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S-31

빵준 실험체(?)AU 유혈있음

落花流水 by 이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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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수에게

나 미칠 것 같아. 서류 생각을 할 때마다 구역질이 멈추지 않아.

네가 없는 하루하루가 정말 끔찍해.

이게 끝이 아니야.

위에서 말했다시피 연구원 새끼들이 떨어트린 서류를 봤어.

진짜 웃긴 게, 우리는 연구원에서 평생을 산 게 아니었어. WJ-04, JS-31 같은 게 다 지랄이었던 거 있지?

그거 알아? 그 서류에 우리 신상이 있더라고. 내 이름이 전영중이래. 넌 성준수고.

이름 멋지더라.


얼굴에 철면피라도 썼는지, 그렇게 감정이 없을 수나 있는 건지.

우린 끝까지 이용당한 거라는 것을 최근에 알아버렸지 뭐야.

진심 네 장례식도 못 차려줄 정도였나 싶어.

그래서 탈출하려고.

다 불태우고, 너의 흔적만을 들고 탈출할 거야.

폭탄에 맞아 죽어도, 총에 맞아도, 배에 칼에 맞아도 상관없어. 네 마지막 말이었으니까.



보고 싶어. 널 보고 같이 웃고 싶어.

XXXX.XX.XX

전영중


JS-31


준수를 처음 만났을 때가 엊그제 같다. 눈을 감으면 네가 눈앞에서 자꾸만 아른거린다.

내 기억의 시작부터 네가 있었고, 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건 널 잊지 못해 그저 남아있을 뿐인 내 기억이다.

당연히 넌 내 오래되어 곪아버린 내 기억 속에서 미화되어가고, 흐려져 갈 것이다.

그런 나는, 흐려져만 가는 내 기억을 잡으려 그저 한없이 널 회상할 뿐이다.


"이름이 뭐야?"

원래부터 내가 있었던 방에 새로운 애가 들어왔다. 새하얗고 잘생긴 애였다. 처음에는 낯을 가려 말을 걸지 못했지만, 같은 방이 된 지 2~3일쯤 되는 날, 나는 방에 들어가던 그 애의 옆에 가서 물어보았다. 걔 팔뚝에 커다란 밴드 몇 개가 피와 고름으로 물들어진 채로 붙어있었다. 아마도 실험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간에, 내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걔는 방문을 열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JS-31."

"난 WJ-04. 잘 부탁해. 같은 방 쓰잖아."

"...그러시던지."

JS-31은 잠깐 날 바라보더니 대답을 하고 뒤를 돌아 방 문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런 JS-31에게 조금 다가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아무래도 친해질 수 있겠지. 히히.

내 소망대로 이 각박한 연구소 안에서 또래라고는 나와 JS-31밖에 없었기에, 우리는 적당히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다.

"......"

다 시들어가는 샐러드를 깨작깨작 입에 욱여넣었다. 벌써 며칠째 샐러드에 옥수수 몇 알, 상한 것 같은 양배추 몇 장과 감자 찌끄레기가 나왔다. 전반적으로 맛이 없는 것을 넘어 괴상한 맛이 났다.

"...야, 맛있냐?"

JS-31은 상관없다는 듯이 대충 포크로 푹푹 찍어 입에 때려 넣었다. 물론 양배추에서 이상한 맛이 났는지 바로 바닥에 뱉어버렸다. 퉷.

"아오 씨발... 뭔 양배추가 이딴 맛이 나. 진짜 토 나올 것 같... 우욱..."

양배추를 뱉어냈지만 조금은 삼켰는지 JS-31의 안색이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야 여기서 토 하지 마. 니가 토하면 나도 할 것 같으니까."

나는 토 하려 하는 JS-31을 보고 킥킥 웃으며 샐러드를 한 입 먹고 그것을 삼킨 순간, 좆 됨을 감지했다. 샐러드 사이에 큰 양배추가 하나 끼워져 있었던 것이었다.

"...아 미친. 우욱-"

"닥쳐... 씨발... 또라이 새끼들이 이딴 걸 밥이라고 주는... 우웨웩-"

서로 말을 맞춘 것 처럼 동시에 포크를 내동댕이치고 후다닥 화장실로 달려가 토를 쏟아냈다. 우웨엑. 우웩. 씨발 죽겠네. 그 양배추 진짜 우욱- 씨발... 잠깐... 조용히 해봐 토 쏠려. 나도야 씨발. 우웨엑-

"..."

