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아들과 이혼하는 법

[BL] 1. 이혼을 하려면 일단 (5)

리마 by 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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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라와 헤어진 뒤에 수리모는 누나를 따라 무사히 집에 돌아왔다. 누구도 아슬라의 혼담 상대를 알아보지 못했거나 수리모가 아슬라의 혼담 상대라는 사실을 신경쓰지 않나보다.

오늘 저녁을 맡은 당번들은 입다실 것으로 삶은 고구마조각을 담은 작은 그릇들을 밖에 놔두고 오면서 오늘 저녁 처음으로 목격한 아슬라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식사당번이 아닌 사람들은 식사가 준비된 자리마다 돌아다니며 좌등을 열어 불을 밝혔다. 불을 밝힌 하슬란 사람들은 식사가 준비되기 전까지 의자를 끌어 모아 놓고 아슬라의 혼담 상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방금 알았지만 혼담 상대는 그들이 살아온 기간 내내 봐온 사람이었다.

당사자는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자기 집으로 향했다. 사촌형은 수리모의 팔을 잡아끌었다.

“저녁도 안 먹고 어디 가?”

“그냥 잘래.”

“약은 먹고 자.”

“밥을 안 먹어서 못 먹겠어.”

“수리모.”

평소보다 훨씬 늦게 귀가한 터라 수리모는 사촌형이 자신을 위해 만드는 역겨운 약을 견딜 힘이 없었다. 배고프면 방에 있는 간식이나 먹고 잠들 생각이었다. 최대한 경사를 줄이려고 둘러만든 길은 오늘따라 너무 길었다. 사촌형처럼 집안 곳곳에 있는 지름길을 꿰고 있지 않아서 수리모는 요령없이 길을 따라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저택 안으로 올라갈수록 독채들은 줄어들었다. 수리모가 머무는 집이 보이면서 힘없이 걷던 수리모 귀에 힘찬 발소리가 들렸다. 여기까지 올라오면 수리모네 말고는 나오는 건물이 없었다. 제자리에 서자 발소리는 멈췄다. 해적들이 침입했을 때 생존자들이 들었다던 발소리도 이랬다. 하지만 해적일 가능성은 없었다. 해적이 나타났다면 어느 집에서든 종을 쳐서 알렸을 것이다.

이미 다른 집들은 저 아래에 있었다. 서둘러 집안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면 포기하고 돌아갈지도 모른다. 날이 밝으면 가족들이 나올 테니 지금 따라오는 사람도 포기하고 숨을 것이다. 집까지 얼마 남았는지 가늠하던 수리모는 어깨에 손이 얹히자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식당에 가실 줄 알았는데 올라가시길래요. 조금만 시간을 내주시겠어요?”

어두워서 분간이 잘 가지 않긴 했지만 어차피 상관없었다. 다른 아슬란 남성들처럼 이이도 자신을 닮았다. 자신이 궁에 들어간 뒤에 눈밭이 하강하면서 아리네 가족은 마지막으로 고향에서 사브랑으로 이주했다. 수리모를 가슴 졸이게 한 사람은 아리의 아들인 간메였다. 아리는 가져온 과일묘목을 집안 양묘장에 옮겨 심었는데 거기서 나는 사과와 배는 희한하게 달면서도 짭잘했다. 어떻게 그런 맛을 내는지는 아리와 간메만 아는 듯했다. 간메는 집안 양묘장에서 주로 지내면서 최근에는 다른 가지를 접붙여 과실 크기도 키웠다. 집안일에 관련되어서 알지 수리모는 간메랑 한번도 만나서 이야기해본 적은 없었다.

둘 다 저녁을 먹지 않아서 수리모는 찻상을 걸게 차렸다. 간메도 상을 보고 얼굴이 환해졌다. 목을 축이고 배를 좀 채운 다음에 간메는 용건을 꺼냈다.

“혼인하신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저를 잉첩으로 데려가주시면 안 될까요?”

어릴 때야 종종 있었지만 요즘은 한번에 남편을 둘 이상씩 들이지 않아서 수리모는 아주 오랜만에 그 단어를 들었다. 사브랑 남성 대부분은 혼인하길 바랐다. 간절하게 원하다보면 가끔 사람들은 기대하지 않던 조건이 딸려 있다는 사실도 잊었다. 수리모는 간메가 깜빡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지적했다.

