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 도위소병

[도위소병] 임소병 가라사대!

소가주는 나의 정인이 되어라!

골판지상자 by 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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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9 이전 완료 예~ 가라사대~

천우맹에서 좋아하는 사람을 괴롭히는 유형의 인간 군상을 찾아 예를 들라면, 어렵지 않게 임소병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어렸을 때 네가 정말로 OO이를 좋아한다면, 그런 짓을 하면 안 되는 법이야! 같은 교육 대신 녹림왕의 산적식 교양을 배워서일까. 오늘도 남궁도위를 친절히 골려 주고자 하는 의도로 그가 새벽 연습을 하는 곳으로 향한 절절한 짝사랑 육 개월 차의 임소병은 제가 찾던 남궁도위는 커녕, 아무도 없는 빈 공간에서 정체불명의 쪽지를 발견했다.

 

보통 이런 곳에 은밀히 숨겨져 있는 쪽지라면, 그리고 그것이 다른 사람도 드나들긴 한다지만, 압도적으로 남궁도위가 사용하는 빈도수가 높은 훈련장에서 발견되었다면. 정답은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바로 연서 말이다. 순수한 순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의 짝사랑 상대가 나름 사람과 비밀스레 내통한다는 것을 짐작하였을 때 충격을 받아야 마땅하겠지만. 임소병은 유감스럽게도 사랑보다는 호기심 충족이 우선인 더러운 사파였기 때문에. 그 구깃구깃하게 반쯤 접힌 쪽지를 열어다 보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내용은 임소병이 추측하던 것은 아니었다.

 

[이 종이를 들고, OOO 가라사대! 라고 말하며 소원을 빌면 하루 동안 그 바람이 실제로 이루어집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쓰여진 쪽지에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필시 누군가의 장난이 틀림없었다. 이걸 보고 진짜로 해보는 머저리 같은 인간은 아마 없겠지. 임소병은 픽 헛웃음을 지으며 종이를 손으로 구겨 던지려 하였지만, 문득 든 생각에 그를 주저하고선 종이를 손에 꼭 쥐었다.

 

아니, 물론 나는 미신 같은 건 안 믿는 편이고, 이런 내용이 사실일 리도 없지만. 한 번쯤 해본다고 해서 손해도 아니지 않나. 유치한 충동이긴 하였지만. 터무니없는 헛소리를 시도해보는 것도 가끔은 나쁘지 않다. 짝사랑하는 상태라면 더욱 그렇고. 임소병은 목을 벅벅 긁고는 주위에 혹시 사람이 없는지 기감을 세워 두리번거리곤 외쳤다.

 

“임소병 가라사대. 남궁도위는 나의 정인이 되어라!”

 

당연하게도, 종이에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온다던가. 하늘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네 소원, 잘 들었다! 하고 이야기를 해온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다. 고요했던 너른 공터에 울려 퍼지는 제 목소리에 임소병이 조금 부끄러워졌을 뿐. 종이와 임소병 둘 다 그대로였다.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그럼 그렇지.

 

쪽팔림을 뒤로 하고 임소병이 자리를 옮기려던 순간. 임소병이 그렇게 찾아대었던, 아까는 사람만 없었다지 공개 고백까지 감행했던 바로 그 상대, 남궁도위가 임소병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아침 단장을 한 후 늦게나마 수련하러 온 모양인지, 무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모습의 남궁도위는 다행히도 아까의 임소병의 외침을 듣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듣지 못한 체하는 것인지. 태연한 얼굴로 임소병에게 인사를 건넸다.

 

“녹림왕이 여기는 무슨 일이십니까? 아직은 주무시고 있으실 시간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제가 저 자는 시간 하나 마음대로 못 합니까? 이래서 정파 도련님이란, 다들 자기처럼 꼬박꼬박 일과 맞춰서 사는 줄 알지.”