"..."

정적이 흘렀다. 우리는 서로의 급속히 파리해진 얼굴을 마주 보았다. 목소리는 한껏 맛이 가버렸고, 목구멍에는 빵꾸가 난 것 같았으며 토한 이물감과 냄새, 위액 같은 것들 때문에 불쾌했다. 나는 손을 씻으며 네게 말을 꺼냈다.

"위액 장난 아니다."

"어. 아으 씨발... 목구멍에 구멍 난 듯..."

제대로 맛이 가 걸걸해진 목소리로 우리 둘은 투닥거리며 비틀비틀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JS-31이 일주일이 넘도록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뭐 실험 갔겠거니 하고 말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 사흘, 나흘, 그리고 이레가 되어도 JS-31은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빨빨대며 연구소를 둘러보았지만 JS-31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음날, JS-31은 비틀거리며 돌아왔다. 휘청휘청 걸어오더니 침대 바로 앞에서 엎어졌다. 새하얀 얼굴에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오고 안 그래도 창백했던 피부는 더 새하얘져 있었으며 온몸이 걸레짝이 되어있었다.

"...야. 너 괜찮아?"

씻고 나오자마자 쓰러져있는 JS-31을 봐서 순간적으로 깜짝 놀랐던 나는 조심스럽게 JS-31을 살펴보았다. 흔들어도 보고 몇 번 불러봤지만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낑낑대며 침대까지 끌고 와 조심스레 눕혔다.

몸 상태를 확인해 보니 더 가관이었다. 불가마 같은 이마와 비 오듯 쏟아지는 식은땀, 온몸에 붙어있는 붕대까지. 결국 문을 박차고 구급상자를 찾으러 방 밖을 나섰다. 이 멍청이가 의료실을 안 들렸나.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방문을 벌컥 열었다. 넓은 연구소를 전력 질주한 바람에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버렸다. 의료실에 찾아가 보니 금방 구급상자를 품에 안겨준 덕에 빨리 올 수 있었다.

허겁지겁 방에 있던 손수건에 찬물을 묻혀 JS-31의 이마에 올려주었다. 구급상자를 뒤져 해열제를 찾아 JS-31의 입을 벌리고 흘려 넣었다. 물수건은 빠르게 뜨거워졌고, 난 쉴 새도 없이 물수건을 새로 갈아 올려주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벌써 시계가 새벽 2시를 가리켰다. 결국 눈꺼풀이 버티지 못하고 스르륵 감겨 버린 바람에 자연스럽게 침대로 엎어졌다.

"으아..."

살짝 흘려버린 침을 소매로 슥 닦았다. 지금 몇 시지... 고개를 돌리자 햇빛이 조그마한 창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9시 언저리였다. 내 옆을 슬쩍 보니 JS-31은 어디로 소멸했는지 또 사라지고 없었다.

1층으로 내려가 보니 JS-31은 JS-31답게 샐러드를 욱여넣고 있었다.

"야, 니 괜찮은 거 맞아?"

"아니, 씨발 일주일 동안 가둬놓고 지랄해 준 덕분에 하나도 안 괜찮아. 근데 어제 이마에 수건 올려준 거 너냐?"

"응. 그럼 나겠지 누구겠냐?"

"고마워."

"...?"

"아 고맙다고."

그러고선 JS-31은 짜증 난다는 듯이 거칠게 푹푹 감자 3개를 꽂아 입에 쑤셔 넣었다. 내 입꼬리는 씰룩씰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JS-31이 고맙다라니. 킥킥. JS-31에게 한 번 재수 없게 웃어주고 테이블 뒤로 걸어가 접시를 들고 아침 식사를 받았다.

"가면 안 돼?"

"...귀찮게 좀 하지 마."

할 짓이 없어 연구소를 싸돌아다닌 나는 연구소 안에 있던 도서관을 찾아냈다. 딱히 문 앞을 막고 있던 사람도 없었고, 한 번 들어가 보니 책은 엄청나게 많지 않았지만, 새로운 공간을 찾았다는 사실을 JS-31에게 알려주고 싶어 후다닥 찾아간 것이었다.

