 가능성도 있어서 마니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어른이에요.”
“그러면 학교를 졸업하셨겠네요. 졸업학년에 제일 많이 들은 수업이 뭐였어요?”
“조금 있으면 졸업해요.”
예상이 맞았다. 아이는 앞치마자락을 쥐고 손끝으로 말았다 풀기를 반복했다.
“아직 학교를 다니면 성인이 아니잖아요. 성인만 순례할 수 있어요.”
“조금 있으면 성인이에요.”
“지금 몇 살이에요? 제가 학교에 가서 문의해도 될까요?”
“15살이요…….”
어제 정신이 없는 통에 키만 보고 넘겼나 보다. 자세히 보니 웃자란 데다 얼굴이 주변 순례객들보다 훨씬 어렸다. 하슬라가 순례객을 시앗으로 들이지도 않겠지만 딸인 운정이보다 어린 애라면 어떡할지 알았다. 마니는 일어나서 앞치마를 벗었다.
“보호자 어디 계시니?”
아이는 말이 없었다. 마니는 다시 앞치마를 둘렀다.
“점심 먹고 늦어도 학교 가자. 학교 마치면 여기 와서 숙제하고, 알았지?”
“아빠가 때가 되면 돌아온다고 하셨어요.”
“그랬어?”
“아빠는 제가 받을 거 다 받고 대우받는 세상에서 살게 만들어주신댔어요.”
힘들면 맡아줄 사람이라도 구하지 그냥 도망친 놈이 비겁하게 애를 챙기는 척 한다. 물론 마니는 속으로만 욕했다. 어른은 아이들에게 사회적으로 올바른 반응을 보여줘서 삶에 적용하도록 도와줘야 했다.
“그랬구나.”
“제 친구도 아빠가 그렇게 말하고 갔대요.”
“친구 누구?”
아이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고 마니는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쟤는 누가 봐도 성인이다.
식사하고 설거지감만 물에 불려 놓고 마니는 애들을 챙겨서 학교로 갔다. 이틀이나 나오지 않았으니 선생님들도 걱정할 것이다. 교실에 애들을 데려다두고 마니는 아슬라를 비롯한 장정들을 뒤에 달고 돌아갔다. 예정에 없던 일정이 생겼다. 마치고 집으로 갈 때 애들 집에도 들러 짐 챙기는 일을 도와야 했다.
아직도 태화는 진정하지 못했다. 처음에 고인을 발견한 사람은 초롱을 보고 당황해서 태화에게 달려왔다. 가서 보니 동생이 아니긴 했지만 간메 역시 자신의 가족이었다.
수리모는 사촌형이 식당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한명씩 가족자리에 데리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다가 식당을 나섰다. 사촌형이 극구 주장해 사건 당시 어디에 있었는지 조사하게 되면서 수리모는 일찍 참여했다. 가장 먼저 참여했지만 태화는 가족들이 하는 이야기를 전부 들으며 자리를 지켰다.
동생은 남을 해칠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가족들이 하는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모두 모여 있을 때 수리모는 없었다. 그리고 피해자가 살해당하기 전에 만난 마지막 사람이 수리모였다.
까마귀들은 수리모를 알아보고 수리모의 집 지붕을 넘어 중정에 들어갔다. 수리모가 중정에 나오자 까마귀들은 쫑쫑 뛰어와서 입을 벌렸다. 수리모는 볶은 거저리를 하나씩 집어 까마귀들 입에 넣어주었다. 따뜻하고 밝을 때 집에 있어본 적이 수리모에게는 까마득했다. 마리한께서 당분간은 집에 있으라고 명하셨다. 연쇄살인이 끊긴 후부터 사라진 줄 알았던 불안과 두려움은 까마귀들이 수리모 손에 머리를 부비면서 가라앉았다. 어릴 때 날개 부러진 까마귀들을 발견하고 보살펴준 후로 아슬란 사람들이 고향에서 데려온 떼까마귀와 갈까마귀들은 대를 이어 수리모를 따랐다.
