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아들과 이혼하는 법

[BL] 1. 이혼을 하려면 일단 (4)

리마 by 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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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라를 깨우러 가는 길은 형산이 나정과 함께 부엌에 들르면서 조금 늦춰졌다. 마리한이 부엌에 오기 전까지 수리모는 정성들여 누룽지를 끓였다. 아슬라는 궁에서 지낸 후로 가족이 아닌 사람 중에서는 두 번째 손님이었다. 곱게 풀어질 만큼 누룽지를 잘게 부수고 그늘에 말려둔 버섯과 채소 자투리를 달여 육수를 냈다. 누룽지 남은 것은 다시 보자기로 싸서 시렁에 올려두었다. 누룽지만 먹으면 허전할까봐 수리모는 시렁 단지에서 마른 떡을 몇 조각 꺼내 솥뚜껑에 올렸다. 입맛 돋굴 반찬도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절여둔 방풍과 곤드레도 조금 담았다. 그러던 중에 아이들이 부엌에 들렀다.

“할아버지 배고프셨어요?”

“손님상을 차리고 있었어요.”

“앉아계세요. 제가 할게요.”

마리한께서 다가오시자 수리모는 서둘러 그릇을 소반으로 옮겼다. 자기 손님도 챙겨야 하지만 수리모는 본분을 잊지 않았다. 자신이 섬기는 마리한은 신경을 많이 쓰면 편두통이 오곤 했다. 반나절 쇠 두들기는 소리를 들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형산이 머리가 아플 때면 수리모는 항상 감자를 구워서 올렸다. 나정이 것까지 감자를 챙겨서 아궁이에 넣고 수리모는 부지깽이를 챙겨들었다.

“내가 구워도 돼요.”

“제가 해도 돼요.”

“그을음 묻어요. 두 분께서는 앉아계세요.”

그릇에 담아갈 테니 두 분께서는 방에 가서 쉬시라고 해도 마리한과 나정은 방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기다릴 동안 심심할까봐 수리모는 데운 떡과 누룽지를 드렸다. 아슬라 몫은 다시 준비하면 됐다. 막 구운 감자를 꺼내자 형산과 딸은 아궁이 앞으로 다가왔다.

“만지면 그을음 묻어요.”

도와주려는 행동은 고맙지만 손은 한 사람만 버리면 됐다. 자신이 키운 아이들에게 줄 감자를 벗기다가 수리모는 감자를 떨어뜨릴 뻔 했다.

“아슬라가 수리모를 만나러 왔다고 들었어요.”

“할아버지 손님이 하슬란네 아슬라셨어요?”

“마리한께 인사드리려고 했는데 도착하고 급한 사정이 생겨서 아직 인사를 못 드리셨어요.”

문밖에서 혼담을 취소하라고 성화를 부리는 통에 아슬라를 마리한께 인사보내는 것도 잊었다. 감자에서 나오는 열기로 수리모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수리모는 일부러 감자만 보았다.

어지간히도 아슬라가 수리모 마음에 들었나보다. 수리모가 생전 잊지 않던 손님맞이 차례마저 잊을 정도로 아슬라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서 마리한은 흡족했다.

형산이 태어나기 전에는 수리모도 사귀는 사람도 있고 즐거움을 찾았다고 들었다. 근 마흔 해를 혼자 지내느라 외로울 수리모를 위해서 마리한은 신중하게 배우자감을 골랐다. 자신이 모르는 그 시기에 수리모는 남자를 만났다고 했다. 남편인 솔뫼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형산도 알지 못했다. 마침 샤로에는 개국공신 집안에서 태어나 누나와 함께 해적들을 소탕해온 아슬라가 있었다. 배경도 괜찮았지만 누가 봐도 잘생겼고 아슬라보다 키 큰 남자는 샤로 전역에 없었다. 키만 큰 게 아니라 비율까지 알맞았다. 유달리 활기가 도는 수리모를 보니 선택이 옳았다.

집중하느라 뜨거운 감자도 금세 다 벗겼다. 김이 나는 포슬포슬한 감자를 마리한과 나정 앞에 두고 수리모는 말린 오미자를 꺼냈다. 다행히 시렁에 놓고 뚜껑을 열던 중이라 오미자 단지가 바닥에 쏟아지는 사태는 면했다.