"책이 엄청 많았어. 재밌을 것 같지 않아?"

"아오... 니 글 읽을 줄은 알고?"

"...어?"

"모르잖아 돼지야."

"......"

그렇다. 그때 당시에는 글을 몇 글자밖에 읽을 줄 몰랐다. 하지만 어쨌든 간에 난 JS-31이랑 같이 가고 싶었고, 그래서 계속 졸랐다.

"아 시끄러. 갈 테니까 꺼져 이제."

"우와! 진짜?"

"그래 씨발. 간다고."

하도 옆에서 쫑알댄 덕에 JS-31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JS-31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JS-31의 손을 끌고 달려 도서관 앞에 도착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는 살금살금 들어갔다. 혹시나 출입 금지였을 수도 있었기에 조심스럽게 내부를 구경했다. JS-31은 책 같은 거에 관심이 없다는 듯이 대충 훑었고, 나는 호기심 때문에 도서관 안을 빨빨대며 돌아보았다.

궁금한 책들은 책꽂이에서 뽑아 표지를 보았다. 더듬더듬 읽긴 했지만 뭔 소린지 모르겠는 제목투성이였다. 도서관을 빨빨대며 열다섯 권쯤 책을 뽑았을 때, 표지에 신기한 모양이 그려져 있는 책을 발견했다. 제목에는 '음식'이라는 단어가 적혀있었고 나는 해맑게 웃었다. 우와 음식? 표지에 있던 그림이 음식인 것이었다. 표지에 있는 그림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매일 썩어빠진 풀때기와 감자 찌끄레기. 좀 괜찮다 싶으면 문드러진 작은 토마토가 다였다. 책을 펼치자 휘황찬란한 음식 그림들이 가득했다. 우와. 맛있겠다. 연구원들이 가끔씩 먹고 있던 음식들도 있었다.

"야! 이거 봐봐."

"...왜."

"맛있어 보이지 않아?"

JS-31의 얼굴에다가 토마토와 빨간색 소스가 올려져 있는 면 요리 그림을 들이댔다. 그러자 JS-31은 손으로 책을 좀 멀리 밀어내며 책을 보았다.

"...맛있겠네. 근데, 이런 게 이렇게 많은데 씨발 그 새끼들은 썩어 문드러진 쓰레기만 먹인 거냐?"

"내 말이. 한 번씩 다 먹어보고 싶다..."

"니가 돼지냐? 다 처먹게?"

"말이 그렇다는 거지. 너도 먹어보고 싶잖아."

책장을 사락사락 넘기며 군침을 삼켰다. '스테이크'라는 요리가 정말 맛있어 보였다. 그동안 입에 넣은 모든 음식이 다 쓰레기 같았다(맞다).

JS-31은 뭔 이상한 책을 꺼내 들었다. 나는 슬그머니 JS-31의 뒤로 가서 책을 힐끔 보았다. 뭔 네모난 그림에 색깔 점들이 여러 개 찍혀 있었다.

"이게 뭐야?"

"그냥. 재밌어 보여서."

"이게 뭔데?"

"나도 몰라. 어떻게 알아 내가."

JS-31이 책장을 대충 휘리릭 넘기다가 말고 그대로 책꽂이에 책을 집어넣었다.

"야. 가자."

"...응."

JS-31이 불러내자 나는 급하게 책을 원래의 위치가 아닌 책꽂이에 쑤셔 넣고는 뒤따라갔다.

"끄응..."

받아쓰기에서 4개를 틀렸다. 젠장. 최근 들어 나와 JS-31은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중에 필요하다는 이유로 연구소에서 우리에게 글 읽는 법과 쓰는 법을 가르쳤다. 물론 이것도 이용해 먹기 위한 미래에 투자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한 번도 이런 걸 배워보지 못한 나에게는 꽤 재미있었다.

"야. 넌 안 힘들어?"

연필 한 자루를 부러질 듯이 쥐고 벅벅 종이에다 무언갈 쓰고 있는 JS-31에게 물었다. 강한 힘 때문에 연필심이 계속 부러져버려 결국 JS-31은 연필을 바닥에다가 내동댕이쳐 버렸다.