 

임소병이 빈정거리자 남궁도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 흔들었다. 누가 봐도 그것이 정인을 대하는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았으므로, 역시 그런 이상한 사술같은건 없겠지. 왠지 모르게 허탈한 마음에 임소병이 어깨를 으쓱대며 에이, 정파 냄새 고약해서 사람 살겠나, 비천한 사파는 갑니다! 하고 다시 마저 걸음을 옮기려던 때. 뒤에서 자신의 팔을 잡아 오는 남궁도위의 손길이 느껴졌다. 무슨 용건인가 싶어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남궁도위가 우물쭈물 말을 꺼냈다.

 

“아니, 그래도 그냥 가시면 어떡합니까! 아무리 그래도. 정인 사이인데. 조금만 더 있다 가주시면 안 될까요.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녹림왕 가라사대, 아무리 사소한 기회라도 놓치면 손해일지니, 절대 좌시하지 말아라. 그 결과가 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자신에게 시선을 맞춰오지 못하는 흔들리는 눈과 살짝 상기된 뺨을 보며 임소병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예, 그러지요.”

 

라는 짧은 대답 하나였다.

 

 

 

이게 맞나, 이게 맞아? 어느새 임소병과 남궁도위는 아침 수련도 팽개치고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마 일각 전부터 자신의 정인이 되었을 남궁도위는 자신의 옆에서 조잘조잘 떠드는 것만으로 즐거운지 묻지도 않은 제 일상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었고, 염탐을 취미로 하고 있는 임소병은 그거 다 아는 이야기네요 제가 봤거든요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끄덕끄덕 대꾸해주며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근데 저희 이러고 있어도 됩니까? 청명 도장이 알면 경을 칠 텐데요. 우리가 사귄 지, 그러니까 얼마나 됐더라….”

 

“아마 한 달쯤 됐을 겁니다.”

 

“그런 설정이군요. 꽤 오래됐네, 아무튼 도장이 알면 지금 연애질하면서 수련도 안 하고 뭐 하는 짓이냐며 머리를 퍽. 어휴. 게다가 전 사파라서 소가주보다 더 호되게 당할 거라고요. 그 망할 놈의 사파 차별….”

 

“하긴 그렇네요. 이제 아침 먹을 때도 거의 다 되었고. 같이 가실까요?”

 

“됐수다. 그래봤자 의심만 받지. 먼저 가십쇼. 난 여기 주변 좀 걷다가 천천히 뒤따라갈 테니.”

 

“예.”

 

대답은 꽤 잘해주었으나, 잡고 있던 손을 놓아야 한다는 게 못내 아쉬웠는지. 미련이 가득한 얼굴로 손을 쥐었다 폈다. 아예 잼잼까지를 하고 있던 지금 남의 손으로 뭐하냐며 남궁도위의 머리를 부채로 꾹꾹 밀어 떼어낸 후 남궁도위가 떠나고 나서야 임소병은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남 좋아하는 소가주 파괴력 짱이네, 얼마나 손을 소중히 꽉 잡았었는지. 임소병도 무인임에도 불구하고 잡혀있던 손이 찌릿찌릿한 것이 손마디가 아려 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이깟 종이 하나로 원하는 것이 하루나마 손에 들어온다는 것은 분명 기분이 좋아야 하는 일이 틀림없을지 언대, 하루 있다 뺏길 것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오히려 불쾌하다는 감각이 먼저 드는 것이,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을 어쩌겠는가, 주어진 시간에라도 충실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어쩌면 이를 통해서 제 마음을 덜어내거나. 아예 포기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세상에 이런 기회조차 없는 사람들이 수두룩할 텐데. 그런 측면에서 보면 자신은 꽤 운이 좋았던 것이 아니겠는가. 꾸무적대며 남궁도위와 머물던 자리에 앉아 있던 임소병은 무릎을 탁탁 털고선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그래, 뽑아먹을 수 있다면 가능한 한 뽑아먹어야 한다. 반쪽이 난 남궁세가 곳간 털 수 있는 때, 지금 아니면 없다! 지극히 산적다운 결론을 내린 후, 한껏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임소병은 총총걸음을 옮겼다. 할 수 있는 것은 다해보리라. 후회가 없을 때까지!

 

 

 

 

아침부터 식당에서 기괴한 광경을 목격한 당패는 엄습해오는 두통의 기운에 미리 머리를 짚었다. 오늘치 독 수련은 아직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느낌에 차라리 식사를 하지 않고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소가주, 이것 좀 먹어 보쇼. 바삭바삭한 것이 식감이 끝내줍니다.”