“아슬라도 피곤할 테니 내가 가서 만나겠습니다.”

“금방 준비해서 집무실로 모셔갈게요.”

“자꾸 헛손질을 하는데 수리모도 쉬어야겠어요. 내가 가면 일이 쉽겠네요.”

옷을 입고 누워서 안 봐도 아슬라 옷이 얼마나 구겨졌을지 수리모는 짐작했다. 마리한에게 아슬라가 남의 집에 와서 주인도 제쳐두고 일하는 사람 방에 가서 잠이나 자는 방만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진 않았다. 찻물을 끓이려다가 수리모는 벌써 부엌을 나서는 모녀를 발견하고 서둘러 앞치마를 벗었다. 두 사람을 따라잡기만 했는데도 수리모는 숨이 턱끝까지 찼다.

“좀 쉬고 있어요. 인사만 하고 올게요.”

“저도 인사할래요. 그분이 하슬라 장군님 동생이시죠?”

“곧 있으면 솔뫼도 돌아오는데 저녁부터 드시면 어떨까요?”

“아까 이것저것 먹었더니 지금은 별로 생각이 없네요. 저녁 말이 나와서 그런데 아슬라한테 저녁을 먹고 가는지 물어봐야겠어요.”

“집무실에 계시면 제가 아슬라를 모시고 갈게요. 그때 물어보시면 어떨까요.”

형산과 나정은 멈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수리모는 자신이 키운 아이들에게 유독 약했다. 따라가느라 숨이 차도 멈추라고 말도 못했다. 별채까지 갈 동안 수리모는 두 사람을 설득하느라 애먹었다. 결국 마리한께서는 별채 마루에 올라 방문을 여셨다. 별채에 다가가자 열린 창문이 보였다. 자다가 아슬라가 열어두었나 보다. 그리 따뜻한 날씨가 아니라서 수리모는 아슬라가 목이 칼칼하진 않을지 걱정되었다.

아슬라는 방에 없었다. 방에 놔둔 물은 줄지 않았는데 누룽지만 사라진 걸 보면 가지고 나간 모양이었다. 아기 때부터 키우면서 마니는 아슬라를 잘 알았다. 마리한께 혼사를 숙고해 달라고 말씀드리러 간 모양이다. 선물로 도대체 왜 누룽지를 골랐는지는 마니도 알지 못했다. 순례객들에게 집안일을 알려줄 사람들은 놔두고 마니는 자신과 함께 궁까지 갈 사람들을 찾으러 다녔다. 혹시라도 궁 앞에 모인 얼간이들이 아슬라랑 가까워 보이지 않게 가족들이 둘러싸고 데려와야 했다.

해가 지기 전에 태화는 나갈 채비를 마쳤다. 혹시나 궁 앞에 모인 무뢰배들이 서기인 수리모를 알아보고 덤벼들 수도 있었다. 낮에 같이 논의했던 사람들도 막 채비를 마치고 나왔다. 가족들이 모여 나가는 날은 보통 마음이 들떴다. 오늘같지 않고.

별채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펼쳐진 이불만 보이자 수리모는 마음이 놓였다.

“마리한께 인사를 드리러 출발했나봐요.”

길이 엇갈린 덕에 아슬라가 잠든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안심한 수리모는 부엌에서 급하게 나오느라 아직 닦지 못한 손을 씻으려고 욕실 문을 열었다.

마리한은 잽싸게 문을 닫았다. 씻던 사람은 항의하지도 않았다. 문이 닫기고 나서야 수리모는 정신을 차렸다.

“미안해요, 아슬라. 있는 줄 몰랐어요.”

아슬라가 욕실에 있을 동안 수리모는 수건을 찾았다. 나정은 시선을 돌리다가 이불 틈새에 시선을 고정했다. 비져나온 천덩어리는 이불과 확연히 달랐고 구겨져 있었다. 나정은 속옷을 발견하고 소리없이 엄마한테 가리켜보이다 할아버지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손을 거뒀다.