"쉬워 보이겠냐? 씨발 말하는 대로 쓰면 되지 뭘 또 지랄인 거야."

받아쓰기 10문제 중 5개에 빗금이 쳐져 있는 걸 보고 큭큭 웃었다. 내가 이겼네. 나의 시험지에는 JS-31보다는 적은 빗금이 그어져 있었다. 이겼다는 소소한 기쁨에 씰룩씰룩 입꼬리가 움직였다.

"요~ 내가 이겼네? 어쩌냐?"

승리의 미소를 지어 종이를 팔랑대며 JS-31에게 보여주자 JS-31은 내가 열심히 깎아놓은 뾰족한 연필을 집어 들어 종이에 내리꽂았다. 펑. 큰 소리를 내며 종이가 두 동강이 나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야!"

나는 걸레짝이 된 종이 두 조각을 주워들고 소리쳤다.

오랜만에 실험에 들어갔다. JS-31은 한동안 실험 안 한다나 뭐라나. 젠장. 몇 번을 겪어보았지만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는 실험실 때문에 눈을 꼭 감았다. 으으 끔찍해.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겠지? 얼마나 걸릴까? 같은 잡생각을 하는 도중에 자동문이 열리고 연구원 세 명이 들어왔다. 그러고선 대충 장갑을 끼더니 나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렇게 내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었다.

"야, 니 죽었냐?"

3일 만에 끝난 실험은 지독하게 내 몸을 괴롭혔다. 실험 마무리로 죽지 않게 처치 같은 것은 해주지만, 약물 부작용과 과다출혈 기타 등등으로 실험이 끝나면 항상 반시체가 되어 돌아왔다. 방으로 들어가는 길에 의료실에 찾아가 대충 진통제를 받았다. 진통제에 문제가 있는지, 두 알로도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다. 한 알 더 먹으려 했지만 의료실 선생님이 주지 않아서 결국 비틀거리며 방으로 돌아왔다.

JS-31은 침대에 누워 도서관에서 몰래 쌔벼온 것 같은 책을 보고 있었다.

"으유, 약골새끼."

"닥쳐봐... 죽을 것 같으니까."

"약은 먹었냐?"

"응. 근데 약이 안 들어."

"...걍 자."

시계를 겉눈질로 한 번 보았다. 오후 6시 31분. 조그마한 창으로는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자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눈이 자기 멋대로 감겼다.

옆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리다가, 이마에 차가운 감각이 느껴졌다. 아마도 물수건이겠지. 하하. 그래도 그 덕분에 머리가 시원해져 편하게 잠에 들 수 있었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뚫어져라 시계를 바라보았다. 달력은 12월 31일만을 남겼고, 우리는 18살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3. 2. 1. 땡-

XXXX년이 되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JS-31에게 새해 인사를 했다.

"새해 복 많이 받아."

의자에서 일어나 좀 두꺼운 펜을 들고 '12월 31일' 칸에 X자를 그었다. 그러고서는 벽에 걸린 달력을 떼어내었다.

"응. 너도."

JS-31은 나를 바라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그동안 우리는 지난 몇 년 동안 많은 일을 겪어왔다. 인체실험이 끝나 인간병기로 쓰이고 있고, 이제는 글을 제대로 읽고 쓸 줄 알아 이젠 책을 더듬거리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키는 많이 컸고 실험 부작용이 생겨버린 바람에 눈 색이 마치 토끼처럼 빨갛게 물들어버렸다. 또, 그동안 몇 명의 실험체가 들어왔지만, 언제 다 죽었는지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그 외에는 달라진 거 하나 없이 똑같은 하루를 반복하며 살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쓰레기 먹기, 군대에서 오는 전략 같은 것을 대충 보고 언제인진 모르지만 연구소 담 너머로 들어온 공 하나로 JS-31이랑 대충 놀다가 쓰레기 먹고 도서관 가서 잠깐 책 좀 보다 산책하고 쓰레기 먹고 샤워하고 JS-31이랑 좀 투닥대며 얘기 좀 하다 자는 것이 반복되었다.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시계는 벌써 12시를 훌쩍 넘은 시간을 가리켰고, 나는 침대로 쓰러지듯이 누워 JS-31을 바라보았다.