 

“마싯넹형.”

 

자신의 앞에서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죽어라 싸워대던 남궁도위와 임소병 두 사람이 갑자기 서로의 입에 반찬을 넣어주고 꼭꼭 잘 씹는지, 아닌지까지 봐주는 괴랄한 행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서로 싸워서 벌칙 수행이라도 하고 있는겁니까? 하고 윤종 도장에게 물어보니 어제 남궁과 녹림 사이에 일이 없었다 하는 걸 보아 그건 아니고, 혹시 도위랑 녹림왕이 머리를 다치기라도 했냐고 백천 도장에게 물어보니. 평소에도 이상했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다 하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밥맛 떨어진다고 청명이는 나간지 오래고, 저도 슬슬 한계라 이제 뒤를 따르려 합니다. 녹림왕까지 저럴 줄은 몰랐는데, 어쩌다 저렇게.”

 

“저도 같이 데려가십시오. 그제 먹은 독이 목으로 올라오는 느낌입니다.”

 

그래도 쟤네가 애먼 짓 하지 못하게 봐줄 사람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 소가주는 여기 계십시오! 싫습니다! 그럼 백천 도장이 남으십쇼! 차라리 저걸 보느니 독약 들이키고 쓰러지는 게 더 나을 것 같단 말입니다! 하고 아웅다웅하는 백천과 당패를 뒤로 하고. 임소병과 남궁도위는 여전히 달큰한 정인 사이의 시각적 민폐 행각을 이어가고 있었다.

 

사실, 그 둘도, 아니. 적어도 임소병 또한 이 상황에 불만을 가진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제 이립보다는 사실상 불혹에 조금 더 가까울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연애 한번을 안 해본 임소병은 정인 사이에 해야 할 마땅한 애정 행각이 무엇인지를 몰랐고, 자칭 연애 1개월 차라지만 실제로는 한 시진 정도의 연애 경력을 갖고 있는 남궁도위 또한 그에 무지하기는 같았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주위 사람의 지식을 빌릴 수밖에. 그러나 천우맹 또한 연애 경험이 없는 사람으로만 가득이라, 임소병이 자문을 구할 만한 사람은 정략결혼을 치른 당군악을 제외하면 맹소정도밖에 없었는데. 그 결과가 지금 이렇게 나타난 것이다.

 

처음엔 남궁도위 또한 질색하긴 하였으나. 임소병이 이건 정인 사이에서 당연히 해야 하는 도리 같은 거라고요. 소가주는 연애 경험이 없어서 모르시려나? 하고 비웃으며 입에 고기 완자를 젓가락으로 쑤셔 욱여넣은 후로는, 자신도 적극적으로 공격…. 이 아니라 다정한 연인들 사이의 밥 먹여주기를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알콩달콩한 사랑의 힘으로, 모두를 식당에서 내쫓고 나서야 탈진한 채 남궁도위와 임소병은 싸움을 멈출 수 있었다.

 

“소가주, 좋은 실력이었습니다.”

 

“녹림왕도요, 그렇지만 제가 날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제발, 좀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아니. 중간부터는 그것만 주지 않았나?”

 

“소가주야말로, 내가 기름기 있는 음식을 잘 못 먹는다는 걸, 기억해줬으면 하는데…. 뭐 아무튼 됐습니다. 날이 짧으니 이렇게 낭비할 시간은 없지요.”

 

잔뜩 늘어진 남궁도위를 끌어 일으켜 세운 후, 임소병이 향한 곳은 장이 길게 늘어선 시전이었다. 두말하면 섭섭하겠지만, 당연히 남궁의 기둥을 하나 더 뿌리뽑기 위한 선택이었다. 물건 몇 개 산다고 흠집도 나지 않을 남궁의 재정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뭐라도 털어먹는 건 즐겁지 않은가. 다만 그 주장과는 상반되게도, 임소병은 자신의 물건을 사러 온 것은 아니었다.

 

“소가주, 이거 한번 해보십시오!”