퇴근할 때까지 얼마 안 남은 시간 동안 수리모는 부엌에 벌인 설거지감을 치우느라 별채를 잠시 떠나있었다. 마리한의 남편은 아직 다른 지역에 보조금을 전달하러 가서 귀가하지 않았다. 저녁까지 준비하고서야 수리모는 부엌을 나설 수 있었다. 돌아오자 아주 오랜만에 마리한께서 웃으시는 소리가 들렸다. 또래랑 어울려 즐거우신가보다. 아슬라도 마찬가지로 즐거우리라 여기며 수리모는 디딤돌에 섰다.

“담 옆이 가파르진 않았습니까?”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따라 걸었습니다.”

“초소에서 뭐라고 하진 않았습니까? 지나가라고 허락했나봅니다.”

“높은 건물들이 보이긴 했는데 어느 곳에서도 기척은 없었습니다.”

초소에서 당연히 하슬라 동생을 알아보고 보낸 줄만 알았더니 누가 안 본다고 또 경계를 게을리했나보다. 자리를 뜬 보초들은 마리한께서 알아서 다스리실 것이다. 별채 디딤돌에서 소리가 나자 형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저녁은 이곳에 가져다놓겠습니다.”

“감사합니다만 가봐야 합니다. 말씀 드리지 않고 집을 나섰는데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정이가 어느 정도 자란 후에 수리모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어김없이 궁을 나가서 잠들었다. 예비 신랑을 받아들인 날이면 둘이 오붓하게 별채에서 잠들 줄 알았다. 딸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할아버지를 채근했다.

“밖에 사람도 많잖아요. 그냥 저녁 드시고 여기서 주무세요.”

“그러고보니 아직 그들이 밖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아슬라가 찾아오고 형산이랑 나정에게 간식을 챙겨줄 동안 수리모는 낮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소리를 깜빡 잊었다. 갑자기 현실에 노출되자 수리모는 기운이 쭉 빠졌다.

어제오늘 깨어있는 시간보다 잠든 시간이 많아서 아슬라는 무슨 일로 사람들이 모였는지는 알지 못했다. 아마도 사람들이 몰려서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수리모가 사람들한테 치일까봐 염려하는가보다. 그동안 모자란 잠을 보충하자 아슬라는 수리모를 도울 여력이 생겼다. 비상사태였다면 수리모가 가기에는 많이 가파른 곁문을 권했겠지만 오늘은 사람만 많지 위험할 일은 없었다. 아슬라는 집에 가져갈 필사용 종이를 챙기는 수리모를 불렀다.

“수리모, 내가 집까지 같이 가면 어떨까요?”

누가 봐도 궁 정문 앞에 모인 하슬란 사람들과 아슬란 사람들은 티가 났다. 장식은 없어도 잘 짜이고 광택이 균일한 값나가는 천으로 옷을 지어입은 하슬란 사람들은 자신들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서있는 아슬란 사람들을 슬쩍 확인했다. 땔감이 부족해 별채를 헐고 문을 뜯어 불을 뗀다던 소문이 돌았지만 옷차림을 보면 아슬란은 여전히 건재해보였다. 잎이나 나뭇가지를 태운 재로 물들여입는 여타 샤로 사람들과 달린 아슬란은 생생한 잎이나 열매로 여러 번 물을 들여 선명한 색을 낸 천을 겹겹이 입었다. 태화는 겉옷 깃을 한번 더 여몄다. 가세가 예전같지 않긴 했다. 태화의 아들은 혼인하기 전까지 새옷을 입어본 적이 없었다. 어른들께서 물려주신 옷들은 질이 좋고 색도 선명해 새옷이 아쉽지는 않았다.

정문에 모여 있던 순례객들은 가족들에게 팔다리가 잡힌 것도 모자라 입도 막혔다. 아들들이 점심 숟가락 놓자마자 여기로 달려온 걸 보면 제 먹은 건 아예 치우지도 않은 듯했다. 하슬란 사람들이 짐 가져와서 쫓아내도 순례객의 가족들은 할 말이 없었다. 이 상황에 하슬란 사람들이 단체로 아들들을 따라 오자 순례객의 가족들은 숨죽이고 처분만을 기다렸다.

처분이 이상하게 길어질 동안 가족들은 순례객들의 행동을 단속했다. 개중 한 명이 열리는 문을 손으로 가리키자 가족들은 너나할 것 없이 손등을 탁 때려서 손을 내리게 했다.