딸깍딸깍딸깍딸깍

한 손으로 턱을 괴며 검정색 볼펜의 윗부분을 연속적으로 눌러댔다. 이번 임무의 작전을 설명하던 연구원은 계속 들리는 딸깍 소리가 몹시 거슬렸는지 결국에는 연필로 바꾸어주었다.

딸그락- 딱-

이번에는 펜 돌리기를 했다. 익숙하지 않아 연필은 계속 책상 위로 떨어졌고, 결국 바닥에 떨어트리자 연구원은 짜증 난 것 같은 얼굴로 연필마저 압수해버렸다.

"......"

엎드려서 잤다. 때문에 서서 작전 설명을 들어야만 했다. 내가 이렇게 정신 산만하게 구는 이유는 단순했다.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임무의 작전 설명을 계속 듣고 있으려니 뭔 소린지도 모르겠고 난 누구 여긴 어디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졸렸다. 한마디로 존나 재미없었다. 졸음이 폭풍처럼 몰려왔기에 깨어있으려 산만하게 굴 수밖에 없었다. 하품을 몇 번이나 했지만, 졸음은 무자비하게 나를 공격해왔다. 그 와중에 JS-31은 열심히 종이 쪼가리에 써져 있는 글을 보며 줄을 긋고 있었다. 이럴 때 보면 정말 대단했다. 안 졸리나. 난 서 있어도 졸린데.

JS-31이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나는 하품하는 리액션을 취하자 JS-31은 한 번 웃더니 작전 설명을 위해 나눠주었던 종이에다가 무언가를 끼적이기 시작했다.

'돼지야. 밥을 많이 먹으니까 졸리지. 내가 작작 처먹으라 했잖아.'

JS-31은 종이에다가 날카로운 글씨체로 빠르게 써 내게 보여주었다. 내가 주둥이를 삐쭉 내밀자 JS-31은 입모양으로 '앞이나 봐'라고 말하였다.

4번째인가 5번째인가. 어쨌든 임무가 시작되었다. 나는 먼 산을 바라보며 JS-31과 기지가 연결되어 있는 이어폰을 귀에다가 푹 꽂았다. 장갑의 벨크로를 제대로 고정시키고, 신발 끈을 제대로 묶었다. 총알 개수를 확인하고 보안경을 쓴 뒤, 권총을 장전하고 장검을 꾹 쥐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 이미 첫 번째 임무에서 한 번 죽을 뻔했던 전적이 있었기에 시작 전에는 항상 긴장이 많이 되었다. 주먹을 꽉 쥐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나는 바로 옆에서 이어폰을 차고 있던 JS-31을 한 번 툭 쳤다.

"야, 나 두고 죽지나 마라? 맨날 골골대서 걱정된단 말이야."

"지랄. 니나 죽지 마. 맨날 골골대는 건 니 아니냐?"

JS-31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한 번 흘겨보았다. 푸하핫. 쟤 놀리는 것도 나름 재밌다니까. 나는 웃으며 작전 시작을 기다렸다. 몇 분 뒤, 신호가 오자 우리는 서로 반대쪽으로 갈라졌다.

"살아서 봐."

"그래."

폭음소리와 총소리, 비명소리 등등. 그런 것들이 이어폰을 끼지 않은 반대쪽 귀에 가득 담겨 울렸다. 나는 그저 멍하게 잔혹한 광경을 눈에 담으며 계속 적들을 썰어나갔다. 내가 총을 한 번 쏘거나 칼을 한 번 휘두를 때, 적들은 진득한 선혈이 흩뿌리며 쓰러져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얼굴에는 검붉은 피가 굳어 눌어붙었고, 쥐고 있던 칼에서는 쉴 새 없이 바닥으로 피가 똑 똑 떨어졌다.

"요~ JS-31. 잘 하고 있냐?"

"닥쳐."

내가 있는 쪽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JS-31에게 말을 걸었다. JS-31쪽은 내 쪽보다 머릿수가 더 많았는지 아직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 나는 옆에서 단검을 쥐고 달려오는 적을 간단하게 방아쇠를 당겨 처리하며 웃었다.

"푸핫, 아직도 멀었어?"