 

“아무리 생각해도 여성용 장신구인 것 같습니다만.”

 

“어허, 꾸밈에 남녀가 어디 있나. 밖에서 그런 말 하고 다니면 큰일 납니다. 어서어서, 빨리 와보라니까!”

 

결국 남궁도위가 기억을 잃게 될 거라면, 후일 자신이 수상하게 ‘남궁도위가 산’ 장신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좋지 않을 것이다. 원래 무언가를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차림이 취향이 아닌 것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보는 것은 다르지. 내 돈은 아니나, 이왕 돈을 쓸 거라면, 예쁜 것을 꾸미는 것이 보기에 좋음이 당연하다.

 

임소병에 의해 돈도 털리고 몸도 털려, 색색의 장신구로 꾸며진 남궁도위를 다른 사람이 수군거리든 말든 옆에 끼고 다니며, 임소병은 킥킥대며 웃었다. 그런 임소병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시선이 있었으나. 저기도 한번 가보죠. 하고 잔뜩 들떠있었던 임소병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였다.

 

 

 

 

“아, 재밌게 놀았다. 소가주도 재미있었지요?”

 

“저는 딱히 산 것도 없고, 잔뜩 희롱만 당했던 것 같습니다만….”

 

“아이, 왜 그래. 그거 다 소가주 거잖아요. 새 장신구가 많이 생겼으니 이제 아침에 꾸밀 맛도 더 나지 않겠습니까.”

 

“많아도 너무 많은데요….”

 

면경을 인상 쓴 얼굴로 들여다보던 남궁도위가 갑자기 손을 머리 뒤로 올리더니 임소병이 제 머리에 대충 꽂아넣었던 비녀 하나를 빼어 쥐었다. 순간 무슨 행동을 하는 것인지 의아하여 남궁도위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임소병을 순식간에 제 앞에 돌려 앉힌 남궁도위는. 아까 제 머리에서 빼낸 비녀를 임소병의 머리에 찔러넣었다. 그러고선 제 앞에 있던 면경을 밀어주고선 어떠냐 하며 물어왔다.

 

“어떻긴 어떠냐니, 소가주와는 달리 나는 이런 장신구는 영 안 어울리는 편이고, 또 이건 내가 하고 다니기엔 너무 비싼 것 같은데.”

 

“글쎄요, 전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요. 그리고 선물 받은 것이라 하면 이상하지 않잖습니까…. 정인 사이에, 물건을 선물하는 일이 드문 것도 아니고요. 이 비녀가 싫으신 것이라면, 다음에는 제가 골라 녹림왕에게 새로 선물드리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녹림왕한테 맞는 장신구를 궁리해 찾아내는 것도. 꽤나 즐거울 것 같군요.”

 

“...”

 

그 후로는 정적이었다. 머리를 매만져 정돈해주는 남궁도위의 손길을 가만히 느끼며, 임소병은 어째선지 모를 울적한 기분에 고개를 푹 숙였다. 정인이라, 이 하루가 지나고도 그럴 수가 있겠는가. 임소병은 자기 자신에게 대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을 거듭하며 제 분수를 찾으려 했다. 그러기 위해선 이 선물은 받을 수 없는,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손을 뿌리치고선, 임소병은 머리에 단정히 꽂혔던 비녀를 뽑아내어 남궁도위에게 쥐여주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남궁도위는 당황한 듯 보였으나. 그러든 말든 임소병은 아무튼 나는 필요 없으니 가져다 다시 팔든지 말든지 하라는 말을 남기고선 발길을 재촉해 방에서 나갔다.

 

뒤를 따라나오는 발걸음이 느껴졌지만 제 발을 멈추어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고, 동시에 속도를 빨리해야 할 필요성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양가적인 감정들이 제 안에서 서로 격돌해, 진창을 이루고 있었다.

 

녹림왕 가라사대. 처음부터 멍청한 짓은 시작하지를 말아라.

 

생각해보면, 처음 허무맹랑한 짓을 했던 때부터 잘못되었었던 것이다. 가져서는 안 될 기대를 품고. 이 시간이 계속 이어져, 내일도 모레도 같은 나날을 보낼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후회 없는 하루를 보내겠다는 사람의 생각지고는 너무 구차한 발상이지 않나.