문은 정말로 열렸다. 경비들이 한쪽씩 맡아 거대한 문을 밀자 마리한이 보였다. 순례객의 가족들은 속이 터지려 했다. 남의 집 혼사에 참견하더니 결국 마리한께서 걸음하셨다.

“가보겠습니다.”

“멀리 안 나갑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자고 가셔도 되는데.”

나정은 여전히 아쉬웠다. 그래도 할아버지 뜻이 중요했다. 엄마랑 같이 나정이 문가로 물러서자 형산은 나정이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인사를 마친 아슬라는 정문 문지방 높이를 보고 수리모를 한번 돌아보았다. 2m에 가까운 자신에게 문지방이 무릎만큼 높았다. 출퇴근하는 터라 수리모는 평소에도 손쉽게 정문 문지방을 넘어다녔다. 조금 문지방이 높긴 했지만 수리모는 미립이 트였다. 문지방에 짐보따리를 올려두려고 팔을 들어올린 수리모는 그대로 몸이 하늘로 떠올랐다.

수리모를 안아다 문지방 너머로 옮겨두고 아슬라는 문을 넘어와서 수리모 손에서 짐보따리를 받아들었다. 아무래도 짐은 수리모보다 자신이 들어야 맞았다. 수리모는 아슬라가 문을 넘어오고서도 전진하지 않았다. 내려둔 자세 그대로 굳은 수리모를 따라 아슬라는 시선을 옮겼다.

“고모?”

순례객과 그 가족들은 충격받았다. 방금 궁에서 나온 훤칠한 남자는 대낮도 아니고 그늘 아래인데도 얼굴에서 빛이 나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저 정도면 한 해 농사를 몽땅 망치지 않는 한 어느 집이든 데려갈 사람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 중년 남성을 안정적으로 어깨높이까지 들었다 내려두는 모습을 보면 일을 못할 사람은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순례 경쟁자인 줄 알고 긴장했던 사람들은 들었던 말을 떠올리고 하슬란 사람들을 주목했다.

“아슬라?”

젊은 남자들이 궁 앞에 몰려갔다는 말을 듣자 동해는 아슬라를 데리러 가는 무리에 들었다. 동해가 없으면 남편은 사고를 쳤다. 젊은 남자들을 선동해서 궁 안에 들어가기라도 할까봐 동해는 정문 앞에서 기다리는 내내 조마조마했다. 그러다 아슬라가 나왔다. 다정하게 수리모를 문 너머로 옮겨주더니 짐도 들었다. 동해는 마니를 흘낏 보았다. 마니 눈은 정처 없이 하늘만 돌았다.

태화와 달리 아슬라의 혼담 상대를 알지 못했던 아슬란 사람들은 방금 집안 어르신을 박상마냥 문 너머로 옮겨주던 중년 남성이 누군지 알자 혼란스러웠다. 수영에서 복무할 군인이 왜 여기에 있으며 어르신 곁에 엿처럼 붙어있는가. 그렇지만 아슬란 사람들은 살아온 내내 그에 대해 질문을 받았지만 본 사람은 집안에서 단 둘뿐이었던 인물을 드디어 목격했다. 업적이야 하슬라 장군 동생이라서 많이 듣긴 했다. 집안 사람들의 아슬라 첫인상은 태화와 비슷했다. 태화는 하슬란 사람이 부르는 이름을 듣고 나서 얼굴을 다시 확인하고 마음을 놓았다. 어딜 봐도 잘생기고 건강했다. 마리한께서 동생을 업신여기시면 절대 점지해주실 사람이 아니었다.

순례객들은 반나절 마리한을 보겠다며 악을 썼지만 막상 마리한이 나오자 쭈그러들었다. 그리고 하슬란 어르신께서 아슬라를 부르시면서 가장 불운한 존재가 되었다. 자신들이 오고 나서 문을 닫은 건 손님이 시끄러울까봐 그랬나보다. 그 손님은 자신들이 들어가는 것도 못 봤을 정도로 일찍 궁에 방문해서 마리한께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아슬라는 처음부터 마리한 뜻을 따를 생각이었다. 순례객들은 저도 모르게 하나둘 가족들 뒤로 몸을 숨겼다.