"니가 와서 도와주던가 씨발."

도와달라는 말을 들어주려 천천히 JS-31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현란하게 잭나이프를 다루는 JS-31을 보며 씩 웃었다. 이야, 역시 JS-31이네. 넌 왜 이렇게 멋지냐? 다 써버린 총알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새 총알을 꽂아 장전했다. 그리고 휘적휘적 긴 다리를 움직여 JS-31에게 다가갔다.

이어폰 너머로 JS-31의 가쁜 숨소리와 적들의 비명,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야 씨발, 빨리 좀 와 봐. 아오!"

"하핫. 지금 가고 있어~"

나는 JS-31의 SOS 요청을 듣고 걸어가던 다리를 더 빠르게 움직여 달려갔다.

"야, 야. 니 오라 했는데 왜 이렇게 밍기적거려?"

"왔잖아~ 근데, 우리 JS-31. 이 정도도 처리 못 하는 거야?"

"닥치고 죽이기나 해, 등신아."

맞추지도 않았지만 마치 한 몸이라도 된 듯, 우리는 빠르게 적진 앞으로 치고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한 총소리가 2번 들렸다. 그 뒤에는 폭발 소리가 연이어 들려졌다. 나는 싸해진 분위기 때문에 고개를 뒤로 휙 돌렸다.

뒤에는 JS-31이 있었다. 피를 뚝뚝 흘린 채, 옆구리를 부여잡은 JS-31. JS-31은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총을 쏜 새끼 머리에 잭나이프를 던져버리고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JS-31쪽으로 미친 듯이 뛰어갔다. 앞을 막는 새끼들은 가차 없이 죽였다.

"야!!!"

나는 JS-31을 향해 세게 소리쳤다. 그러자 JS-31은 피를 한 번 토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왜... WJ-04."

"...너......"

나는 홀린 듯이 JS-31 앞에 앉아 허벅지의 작은 가방에서 붕대를 꺼내들었다. 야, JS-31. 이거 지금 짜고 치는 거지? 말을 좀 해봐 JS-31. JS-31의 허리에 붕대를 단단히 둘렀다. JS-31의 입에서 작은 신음 소리가 나왔지만 나는 무시한 채 계속했다.

"으윽... 아니, 씨발. 좀 살살해라..."

"JS-31아, 닥쳐봐."

급하게 붕대를 감느라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배의 3분의 1이 총알 때문에 뚫려 있었다. 한 방만 맞은 게 다행인 걸까. 웬만한 총알로는 이 정도의 치명상을 안겨주지 못했겠지만, 적군이 쓰는 총알은 무슨 괴상한 거라도 장착이 되었나 본 지 JS-31의 배에 총알이 박힘과 동시에 펑 터져버린 것이었다. 그 때문에 적이 쏜 두 발을 그대로 다 맞아버렸으면 JS-31은 그대로 즉사였을 것이다.

"윽..."

JS-31의 고개가 내 어깨를 향해 숙여졌다. 나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JS-31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두 팔을 올려 JS-31을 끌어안았다.

"야... 연구소에서, 나와서...... 연구소 탈출해라..."

"..."

JS-31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온몸의 힘이 다 빠졌나 본지 JS-31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게 마지막이겠지. 나는 결국 눈시울이 점점 빨개지더니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흐어엉- 이 나쁜 새끼야-. JS-31은 피식 웃더니 그대로 말을 이어나갔다.  

"니, 그 뭐냐... 책에서 봤던 거, 다 먹어봐라. 연구소 탈출해서."

"...하하. JS-31. 알겠으니까... 제발 고개 좀 들어봐-."

JS-31이 답이 없자 나는 그런 JS-31을 더 꽉 끌어안았다.

"...야."

"......왜."

JS-31은 내 부름에 힘겹게 대답해 주었다. JS-31, 네가 없었다면 난 연구소에서 정신을 붙들고 살 수 있었을까? 네가 없었다면 난 무엇 때문에 살아갔을까? 내가 항상 귀찮게 굴었는데도 내가 싫지 않았을까? 너는...

"...내 옆에 계속 있어줘서, 고맙다."