“하슬라 장군님께서 여성이시죠. 아슬라는 그 남동생이에요.”

“저도 알아요. 그냥 배우자만 서류상으로 두고 싶어서요. 저는 아슬라가 받는 봉급은 필요없어요.”

살아오면서 수리모는 혼인하고 싶다고 법을 어기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배우자로 적어 혼인신고서를 내는 사람,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이에 구두로 혼인을 약속했다며 무단으로 신고서를 작성하던 사람이며 별 사람 다 있었다. 하지만 혼인하고 싶은 이유를 침착하게 합법적이고 실리적으로 대는 사람은 처음 봤다. 오늘 혼담을 들었을 텐데 간메는 이미 미래까지 다 구상했다.

“이번에 아슬라가 수리모랑 혼인하면 아슬란과 하슬란이 합쳐져요. 하슬라 장군님께서 혼인하실 때 하슬란에서 사돈집안을 받아들이면서 사돈댁 전체를 수리해주셨다잖아요. 우리 집안에서 관리 못 한 집들도 몽땅 수리해주시겠죠. 그럴 재력이 충분한 곳이니 30년 넘게 하슬란네 집주인 남편분께서 사브랑 두레 행도를 맡아오셨을 거예요. 지금 행도이신 마니께서 물러나시면 군인인 아슬라나 서기인 수리모는 못 나가지만 저는 행도 선거에 출마할 수 있어요. 집안에서 아슬라를 아끼시니 그 배우자도 지지해주시겠죠.”

간메 말이 맞긴 했다. 사촌형이 궁에서 나가고 행도직에 출마한 해에 마니는 유례없이 만장일치로 행도로 뽑혔다. 마리한의 남편을 배출한 집안사람이라도 하슬란 주인댁 남편을 이길 수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예전에 행도를 맡으셨을때 수리모는 무슨 일을 하는지 봤다. 수리모는 행도가 되고 싶지 않았다. 행도는 두레 구성원들 집안 행사를 피해서 일정을 짜고 어느 집 땅부터 시작할지 정해야 했다. 한 해 열 번은 그 차례 때문에 싸움이 났다.

사람마다 관점은 다르니 간메는 지위를 원하는지도 모른다. 아슬라처럼 군공을 세우지 않았으면 행도에 오르는 것도 이름을 알리는 괜찮은 방법이었다. 일이 좀 많아도. 야망을 한껏 드러내다가 간메는 말을 덧붙였다.

“물론 아슬라랑 수리모도 보필하려고요. 궁에서 생기는 잡일도 제가 도와드릴게요.”

“고마워요. 하지만 궁에서 일하는 사람들만 일을 맡아볼 수 있어요.”

“사촌형도 궁에서 나올 때까지 공식적인 직위가 없었잖아요. 그래도 궁에서 일을 맡았죠.”

아슬라랑 혼인할 생각도 없었는데 간메는 앞날까지 준비했다. 집으로 오는 내내 수리모는 어떡하면 마리한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혼담을 취소할지 고민했다. 하슬란 사람들이야 오늘 혼담 상대를 직접 봤으니 당연히 거부할 것이다. 잘하면 하슬란에서 먼저 혼담을 거두어달라고 청할 수도 있었다. 이제는 간메한테 어떻게 자기 뜻을 전할지 생각해봐야했다. 면전에서 같은 항렬 친척에게 혼인 안 할 거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수리모 경험상 이렇게 철저하게 답변을 준비해온 사람에게 어영부영 혼담을 거부한다고 말하면 완벽하게 논파당해 지금부터 혼수 준비하러 가야 한다. 다음에 대비를 해서 간메랑 이야기를 해보려고 수리모는 대화를 마무리했다.

“간메가 혼담을 진지하게 생각할 줄 몰랐어요.”

“수리모는 혼담 들어오고 기쁘지 않으셨어요?”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갈 수 있으면 하슬란은 무조건 가세요. 오늘 하는 걸 보니 아슬라도 수리모한테 못해주진 않겠던데요. 이번 기회에 수리모도 자유로워지세요. 거머리도 떼어내고.”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가는 길이 어두우니 조심해요.”

아까처럼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나 다른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게 수리모는 초롱을 찾아 불을 켜서 들려주었다. 걸어둔 외투도 걸쳐주고 수리모는 간메가 길을 나서는 모습을 확인했다. 수리모는 배웅을 마치고 찻상을 치웠다.