순례객의 가족들은 아슬라가 누가 봐도 하슬란 어르신처럼 차려입은 분을 모시고 다정하게 문을 나서는 모습을 보자 암담했다. 쟤는 무슨 재능으로 하슬란과 아슬란 두 집안이 기억할 짓을 벌였나. 오늘 궁 앞에서 부린 소란까지해서 마리한의 집안인 가슬란까지 세 집안이 기억하겠다. 가족들은 순례객들의 등짝을 때리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대신 자신들 뒤에 숨으려는 순례객들을 피해 옆으로 몸을 옮겼다.

마리한은 지금 사브랑에서 가장 행복했다. 동시에 두 사람이 나가자 오늘 낮을 소음으로 채우던 사람들에게 확실한 답이 되었다. 형산은 딸아이를 꼭 끌어안은 채로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려는 순례객들과 머뭇거리다가 아슬라와 수리모에게 다가가는 하슬란과 아슬란 사람들을 구경했다.

교류가 끊긴 이래 근 40년만이라 두 집안에서는 마치 인사를 처음 해보는 사람처럼 허리를 숙이는 동시에 눈을 맞추고 난리였다. 집안에서 으뜸가는 어르신들은 그나마 능숙했다. 동해와 태화는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누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두 사람은 눈치챘다. 이 사람은 마리한께서 아슬라와 수리모에게 혼담을 주선하셨다는 사실을 안다. 슬금슬금 아슬라와 수리모를 향해가면서 모이던 두 집안 사이는 누가 헐레벌떡 달려오면서 갈라졌다. 마리한은 몸을 돌리고 경비들은 문을 닫기 시작했다.

“모야, 집에 오지도 않고 아직 여기 있어?”

하슬란 사람들 중에서 막 이 혼란에 합류한 사람을 알아보는 이는 동해밖에 없었다. 하슬라와 아슬라 돌잔치에 수리모를 따라왔던 사촌형이었다. 사촌형은 수리모 손을 살피다가 아슬라를 보고 혀를 찼다.

“너는 왜 남한테 네 짐을 떠맡겨?”

“제가 들어드렸습니다.”

자신이 아슬라를 짐꾼처럼 부렸나보다. 얼굴이 화끈해져서 수리모는 조심스럽게 아슬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슬라는 계속 짐을 들고 있기만 했다. 집안을 이끄는 어르신이 두 분이나 있는 곳에서 사촌형이 가장 목소리가 컸다.

“뭐하느라 계속 서 있어. 빨리 집에 가.”

사촌형이 채근하자 수리모는 아슬라에게 속삭였다. 아슬라는 여전히 한곳만 보고 있었다.

“같이 가주려고 해서 고마워요. 가족들이 마중나와서 괜찮아요. 아슬라도 조심해서 들어가요.”

“집까지 안 가도 되겠어요?”

“그럼요.”

궁 앞에 모였던 사람들은 속한 무리가 달라도 집으로 가는 길이 모두 어색했다. 각자 집으로 가긴 하는데 궁 앞에 놓인 대로를 따라 걷느라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순례객들은 하슬란 사람들이 걷기 시작하자 조용히 뒤따랐다. 수리모는 여전히 자기 옆에서 걷는 아슬라를 보고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슬란 저택 진입로가 나오자 수리모는 몸을 돌렸다. 하슬란 저택은 조금 더 남쪽으로 가야 진입로가 나왔다. 수리모가 어디에 사는지는 모르지만 아슬라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수리모를 보고 이곳이 갈림길이라고 짐작했다. 수리모는 인사를 했으니 자신만 하면 되었다.

"내일 다시 갈게요. 조금 더 일찍 가면 이야기할 시간이 나겠죠."

모른척하고 하슬란에 가던 순례객들은 아슬라가 하는 말을 듣자 그제서야 누가 아슬라 혼담 상대였는지 깨달았다. 태화를 제외한 아슬란 사람들도 깨달았다. 순례객들과 달리 아슬란 사람들은 재빨리 주변을 살펴서 혼담 상대를 극렬하게 반대한 이들이 누군지 보려고 했다. 아슬란 사람들은 가족들을 살뜰하게 챙기면서 자기 앞길도 잘 살피는 어르신을 감히 부족하다고 여기는 이들과 가까이 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순례객들은 아슬란 사람들이 두리번거리기도 전에 잽싸게 사라졌다.