울음을 꾹 삼키고 해맑게 웃으며 JS-31에게 짧은 작별 인사를 건넸다. JS-31도 작은 목소리로 '나도.'라 답한 뒤, 어색하게 나를 끌어안던 손을 힘없이 떨구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고개를 들어 광활한 평야에서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늘은 주황빛과 보랏빛으로 아름답게 물들어있었다.

난 그저 차갑게 식어버리고 있는 널 끌어안고 너처럼 아름답게 지고 있는 태양을 바라볼 뿐이었다.


너는 죽어버렸고, 난 비참하게 살아있다.

연구소로 돌아왔다.

차가워진 JS-31을 힘겹게 끌고 왔지만, 장례는 치르지도 못했다. JS-31은 그저 그들에게는 폐기물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결국 나는 몰래 JS-31의 머리카락을 잘라와, 걔가 사용했던 손수건에 감싸 방에 있는 서랍에 고이 넣어놓았다.

JS-31이 사용했던 모든 물건들을 꺼내보았다. 하지만 연구소 안에서 평생을 살아왔기에 딱히 특별할 것도 없었다. 그중에서 임무 바로 직전까지 보고 있던 농구 책을 펼쳐보았다. 페이지 귀퉁이는 낡아버려 다 바래버렸고, 하도 읽는 바람에 종이는 대부분의 페이지가 구겨져있었다. 그리고 JS-31이 대충 서랍 마지막 칸에 던져버려서 제멋대로 구겨져버린 종이 뭉텅이들을 집어 들었다. 나는 그 종이를 한 장씩 뒤로 넘겨보았다. 푸핫. JS-31 이런 것도 그렸었나 보네. 나는 귀퉁이에 엉망진창 그려진 군인과 연구원들의 낙서를 보고 큭큭 웃었다. 몇 장을 더 살펴보았다. 그중에는 우리가 서로 나누었던 쪽지, 별 의미 없는 낙서, 연구원과 군인의 저주 정도밖에 없었다. 그 하나하나를 끄적이는 JS-31은 전부 내 기억에서 생생히 살아움직였다.

며칠 뒤, 나는 JS-31이 죽고 나서 처음으로 방 바깥으로 나왔다. 영혼 없이 그저 복도를 걸어 식당으로 내려갔다. 항상 내 곁에 있었던 JS-31이 무한 반복으로 기억 속에서 재생되었다. 식판을 쥐자 늘 먹던 메뉴의 식단이 접시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난 머릿속에서 생각을 지워버리기 위해 자리에 앉아 썩은 양배추를 입에 욱여넣었다.

방으로 돌아가는 길이였다. 복도에 서류 몇 장이 떨어져 있었고, 난 그걸 주워 호기심으로 첫 번째 페이지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연구소에서 지내왔고, 현재 내 인생의 평생을 이곳에서 보냈다.

갓난아기 때부터 지금까지 쭉.

JS-31과 같이.


이름: 전영중

코드네임 : WJ-04

생년월일 : XXXX. 05. 06.

성별 : 남

"...어?"

전영중?

서류의 윗부분을 보고, 잠시 뇌가 멈춰버렸다. 내 이름이라기에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전영중이라니. 알지도 못했다.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WJ-04였다. 갑자기 들어온 정보로 인해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그 때문에 급하게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 적힌 서류의 밑 부분을 살펴보았다.

서류 밑 부분에는 혈액형, 약물 저항 유무, 약물 투여 성공 유무, 부작용 등 실험 관련된 사항들이 기재되어 있었다. 나는 대충 훑어보고서 서류의 뒷면을 넘겨보았다.

기타 정보 및 특이사항 : X-1 지구에서 실험체의 일족 살해 및 납치. 기억 삭제 약물 성질에 저항.

바닥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기억 삭제 약물이라니? X-1 지구? 일족 살해? 총 뒷부분으로 머리를 강타당하는 것 같았다. 나는 연구소에서 평생을 지낸 게 아니었던 건가?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졌다. 내 서류에는 스테이플러로 뒤 페이지가 연결되었다. 나는 홀린 것처럼 페이지를 넘겼다.

이름 : 성준수

코드네임 : JS-31

생년월일 : XXXX. 12. 24.

성별 : 남

"...씨발......"