부엌에 들어서니 또 탕약그릇이 있었다. 문은 잠가두었는데 또 언제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사촌형이 두고 갔을 약을 들고 고민하다가 수리모는 중정에 들어갔다. 약은 나무 밑둥에 잘 스며들었다. 이 약을 먹은 지 20년이 되어 가는데 먹어도 졸립고 몸이 늘어지기만 했다. 그래도 내일 출근할 준비는 미리 해두어야 했다. 짬이 날 때 필사할 종이를 챙기고 오늘 필사를 마친 분량을 문갑 안에 넣어두었다. 졸음이 몰려와도 수리모는 자기 전에 하는 자질구레한 일들을 모두 마쳤다. 수리모는 이불에 들어가자마자 잠들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태화는 식당 앞에 모여 선 아슬란 사람들 곁으로 다가갔다. 저택 부지 안에 있는 각자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도 그들은 오늘 있었던 사건을 얘기하고 싶었다.

“처음 봤을 때는 키가 커서 무서웠는데 행동이 조심스러웠어요.”

“하슬란 사람들이 키가 커요.”

“얼굴도 괜찮고요.”

아슬라 얼굴을 떠올리자 사람들은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정도면 괜찮은 게 아니라 정말 좋았다. 수리모도 가볍게 들어올렸으니 몸도 건강할 것이다. 분위기가 좋았지만 태화는 가족들이 잊고 있는 사실을 일깨워야 했다.

“아슬라는 남자죠.”

“수리모가 옛날에 사귀던 사람들은…….”

말하던 사람은 잠시 주변을 살폈다. 이 얘기만 하면 발끈하는 사람이 곁에 있을지도 몰랐다. 이미 가족들은 다 아는 사실인데도. 누구도 지적하지 않자 다른 가족들이 입을 열었다.

“그렇죠.”

“잘됐네요.”

“마리한께서도 그래서 아슬라를 짝으로 점지해주셨나봐요.”

“하슬란에서 우리 집안에도 순례객을 배치해줄까요?”

“솔뫼가 수리모 일을 물려받아도 되겠네요. 하슬란에 가서도 할 일이 많겠죠.”

가족들이 혼담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서 좋긴 했다. 혹시 수리모가 혼인을 원한다면 순조롭게 진행할 정도였다.

“수리모에게 물어봐야겠네요. 혼인을 하고 싶은지.”

간메는 자기 집으로 가면서 당분간 보지 못하게 될 아슬란 저택 안 풍경을 천천히 살폈다. 마니는 잡다한 집안일에 두레 구성원들을 부르지 않아서 하슬란 내부는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했다. 하슬란에 순례 다녀왔던 이들은 하슬란 저택이 넓고 탁 트여서 모일 곳이 많다고 했다. 개인공간은 독립된 건물이고 안에는 각자 취향대로 꾸민 중정이 있는 아슬란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겨울이 되어서 일이 줄어들면 다니러 올 수 있겠다.

어쩌면 집안이 합쳐지면서 자신은 여기서 지낼 수도 있었다. 양묘장에서 자라는 짠맛과 단맛이 함께 나는 과일들을 키우면서 자기 집에 딸린 중정에 나와 책을 읽는 삶은 이전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삶은 어느 순간 불확실해진다. 설원이 하강하면서 간메의 가족들은 옮길 수 있는 것만 지고 고향을 나와야 했다. 다행히 아슬란에서 지낼 수 있었지만 아슬란 사정은 예전같지 못했다. 간메는 견고한 기반을 찾아다녔다. 잉첩은 안정된 입지를 얻을 기회였다. 자신에게나 집안에나.

아직 멀리 있는 지붕들밖에 보이지 않는데 낮게 앓는 소리가 났다. 간메는 수리모가 들려준 초롱을 주변에 비췄다. 집안에서 가장 어린 솔뫼가 혼인해서 나간 후로 아슬란에는 젊은 사람이 없었다. 혹시나 저녁 산책을 하다 넘어진 어르신이라도 있을까봐 간메는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향했다.

“괜찮으세요?”

여전히 신음만 들리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간메는 개울 위로 세워진 나무다리를 건너 대나무숲으로 이어지는 산책로에 들어섰다.