 

임소병 가라사대. 하지만 어찌 하지 못하는 감정이 있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람이기에 저는 속절없이 지고야 마는 것이다. 자신에게 다가와 무슨 일 있냐는 남궁도위의 물음에, 히 하고 순간적으로 소가주가 너무 재수 없어서 뛰쳐나와 버렸다는 농으로 답하며, 임소병은 얼굴에 비친 내색을 지우며 웃었다.

 

 

 

 

점차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임소병과 남궁도위는 이러니 저러니 해도 천우맹의 소속이기에 그것이 단 하루라 해도 서로의 일로만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고, 그렇기에 남궁도위는 마저 창궁검대와 수련하러, 임소병은 청명과 다른 수장들과 함께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러 향했다.

 

아쉬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터이다. 한 달 동안 사귀었다는 암시가 있을 남궁도위조차, 낑낑거리며 오늘 배탈로 병가라도 낼까요? 하는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였으니까. 야속하게 날은 점차 저물었고, 사용 횟수는 안 적혀있지 않았나 싶어. 소원 세 개를 빌라는데 하나에 소원을 무한대로 늘려주세요. 하는 아이 같은 발상을 하며 소매를 뒤적거리며 찾아도 보이지 않는 쪽지는 정말 이 하루가 끝나간다는 걸 실감케 했다.

 

어찌 되었든, 이젠 일상으로 돌아올 때이다.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하늘의 아래, 처음으로 쪽지를 주웠던 장소에 서서 임소병은 생각했다. 입술 한 번 물어보지 못한 건 아쉽지만, 그렇다고 이런 사술로 남을 희롱하기도 이 정도면 충분히 너무했으니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나저나, 시전에서 일도 그렇고, 오늘 아침도 그렇고. 소문나면 어떡하지. 기억 상실 범위 어디까지야? 소가주 혼자만 다 잊어버리면 볼 맛 나겠는데….

 

혼자 키득거리던 임소병은, 갑자기 머리에서 핑 도는 감각을 느꼈다, 아침만 먹고 죄다 식사를 걸러서인가, 이 망할 절맥 몸뚱아리. 근데, 좀 심한 것 같은데…. 그대로 쓰러진 임소병의 뒤에 검은 인영이 드리운 것은 얼마 지나지 않은 후였다.

 

그것은 아침 수련을 하러 정시에 온 남궁도위였다, 녹림의 처소로 옮기기 위해 임소병을 안아 옮기는 모습은 침착하였으며, 어쩌면 이 모든 상황을 짐작한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녹림왕, 어제 기억 안 나십니까? 도위랑 왜 대체 그러고 있었던 겁니까? 저 결국 토하러 갔었는데요”

 

“어제 무슨 일이 있었다고 그럽니까? 소가주, 그쪽은 기억 납니까? 자꾸 보는 사람들마다 이상한 소리를 하고 난리야... 다들 제가 사파라고 절 짜고치고 놀리는 거라면, 가만 두지 않겠습니다. 녹림의 원한을 보여드리지요.”

 

“어우, 됐습니다. 말을 말아야지. 도위야, 너도 정말 기억 안 나냐?”

 

“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언제나와 같은 이른 새벽, 수련을 하러 나온 남궁도위는 이상한 쪽지를 발견했다. 바르게 접힌, 삐뚤빼뚤한 글씨로 터무니없는 헛소리를 적어 놓은 것이었다.

 

다만, 시도함에 있어서 나쁜 것은 없으니. 남궁도위는 조용히 제가 바라는 것을 읊었다.

 

남궁도위 가라사대, 녹림왕이 저를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 혹시 시간선 때문에 이해가 안되실까봐... (자신의 글을 믿지 못하는 편) 

남궁도위 가라사대, 녹림왕이~ > 임소병 가라사대, 남궁도위가~ 순서입니다. 도위가 먼저 소원 빌었구 따라서 기억도 있습니다 떡밥을 잘 뿌려놓지 못한 것 같아서.. 어쩐지.. 죄송한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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