까마귀들이 단체로 높고 짧게 깍깍거렸다. 사람이 찾아올 것 같아 수리모는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집에 들어서자 사촌형은 늘 그렇듯 까마귀들을 보고 혀를 찼다.
“너 어릴 때부터 이것들 버릇을 잘못 들였다.”
“벌써 조사 마쳤어?”
“나중에 하려고. 위험한데 혼자 다니니까 왔지. 약도 안 챙기고.”
탕약 그릇이 눈에 들어오자 수리모는 얼굴을 찡그렸다.
“먹으면 피곤하고 몸도 불편해.”
“계속 챙겨먹어야 효과가 있지. 너 가끔 안 먹잖아."
아무리 몸에 좋대도 형언할 수 없는 냄새가 나는 그릇은 수리모에게는 많이 힘들었다. 약학에 능통한 사촌형이 수리모를 위해 특별히 맞춰 만든 약이라 수리모는 거부하기 미안했다. 사촌형은 늘 수리모가 잘하지 못하는 일을 대신해주었다. 아이들은 사촌형을 말없이 따랐고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촌형은 중정 마루에 앉았다.
“사람들이 아슬라 얘기를 하던데. 수영에 있는 아슬라 맞지?”
“응. 형도 만난 적 있을 거야. 해적 잔당을 소탕하러 수영에 갔었잖아.”
“그랬지. 거기서 내가 바닷가에서 올라오던 해적을 보자마자 칼로 쑤셨더니…….”
“거기까지만 얘기해.”
해적들이 침입한 후로 수영에서 사브랑 아래까지 황폐해졌다. 재개간 사업도 시작했고 눈밭이 늘면서 재개간 지역 이주 비용도 늘렸지만 아직까지 신청자는 없었다. 20년이 지났는데도 사람들은 해적들이 다시 찾아올까봐 두려워했다. 더 커질 피해를 막았던 사촌형은 자랑스럽게 여겨도 되는 일이지만 수리모는 그 묘사가 징그럽고 무섭기만 했다.
사촌형이 보는 앞이라 수리모는 결국 오늘은 약을 다 마셔야 했다. 약을 먹고 나면 속이 느글거려서 수리모는 입부터 헹궜다. 속에 약이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몸이 무겁고 기운이 없었다. 대낮이지만 수리모는 다시 이불장을 열었다.
“자야겠어. 피곤해.”
“아슬라 얘기 좀 해.”
“저녁에 하면 안 될까?”
“긴 얘기 아니야. 아슬라랑 혼인하지 말라고 말하러 왔어.”
수리모는 이불을 놔두고 마루를 돌아보았다. 사촌형이 반대할 줄은 수리모도 몰랐다. 오늘 진술하러 모인 가족들은 자신을 알아보고 하나같이 혼인을 축하해줬다. 문득 어젯밤 차분하게 혼인 후 미래를 구상하던 간메가 떠올랐다. 수리모는 속이 불편해져서 가슴팍을 문질렀다. 수리모가 대답이 없자 사촌형은 말을 이었다.
“아슬라는 너한테 너무 어려. 네 친구 아들이기도 하잖아. 덕우를 ‘아버님’이라고 부르려고?”
“그렇긴 해.”
“위험하기도 해. 네 주변에만 연쇄살인범 피해자가 많았잖아.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아슬라가 가까이 있으면 아슬라도 위험하지.”