잘 때는 향낭을 차지 않는데도 수리모는 항상 향기롭다. 몸에서는 부드럽고 진한 오래된 나무 향이 난다. 아슬란 도서관에 들어서면 나는 향과 같다. 이불을 살짝 들추면 체온으로 데워진 공기가 수리모의 향기를 품고 나온다.

해가 뜨기 전에 나서고 해가 기울면 돌아와서인지 수리모는 볕에 그을리지 않았다. 수리모의 살결은 어디든 매한가지다. 마치 달빛에 비춰지듯 차갑게 빛난다. 해안가 친척집으로 피서를 가서도 한 번도 옷을 벗고 물에 들어가지 않아서인지 모른다. 조금 식은 피부는 촉촉하고 매끄럽다. 피부에는 손이 내려앉는 곳마다 발긋하게 자국이 남는다. 잠들어서 목소리를 들을 수 없어서 아쉽다.

그들이 건넨 주사를 맞힌 후로 수리모는 같은 연배보다 젊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모든 일이 자신의 뜻대로 흘러가고 있다. 아슬라의 아버지처럼 아슬라도 건드리기 힘든 자리에 있지만 머지 않아 내가 임금이 되고 너를 비로 맞으면 그때는 다르리라. 우리와 달리 축복받지 못한 그들 모두를 내 손끝으로 부리리라.

계획이 어그러지면서 시간이 오래 걸린 건 수리모가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아서였다. 수리모를 위해 준비해둔 가장 좋은 길이 있는데도 수리모는 어째서 그 길로 가지 않을까? 우리 모두를 위해 자신이 긴 시간 동안 희생해왔는데도 말이다.

잠깐 수리모가 고통스러워하겠지만 다가올 영광을 생각하면 그리 희생도 아니다. 다른 길을 모두 막으면 수리모는 가장 좋은 길을 택할 것이다.

하늘이 희끗해지기 직전은 늘 그렇듯 온통 푸르스름했다. 아침식사를 맡은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들 중 일어나서 산책을 즐기는 이들은 집안에 조성된 길을 따라 집안을 한 바퀴 돌고 하루를 시작했다. 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대나무숲에 들어서는 길목에서 그들은 멈췄다. 숲 앞을 흐르는 시냇가에 희끗한 것이 놓여있었다. 멀리서 봤을 때는 어제 낮에 미처 걷지 못한 빨랫감으로 보였다. 조금씩 다가가자 시내에 손을 드리우고 누워있는 사람이 있었다. 운동하던 사람들은 다가가면서 재차 누워있는 사람을 불렀다. 날이 풀릴 때는 어르신들에게 위험했다. 더울 때는 나와서 주무시긴 하지만 아직은 한데 주무실 날씨가 아니었다. 불러도 어르신은 대답이 없으셨다. 운동하던 사람들은 힘을 합쳐서 넘어진 어르신을 조심스럽게 바로 눕혀드렸다.

“수리모. 수리모, 일어나서 나와.”

잠에서 깬 직후 수리모는 따뜻하면서도 시원했다. 모순에 마비된 정신은 방 안 가득 퍼지는 햇살을 보고 깨어났다. 지금쯤이면 궁에서 아이들 밥을 차려줄 시간이었다. 사촌형이 밖에서 재차 부를 동안 까마귀들은 악을 쓰며 높고 빠르게 울어댔다. 푹 자고 일어난 덕에 수리모는 차분하게 짐을 챙기고 나갈 준비를 마쳐서 집을 나섰다.

집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수리모의 집 주변은 고향에서 데려온 까마귀떼와 수리모 말고는 없어서 이 시간에는 조용했다. 지금은 이곳에 사람들이 드문드문 서있었다.

“따라와.”

사촌형은 더 설명하지 않고 앞서갔다. 수리모는 출근하는 차림새로 사촌형을 따라 길을 내려갔다. 내려갈수록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대나무숲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그곳에 사는 까마귀들이 격렬하게 소리높여 울었다. 사촌형은 혀를 찼다.

“언제 한번 목을 비틀어야 조용하지. 수리모, 이거 봐. 누군지 알겠어?”