아슬란 사람들과 헤어져서 집으로 오는 길에 동해는 마니에게 말했다.

“늦었어도 밥은 먹고 자자.”

“난 아무 것도 못 들었어.”

“저녁 먹자고.”

“아.”

마리한이 혼인한 이래 마니는 수리모에게 앙심을 품었다. 그래봤자 다 소용없다. 오늘 슬아는 궁 앞에 있던 누구 눈으로 봐도 수리모를 벌써 반쪽처럼 여겼다. 허망한 마니는 힘없이 동해를 따라가서 초를 꺼냈다. 평소 같으면 누가 이 난리를 피워서 귀한 초를 켜야 하냐고 한마디 했겠지만 밝혀진 진실이 그럴 힘도 빼앗았다. 날이 꽤 어두워져서 불을 켜지 않으면 이게 숟가락인지 젓가락인지 구분도 안 갈 판이었다. 불을 켜고 밥을 짓고 반찬으로 모듬채소절임을 꺼낼 동안 마니는 슬슬 부정하던 현실로 돌아왔다. 동해는 인원에 맞춰 식기를 꺼내 가족들과 함께 하나씩 놓으며 옆으로 이동했다.

“다들 어디 갔어? 배치도 안 끝났는데 방에 들어갔어?”

“다 식당 아니면 부엌에 있어.”

“아까 우리랑 같이 오던 순례객들 있잖아. 점심 먹고 뛰쳐나간.”

“없던데? 집에 들어올 때부터 없었어.”

순례객들이 집으로 돌아오자 가족들은 벼르던 등짝을 때렸다. 누구는 무거운 솥단지 들고 집에 와서 불 켜고 밥 먹는데 쭐래쭐래 잘도 숟가락 들고 상에 앉았다. 순례객들이 자란 배경은 각자 달랐지만 한 가지로 우는 소리를 냈다.

“아슬라가 혼인하고 싶대잖아요. 가도 쫓겨나요.”

진짜 전생에 원수였나보다. 가족들은 일제히 수저를 내려두고 집을 나섰다. 오늘은 어떻게 세 끼 중 한 끼도 편안하게 밥을 먹을 수가 없다.

하슬란에서도 저녁을 먹기가 쉽지 않았다. 막 숟가락을 들던 참에 대문이 소란스럽자 동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례객의 가족들이 손이 발이 되게 빌며 제발 아들을 받아달라고 간청하면서 순례객이 늘긴 했지만 일도 늘었다. 저녁 때 오셨으니 온 사람들에게 식사를 드려야 해서 하슬란 사람들은 먹으려던 밥도 양보하고 식사 준비하러 모두 일어났다. 순례객의 가족들은 사양하고 돌아가려다 냉큼 식탁에 앉아버리는 아들들을 발견했다.

설거지를 하면서 마니는 아슬라를 방에 보내려고 애썼다. 오늘 하루 만난 순례객 중 다섯을 빼면 죄다 아슬라랑 눈도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슬라는 개의치 않고 순례객들이 가져오는 가마솥을 받아들었다. 둘만 남았을 때야 마니는 속삭였다.

“짐도 두고 집에 가는 줄 알았는데.”

“남은 밥은 누룽지 만들게요.”

아슬라는 솥바닥에 밥을 얇게 깔아 눌어붙였다. 이제 막 현실로 돌아왔던 마니는 오랜만에 아슬라와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조금 나아졌다.

“이거 조금 가져가도 돼요?”

“다 먹어도 돼. 많이 배고파?”

“내일 선물로 가져가려고요. 수리모가 누룽지를 좋아한대요.”

집주인이 아니라 수리모 취향에 맞춘 선물이었나보다. 누룽지를 만들 동안 아슬라는 솥을 옮기는 팔에만 힘줄이 돋아보였지 얼굴은 즐거워보이기만 했다. 마니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우리 슬아는 앞길을 막았던 늙은이 어디가 그렇게 좋을까?

아슬라는 마리한의 부군 후보 훈련장에 입소하기 전부터 사브랑 사람들 모두가 마리한 부군이라고 점쳤다. 중간에 갑자기 퇴소 요청을 받기 전까지. 그 퇴소 요청 다음날에 수리모가 자기 조카인 솔뫼를 마리한의 부군으로 공인할 때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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