첫말이야 수리모도 쉽게 수긍했다. 뒷말을 듣는 순간 수리모는 40년 전으로 돌아갔다. 당시에는 마리한께서 자신을 부군으로 삼지 않으셔도 수리모는 정말 기뻤다. 끔찍한 일이고 확실한 증거가 없어서 사람들이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모두가 알았을 것이다. 수리모가 다녀간 자리에는 시체가 남았다. 한두 번은 우연이었겠지만 연속해서 사건이 일어나면서 수리모는 더 이상 순례를 다니지 않았고 궁에서 부군을 보필할 서기를 구하자 곧바로 지원했다. 수리모가 칩거한 그 시기부터 살인범은 범행을 멈췄다. 그 때부터 남들에게는 말할 수 없지만 남들은 모두 아는 이유로 수리모는 자신에게 사람이 다가오지 않길 바랐다. 수리모는 마루로 가서 앉았다.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동해는 남편을 따라 인사나온 남성들과 마주했다. 순례객들이 인사성이 밝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동해는 남편이 늦은 식사를 준비할 동안에도 자리 한번 안 뜨는 사람들을 보고 상황을 물었다. 순례객들은 자유시간에 혼자서 시간을 보내기를 좋아했다. 미성년자들이 순례객으로 들어와서 임시로 보호한다는 말을 듣고 동해는 이해했다.
“미성년자가 많이 들어왔네?”
“아니오, 저희 둘만요.”
“그럼 다른 분들은 무슨 일로 마니를 따라다니고 계세요?”
“연쇄살인범이 나타났대요.”
“40년만에요.”
그 말을 듣자마자 동해는 마니를 데리고 자리를 떴다. 하지만 살인범이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도 모르는데 아슬라는 두 분만 보낼 수 없었다. 순례객들도 당연히 아슬라를 따라왔다. 동해는 아슬라에게 손바닥을 아래로 펼쳐 손을 땅으로 내려보였다. 고모 뜻이라 아슬라는 거역하지 못하고 자리에 남았다. 아슬라가 불안해 할까봐 동해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모퉁이를 돌아서 마니와 이야기를 나눴다.
“집안일은 다른 분들께서 도와주실 거야. 당신은 당분간 애들 데리고 숨어 있어.”
“두 명은 등교해야 하는데?”
“그러다 당신이 잡혀가면 어떡해?”
“잡혀가진 않겠지, 그 자리에서 죽인다는데…….”
“옛날에 조심 안 하다 많이 죽었어. 특히 키 크고 인물 좋으면.”
“난 다 늙었잖아. 그때 들었는데 20대만 노린댔어.”
“40년이 지났잖아. 이번에도 피해자가 20대야?”
“우리 또래래.”
“그럼 더 위험하지. 아니다, 그때도 돌아가신 어르신들 계셨잖아. 나이는 상관없어.”
동해는 순례객들을 데리고 마니가 피할 만한 곳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식품을 보관하고 얼음을 저장하던 동굴이 있었다. 20년 전 해적이 침입한 뒤에 여러 시설을 설치해서 지금은 피난처로도 쓰는 곳이었다.
“애들 데리고 동굴에 들어가 있어.”
“지금은 너무 어두워서 올라가기 힘들어.”
“그러면 날 밝고 애들 데리고 가.”
언제 돌아갈지 모른다고 마니는 굳이 동해를 방까지 배웅했다. 당연히 아슬라와 순례객들도 따라갔다. 아이들은 오늘 학교에서 들었다며 40년 전 살인범이 벌인 사건들과 차례로 주검으로 발견되었던 용의자들 얘기까지 모조리 해주었다. 동해는 문을 닫을 때까지 부담스러웠다.
큰방에 돌아와서 씻고 잠들 동안 아슬라는 수리모를 떠올렸다. 수리모를 만나고 싶었다. 아직 혼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묻지 못했지만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생겼다. 살인범이 수리모가 사는 저택에 나타났다. 수리모가 젊을 적 활동하던 살인범이니 어쩌면 살인범은 한번은 수리모를 봤을지도 모른다. 순례객들이 해준 말로는 돌아가신 분은 수리모와 체형도 비슷한 모양이다. 아슬라는 고개를 돌려 어둠 속에도 확연히 구분되는 빈자리들을 보았다. 어차피 방은 넓으니 수리모와 이곳에서 같이 살면 수리모도 위험하지 않을 것이다. 수리모만 괜찮다면 아슬라는 다 같이 모여 안전하게 지내고 싶었다. 잠이 오기 직전에 아슬라는 궁에 있던 별채에서 맡았던 향을 떠올렸다. 오래된 나무향이었는데 향이 부드럽고 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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