수리모가 숨을 삼키자 사촌형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이었던 곳에 손수건을 덮었다. 수리모는 숨을 천천히 내쉬며 다시 눈을 떴다. 눈에 익은 겉옷이 보였다. 머리는 다시 떠올리기 힘들었지만 수리모는 찬찬히 소매를 따라 눈을 옮기다 손을 보았다. 오른손은 힘껏 주먹을 쥐었다. 왼손은 대낮에는 필요 없는 초롱 손잡이를 꼭 쥐었다. 다른 사람이 빌려갔다가 반납할 곳을 쉽게 알려주려고 수리모는 초롱 윗부분에 자기 이름을 수놓았다. 거뭇하게 물들어도 자수는 도드라졌다. 수리모는 사촌형을 돌아보았다.

“간메야. 어젯밤에 나한테 들렀어.”

전보다 훼손이 덜하긴 했지만 수리모는 기억 속 그것을 쉽게 떠올렸다.

해적들이 나타나기 전까지 수리모는 그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40년 전 샤로 남성들은 그것 때문에 당시 순례를 포기했다. 해적들이 나타난 후로 사람들은 내심 해적들이 그것을 없앴으리라 여겼다. 다만 해적들에게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을 잃은 사람들이 많아 말로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그것이 일으킨 사건들을 알았지만 누구도 입에 올리진 않았다.

순례객들은 하룻밤을 잔 뒤에 어제보다는 익숙하게 장작을 나르고 물을 떠왔다. 동해는 일찍 출장가야 해서 마니는 동해랑 미리 아침을 먹었다. 감독하던 마니는 아슬라를 눈으로 찾았다. 순례객들 사이에서 아슬라는 씻은 쌀을 솥에 붓고 있었다. 침통했지만 마니는 아내 말을 떠올렸다.

“오늘은 늦게 도착하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어.”

“잘 다녀와.”

“아슬라한테 오늘 마리한 뵙고 어디로 배치하실지 여쭤보라고 해. 선물 꼭 가져가라고 하고. 선물은 간밤에 챙겨놨어.”

집안 이름이 수놓인 보자기로 싼 꾸러미 두 개가 마니 앞에 놓였다. 동해는 짐에서 손수건에 싼 물건을 꺼냈다.

“어제 너무 정신이 없어서 까먹었어. 이거 당신 먹어. 말린 배야. 새내 집사청에서 주더라.”

“귀한 거네. 마리한께 드리자. 아슬라를 더 좋게 보실 수도 있잖아.”

동해 예상대로 마니는 선물 꾸러미를 다시 열어 말린 배를 보태려 했다. 꾸러미 하나는 말린 배가 들어가서 조금 더 커졌다. 동해는 신신당부했다.

“더 큰 꾸러미가 마리한 선물이라고 아슬라한테 말해줘.”

“작은 건 아니야?”

동해 표정만 봐도 마니는 이게 누구 줄 선물인지 알았다. 마니 표정을 보고 동해는 마니가 무슨 생각을 할지 짐작했다. 오늘 밤에 집에 오려면 동해는 당장 나가야했다. 동해는 마니 손을 잡았다.

“아슬라도 집밖에 아는 민간인이 있어야지. 수리모도 연줄 많잖아.”

굳이 혼인하지 않더라도 수리모는 가까워지면 좋을 자리에 있긴 했다. 법적으로 군대밖에서 일을 할 수는 없지만 자기 먹을 것을 짓고 자기 먹을 것을 치우는 것은 허락된다며 조카는 어제오늘 열심히 일한다. 마니는 아슬라 옷을 다려주려고 집안에 들어갔다.

제 밥 먹은 김에 치운다고 순례객들 먹은 것까지 같이 설거지했더니 시간이 꽤 걸렸다. 아침 먹고 알아서 다려입고 출발하려고 했는데 고모부께서는 아슬라가 입을 옷과 마리한께 드릴 선물까지 준비해주셨다. 꾸러미는 하나 더 있었다.

“이것도 드릴까요?”

“이건 수리모 드려.”

“벌써 누룽지 싸놨어요.”

오늘 아침 부엌에서 살더니 저 보따리가 수리모 줄 선물이었나보다. 보따리는 수리모가 혼자서 한달 먹을 만큼 누룽지로 빵빵하게 찼다. 마니는 아내 말을 되새기며 아슬라 옷자락만 고쳐주었다.