내가 몇 년 동안 주구장창 불러왔던 익숙한 코드네임이 정자로 기입되어 있었다. 씨발. 그럼 그동안... 씨발. 씨발. 씨발. JS-31의 서류는 내 서류와 동일한 형식으로 되어있었다. 다른 점이라고는 서류 맨 위에 'Fail' 도장이 찍혀있을 뿐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뒷면을 넘겨 기타 정보 및 특이사항란을 보았다.

기타 정보 및 특이사항 : S-2 지구에서 실험체의 일족 살해 및 납치. 담당자 2명 사망(실험체의 강력한 저항). 

"우욱-"

서류를 주머니에 욱여넣고 화장실로 향했다. 이 말들이 사실이라면 정말 끔찍했다. 적혀있는 것으로만 추론했을 때, 우리를 납치하고 가족을 죽이고, 심지어 그 기억들까지 삭제한 것이었다. 역겨웠다. 화장실로 뛰어가면서 이게 사람을 상대로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지 의심했다.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우리가 그동안 했던 것들은 다 뭐였을까. 우리는 이곳에서 저들을 위해 왜 모든 것들을 감수했던 걸까. 억지로 시키니까? ...그리고 JS-31... 준수는 무엇을 위해 전사해야만 했던 걸까.

"우웨엑-"

변기에 머리를 박고 구역질을 계속했다.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따가운 느낌이 지금 이 상황처럼 불쾌했다. 준수야. 우리가 이 사실을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넌 살 수 있었을까? 우리는 이용당하지 않을 수 있던 걸까?

구역질을 하던 와중, 새빨갛게 타오르는 건물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그 건물에서 도망치려는 몇 명의 사람들을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총을 쏘고 칼로 찌르며 죽여나갔다. 건물 안의 한 아이는 권총 하나를 벌벌 떨리는 손으로 들고 도망치는 사람들을 죽인 군인을 겨냥하고 있었고, 그 사람은 빠르게 아이를 제압해 끌고 나갔다. 내 몸은 어느새 뒤로 넘어가 화장실 칸의 문에 부딪혀버렸다. 나는 화장실 문에 머리를 기대어 천장을 응시했다.

비틀비틀 일어나 세면대 앞으로 걸어가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을 빤히 보았다. 언제 시작한 지도 모르는 눈물이 볼을 타고 세면대로 떨어져갔다. 안 그래도 부작용 때문에 빨개진 눈동자는 이제 충혈까지 되어 눈에서 피가 흐르는 것만 같았다.

"씨발!!!"

쨍그랑-

거울의 유리조각이 새빨간 피와 같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결국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그대로 화장실을 뛰쳐나왔다.

바닥만을 보고 뛰어 방에 있는 의자에 앉아 종이와 굴러다니던 펜을 들고 JS-31였던 성준수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네 마지막 말대로 이 개 같은 곳에서 탈출할 거야.


연구소를 둘러싼 마당에 천천히 기름을 뿌려나갔다. 나는 탈출 채비를 다 마친 상태였다. 큰 가방에 성준수의 유품과 내 짐들을 간단히 챙겼다. 기름통을 들고 큰 연구소를 한 바퀴 빙 돌아 라이터로 불을 점화했다. 이제 연구소 주위에 둘러진 기름 위에 라이터를 던지기만 하면 되었다. 나는 조용한 밤하늘을 빤히 바라보았다. 별들은 환하게 반짝이며 어두운 하늘을 장식하고 있었다. 나는 점화된 라이터를 던져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계속 달렸다.

쉬지 않고 계속 달려갔다. 숨이 목 끝까지 차 버려 더 이상 숨을 못 쉴 때쯤에서야 고개를 돌려 불타는 연구소를 보았다. 멀리 달려온 터라 연구소의 불길은 작게 보였다. 연구원들의 발버둥 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 고요한 새벽의 적막을 깨트려 버렸지만, 나는 그제야 주저앉아 편하게 울 수 있었다.

준수야, 나는 너를 안고 이 어두운 밤을 헤쳐 나갈 거야. 달이 지고 아침 햇살을 맞을 때까지 계속 달릴 거야.

그리고 나는 널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내가 뼛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한이 있어도. 이 개 같은 세상이 멸망하기 바로 전이라도.


JS-31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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