농담삼아 말씀하셨지만 아슬라는 어제 마리한께서 하신 말씀대로 당당하게 정문으로 궁에 들어왔다. 경비들은 중간마다 한 명씩 다른 경비에게 아슬라를 넘겨주며 궁 안으로 보냈다. 어제 갔던 길이 수리모를 만나는 지름길이었는지 주변은 별채와 전혀 풍경이 달랐다. 공식적인 절차를 걸쳐서 집무실로 안내받은 아슬라는 마리한께 인사를 올렸다. 목소리를 낮춰서 지시를 내리던 형산은 사람들을 내보내고 아슬라를 맞이했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집안에서 마리한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고맙습니다. 집안에 별일은 없었습니까?”

마리한은 안에서 흐르는 모래 소리가 나는 거대한 보따리를 받고 고소한 향을 맡았다. 한동안 음식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인사가 오늘 희한하셨지만 아슬라는 자신이 사브랑을 떠난 지 스무 해가 지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요즘 인사는 이렇게 하나보다 여기고 아슬라는 마리한 인사에 답했다.

“무탈합니다. 마리한께서도 별고 없으십니까?”

“다행히 솔뫼도 무사합니다.”

어제 헤어진 수리모나 따님 근황도 궁금했지만 마리한께서는 거기서 인사를 마치셨다. 형산은 서류뭉치를 넘겨서 한 장을 꺼내 빈 곳에 기입했다.

“따로 명할 때까지는 근무지를 집으로 지정하겠습니다. 가족들이 안전한지 살피고 시간이 남으면 집안일도 도와드리세요.”

“알겠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수리모만 만나고 돌아가겠습니다.”

“수리모는 당분간 집에서 쉬라고 했습니다.”

“댁에 가면 뵐 수 있겠네요.”

형산은 붓을 놓고 아슬라를 염려했다.

“수리모한테 시간이 좀 필요해요. 당분간은 아슬라도 집에서 쉬어요. 몸조심하고요.”

“수리모를 못 만났어?”

마니는 아슬라가 들고 돌아온 선물보따리를 챙겼다. 아슬라가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데다 좋은 소식도 많이 가져왔다. 아슬라 방까지 따라왔던 마니는 방문 앞에서 아슬라가 하는 말을 들었다.

“당분간은 집에서 근무하라고 하셨어요. 가족들이 안전한지 살피고 일도 도와드리래요.”

“네 일도 많은데 안 도와줘도 돼.”

“제 근무지 일이잖아요.”

집에서 근무한다면 수리모를 만날 일도 없었다. 아내 말을 들었는데도 내심 바라던 대로 일이 돌아가자 마니는 즐거웠다. 오늘 점심에는 맛난 것을 해줘야겠다. 부엌으로 내려가다가 마니는 웅성거림을 들었다. 큰마당에 사람들이 잔뜩 들어왔다. 아래로 내려가면서 마니는 몇몇 사람을 알아보았다. 어젯밤 그 난리를 치면서 아들들이 밥 먹은 거 제대로 치우는지 지켜보던 순례객의 가족들이었다. 곧 방마다 짐보따리를 들고 진 젊은 남자들이 나왔다. 남자들은 마니를 알아보고 허리를 숙였다. 순례객의 가족들도 마니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워낙 여러 사람들이 동시에 말하는 터라 마니는 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인사하고 대문 밖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늘고 나서야 마니는 겹치던 말들을 하나씩 떼어 들었다.

“죄송합니다,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하슬란 분들도 무사하시길 바랍니다.”

“염치없지만 아이가 걱정되어서요. 집안 분들도 무사하시길 빕니다.”

아이를 데리러 온 여성들은 아빠나 남편, 남자아이들을 자신들 틈에 숨기듯 끼운 채로 하슬란을 나섰다. 40년 전에 사람들이 자기 가족들을 이렇게 보호하며 걸었다. 꽤 옛날이지만 사람들이 당시에 나누던 인사도 이랬다.

하슬라랑 아슬라가 하슬란에 오기 전이었다. 샤로에는 순례객이나 남편을 노리는 범죄자가 있었다. 수법이 너무나 잔인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당시 하슬란에서는 무슨 일이 생길까봐 순례객들을 비롯해서 집안에 있는 모든 남성들을 큰방에서 함께 재우고 돌아가며 보초를 섰다.

짐을 하나도 챙기지 않은 순례객이 방을 나와서 마니를 향해 곧장 걸어왔다. 어제 낮에 딱 다섯 남아있던 순례객 중 하나였다. 넓은 마당에서 들을 사람은 마니밖에 없는데도 남자는 소근거렸다.

“아슬란에 연쇄살인범 피해자가 나왔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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